47장. 물이 걷히고 드러난(1)
물기 한 점 없는 몸에 어딘가에서 불어온 바람이 사늘하게 스쳤다.
“어떻게…… 된 거지?”
해상 카지노 던전에서 파도에 휩쓸린 것을 기억한다.
쓰러진 몸을 반쯤 일으키면서 주변을 살폈다.
조금씩 선명해지는 시야에 다소 어두운색을 띤 바위 벽이 비친다.
사방에 가득했던 물은 온데간데없다.
우리는 어느새 전혀 다른 공간에 와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대왕님.”
나지막이 울리는 목소리에 옆을 돌아보았다.
짙푸른 빛을 띤 익숙한 눈동자가 보였다.
각 잡힌 정장에 젖은 흔적 따윈 없었으나 단정하게 넘겼던 머리카락만은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아…… 네, 형. 괜찮아요.”
내게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에 살짝 몸을 뒤로 물렸다.
“여긴 우리뿐인가요?”
“그런 듯합니다.”
돌아오는 대답을 들으며 파도에 휩쓸리는 와중 손을 뻗던 형을 떠올렸다.
오류창과 스파크가 점점 커져 가던 그때, 형이 나를 붙잡아서 우리가 지금 함께 있는 걸까.
물살과 함께 나를 뒤흔들던 감정들은 그사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데도 형과 시선을 마주하자 아직 잔열과 같은 열기가 느껴졌다.
“대왕님.”
형이 다시 나를 불렀다.
“꽃이 떨어져 있습니다.”
반장갑을 낀 손이 뻗어 왔다.
형은 내 배 아래에 떨어져 있던 꽃을 주워 내게 내밀었다.
서천의 꽃이었다.
시선을 내리자 그제야 바닥에 흩뿌려진 꽃들이 눈에 들어왔다.
열댓 송이쯤 되는 꽃들은 마치 일부러 뿌린 것처럼 우리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었다.
“노괴가 어떻게든 전해주려 한 것이겠지요.”
형이 커다란 몸을 일으켰다.
거칠고 단단한 손이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손길로 흩어진 꽃을 한데 묶어 내게 건넸다.
“지니고 계십시오. 혹여 몸이 상하시면 바로 쓰셔야 합니다.”
“그럼 절반은 형이 갖고 있어요.”
나는 그가 내미는 꽃을 바로 받지 않고 말했다.
“형도 다치면 써야 하잖아요.”
“저는 모아둔 신성으로 몸을 고칠 수 있으니 괜찮습니다.”
형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다시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다발을 이룬 꽃을 두 손으로 감싸서 내민 그의 눈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다발을 온전히 받아 들었다.
“여기도 던전일까요?”
꽃을 인벤토리에 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파도가 또 다른 던전을 열고 있습니다!
파도가 선체를 덮치기 직전 단군은 그렇게 말했다.
오류 때문일까?
공간이 바뀌었는데 던전을 안내하는 팝업창은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단군이나 바리가 있었다면 공간의 인과를 읽어주었을 텐데.
이대로 뭘 어째야 좋을지 영 막막한 기분이었다.
“그냥 봐도 지금까지의 던전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라…….”
해안 도시를 무대로 한 던전답게 지금까지 지나온 세부 던전들은 도시에 어울리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나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공간은 한눈에 보기에도 도시와는 달랐다.
사방이 바위로 이루어진 어두컴컴한 동굴이었으니까.
“갑자기 동굴은 조금 이상하죠.”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동굴의 벽을 훑어보았다.
안쪽 깊숙한 곳으로 길이 이어지는 동굴은 여느 동굴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지만, 도깨비불처럼 푸르스름한 불꽃이 벽에 일정한 간격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음…….”
동굴 벽을 집중해 살폈다.
언뜻 그냥 깎여 나간 바위로만 보였던 벽에 무언가 희미하게 그려져 있었다.
“연꽃?”
오랜 세월에 풍화되었으나 분명 만개한 연꽃을 그린 벽화였다.
“또 연꽃인가…….”
북해 용궁 5층에 가득했던 상한 연꽃이 떠올라서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내겐 인과나 미래를 읽는 재주가 없다.
그렇지만 이 공간이 남해 용왕 뒤에 있는 도사의 솜씨라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희미하지만 기척이 느껴집니다.”
곁에서 벽을 살피던 강림 형이 동굴 깊은 곳에 시선을 두며 말했다.
“이곳이 던전이라면 아마 몬스터일 테지요.”
그리 말하는 형은 이미 전투를 예감한 듯 신성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모시겠습니다.”
무엇이 나오든 놀라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죽음을 단단히 쥐고서, 나는 형을 따라 천천히 동굴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
일순 칼바람처럼 사늘하게 살갗을 덮치는 독기에 흠칫 몸을 떨었다.
짙은 독기에 경계심을 높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독기가 벽에도 영향을 미친 듯 바위가 조금씩 녹아 있었다.
“대왕님, 옵니다.”
곧장 내 앞에 벽처럼 멈춰 선 형의 손 위로 신성이 일렁였다.
파아아앙!
검푸른 신성이 크게 번쩍였다.
벽을 따라 이어진 불꽃만으로는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어둠이 걷히며 동굴 안쪽이 드러났다.
“아……!”
여섯 개의 팔과 뱀의 하반신을 가졌던 브리트라.
그를 떠올리게 하는 외형의 존재들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다만 눈앞의 뱀 인간들은 상반신까지도 뱀에 가까웠는데, 팔은 둘이었지만 온몸이 비늘로 덮인 데다 코브라처럼 넓은 볏이 달렸다.
-캬아아악!
좁은 길을 빽빽하게 메운 그들이 일제히 볏을 펼치며 독액을 뿜었다.
파아아앙!
검푸른 신성이 거칠게 번쩍이며 가장 앞줄에 늘어선 적들을 날려버렸다.
“제 뒤에서 나오시면 안 됩니다.”
내 앞을 가린 형이 다시 한번 신성을 끌어 올렸다.
놈들이 뿜는 독을 경계한 말이었다.
파아아앙!
발설지옥의 신성이 광풍처럼 적들을 향해 쏟아졌다.
-캬아아악!
-캬아아아악!
뱀 인간들은 몸이 짓이겨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볏을 펄럭였다.
독액은 물론이고 훨씬 가볍고 넓게 퍼진 독기가 빠르게 쇄도해 왔다.
파아아앙!
파아아아앙!
파아앙!
형은 내 앞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신성을 터트려 독을 쳐냈다.
밀실이나 다름없는 좁은 동굴.
쳐내는 대로 밀리기만 할 뿐 제대로 흩어지지 못한 독기가 점점 짙은 안개처럼 변해 갔다.
치이이익!
문득 지척에서 타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가늘고 희뿌연 연기가 났다.
“형……!”
발이 묶여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된 형이 모조리 방어하는 건 다소 무리한 일이었으니, 광범위하고 불투명한 독기에 숨어 은밀하게 쏘아진 독액이 형의 팔과 어깨에 튀어버린 것이다.
“괜찮으니 좀 더 물러서십시오.”
검을 쥔 손에 반사적으로 힘을 더하며 한 걸음 내디뎠다.
한데 형은 내가 움직인 방향으로 똑같이 한 걸음 이동하고는 계속해서 몰려오는 독기를 향해 신성을 맞부딪쳤다.
-캬아아악!
내내 그 자리에 붙박여 있던 형이 움직인 것을 기회로 본 걸까.
한층 더 묵직해진 독기 너머 불쑥 존재감을 드러낸 뱀 인간 하나가 긴 꼬리를 스프링처럼 튕기며 짓쳐들어왔다.
촤아아아악!
나는 더 견디지 못하고 단숨에 형을 지나쳐 검을 횡으로 그었다.
-캬악!
허리가 베인 뱀 인간이 물러날 것처럼 주춤하더니 불현듯 머리를 들이밀고 볏을 넓게 펼쳤다.
치이이익!
근접 거리에서 꿰뚫을 듯 쏘아진 독액을 재빨리 검면으로 막았으나 조금 늦었다.
완벽히 걷어내지 못한 독이 뺨을 스치며 불에 닿은 듯한 통증이 일었다.
“큿……!”
급히 소매로 뺨을 닦아내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통증이 컸으나 그에 비해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다.
애초에 그러한 독이리라.
그렇다면 딱히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
내가 나서면서 상황이 바뀐 탓인지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며 독으로 공격하던 다른 뱀 인간들도 우르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촤아아악!
촤아아아악!
촤아악!
허리를 베었던 놈의 심장을 찔러 마저 처리한 뒤, 내 머리 위로 솟구쳐 곧바로 형에게 가려는 녀석의 꼬리를 잘라냈다.
“대왕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깃을 펼쳐 독기를 뿜기보다 이제는 앞서 뿜어낸 독기를 전신에 은은히 두른 채 달려드는 적들은 내 검이 닿는 반경에 이르는 족족 사지와 목이 베여 나뒹굴었다.
비늘로 뒤덮인 살을 가를 때마다 그 몸뚱이가 품은 독이 어김없이 튀었지만 무시했다.
그까짓 통증을 신경 쓰느니 빨리 이 상황을 끝내는 게 나았다.
뱀 인간 둘이 노린 듯이 좌우에서 동시에 튀어나왔다.
나는 되레 왼쪽으로 한 발 나서 한 놈을 아래부터 올려쳤다.
그다음 바로 다른 놈의 접근 타이밍에 맞춰 검을 사선으로 내리그으려는데, 그보다 먼저 보이지 않는 주먹이 녀석을 벽에 처박았다.
형은 나를 제지하지 않는 대신 한층 더 매섭게 발설지옥의 힘을 휘둘렀다.
[ (!) 첫 베멉땍깃뤄흐흐흐 파수꾼들을 저지벴놂땍귀룔흐흐흐니다. ]
침묵 속의 협공은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팝업창이 떴다.
“파수꾼…….”
읽을 수 있는 단어를 읊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은 온통 넝마가 되어 널브러진 뱀 인간들의 시신뿐이었다.
“첫 번째 파수꾼…….”
뱀 인간들은 독액과 독기를 운용하며 위협한 것치고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독을 앞세워 대치하던 상황이 깨지자 빠르게 결판이 났다.
만일 과한 통증에 겁을 먹고 매몰되었다면 더 긴 시간이 필요했겠지.
“역시 던전이 맞았네.”
뱀 인간이 첫 번째라면 두 번째도 있다는 뜻.
그 외 어떤 안내도 없었지만 던전인 이상 클리어해야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조금 긴장하며 동굴 안쪽을 내다보았다.
파지직!
그때 뱀 인간들의 시신에서 스파크가 일어나면서 사이하게 빛나는 새빨간 문자열이 흘러나왔다.
“주술?”
문자열에 휩싸인 시신이 삽시간에 녹아내리며 시커먼 웅덩이를 이루었다.
“이건 또 무슨…… 어?”
알 수 없는 현상에 뒤로 물러서자마자 그 검은 웅덩이에서 갑자기 뱀 수백 마리가 솟구쳐 나왔다.
뱀들은 처음부터 준비된 함정인 듯 하나같이 볏을 펼치며 내게 독을 뿜었다.
파아아앙!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검푸른 신성이 번쩍이며 독과 뱀을 한꺼번에 날려버렸다.
한데 그 순간, 어째서인지 형의 몸 곳곳이 갈라지며 피가 터져 나왔다.
“형……!”
나는 비명처럼 외치며 다급히 형에게 다가갔다.
“괜찮습니다, 대왕님.”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으면서도 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공격을 되받아치는 주술이군요. 별것 아닙니다.”
수많은 뱀과 독을 쳐낸 충격이 고스란히 형에게 되돌아왔다는 뜻이었다.
그게 어떻게 별것 아닐 수 있단 말인가.
“빠, 빨리 치료해야 돼요.”
핏빛으로 물든 정장을 보자 심장이 불쾌하게 쿵쿵거렸다.
형이 다친 걸 보는 건 처음이 아닌데도, 해상 카지노에서 파도에 휘말릴 때부터 잔상처럼 남은 감정에 점점 숨이 막혔다.
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행동하는 형이, 그래서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그 모습이…… 자꾸만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을 떠오르게 했다.
……나는, 나는 정말로 그런 걸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보이는 것만큼 큰 손상은 아닙니다.”
형은 여상한 어투로 손을 몇 번 쥐락펴락했다.
손가락뼈와 관절이 부러지고 뒤틀려 삐걱거리는 것이 반장갑에 덮여 있어도 훤히 보였다.
그 단순한 동작조차 제대로 못 할 정도로 몸이 망가진 것이다.
“움직이는 데 딱히 지장 없습니다. 회복이 급하지 않으니 신성은 아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형은 고통 따윈 없다는 듯 움직이는 감각을 조율할 뿐.
그 지경이 되어서도 신성을 아끼겠다는 말이나 하고 있었다.
언제 던전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모르니 신성을 낭비할 수 없다는 판단.
그래, 그게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그럼 꽃이라도 써요.”
“그 꽃은 대왕님께서 몸이 상하셨을 때 써야 합니다.”
그것도 정도가 있잖아.
가슴이 답답했다.
짜증인지 분노인지 모를 것이 울컥 솟았다.
나는 보란 듯이 인벤토리에서 서천꽃밭의 꽃을 꺼냈다.
“대왕님……!”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챈 형이 나를 저지하려 손을 뻗었지만.
파앙!
나는 형이 그리하리라는 것을 짐작했으니,
서천의 꽃이 새하얀 신성을 발하며 망가진 몸에 스며드는 것이 더 빨랐다.
“…….”
위에서부터 형의 시선이 꽂혀 왔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검푸른 눈동자가 나를 찍어 누를 듯 날카로웠다.
칼로 저미는 것처럼 아픈 독선적인 애정이 담긴 눈이었다.
“제가 괜찮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이어지는 그의 힐난에 입술을 깨물며 그를 올려다봤다.
곧바로 형의 말을 받아치지 않은 건 내가 품은 말이 우리의 상처를 건드릴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형의 사랑이 나를 옥죄고 짓누른다 한들 나는 형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형, 나는 더 이상…….”
그럼에도 나는 입을 열었다.
“왕을 지키다 스러지는 발설지옥의 차사를 보고 싶지 않아요.”
나를 직시하던 눈동자에 금이 갔다.
온몸이 갈라지고 피가 터져도 담담하던 얼굴이 통증으로 물드는 것을 보면서, 나는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을 했다는 걸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