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장. 파도에 잠기면(4)
행운과 불운의 신화로 이루어진 해상 카지노 던전이 클리어되었다.
락슈미의 상징, 황금빛 연꽃이 빛을 발했다.
연꽃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홀 가득 하얀빛이 차올랐다.
눈이 부셔서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슬롯머신과 게임 테이블이 사라지고 그 한가운데 18개의 팔을 가진 락슈미 상이 생겨났다.
신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여 머리가 천장에 닿을 만큼 크고 높은 상이었다.
“이상하군요.”
락슈미를 마주한 단군이 반듯한 눈썹을 찌푸렸다.
“본디 각 팔마다 락슈미의 상징이 들려 있어야 합니다.”
그가 비어 있는 락슈미의 팔을 가리켰다.
“칼이나 삼지창, 성스러운 방패…… 아수라와의 전쟁에서 쓰일 무기들이지요.”
“던전의 보상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는 뜻인가요?”
나는 얼굴을 굳히며 락슈미 상에 다가갔다.
“어…….”
문득 부귀를 상징하는 황금빛 옷자락에 분홍색 피부, 행운의 신이 품은 신성한 기운 너머로 낯설지 않은 신성이 느껴졌다.
“뭐야……?”
나는 락슈미가 품은 것을 알아보고 작게 몸을 떨었다.
“왜…… 죽음의 신성이?”
의문을 표하자마자 업경의 권능 너머로 솜털이 곤두서는 한기가 섬뜩하게 파고들었다.
파가각!
동시에 락슈미 상의 목이 떨어졌다.
깜짝 놀라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떨어진 목에서 정체불명의 검은 액체가 피처럼 흘러내렸다.
분홍빛이었던 락슈미의 피부도 똑같이 검게 물들었다.
“허.”
불길한 현상에 사라가 나직이 탄식했다.
“검게 물든 것만으로도 전혀 다른 존재처럼 느껴지는구나.”
그 말을 듣자 어떠한 형상이 뇌리를 스쳤다.
검게 물든 락슈미.
그것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락슈미가 아니라…… 칼리?”
파괴와 죽음의 신, 칼리.
본디 칼리는 파괴신 시바의 반려 파르바티의 화신이지만 간혹 락슈미의 화신으로 여겨질 때가 있었다.
락슈미가 죽음의 신 칼리로 표현될 때 그녀의 피부는 검은색으로 그려진다.
“행운의 신 락슈미가 죽음의 신 칼리였어.”
쿠우웅!
그때였다.
쿠우우웅!
목이 부러진 락슈미를 자세히 살피기도 전에 크루즈가 굉음을 내며 흔들렸다.
“대왕님!”
이상을 감지한 형이 곧장 내 곁에 와서 섰다.
“서둘러 나가야 합니다.”
허공을 떠도는 문자열 사이에서 단군이 급히 우리를 돌아보았다.
쏴아아아!
흔들리는 선체 너머로 거칠어진 파도 소리가 들렸다.
쏴아아아아!
쏴아아아아아!
던전을 클리어했기 때문인지 파도는 한층 더 높아져 있었는데, 이대로 크루즈를 집어삼킬 기세였다.
“파도가 품은 인과가 심상치 않습니다.”
단군이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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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게 오류가 섞인 팝업창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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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경고하듯 연달아 뜨는 팝업창.
오류가 섞여 제대로 읽을 수 없었음에도 확신할 수 있었다.
던전을 알리는 팝업창이었다.
“파도가 또 다른 던전을 열고 있습니다!”
내 확신과 동시에 단군이 더욱 늘어난 문자열 사이에서 외쳤다.
그 찰나에 주술을 시전했는지 그의 손끝에서 붉게 빛나는 문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휘말리기 전에 나가야 합니다!”
출구를 안내하듯 한 줄로 이어진 문자들이 붉은 길을 그렸으나.
쏴아아아아악!
우리가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높이 솟아오른 파도가 선체를 덮쳤다.
파장창!
파장창창!
선실의 유리창이 깨졌다.
배가 전복되기라도 한 것처럼 막대한 양의 물이 카지노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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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창이 계속되었다.
홀이 완전히 잠겨버렸다.
용왕의 축복 덕에 호흡에는 문제가 없었다.
나는 소용돌이치는 물속에서 어떻게든 몸을 가누려고 애쓰며 주변을 살폈다.
카지노의 출구와 가까운 곳으로 밀려난 사라가 보였다.
그의 위치는 붉은 문자가 안내하는 방향과 정확히 일치했는데, 나가기는커녕 출구를 코앞에 두고도 물살에 저항하고 있었다.
사라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단군도 마찬가지였다.
사라만큼은 아니었으나 그 또한 언제든지 나갈 수 있는 위치였다.
한데도 출구를 등진 채 문자열이 안내하는 방향을 가리키며 나를 부르듯 멈춰 서 있었다.
왜 둘 다 안 나가고 있어?
사라와 단군에게 어서 먼저 나가라고 외치려 할 때였다.
쏴아아아아!
그때 다시 한번 파도가 강하게 부딪치며 크루즈를 뒤흔들었다.
시야가 어지러웠다.
모든 것이 아득하게 흔들리는 와중 힘겹게 물살을 가르던 사라가 다시 출구 쪽으로 휩쓸리는 것이 보였다.
언제나 느긋하고 여유로웠던 얼굴이 어쩐지 일그러진 것만 같았다.
그 표정을 보자 어렴풋이 사라를 잡아야 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균형 감각이 잘 잡히지 않았으나 이를 악물고 팔다리를 움직였다.
그러나 수세는 사라를 끌어당기되 나는 밀어냈다.
파아아앙!
돌연 새하얀 신성이 번쩍였다.
물살을 따라 색색의 꽃잎이 휘몰아쳤다.
그 너머에 사라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끝내 출구로 빨려들어 간 그가 직전에 피워 낸 서천의 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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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드러지는 꽃잎 속에서 다시금 팝업창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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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업창이 무한히 이어지며 파지직 스파크를 일으켰다.
나는 본능적으로 더 이상 크루즈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쏴아아아아!
난무하는 오류창과 스파크 속에서 파도에 부딪힌 선체가 또다시 요동쳤다.
“……아.”
사라가 사라진 후 단군마저 시야에서 놓쳤다.
오류창, 스파크, 숨결로 방울지는 기포와 바닷물의 거친 흐름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문득 움찔 몸이 떨렸다.
누군가의 막대한 감정이 물밀듯 밀려들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시야를 가득 채울 정도로 한껏 다가온 강림 형이 보였다.
형의 입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그러나 물속에서도 선명히 보이는 짙푸른 눈동자와 마주하자, 업경을 통해 밀려온 어느 기억이 속절없이 시야를 뒤덮었다.
형이 내게 손을 뻗었던 순간.
남해와의 신화전에서 설계자가 용궁 전체를 미로로 바꾸었을 때, 내게 손을 뻗었지만 끝내 잡지 못하고 벽에 가로막힌 그 순간이었다.
짙은 자책과 두려움으로 점철된 기억을 갈무리할 여유도 없이 그가 강한 힘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그것은 실로 오랜만에 읽는 형의 감정이었다.
이때껏 읽을 수 없었던 감정이 나를 뒤흔드는 파도에 섞여 강렬하게 들이닥쳤다.
***
정신을 차렸을 때 사라는 해변에 서 있었다.
“…….”
그는 제 몸을 내려다보곤 눈을 내리감았다.
옷은 물론이고 머리카락 한 올 젖지 않은 상태였다.
던전이 남긴 모든 흔적이 지워졌다.
“결국 홀로 떨어져 나왔구나…….”
사라가 허탈하게 바다를 돌아봤다.
바다 위에 휘황찬란한 빛을 뿜으며 떠 있던 크루즈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더욱더 높아진 파도에 물거품만 뿌옇게 흩어질 뿐이었다.
그는 놓쳐버린 일행들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깊이 침잠한 눈은 평소와 같이 무심하였으나 무거운 상념이 담겨 있었다.
“혼자만 무탈한 꼴은 다시 겪고 싶지 않았거늘.”
발밑으로 흐드러진 색색의 꽃잎.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발치를 짓이기자 망가진 꽃잎이 새하얀 신성으로 돌아가 그에게 도로 스며들었다.
“어떻게든 꽃이라도 남겼다만…….”
사라는 머릿속을 잠식하는 묵직한 후회와 상실감을 의식적으로 몰아냈다.
왕에게 가려 해도 자꾸만 출구로 몸이 기울어질 때, 그는 자신만 던전 밖으로 떨어져 나오는 상황을 직감하고 황급히 모든 마력으로 꽃을 피웠다.
일부는 이렇듯 사라와 같이 딸려 나왔으나, 어느 정도는 일행과 함께 이동했을 터.
그들이 꽃을 챙긴다면 그것으로나마 다친 상처를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한들 한 번 피어난 꽃은 오래가지 못한다.
꽃이 효용을 잃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던전을 클리어해야 한다.
“108개의 던전들 중 하나와 연결된 건가?”
사라는 인벤토리에서 던전 지도를 꺼냈다.
혹시나 일행이 떨어진 위치를 유추할 힌트가 있을지도 몰랐다.
“허…….”
그러나 지도를 펼친 그는 탄식했다.
108개의 점, 그 대부분에 X표가 새겨져 있었다.
카지노 던전에 입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건만, 그사이에도 남해의 용신들은 파죽지세로 던전을 점령해 놓았다.
“이만한 차이라면 전쟁이 시작되어도 당최 쉽지 않겠어.”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 아직 공략되지 않은 던전을 찾아 지도를 살폈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X표가 있으니 남은 던전을 찾는 것조차 까다로웠다.
[ 뭐야, 영감?! ]
그때 불쑥 호구별성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왜 영감만 통화가 돼?! ]
할당된 던전을 클리어하여 예정대로 합류하기 위함일 터였다.
각 던전에 도전할 때에는 전음을 사용할 수 없다.
그런데 사라에게만 전음 기능이 활성화되었으니 이상함을 느낀 게 분명했다.
[ 사고가 났다. ]
사라는 작금의 상황을 곱씹으며 딱딱한 어투로 설명했다.
[ 사고? ]
[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가려는데 다른 던전과 연결되어버렸어. ]
[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다른 애들은 또 던전에 갇힌 거야? ]
상황을 파악한 호구별성이 언성을 높였다.
[ 아니, 영감만 혼자 떨어져 나오면 어떡해! ]
[ 나라고 원해서 그리했겠느냐. 하는 수 없으니 꽃만 쥐여주었다. ]
[ 꽃? 아, 그래도 꽃은 좀 챙겼구나? ]
호구별성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 누그러진 어투로 되물었다.
[ 하나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을 테니 서둘러야 할 게다. ]
전음을 이어가면서 사라는 계속해서 지도를 살폈다.
도통 보이지 않는 미공략 던전에 설마 정말로 모든 던전이 클리어되었나 하는 불안이 차오를 때 즈음, 그는 간신히 아직 X표가 붙지 않은 점을 찾아냈다.
[ 설마……. ]
던전을 확인한 그의 눈이 가늘게 흔들렸다.
[ 별성, 네 지도에도 남은 던전이 두 개뿐이냐? ]
[ 으응? ]
[ 바스키 던전과 쿠르마 던전뿐이냐고 물었다. ]
[ 뭐? 설마! ]
말뜻을 알아들은 호구별성이 경악했다.
쿠르마는 바스키로 하여금 우유 바다를 휘저을 때 그 지지대가 되었던 거북으로, 바스키 던전과 함께 유해교반 퀘스트를 후반부로 전환하는 던전이다.
따라서 108개의 던전들 중 가장 높은 난이도가 예상되었으니, 그 때문에 일곱 명이 다시 모이기로 한 것인데 뜻하지 않게 셋만 내던져지고 만 것이다.
[ 미친, 지금 영감도 없이 꼴랑 셋이서 거기에 떨어졌다고?! ]
[ 셋만 떨어진 것도 문제다만……. ]
사라가 한숨처럼 말꼬리를 흐렸다.
상황을 상기하자니 높아진 던전의 난이도만큼이나 그를 착잡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아니, 하필 그 셋이어서 문제라고 해야 할까.’
지금껏 그래왔듯 도사가 공략 방식을 읽어 내고, 그 시커먼 놈은 제 한 몸을 바쳐 왕을 지킬 것이다.
하나 그것을 알면서도 사라는 불안감을 쉬이 떨치지 못하며 고운 입매를 비틀었다.
고압적인 보호 뒤에서 숨 막혀하던 왕.
차라리 왕의 곁에 남은 것이 그 자신이나 별성이었다면 공략이 걱정될지언정 이렇게 속 시끄럽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라는 그 이상 말을 얹지 않았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셋이 별일 없이 던전을 공략하고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으므로.
46장. 파도에 잠기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