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장. 파도에 잠기면(3)
[ (!) 행운 수치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
[ (!) 승리의 추가 당신에게 기웁니다. ]
예상치 못한 강림 형의 활약으로 행운 수치를 채우게 되었다.
[ (!) 내기에 패배한 아프사라스가 충격을 받습니다. ]
[ (!) 아프사라스의 충격에 간다르바가 동요합니다. ]
팝업창이 뜨자마자 게임을 안내하던 아프사라스와 간다르바들이 한순간에 움직임을 멈추고 가늘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바다에 뜬 크루즈이기 때문일까.
그들뿐만 아니라 카지노 전체가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다.
유리 창문 너머로는 그새 더욱 높아진 파도가 새하얀 거품을 일으켰다.
[ (!) 내기에 패배한 아프사라스의 존재가 흔들립니다. ]
아프사라스의 투명하게 찰랑이던 몸이 무너지더니 보석과 닮은 모습으로 산개했다.
반짝이는 물방울 사이에서 간다르바들은 일제히 반쯤 접혀 있던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 (!) 간다르바가 아프사라스의 파편을 모읍니다. ]
우산처럼 펼쳐진 간다르바의 날개에 빗물처럼 쏟아지는 아프사라스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거대한 날개가 아프사라스의 파편에 젖어드는 것이 보였다.
그와 비례하게 간다르바마저 아프사라스처럼 투명한 형태로 변했다.
[ (!) 아프사라스의 축복이 간다르바에 깃듭니다. ]
겉으로는 단지 투명하게 바뀌었을 뿐이지만, 형형하게 빛나는 눈과 꾹 다물린 부리에서 카지노의 딜러로 움직일 때와는 달리 흉포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아프사라스가 스며들어 강화한 간다르바를 쓰러트리는 게 클리어 조건이구나.”
맹금류의 것처럼 날카로운 눈빛이 우리에게 집중되었다.
나는 눈을 피하지 않으며 인벤토리에서 죽음을 꺼내 들었다.
[ (!) ‘행운과 불운은 동전의 양면’벨덮됩흐 클리어 조건이 해금베뀌땍귿등롼렐빔니다! ]
- 클리어 조건 : 축복이 깃든 간다르바를 쓰러트리벨깰민귁뜩뢍딜빎.
클리어 조건이 해금되었다.
그러나 처음 던전에 들어왔을 때처럼 다시금 팝업창에 오류가 섞여 들었다.
“던전의 개폐에 개입했군.”
옆에 선 단군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던전 클리어와는 별개로 남해 용왕 쪽 도사가 실시간으로 조작하는 인과를 추적 중인 듯했다.
“물러서십시오, 대왕님.”
강림 형이 어김없이 큰 몸으로 내 앞에 섰다.
“손을 쓰시는 일은 없게 하겠습니다.”
칼파브릭샤 던전에서와 같았다.
형은 단호한 태도로 내가 전투를 치르는 것 자체를 차단하려 했다.
목 안쪽이 갑갑해지는 기분에 입을 다물었다.
남해 용왕 탓에 한 번 기운 상처가 다시 터졌으니 그만큼 더 예민해진 것을 안다.
이대로 형에게 지켜지며 구경만 하다가 카지노 던전을 클리어한다고 치자.
그럼 그다음은?
유해교반 퀘스트의 후반부는 데바와 아수라의 전쟁이다.
압도적인 수의 남해 용신들을 상대로 형이 나만 보호할 수는 없다.
형은 내가 언제까지 침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우리는 이미 전쟁이 무엇인지 아는데.
“같이 싸우거라, 대왕.”
그때 사라의 목소리가 울렸다.
“수가 많아. 칼파브릭샤의 허물과는 다르다. 가만히 서 있을 수만은 없어.”
그는 무심한 눈으로 내 마음을 꿰뚫어 본 것처럼 말했다.
“혹여 몸이 상하거든 곧바로 내 신성으로 가호할 것이다. 그리하려고 네 옆에 남은 것이니까.”
“제가 놓친 적들만 베어내십시오.”
내가 그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형이 먼저 사라를 돌아보았다.
눈으로는 사라를 보고 있었으나,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나를 향했다.
가라앉았지만 날이 선 목소리에 형을 올려다봤지만, 그의 등은 변함없이 날 벽처럼 가로막고 서 있을 뿐이었다.
“……쯧.”
옆에서 사라가 작게 혀를 찼으나 당장 그 이상 말을 얹지는 않았다.
나는 끝내 입술을 깨물며 검을 고쳐 쥐었다.
촤아아아악!
아프사라스처럼 액체화한 간다르바 하나가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사납게 달려들었다.
파아아앙!
검푸른 신성이 간다르바를 덮쳤다.
그러나 허물어졌던 간다르바의 몸은 아무렇지 않게 출렁이며 되돌아왔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 바위를 떨어뜨리면 큰 물결을 이루며 흔들리다가도 곧 다시 평온해지는 것처럼.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아.”
낭패감에 혀끝을 깨물었다.
신성으로 결과를 조작할 수 있는 카지노 던전을 단군과 바리가 왜 까다롭다고 했는지 이제야 실감했다.
촤아아아악!
날개를 힘껏 펼친 간다르바가 재차 달려들었다.
물리력을 휘두르는 발설지옥의 신성이 통하지 않는 것을 분명 보았을 텐데, 나를 가리고 선 강림 형은 또다시 발설지옥의 신성을 끌어 올렸다.
화르르륵!
한데 검푸른 신성이 간다르바를 공격하기 직전 불현듯 날아온 커다란 불길이 녀석을 덮쳤다.
“아!”
이어지는 현상에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타오르는 불에 닿은 물이 증발하듯, 물로 변한 간다르바의 온몸에서 희뿌연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녀석을 덮친 화염이 그 몸에 깃든 아프사라스의 축복을 거두기라도 한 걸까.
수증기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깃털이 수북한 반인반조였다.
파아앙!
틈을 놓치지 않고 검푸른 신성이 뻗어졌다.
커다란 주먹을 형상화한 그것이 간다르바를 덮치자 녀석은 깃털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사라졌다.
“이런 식으로 공략하는 거구나.”
먼저 물리력이 통하지 않게 만드는 아프사라스의 축복을 불태우고 축복이 벗겨진 간다르바를 마저 처리하면 된다.
예상보다 빠르게 공략법을 찾았으니, 이대로 마저 공략하면…….
화르르르륵!
한데 다시 한번 붉게 일어난 불꽃은 간다르바가 아닌 우리를 감싸는 벽이 되었다.
“공략법은 찾았습니다만…….”
벽을 세운 단군이 일행을 돌아보았다.
“아프사라스의 축복을 지우는 데 소모되는 마력이 생각 이상으로 큽니다.”
그는 인과를 읽으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던전의 인과는 현재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가능한 한 마력을 아끼셔야 합니다.”
계속 변화하는 인과 탓에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엿보는 것도 쉽지 않다던 단군의 말을 상기했다.
마력을 아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옳았다.
간다르바를 쓰러트리기 위해선 우선 축복부터 벗겨 내야 했으니 두 배로 품이 든다.
그렇다면 그만큼 적은 마력을 효율적으로 운용해야 한다는 건데, 화력을 높일 방법을 고민하자니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멍군한테 화탕지옥의 불길을 먹이는 것은 어떨까요?”
얼음 산호 던전에 갔을 때, 무용담으로 변한 멍군이 화탕지옥의 불길을 삼켜 백염을 불러왔었다.
내가 마력을 다소 조절해 화탕지옥 스킬을 쓰더라도 멍군이라면 화력을 증폭시켜줄 수 있다.
“충분하겠군요.”
단군은 깊은 눈을 부드럽게 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제 멍군이 나와야 하는데…….”
멍군이 튀어나오던 가슴께를 내려다봤다.
새삼 생각해 보니 늘 멍군이 스스로 튀어나왔기에 내가 먼저 멍군을 불러본 적이 없었다.
“어, 음…… 저기.”
어색하게 가슴을 문지르며 멍군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저기, 멍군…… 나와줄 수 있을까?”
그러나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도 돌아오는 반응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 말이 들리지 않아서인지, 그냥 멍군이 나오고 싶지 않은 건지 알지 못해 난감해졌다.
“으음…… 안 나오는 것 같은데요.”
몇 번 더 불러본 끝에 소심하게 말했다.
“흐음…….”
“정말 제멋대로인 녀석이군.”
지켜보던 사라와 강림 형이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혹시 몰라서 챙겨 왔던 겁니다만.”
나보다 앞서 멍군을 길렀던 단군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인벤토리에서 볼링공만 한 화분을 꺼냈다.
“……?”
갑자기 왜 그런 것을 꺼내는지 알 수 없어 가만히 지켜보았다.
파아앙!
화분을 든 단군이 연녹색 신성을 번쩍였다.
촤르륵!
믿을 수 없게도 커다란 잎을 단 줄기가 순식간에 일 미터 가까이 치솟았다.
“어, 그건 설마…….”
나는 단군이 무슨 드루이드인 양 몇 초 만에 키워 낸 화분을 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네.”
단군이 능숙하게 줄기를 잡아채며 말했다.
“고구마입니다.”
“…….”
화분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한데 단군이 줄기를 쑥 뽑아 올리자, 주렁주렁 딸려 나온 고구마들은 어떻게 전부 그 안에 들어 있었던 건지 의문일 정도로 큼지막했다.
화르륵!
단군은 고구마를 모두 바닥에 내려놓고 화염 주술을 발동했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군고구마의 단내가 순식간에 퍼지며 코끝에 닿는 것과 동시에.
-멍! 멍멍멍! 멍!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던 털뭉치가 튀어나왔다.
-멍멍멍! 멍멍멍멍!
멍군은 몹시 흥분한 기색으로 불붙은 고구마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꼭 불꽃을 숭배하는 의식을 치르는 사제 같았다.
그러다 한순간 제자리에 멈춰 섰는데, 멍군이 입을 벌리자 고구마를 익히던 불길이 호로록 삼켜졌다.
-멍! 멍멍!
멍군은 고맙다고 인사하듯 몇 번 짖고는 노랗게 잘 익은 고구마를 챱챱 소리 내며 먹기 시작했다.
“저승에 가면 꼭 고구마를 챙겨줘야겠다…….”
단군과 함께할 때는 이런 식으로 매일 신선하게 자라난 고구마를 제공받았던 걸까.
나는 며칠 굶은 개처럼 고구마에 달려드는 멍군에게 깊은 미안함을 느끼며 녀석의 식사를 지켜봤다.
-멍멍멍!
눈 깜짝할 사이에 고구마를 해치운 멍군이 꼬리를 붕붕 휘두르며 옛 주인 단군을 바라보았다.
‘고구마.’
‘몹시 훌륭.’
업경으로 읽히는 멍군의 감정은…… 여전히 그를 고구마로 여기고 있었다.
-멍멍!
단군에게 인사를 끝낸 멍군이 이번에는 나를 돌아봤다.
‘사랑.’
그러더니 흰 털을 날리며 어김없이 내게 달려왔다.
……고구마를 한 번도 못 챙겨줬는데도 사랑해줘서 고마워.
나는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아 멍군의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열심히 토닥여주었다.
멍군은 엉덩이를 토닥토닥하는 것이 기분 좋은지 두 다리를 내 어깨에 올리고 내 뺨을 핥았다.
멍군의 숨결과 입 주변의 부드러운 털에서 달달한 고구마 향이 진하게 풍겨 왔다.
“이제 계획대로 가면 되겠군요.”
단군이 그렇게 말하며 불의 벽을 걷었다.
나는 나를 안다시피 한 멍군의 다리를 살살 바닥에 내려놓았다.
“멍군, 화탕지옥의 화력을 높여줄래?”
-멍멍! 멍!
내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멍군이 곧장 간다르바들을 돌아보았다.
녀석의 듬직한 뒷모습을 보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맺히는 것을 느끼며 스킬을 시전했다.
[ 화탕지옥(L) ]
몰려드는 간다르바들 사이로 화탕지옥의 불길이 치솟았다.
화르르르륵!
멍군은 딱 알맞은 타이밍에 하얀 털을 휘날리며 화탕지옥의 불길 속으로 달려들었다.
[ (!) 해태 ‘멍군’이 화탕지옥의 불길과 공명합니다. ]
팝업창이 떴다.
파아앙!
막대한 신성을 휘감은 멍군의 하얀 털이 구름처럼 부풀며 사자만큼 몸집을 키웠다.
[ (!) 해태 ‘멍군’이 화탕지옥의 불길을 삼킵니다. ]
화아아악!
사그라드는 불길 사이로 간다르바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몇몇은 아프사라스의 축복이 완전히 벗겨진 상태였지만, 아직 축복에 감싸인 간다르바가 훨씬 많았다.
내가 화탕지옥을 시전한 마력은 30%.
단군의 말대로 소모가 상당했다.
-멍멍!
화탕의 불길을 삼킨 멍군이 재차 간다르바 무리에게 불을 뿜었다.
[ (!) 해태 ‘멍군’이 화탕지옥의 불길을 토해 냅니다. ]
화르르르륵!
해태의 갈기처럼 새하얀 불길이 카지노 전체를 휘감았다.
화르르륵!
화르르르륵!
불을 토해낸 멍군은 원래의 크기로 되돌아갔다.
새하얀 불길이 사그라지자 아프사라스의 축복이 벗겨진 간다르바들이 분한 듯 커다란 날개를 거칠게 펄럭였다.
“됐다……!”
멍군 덕에 30%의 마력만으로 축복을 벗겨낼 수 있었다.
나는 간다르바를 베기 위해 다시 죽음을 손에 쥐었다.
“이제 간다르바들만 쓰러트리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익숙한 등이 다시금 시야를 가렸다.
보이는 것은 뒷모습뿐이었으나 그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지는 커다란 몸에서 피어오르는 기세만으로 알 수 있었다.
“형.”
형이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과하다.
그리 말하기 위해 입을 떼었다.
“마력은 얼마나 쓰셨습니까.”
서늘한 목소리가 곧바로 내 말을 잘랐다.
고의임을 알았지만 그것은 당장 중요하지 않았다.
“아직 반 이상 남았어요.”
한숨을 삼키고 우선 대답했다.
“바스키 던전에는 마력을 회복하신 후 가셔야겠군요.”
그런데 이어지는 형의 말에, 나는 그가 애초부터 내 대답 따윈 관심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가 놓친 적들만 베시면 됩니다.”
검푸른 신성을 끌어 올린 그가 내 앞에 벽처럼 서서 선언하듯 말했다.
나는 결국 던전이 클리어될 때까지 검을 휘두르지 못했다.
형이 단 하나의 간다르바도 내게 접근하게 두지 않았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