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62화 (162/187)

46장. 파도에 잠기면(2)

푸른 바다 위에 뜬 크루즈.

하얀 선체를 장식한 조명이 수백 갈래로 빛을 반사하는 보석처럼 화려하게 반짝였다.

락슈미와 알락슈미의 신화를 토대로 만들어진 해상 카지노 던전이었다.

“정말로 파도가 높아지고 있네요.”

던전에 들어가기 앞서 하얗게 거품이 이는 바다를 돌아보았다.

바람은 그대로인데 파도만 높아지는 광경.

바스키 던전을 클리어하면 도시가 완전히 잠기게 될 거란 말은 팀을 나누기 전에 이미 들었는데도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 던전 다음이 바스키 던전이었죠?”

우리가 가려던 던전은 생명의 나무 칼파브릭샤 던전, 인드라의 말 웃차이쉬라바스 던전, 인드라의 코끼리 아이라바타 던전, 그리고 행운의 신 락슈미와 불행의 신 알락슈미 던전이었다.

웃차이쉬라바스 던전은 비어 있었으며, 아이라바타 던전은 그새 아수라 측이 클리어해버렸다.

물론 바다 무덤 던전에서 웃차이쉬라바르와 아이라바타가 둘 다 등장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이라바타 던전도 비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만.

어쨌든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이 카지노 던전을 끝으로 호구별성, 바리, 그림 리퍼와 다시 합류하게 될 예정이었다.

“그와 관련하여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염라.”

내 말에 단군이 입을 열었다.

“앞서 그분과 함께 보았을 때와는 조금 다른 것이 느껴집니다.”

“저 파도에서요?”

“네. 바스키 던전을 기점으로 도시가 잠기는 것은 동일합니다만…….”

단군의 정갈한 미간에 옅은 주름이 잡혔다.

“파도에 담긴 인과가 시시각각 변하고 있습니다.”

인과가 시시각각 변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와닿지 않았다.

인과가 어떻게 시시각각 변할 수 있다는 말인가.

“누군가 계속해서 태초의 바다 던전에 버그를 일으키는 것이지요.”

내가 재차 묻기 전에 단군이 긴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그제야 나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이 정도 규모의 던전을 실시간으로 조작할 수 있는 도사가 남해 용왕의 뒤에 있었군요.”

남해 뒤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았다.

신화전에서 남해 용왕과 대면했을 때부터 그가 동서해를 치도록 유도한 존재가 있다는 것은 이미 눈치챘으니까.

다만 그 존재가 단군마저 긴장할 정도의 도사일 줄이야.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수십 개의 던전을 빠르게 클리어할 정도의 머릿수뿐 아니라 정체불명의 도사까지 상대해야 한다는 것에 머리가 아파 왔다.

“대왕님, 준비는 되셨는지요.”

강림 형의 서늘한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를 직시하는 검푸른 눈.

그 눈이 이제는 던전에 들어가야 할 때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 네. 들어가요, 형.”

도사의 존재는 분명 불안했지만, 그건 눈앞의 던전을 공략하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걱정이었다.

서둘러 머릿속을 정리하고는 카지노 던전의 입구 앞에 섰다.

“흐음, 노름이라. 가정이 있는 사내라면 결코 가까이해서는 안 될 짓이지.”

뒤에 선 사라가 해상 카지노를 훑으며 느긋한 어투로 말했다.

정말이지 옳은 말이었으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난 세월 우리 대왕님과 사흘 밤낮 내기 바둑을 하다가 원강아미에게 등짝을 맞던 걸 내가 몇 번이나 봤는데.

[ (!) 공간의 지배베멋뇬깬뚜흐흐흐이 바뀝니다. ]

크루즈 안으로 발걸음을 내딛자 어김없이 오류가 섞인 팝업창이 떴다.

[ ‘행운과 불운은 동전의 양면’에 입장하벨곽땍귀룔흐흐흐니다! ]

- (!) 해당 던전벨덮됩흐 등급은 ‘영웅담’입베깩됩흐다.

- 클리어 조건 : (……)의 쓰러트리벨깰민귁뜩뢍딜빎.

칼파브릭샤 던전처럼 해금이 필요한 던전이었다.

단군이 있으니 오류가 섞였어도 아마 조건은 읽을 수 있겠지만.

한데 그 순간.

[ (!) 해당 던전은 숨겨진 베꼐땍긱뒷뢍뮌빎 있습니다. ]

[ (!) 비정상적인 베말띈귁뜸뢍멘꽥라닻흐흐 이어진 베꼐땍긱뒨흐흐흐입니다. ]

[ (!) 해당 던전은 숨겨진 베꼐땍긱뒷뢍뮌빎 있습니다. ]

[ (!) 비정상적인 베말띈귁뜸뢍멘꽥라닻흐흐 이어진 베꼐땍긱뒨흐흐흐입니다. ]

던전을 안내하는 팝업창에 이어 내용을 알 수 없는 오류창이 연달아 떴다.

[ (!) 해당 던전은 숨겨진 베꼐땍긱뒷뢍뮌빎 있습니다. ]

[ (!) 비정상적인 베말띈귁뜸뢍멘꽥라닻흐흐 이어진 베꼐땍긱뒨흐흐흐입니다. ]

……

두 가지 내용이 담긴 팝업창이 시야를 완전히 가려버릴 만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계속해서 떠올랐다.

파지지직!

그러고는 오류창끼리 스파크를 일으키다가,

파지지지직!

유리창이 깨지듯 산산이 부서졌다.

“아…….”

처음 보는 현상에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이게 무슨…….”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심상치 않아 보이는 오류에 더 깊이 들어갈 생각도 못 하고 걸음을 멈추자 단군이 조용히 설명했다.

“태초의 바다 던전 전체의 인과가 시시각각 변하면서 오류 또한 더욱 복잡해지는 겁니다.”

업경이 그의 시야에 비친 문자열을 비추었다.

“이곳은 칼파브릭샤 던전처럼 특정 조건에 도달하면 몬스터가 깨어나는 던전입니다. 다만 상대가 무엇을 바꾸고 있는지는 섣불리 판단할 수 없습니다.”

긴장을 늦춰선 안 된다는 말이었다.

한숨을 쉬며 카지노 던전 내부를 훑었다.

행운의 신 락슈미의 신화를 토대로 만들어진 던전이라서 그런지, 카지노는 락슈미의 상징인 황금빛 연꽃으로 현란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중앙에는 블랙잭, 바카라, 홀덤, 포커 등 테이블 게임들이 늘어져 있고 사방에는 각양각색의 슬롯머신이 가득했다.

“엄청 화려하네…….”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봤던 화려한 카지노.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지만 말쑥하게 차려입은 딜러가 여럿 보였다.

여성은 마치 흐르는 물이 인간 여성의 형태로 빚어진 듯한 모습이었으며, 남성은 몸이 깃털로 뒤덮이고 등에 날개가 돋은 반인반조였다.

“아프사라스와 간다르바구나.”

유해교반에서 태어난 아프사라스는 물을 다루는 아름다운 무희 아프사라들의 종족으로, 도박을 이기게 해주는 요정으로 여겨졌다.

그들의 짝은 신들의 악사인 간다르바라던데, 그래서인지 이 던전의 딜러로 아프사라스와 간다르바가 설정된 모양이었다.

“어…….”

그때 사뿐히 다가온 아프사라 하나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음……?”

의미를 알지 못해 갸웃하며 바라보니, 그녀가 말 대신 양 손바닥을 내보였다.

물이 찰랑이는 손바닥에 칩이 한 개 놓여 있었다.

그녀는 내게 칩을 보여주고는 두 손을 모았다가 다시 양쪽으로 주먹을 쥐어 내게 내밀었다.

“어느 쪽에 칩이 있는지 찾으라는 거구나.”

나는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고 두 주먹을 번갈아 보았다.

물론 쳐다본다고 딱히 칩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닌지라, 그냥 짧게 고민하다 한쪽을 골랐다.

“음…… 이쪽일까요?”

내가 왼쪽을 선택하자 아프사라가 입꼬리를 당기며 양손을 펼쳐 보였다.

고작해야 1/2의 확률이건만…… 칩은 오른쪽에 있었다.

[ (!) 아프사라스와의 내기에서 패했습니다. ]

동시에 팝업창이 떴다.

[ (!) 불운 수치가 5% 올라갑니다. ]

“앗!”

한 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팝업창에 깜짝 놀랐다.

던전에 들어오자마자 큰 실수를 한 것 같아 눈치를 보자 별안간 아프사라가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부딪쳤다.

[ (!) 불운 수치가 5% 내려갑니다. ]

이번엔 또 뭐야?

영문을 모른 채 멍하니 아프사라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춤을 추듯 하늘거리는 손짓으로 슬롯머신들과 테이블 게임을 가리켰다.

“아…… 연습 게임이라는 건가요?”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대충 딜러들과의 게임에서 이기거나 지면 행운 수치와 불운 수치가 올라간다는 규칙은 제대로 이해했다.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는 듯 아프사라가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인 뒤 우아한 걸음으로 뒤돌아 갔다.

“연습 게임이라 다행이다…….”

나는 두 손을 모으고 소심하게 안도했다.

“어쨌든 딜러들이랑 게임을 해서 행운 수치를 100%로 만들면 되겠네요.”

“작은 함정이 있습니다, 염라.”

연습 게임에서 진 것이 신경 쓰여 민망하게 웃자, 단군이 평소와 같은 미소로 말했다.

그새 또 무언가를 읽어 낸 듯 문자열에 둘러싸인 채로.

“아프사라스와 겨루면 필패합니다. 그녀들은 도박을 이기게 해준다는 요정이니까요.”

“아하……!”

그러면 내가 진 것도 내 탓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흐음, 그렇다면야 간다르바에게서 이기면 되겠지.”

사라는 후후 웃으며 느긋하게 홀덤 테이블로 향했다.

노름은 가정이 있는 사내가 하면 안 될 짓이라더니 의자를 당기고 앉는 폼이 몹시 능숙했다.

5000년 이상 놀며 쌓은 경력답게 노는 것은 다 좋아하는 양반이었다.

그러고 보니 탈해가 만든 로봇 하인들한테 바둑과 카드 게임을 학습시킨 것도 사라였지?

“저도 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단군도 여유롭게 웃으며 포커 테이블로 향했다.

아, 그렇지.

미래를 볼 수 있는 도사한테는 꽤 유리한 던전일 수도 있겠다.

나는 그의 넓은 등을 제법 든든하게 느끼며 마지막으로 강림 형을 돌아보았다.

“음…… 형은 뭐 하고 싶은 게임 없어요?”

“명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형은 그저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평소와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하긴 유교 꼰대가 카지노에서 할 만한 게임이 뭐가 있겠어.

룰도 모를 텐데.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게임을 이어가는 사라, 차분히 상대를 고르는 단군과 달리 형은 기둥처럼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나는 그런 형의 옆에서 함께 카지노를 둘러보았다.

사실 나도 70년 평생 카지노 같은 곳은 처음인지라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저 화려한 장난감들이 궁금하긴 한데.

뭐라도 건드려 보기엔 자칫 불운 수치가 올라갈까 봐 무섭고.

[ (!) 간다르바와의 내기에서 승리했습니다. ]

[ (!) 행운 수치가 10% 올라갑니다. ]

[ (!) 간다르바와의 내기에서 승리했습니다. ]

[ (!) 행운 수치가 10% 올라갑니다. ]

그런데 멀거니 서서 구경한 지 얼마나 됐다고 행운 수치가 빠르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룰에 무지한 건 나도 마찬가지라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사라와 단군이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으음, 이 정도면 한두 번은 재미로 해 봐도 되지 않을까……?”

상황이 안정적으로 흘러가는 걸 보자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사라와 단군이 각자의 자리에서 훌륭하게 던전을 공략하는 걸 지켜보던 나는 요란하게 번쩍이는 슬롯머신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형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오늘이 아니면 언제 또 카지노에 와 보겠어?

“형, 우리 저거 한 번만 해볼까요?”

내가 그렇게 툭 던지자 형의 짙푸른 눈이 슬롯머신을 향했다.

“기계군요.”

눈빛만으로 기계를 우그러뜨릴 기세에서 현대 문물에 대한 여전한 혐오가 느껴졌다.

“대왕님께서 원하신다면 한번 해 보시지요.”

그래도 형은 성큼 걸어 나갔다.

슬롯머신마다 그 앞에 아프사라스와 간다르바가 번갈아 서 있었고, 우리는 당연히 간다르바가 서 있는 슬롯머신 앞으로 갔다.

“이건 되게 간단해요. 그냥 레버를 돌리면 되거든요.”

머신에 칩을 넣으며 간략히 설명한 다음, 레버를 돌렸다.

띠리링!

회전판의 그림들이 돌아갔다.

그냥 재미로 한번 해 보는 것뿐인데 막상 빠르게 돌아가는 그림들을 보자 슬금슬금 긴장이 됐다.

띠리링!

띠리링!

회전판이 점차 느려지더니 이윽고 하나씩 멈추었다.

[♧♧◇]

“하나가 다르군요.”

강림 형이 그림들을 내려다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아, 네. 다르네요.”

룰이 제일 간단하기도 하고, 뭐라도 일단 하면 재미있을 것 같았는데…… 도통 무슨 재미인지 모르겠다는 듯 무심한 반응을 보니 아주 멋쩍었다.

[ (!) 간다르바와의 내기에서 패했습니다. ]

[ (!) 불운 수치가 5% 올라갑니다. ]

잇달아 불운 수치까지 올라가자 더욱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제연아, 카지노가 뭐 별거야?

도박이 그냥 도박이지, 뭘 어울리지도 않게 즐겨 보겠다고 나서서!

“그…… 형, 역시 재미없죠? 그럼 이제 그만하고 구경이나 할까요?”

“그림이 모두 같으면 되는 겁니까?”

형의 소매를 잡아끌며 말을 돌리는데, 형은 뜻밖에도 그렇게 물었다.

“네? 네, 그렇기는, 한데요.”

너무 의외의 질문이라 살짝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형이 이 서양 도박 기계에 관심을 가지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한데 무관심한 얼굴의 형은 곧장 반장갑을 낀 손에 레버를 쥐었다.

띠리링!

그림들이 다시 한번 빠르게 돌아갔다.

파앙!

첫 번째 회전판이 멈추기 직전 발설지옥의 신성이 번쩍였다.

“어……?”

생각지 못한 방식에 나는 멍하니 그림들을 바라보았다.

[◇◇◇]

형, 지금 발설지옥의 신성을 써서 그림을 강제로 맞춘 거야?

무슨 동네 게임방도 아니고 카지노에서 그래도 돼?

[ (!) 간다르바와의 내기에서 승리했습니다. ]

[ (!) 행운 수치가 5% 올라갑니다. ]

내 의문에 대신 답하듯 던전의 치트키를 발견했음을 알리는 팝업창이 떴다.

“되는구나…….”

잠시 뒤.

슬롯머신에서 잭팟을 알리는 팡파르가 울리면서,

우리는 어째서인지 아쉬움 가득한 사라의 탄식을 끝으로 카지노 던전의 첫 번째 조건을 클리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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