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61화 (161/187)

46장. 파도에 잠기면(1)

한동안 던전 공략이 계속되었다.

던전에서 나올 때마다 호구별성 팀에 전음을 걸었지만 서로 던전을 공략하는 타이밍이 다르다 보니 좀처럼 연결되지는 않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연락이 닿았고, 그쪽도 순조롭게 공략 중이란 걸 확인했다.

술의 여신 바루니의 신화로 이루어진 칵테일 바에서 술 게임을 했다거나,

신성한 흰 암소 카마데누의 신화로 만들어진 인형 공장에서 하얀 소 인형을 돌보는 일을 했다거나 하는 이야기였다.

[ 그냥 인형 공장인 줄 알았는데 그게 다 카마데누더라니까. ]

[ 그러고 보니 모든 소에는 카마데누가 깃들어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죠. ]

[ 응, 그래서 그 인형들 다 돌봐줬다. 밥 먹이고 등 두들겨주고…… 염병, 내가 역병인지 젖병인지. ]

[ 하하하. ]

인형 공장에서 인형을 돌보는 던전이라니.

그려지는 그림이 귀여워서 웃는 와중에 호구별성의 보고가 이어졌다.

[ 근데 갑자기 도둑놈들이 떼거지로 몰려들어선 인형을 훔치려고 하지 뭐야. ]

[ 아, 원본 신화에서도 카마데누를 훔치려는 이들이 있었죠. 다들 천벌 받았지만. ]

정성껏 카마데누 인형들을 돌보고 그들의 신뢰를 얻은 뒤, 마지막으로 도둑에게서 지켜내는 것까지가 카마데누 인형 공장 던전의 미션이었다고.

[ 인형도 많고 도둑도 많았어. 세 명이 감시하기는 힘들었지. ]

[ 어떻게 하셨어요? ]

[ 그냥 죽음의 무도 썼어. ]

[ 아하. ]

몰려드는 도둑들을 상대하려면 광역기가 적격이겠지.

팀원이 세 명뿐이라 전투력이 부족하더라도 융합 풍문으로 보충할 수 있으니, 호구별성과 그림 리퍼를 한 팀으로 엮은 것은 탁월한 결정이었다.

[ 마력 다 쓰는 게 좀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다 끝나니까 마력을 보충하는 우유가 나오더라고. ]

[ 정말 단군과 바리가 예상한 그대로네요. 공략이 덜 까다로운 던전은 회복 수단이 있을 거라던. ]

그 밖에도 호구별성 일행은 보석상 던전에서 무한의 여신 아티티가 가져갔다던 귀걸이를 얻었는데, 아티티의 권능이 담겨 상태 이상을 회복하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본격적으로 우유의 바다 휘젓기가 시작되면 바다를 젓는 역할을 하는 거대한 뱀, 바스키가 불과 독을 토해낼 테니 분명 필요한 효과였다.

[ 이제 우리는 그 뭐냐, 달 모양 장식. 그것만 가지러 가면 된다. ]

호구별성의 전음이 이어졌다.

힌두교의 삼주신(三主神) 중 하나인 시바의 머리 위를 장식한 찬드라를 얻는 게 그들의 마지막 할당이었다.

[ 전하 쪽은 어때? ]

보고를 마친 호구별성이 이번에는 이쪽의 진행 상황을 물었다.

[ 이쪽도 순조로워요. 제일 먼저 갔던 데는 칼파브릭샤 던전이었는데 파리자타를 온실 가득히 피우는 게 미션이었거든요. ]

꽃을 피우는 첫 번째 미션에서 강림 형의 화분이 시들고 말았다는 말을 전해주니, 호구별성이 몹시 즐거워했다.

[ 그런데 두 번째로 갔던 웃차이쉬라바스 던전은…… 비어 있었어요. ]

[ 비어 있었다고? ]

[ 네, 던전이 그냥 비어 있었어요. ]

[ 흐응? 아수라가 먼저 다녀갔다는 말은 아니지? ]

[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면 아마 지도에 클리어가 된 던전이라고 떴겠죠. ]

이건 던전의 공략을 시작하고 뒤늦게 안 사실인데,

108개의 작은 던전을 공략해서 아수라와 데바의 전쟁을 준비하는 유해교반 퀘스트는, 전체 던전의 공략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던전을 클리어하면 도시 전체를 간략하게 그린 지도가 주어진다.

거기엔 던전의 위치를 의미하는 108개의 점이 찍혀 있고, 클리어된 던전은 그 점 위로 X표가 생긴다.

처음 이 기능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아수라 측이 벌써 수십 개의 던전을 클리어했음에 피가 식는 기분을 느꼈다.

-당신이 정신을 잃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염라.

-아마 브리트라가 된 남해 용왕이 남해의 용신들을 전부 던전 공략에 동원한 것이겠지요.

그나마 내 속내를 알아챈 단군이 그렇게 말해주어 약간이나마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동해와 남해의 신화전이 끝났을 때, 동해 용왕께서는 남해 용왕의 목적이 지옥의 권능을 심은 군대라고 하셨죠.

-이제 보니 그는 동서해의 용신들도 아수라의 군대로 만들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웃음을 짓고서 말했다.

-당신이 신화전에서 승리하여 그를 저지한 일은 생각보다 훨씬 큰 수확이었다는 뜻이지요.

우리에 비해 적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은 여전히 절망적이었으나, 나는 내 동요를 진정시켜주려는 그의 말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건 있었다.

남해의 용신들은 월등한 머릿수를 내세워 빠르게 던전을 공략했지만, 정작 공략된 던전들은 크게 중요한 던전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상할 정도로 바리와 단군이 꼽은 주요 던전을 피해 공략하고 있었다.

단순히 던전 고르는 눈이 없다고 보기에도 어려울 정도로 부자연스러워서, 무언가 다른 속셈이 있어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당장 해야 할 일이 달라지진 않았다.

우리는 그저 단군과 바리가 고른 던전을 찾아 최대한 빠르게 공략해 나갈 뿐.

[ 웃차이쉬라바스 던전에는 X 표시가 없었어요. ]

[ 흐음. ]

호구별성도 영문을 모르겠는지 앓는 소리를 냈다.

[ 그거 뭐냐, 우리가 바다 무덤에서 봤던 그것도 웃차이 어쩌구 하는 말이었잖아. ]

[ 네, 인드라가 타고 다니던 말이요. ]

[ 우리가 그놈을 물리친 것과 관계가 있을까? ]

[ 저도 그게 제일 가능성 있는 것 같긴 해요. ]

나는 호구별성의 말을 받으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 그렇다면 유해교반 퀘스트가 시작되기도 전에 그 부산물인 웃차이쉬라바스가 먼저 태초의 바다 바깥에 존재했다는 뜻이 되지만요. ]

[ 아주 엉망진창이구만! ]

말로는 가능성이 높다 정도로 표현했지만, 내 말로 확신한 듯 호구별성이 성을 냈다.

[ 이게 다 그 공노비들이 일을 제대로 못해서 그런 거 아니야! ]

[ 음…… 아무래도 그렇죠. ]

[ 염병, 생각해 보니 우리 벌써 통화료도 꽤 나왔겠다. ]

전음을 잇던 호구별성이 혀를 찼다.

그 말에 나도 1분당 만 원이라는 양심 없는 요금이 뇌리를 스쳤다.

[ 알았다, 아무튼 무사히 진행 중이라니 마음이 좀 놓이네. ]

[ 저도 그래요, 누나. ]

[ 그럼 이제 우린 찬드라랑 카우스투바를 얻으러 가마. 세상에서 제일 귀한 보석이라니 좀 기대돼. ]

[ 네, 저희도 슬슬 다음 던전으로 가봐야겠어요.]

이걸로 중간 정보 교환을 완료했다.

전음을 끝내고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두 번째로 찾은 웃차이쉬라바스 던전이 비어 있었던 탓에 지친 기색은 전혀 없었다.

칼파브릭샤를 얻은 첫 번째 던전도 꽃감관의 권능과 육해공의 활약으로 별다른 고생 없이 클리어하기도 했고.

내가 호구별성과 연락을 하는 사이 사라는 자개 의자에 앉아 느긋한 얼굴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강림 형은 세 번째 던전 공략을 앞두고 검푸른 빛을 발하며 신성을 가다듬고 있었다.

두 신 모두 다른 곳에 한창 몰두한 듯해서 나는 옆에 선 단군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다음 던전은 카지노라고 했죠.”

단군이 둥글게 눈을 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보면 락슈미와 알락슈미의 신화에 딱 어울리는 곳입니다.”

행운의 신 락슈미와 불운의 신 알락슈미는 유해교반에서 태어난 자매들이다.

이제까지 본 던전은 하나의 상징을 토대로 하고 있었는데, 행운과 불운의 신은 둘이서 함께 던전이 된 듯했다.

“선한 신과 악한 신이 함께 휘저은 바다에서 행운과 불운도 함께 태어났네요.”

그리 말하면서 유해교반 신화를 곱씹었다.

선한 신 데바와 악한 신 아수라 간 전쟁의 결말.

이길 방법을 찾기 위해 시작된 신화의 결말은 데바의 완전한 승리가 아니었다.

데바는 우유의 바다를 휘저어 불사의 약 암리타를 손에 넣고 아수라를 지하 세계로 추방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나 그것은 결코 아수라의 완전한 멸망이라 볼 수 없었다.

선의 데바가 존재하는 이상 악의 아수라 또한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신화이기 때문이다.

지하 세계로 추방당한 아수라는 언제든 다시 나와서 데바와 크고 작은 싸움을 이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리타를 얻은 선의 데바는 언제나 악의 아수라에게서 승리한다.

선이 존재하기에 악이 사라지지 않는 대신, 선이 악을 이기는 것도 불변했다.

그래…… 그것은 결국 인간의 바람이 담긴 이야기가 아닐까.

세상의 선이 세상의 악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할지라도,

선의가 꺼지지 않는 이상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악의를 억누를 수 있으리라는.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나는 다시 단군의 눈을 마주했다.

멀찍이서 나를 기다리는 두 신과 달리, 나와 같은 눈으로 신을 바라보는 인간을.

“당신은 유해교반 신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남해와의 신화전에서 바다의 신화에 대해 짐작하는 바가 없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인간의 입장에서 바라본 사해 용왕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것은 분명 내 차사들에게서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바다의 신화가 유해교반이라는 예상치 못한 형태로 열린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구원의 신화라고 생각합니다.”

내 조심스러운 물음에 망설임 없이 돌아온 대답은 내 예상을 크게 벗어난 것이었다.

“구원의 신화요? 유해교반이?”

나도 모르게 되묻자 그는 검고 깊은 눈으로 차분히 말을 이었다.

“세상을 멸망시킬 독을 삼켜주는 구원자가 등장하지 않습니까.”

“아…….”

그제야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고 작게 탄식했다.

우유의 바다를 휘젓는 막대 역할을 했던 거대한 뱀, 바스키.

바스키는 데바와 아수라가 각각 자신의 목과 꼬리를 쥐고 바다를 젓는 고통에 울부짖으며 불과 독을 토해 낸다.

바스키가 토한 독은 쌓이고 쌓여 세상 전체를 멸망시킬 수 있는 맹독, 하라하라가 되었는데.

그것을 힌두교의 삼주신 중 하나인 시바가 삼킴으로써 세상의 멸망을 막는다.

“데바와 아수라라는 신이 주체가 되는 신화마저도, 더 위대한 존재가 나타나 그들을 구원하게 되지요.”

그런데 이어지는 단군의 말에 나는 묘한 기분이 되었다.

“선이 악에 맞서는 와중 필연적으로 생겨난 독을 삼켜줄 구원의 신이.”

단지 유해교반을 두고 이야기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하필 시바가 그 역할을 한 게 모순적이네요. 창조, 유지, 파괴. 삼주신 중에서 하필 창조의 브라흐마도, 유지의 비슈누도 아닌 파괴의 시바가 멸망을 막다니.”

“사실 시바야말로 진정한 구원의 신으로 여겨지기도 했죠.”

단군은 변함없는 미소로 내 말을 받았다.

“어쩔 수 없는 모순이 쌓인 기존의 체제를 전복시킬 수 있으니까.”

그가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으나 나는 더 이상 태연히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다.

단군이 시바에 무엇을 빗대어 말하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으므로.

“당신도…….”

한참의 침묵 끝에 그의 의도대로 입을 열었다.

“당신도…… 구원의 신화를 바랍니까.”

부드러운 얼굴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마 모든 인간이 바랄 테지요.”

그 대화를 끝으로 목적지였던 카지노 던전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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