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장. 태초의 바다(4)
색색의 꽃잎이 흐드러지는 파리자타들 한가운데서 검게 죽어 있던 칼파브릭샤가 요동쳤다.
쿠우우웅!
쿠우우우웅!
콰아아앙!
칼파브릭샤는 굵은 가지를 채찍처럼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힘이 어찌나 대단한지 한 번 내리칠 때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일대가 흔들렸다.
“클리어 조건은 칼파브릭샤의 묘목을 얻는 것이지요.”
커다란 고목을 응시하며 단군이 차분하게 말했다.
업경을 통해 그의 주변에서 천천히 맴도는 문자열이 보였다.
“기둥 안에 묘목이 있습니다. 저 검은 나무는 칼파브릭샤가 벗어야 할 허물인 셈입니다.”
즉, 묘목을 얻기 위해선 괴물이 된 칼파브릭샤의 허물을 쓰러트려야 한다.
“한데 저렇게 기세가 사나워서야 가까이 가기도 쉽지 않겠구나.”
사라가 사방으로 난폭하게 가지를 휘두르는 나무를 주시하며 혀를 찼다.
“물러서 계십시오, 대왕님.”
강림 형은 곧바로 내 앞을 가로막으며 신성을 끌어올렸다.
“당신께서 손을 쓰실 일이 없게 하겠습니다.”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발설지옥의 검푸른 신성이 나무를 덮쳤다.
지진이라도 맞이한 것처럼 굳건한 기둥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이번에는 저와 차사님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옆에 선 단군도 형의 말에 동의했다.
그도 직접 싸우려는 것일까?
몇 번 화염 주술을 사용하는 걸 보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나서는 그를 직접 보는 건 매우 오랜만이었다.
첫 번째 천벌을 제외하곤 멀리서 중계 화면을 통해 본 게 전부였으니까.
“딱 알맞은 친구들이 있지요.”
빙긋 웃는 단군에게서 세 갈래의 빛이 쏟아졌다.
나는 그것들을 눈에 담으며 눈을 끔뻑였다.
“신수군요.”
산군에 이은 또 다른 신수들.
하나는 동그란 머리에 주둥이가 뾰족한 두더지였는데 귀엽게도 선글라스와 너클을 끼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나비넥타이를 한 커다란 대왕쥐가오리였으며.
나머지 하나는 동글동글한 눈이 형형하면서도 귀에는 앙증맞은 꽃핀을 꼽은 수리부엉이였다.
각양각색의 모습이었지만 멍군이나 산군과 달리 모두 천부인의 하얀 두루마기 코트를 걸치고 있어 한눈에 봐도 셋이 한 세트로 보였다.
“데리고 있는 신수가 엄청 많네요.”
단군이 꺼낸 신수들을 구경하며 새삼 그가 한반도 최강자라는 것을 실감했다.
신수는 곧 그가 얻은 풍문이다.
일반적인 헌터들은 한두 개 갖기도 힘든 게 풍문인데 신수와 관련된 것만 해도 벌써 몇 개인가.
단군은 능숙하게 신수들을 지휘했다.
“차례로 육군, 해군, 공군입니다.”
……장군과 멍군, 산군에 이어서 이번에는 육해공이라니.
따로 묻지 않아도 누가 육군이고 해군이며 공군인지는 명확했다.
“어…… 다들 멋진 이름을 가지고 있네요.”
나는 칼파브릭샤를 향해 돌진하는 세 신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순수한 칭찬이라기보단 나도 모르게 살짝 비꼬아버린 것에 가까웠는데, 내 말을 칭찬으로 들은 단군은 다소 수줍게 웃었다.
“멋지다고 해주신 분은 당신이 처음입니다, 염라.”
“…….”
그 순수하고 해맑은 웃음을 보자니 어쩔 수 없는 죄책감이 들었다.
꼭 아무것도 모르는 착한 아이를 놀린 나쁜 어른이 된 것만 같은…….
아니야, 어쨌든 거짓말을 한 건 아니잖아.
들은 사람이 칭찬으로 받아들였으면 된 거지.
나는 애써 죄책감을 다잡았다.
단군, 장군, 멍군, 산군, 육군, 해군, 공군.
나올 것은 다 나왔으니 이제 ‘그렇군’ 같은 무성의한 이름이 나와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셋이 힘을 합하면 조건에 따라 공격력이 3,000% 이상 증폭되는 영웅담이 있습니다만.”
단군의 말이 잠시 끊겼다.
콰아아아앙!
직후 육해공에 포위된 칼파브릭샤로부터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해군과 공군이 협공할 환경은 많지 않은데, 마침 이곳이 바다라서 다행입니다.”
나는 날아다니는 대왕쥐가오리, 해군을 바라보았다.
얼핏 보기엔 그냥 평범하게 하늘을 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런 움직임은 물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뉘앙스였다.
발설지옥의 신성과 육해공의 협공이 이어졌다.
드높고 두꺼운 고목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널빤지만 한 나무껍질이 조각조각 쉴 새 없이 떨어져 내렸고, 이파리는 없어도 풍성하게 뻗었던 가지들은 아무렇게나 부러져 곤두박질쳤다.
쿠우우웅!
콰아아아앙!
[ (!) 칼파브릭샤의 기둥이 꺾였습니다. ]
커다란 굉음이 몇 번 더 울린 뒤 팝업창이 떴다.
쩌어어어억!
칼파브릭샤의 기둥이 반으로 갈라지면서 온실을 가득 채울 만큼 환한 빛이 퍼져 나갔다.
“이제 칼파브릭샤가 품고 있던 묘목을 취할 차례로군요.”
순식간에 공략을 끝낸 단군이 육해공을 다시 불러들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거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염라.”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
해변이 보이는 칵테일 바.
호구별성과 그림 리퍼가 발개진 얼굴로 잔을 부딪쳤다.
테이블 위에 향기만을 남긴 빈 잔 여럿이 볼링핀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술과 예언의 신, 바루니의 신화를 토대로 만들어진 칵테일 바 던전이었다.
일곱 마리의 백조가 바텐더 역할을 하며 각각 연꽃, 소라, 뱀, 삼지창 따위의 모형으로 장식한 칵테일을 건네주었는데, 이는 바루니의 남편이기도 한 수신 바루나의 상징들이었다.
피를 흘리는 전투는 없었다.
대신 칵테일을 마시며 일곱 마리의 백조들과 치열한 술 게임을 벌여야 했다.
게다가 던전에서 제공되는 술은 달큼한 향기와 달리 몹시 독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한두 잔만 마셔도 행동 불능에 빠질 터였다.
-오, 이렇게 치명적인 던전이라니. 역시 원초적인 바다라 그런지 아주 무시무시하군요.
-이거 우리 바리는 잠시 이 끔찍한 던전에서 한 발 떨어져 있어야겠는데?
미성년자가 술 게임을 할 수는 없다.
신들은 던전을 파악하자마자 바리를 바테이블에서 최대한 떨어진 자리에 앉혀 놓고 둘이서 공략을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바리는 기분이 몹시 좋아 보이는 두 신이 함께 다트를 던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던전의 마지막 미션, 다트 게임이었다.
-이쪽으로 손목의 각도를 조금 틀어주는 게 좋겠군요.
-어어, 나 좀 취했나 본데, 네가 알아서 맞춰 봐.
-얼마든지요, Darling.
호구별성의 어깨를 감싼 그림 리퍼가 다트를 든 그녀의 손목을 다정하게 쥐고 각도를 조절했다.
물론 바리의 눈에는 다트를 쥔 호구별성도, 그녀의 손목을 움직이는 그림 리퍼도 똑같이 고주망태인지라 다트는커녕 빨대나 제대로 꽂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흐물흐물했다.
다만 다트 실력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핀이 과녁 앞에서 고꾸라지는 족족 역병의 신성과 죽음의 신성으로 잡아채 정중앙에 꽂아 넣었으므로.
-10점 만점입니다, Honey.
-당연하지. 누가 죽음에 올라탄 역병을 피해 가겠어.
얼큰하게 달아오른 역신과 사신이 만점을 축하하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것이 던전의 최종 미션이었다.
마지막 다트가 중앙에 꽂히자 클리어 메시지와 함께 보상 아이템이 나타났다.
[ 소마(D) ]
- 신성한 힘이 담법받꿨흐 술.
- 체력과 마력을 100% 회복벨깬몄눈럴렷륑빎.
오류가 섞인 설명이었지만 바리는 그 아이템이 체력과 마력을 모조리 회복시키는 효과가 있음을 문제없이 읽어 냈다.
태초의 바다 안에서만 사용할 수 있게 안배된 D(Dungeon) 등급이란 것이 아쉬울 뿐.
-이거 술집 던전이라 보상도 술인가 보네?
-천상의 신들이 마신다는 소마로군요. 상처를 치료해줄 뿐만 아니라 힘도 올려준다고 하지요.
소마를 사이에 둔 호구별성과 그림 리퍼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도사 친구 말대로 던전을 클리어하니 이런 게 나오는군요.
-그래도 만일을 대비해 이건 아껴두는 게 좋겠어. 영감탱이도 없으니까.
그리하여 클리어 조건인 술 게임과 다트 게임을 끝내고, 인원수에 맞춰 보상된 소마 세 병을 챙긴 그들은.
나른하게 풀린 몸으로 나란히 바테이블에 늘어졌다.
술이 깰 때까지 좀 쉬어야겠다는 이유였으나, 어째서인지 아직 많이 남은 칵테일들을 홀짝홀짝 들이켜면서.
바리는 좀처럼 던전을 나갈 생각이 없는 듯한 신들을 굳이 재촉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잔을 기울이는 그들에게서 무언가 나쁘지 않은 인과가 보였기 때문이다.
“술 중의 술은 역시 뱀술이지.”
조그마한 뱀 모형이 담긴 잔을 골라 들며 호구별성이 말했다.
“뱀이 죽기 직전까지 토해 낸 독한 생명력으로 담근 술이라, 인간들은 뱀술을 많이 마시면 이가 다 썩어버린다는 얘기가 있어.”
잔을 한 모금 마신 그녀가 혀를 내어 입술을 핥았다.
“그래서 이에 닿지 않게 혀끝으로 살짝만 맛본다지.”
“흥미로운 얘기군요.”
똑같이 뱀 모형이 담긴 잔을 든 그림 리퍼가 능청스럽게 눈썹을 움직였다.
잔을 들면서도 그의 시선은 줄곧 호구별성에게 향한 채였다.
“솔직히 그게 인간들한테 약이 되겠어? 독이면 독이지. 늙은 놈이 아집으로 뱀술을 들이켜는 바람에 삼대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는 말도 흔해.”
한 모금으로는 부족해서 남은 술까지 마저 쭉 들이켠 그녀가 낄낄거렸다.
“물론 나는 독도, 저주도 좋아.”
“고아한 취향이십니다, 역병이시여.”
빙긋 웃은 그림 리퍼가 호구별성에 이어 자신의 잔을 비우자,
[ (!) 저주받은 뱀술을 모두 마셨습니다. ]
클리어된 던전에서 새로운 팝업창이 떴다.
[ (!) 물에 잠겨 있던 뱀의 유지가 깨어납니다. ]
동시에 테이블에서 금빛 포승줄이 떨어졌다.
웬만한 장정의 팔뚝만큼 굵은 포승줄이었는데, 자세히 보면 단순한 포승줄이 아니라 황금빛 비늘이 덮인 뱀의 형상이었다.
“응? 이건 또 뭐야?”
술기운에 코끝이 빨개진 호구별성이 포승줄을 들고 고개를 갸웃했다.
“수신(水神) 바루나의 뱀, 나가파사예요.”
지켜보던 바리가 말했다.
“겨냥한 것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는 포승줄인데 바루니 던전의 히든 피스인 것 같아요. 본래는 바다에서 아수라를 감시하는 데 쓰였으니까요.”
108개의 던전에 안배된 것은 결국 데바와 아수라의 전쟁에서 필요한 자원들.
나가파사 또한 그중 하나였다.
“오, 그러면 우리가 놓친 히든 피스가 또 있을지도 모르겠군!”
바리의 설명에 그림 리퍼가 손바닥을 비비며 테이블에 놓인 술을 훑었다.
“그러게. 혹시 모르니까 다 마셔버리는 게 좋겠어.”
호구별성도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보탰다.
물론 바루니 던전의 히든 피스는 나가파사뿐이었지만, 바리는 두 신이 남은 술을 몽땅 마시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취기는 던전의 효과일 뿐이니 던전을 나서면 사라진다.
그들이 술을 마시는 사이에 잠시 살펴볼 미래가 있었다.
“파도가 높아졌어…….”
창문 너머로 바다를 바라보며 바리가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로 던전이 클리어될 때마다 파도가 높아지는구나.”
지금쯤 염라 쪽도 던전을 하나 클리어했을 것이다.
우유처럼 하얗게 흩어지는 파도의 포말을 응시하며 바리는 단군과의 대화를 곱씹었다.
-그런데 언뜻언뜻 높아지는 파도가 보여요. 이건 뭘까요?
-유해교반의 신화로 이루어진 공간이니 파도가 보이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때 단군은 그녀가 읽지 못하는 인과까지 여상히 읽어 내었다.
-유해교반 퀘스트는 108개의 던전을 클리어해서 물자를 축적하는 전반부와 축적한 물자로 데바와 아수라의 전쟁을 재현하는 후반부로 나뉘지요.
-던전을 클리어할수록 높아지는 저 파도가 전반부에서 후반부로 전환하는 역할을 할 겁니다.
그가 읽은 것에는 인과를 넘어 전환 방식마저 포함되어 있었다.
-아마도 바스키 던전을 클리어하는 순간 파도가 도시를 완전히 덮치는 것으로요.
-정말로 세상 전체가 잠겨 있었다던 우유의 바다가 열리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그만큼 다른 던전보다 위험도가 높으니, 바스키 던전은 모두 함께 클리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때 읽었던 파도랑은 무언가가…….”
정체 모를 위화감에 조금 더 높아지는 파도에 집중해 봤지만 그것이 불러올 무언가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이라면 제대로 읽을 수 있을까?”
잠시 단군에 대해 생각하던 바리는 다시 두 신을 돌아보았다.
파도의 인과가 더 읽히지 않는 이상, 이제 두 신을 데리고 던전을 빠져나갈 차례였다.
“어…….”
그런데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그새 던전의 모든 술을 몽땅 마셔버린 두 신이 테이블 위에 떡처럼 눌어붙어 있었다.
“으음…….”
바리는 손으로 작은 입을 가리며 눈을 깜빡였다.
던전 밖으로만 나가면 취기는 사라질 테지만, 그녀의 힘만으로는 두 신을 옮기기 힘들 게 자명했다.
“아껴 두려고 했는데…….”
잠시 생각한 끝에 그녀가 부적 두 장을 꺼내어 두 신의 등에 각각 붙였다.
파앙!
흙의 권능을 담은 부적은 손바닥만 한 토우(土偶) 수십 개가 되었다.
크기는 작지만 비늘 갑주에 투구까지 잘 차려입은 토우들은 짧고 뚱뚱한 팔과 다리를 움직여 고주망태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소환 시간은 3분 남짓.
그것이면 그들을 던전 밖으로 옮기기에는 충분했다.
하기야 아껴두었다고는 해도 토우들이 너무 작아서 딱히 쓸모가 있을까 싶었던 부적이었는데, 마침 적당한 용도를 찾은 것일지도 몰랐다.
“얼마 전에 얻은 권능으로 더 큰 토우를 만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바리가 토우들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던전을 나서는 찰나에 언뜻 듬직한 얼굴의 커다란 토우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45장. 태초의 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