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장. 태초의 바다(3)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 칼파브릭샤의 신화를 토대로 만들어진 온실 던전.
[ (!) 공간의 지배베멋뇬깬뚜흐흐흐이 바뀝니다. ]
온실 안으로 발걸음을 내딛자 던전을 알리는 팝업창이 떴다.
[ ‘빛이 산개하는 온실’에 입장하벨곽땍귀룔흐흐흐니다! ]
- (!) 해당 던전벨덮됩흐 등급은 ‘영웅담’입베깩됩흐다.
- 클리어 조건 : (……)의 묘목을 벨놋릍긋륫흐흐흐십시오.
역시나 오류가 섞인 팝업창이었다.
(……)로 표기된 걸 보니 원래도 해금이 필요한데, 오류까지 섞이자 조건을 파악하는 게 배로 힘들었다.
“온실의 꽃을 피워 칼파브릭샤를 깨우는 것이 첫 번째로 보이는군요.”
던전의 인과를 살피던 단군이 온실 한가운데 우뚝 선 커다란 고목을 가리켰다.
줄기가 신전의 기둥만큼 크고 굵은 데다 가지 또한 풍성했지만, 잎이 하나도 없고 옻칠한 것처럼 검어서 꼭 죽은 나무처럼 보였다.
신화에 따르면 칼파브릭샤는 청금석으로 된 가지에 진주로 꽃이 피고 금강석으로 열매가 맺히는 나무일 터.
한데 지금은 무척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우유의 바다에서 자라난 칼파브릭샤는 훗날 데바의 왕 인드라가 자신의 정원에 가져가 심었다고 하죠. 그러니 던전의 클리어 조건은 칼파브릭샤의 묘목을 얻는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단군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설명을 마쳤다.
인드라가 거두는 나무라고 하니 자연히 귀속 아이템으로 인벤토리에 자리한 바즈라가 떠올랐지만, 굳이 입에 담지 않고 온실을 둘러보았다.
“흙과 화분이 많네요.”
유리 온실은 검게 죽은 칼파브릭샤를 둘러싸듯 크고 작은 화분으로 가득했다.
밖에서 봤을 때는 커다란 보석인 양 아름다웠으나 막상 내부는 그다지 밝지 않고 오히려 삭막함이 감돌았다.
“칼파브릭샤의 힘으로 피어나는 파리자타의 화분이겠지요. 지금은 흙만 담겨 있을 뿐이지만, 영원히 시들지 않는 불멸의 꽃입니다.”
단군이 다시 설명했다.
“본디 생명의 나무인 칼파브릭샤의 권능으로 꽃을 피워야 하죠. 이곳에선 반대로 불멸의 꽃을 피워야 칼파브릭샤의 권능을 깨울 수 있는 모양이군요.”
즉 이 수많은 화분의 꽃을 피워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명의 권능이라니.
내 신격과는 정반대되는 일이 아닌가.
“흐음, 확실히 화분마다 웅크린 생명이 느껴지는구나.”
팔짱을 낀 사라가 말했다.
웅크린 생명이라면 아마 씨앗일 것이다.
“서천의 꽃들과 근본은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아.”
꽃을 피워야 한다는 과제 앞에 다소 움츠러든 나와 달리 그는 몹시도 태연한 태도였다.
생명의 꽃을 피우는 서천꽃감관의 위용이 새삼 다시 보였다.
사라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다.
“꽃을 피워야 한단 말이지.”
강림 형은 천천히 거닐며 서늘한 눈으로 화분들을 훑었다.
“죄인의 혀에 밭을 가는 발설지옥의 명예를 걸고 최선을 다해야겠군.”
큼지막한 손으로 작은 화분을 하나 들어 올린 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무심하되 오래된 신의 현기가 담긴 눈으로 형을 돌아본 사라는 곧장 냉엄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 강림 너는 아무것도 하지 말거라.”
꽃감관의 가차 없는 평가에도 형은 화분을 든 손에 보란 듯이 검푸른 신성을 발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다.”
눈이 마주친 두 차사 사이에서 선명한 불꽃이 튀었다.
“꽃감관 주제에 자신이 없다면 뒤에서 구경이나 하지.”
“장담컨대 네 손아귀에서는 꽃잎 한 장 날리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꽃이 만발하는 온실이라. 게으름뱅이의 화원보다 낫겠군.”
“애석하구나. 자칫하다 처자식도 못 만나고 던전에 갇히게 생겼어.”
계속되는 두 차사의 신경전에 나는 슬쩍 단군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혹시 화분을 전부 꽃피우지 않으면 페널티가 있을까요?”
형이 저렇게 좋아하는데.
던전 공략에 영향을 끼칠 정도가 아니라면 화분 한두 개 정도는 가지고 놀게 해주고 싶었다.
“구 할만 온전히 피우면 됩니다.”
단군이 마침 해금 조건을 엿보는 데 성공했는지 흩날리는 문자열 사이에서 미소 지었다.
“그럼 몇 송이 정도는 시들어도 괜찮겠네요.”
나는 단군에게만 들리도록 조그맣게 말하고는 헛기침을 하며 두 차사 앞에 섰다.
“다 같이 모여 있는 것보단 둘로 나뉘는 편이 더 효율적으로 꽃을 피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때요?”
내가 형을 감시할 테니 그사이에 서천의 꽃감관과 신단수를 기르는 도사가 꽃을 다 피우라는 말이었다.
“흠, 내가 단군과 같이 하마. 흙을 풍요롭게 하는 권능이라면 내 신성 또한 힘을 더할 수 있을 테니.”
찰떡같이 알아들은 사라가 곧장 단군에게 손짓했다.
곧장 단군과 팀을 먹는 사라가 마뜩잖았는지 형이 사라를 노려보았다.
“그럼 형은 이쪽에 와서 저랑 같이 꽃 피워요.”
형이 시선을 거두며 성큼 내 앞으로 왔다.
그의 큰 손에 쥐여 있다시피 한 화분이 귀여워서 살짝 쓰다듬자, 형은 내가 그 화분을 마음에 들었다고 생각한 듯 그것을 내게 들려주곤 다른 화분을 손에 들었다.
나와 형이 화분을 하나씩 맡는 사이 사라도 단군과 나란히 서서 작전을 세웠다.
“먼저 흙에 권능을 담아라. 건드리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개하겠어.”
“그렇게 하겠습니다.”
단군이 곧바로 손끝에 연녹색의 신성을 발했다.
둘 다 여유 있어 보이니 칼파브릭샤를 깨우는 덴 별문제 없을 것이다.
“저들보다 더 풍성히 꽃피워 보이겠습니다, 대왕님.”
형은 신과 도사를 한 번 쏘아보곤 말했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검푸른 눈에는 평소 볼 일 없던 승부욕이 서려 있었다.
손에 든 작은 화분을 내려다보며 그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짐승의 시대와 인간의 시대가 갈릴 무렵, 대별왕께서는 아우인 소별왕과의 내기에서 승리하셨지요.”
이승과 저승이 어떻게 나뉘었는지 이야기하는 한반도의 창세신화.
그 얘기가 나오자 형이 우리가 더 잘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를 이해했다.
먼 옛날, 하늘을 다스리던 천지왕은 장성한 두 아들을 땅의 왕으로 내려보냈다.
두 아들은 모두 지혜와 용기가 훌륭했으나, 형인 대별왕의 능력이 더욱 뛰어났으며 인품 또한 어질었다.
대별왕과 소별왕, 두 아들이 모두 산 자들의 땅인 이승을 다스리고 싶어 하자,
아버지 천지왕은 두 아들에게 각각 꽃을 한 송이씩 주어 더 잘 피운 아들이 이승을 다스리도록 했다.
능력이 뛰어난 대별왕의 꽃이 더욱 풍성하게 자라는 것은 당연한 일.
하나 이승이 탐났던 소별왕은 대별왕이 잠든 사이 꽃을 바꿔치기하고 만다.
그리하여 재주가 더 뛰어난 대별왕은 저승을, 재주가 형보다 못한 소별왕은 이승을 다스리게 되었으니.
소별왕의 이승은 대별왕의 저승과 달리 불합리한 혼란이 계속된다는 이야기였다.
“저는 대별왕의 의지가 깃든 땅에서 천 년을 살았습니다. 그분처럼 꽃을 피울 수 있을 겁니다.”
결국 형은 저승의 왕과 차사인 우리를 대별왕의 신화에 빗댄 것이다.
말을 마친 그가 손에 발한 검푸른 신성으로 천천히 화분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나는 형이 화분에 권능을 불어넣는 것을 지켜보며 대별왕과 소별왕의 신화를 곱씹었다.
이승은 태초부터 속임수로 시작된 땅이기에 불합리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
그러자 이전에 쌍둥이 앞에서 들었던 강림 형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신은 완벽한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세상이 모순적이고 불합리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신이 존재하면, 그 많은 모순과 불합리는 신의 뜻이 됩니다.
……세상의 근원을 설명하는 태초의 신화라는 것은 결국,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세상의 불합리를 받아들이기 위한 것임을.
지금 우리가 서 있는 태초의 바다 역시 벗어날 수 없는 불합리를 담고 있을지 몰랐다.
그래, 선한 신 데바가 악한 신 아수라를 속이면서부터 시작된 이 거대한 바다 역시도.
“아…….”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파아앙!
형이 신성을 주입하던 화분이 어느 순간 검푸른 빛을 발했다.
검푸른…… 신성이면, 그…… 아무래도 발설지옥의 신성일 텐데.
내심 긴장하며 형의 조그만 화분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불모지 같았던 흙 위로 자그마한 새싹이 올라오더니, 순식간에 반 뼘이나 키가 자랐으니까.
뿐만 아니라.
“꽃봉오리가 맺혔습니다, 대왕님.”
화분을 든 형이 말했다.
여전히 서늘한 눈에 건조한 목소리였지만, 저 정도면 꽤 기뻐하는 것이다.
“우와, 정말 우리 권능으로도 피울 수 있나 보네요!”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형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솔직히 죽음의 신성으로 정말로 꽃을 피울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자연스레 마음이 설레 나까지 눈이 반짝일 정도였다.
“생과 사는 결국 하나일지니, 죽음의 사자가 결국 생의 사자가 아니겠습니까.”
내 말에 형은 제법 은근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천 년을 죽음의 사자로 군림했던 신이 그렇게 말하니 정말로 그렇게 들렸다.
나는 꽃봉오리가 맺힌 화분에 좀 더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검푸른 신성을 머금은 꽃봉오리는 그사이에도 멈추지 않고 쭉쭉 줄기를 뻗더니.
파아아앙!
다시 한번 환한 신성을 발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불에 타버린 심지처럼 검게 시들었다.
“어라…….”
“…….”
“어어……?”
“…….”
“음…….”
“…….”
한순간에 검게 변해버린 꽃에 무심코 탄식이 샜다.
조심스럽게 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발설지옥의 신성을 머금은 꽃이 채 피지 못하고 시들어버리자 화분을 든 형까지 빠르게 시들어가고 있었다.
화분을 내려다보는 눈은 여전히 서늘하고 날카로웠음에도, 분명 어딘가가 죽어 있는 것만 같았다.
어떡하지.
나는 황급히 손을 뻗어 풀이 죽은 형의 너른 등을 토닥였다.
“형, 저승 삼신님이 피운 꽃도 하나의 가지에서 하나의 꽃만 피웠잖아요.”
“…….”
“물론 그것도 금방 시들어버렸지만, 그래도 그분이 그렇게 저승에 오셨으니까…….”
그랬으니까 저승의 차사인 형도 하나의 꽃을 피워 검게 시든 것이 당연하지 않으냐고.
그런 의미를 담아 위로하는데 형이 시든 화분을 멀거니 보며 중얼거렸다.
“……흑암이의 좋은 벗이 되었을 텐데.”
벌써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어?
던전의 일부인 화분을 반출하는 게 가능한가 따위는 당장 꽃을 잃은 형에겐 의미 없는 문제였다.
“영웅담급 던전이잖아요. 당연히 꽃을 피우는 것도 쉽지 않을 거예요.”
그저 쉼 없이 형을 토닥토닥하며, 제대로 들리긴 하는 건가 싶은 위로를 어떻게든 이어갈 때였다.
파아아앙!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어마어마한 신성이 눈부시게 산개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게 죽은 칼파브릭샤를 중심으로 온실 가득 엄청난 양의 꽃이 삽시간에 피어나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꽃잎이 흐드러지는 파리자타들이었다.
“……와아, 예쁘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화아아악.
꽃들이 만개하면서 불어오는 바람에 코끝이 움찔 떨렸다.
천상의 화원이라도 펼쳐진 듯 꽃향기가 선명하기 그지없었다.
구태여 힘을 불어넣지 않은 내 화분에서도 파리자타가 피어날 정도였다.
그들의 권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할 수 있었다.
“별로 어렵지 않구나.”
“다행히 서천의 권능과 제가 가진 권능이 잘 어우러졌군요.”
그 짧은 시간, 온 세상을 꽃밭으로 일궈낸 신과 도사가 각자 흡족한 얼굴을 했다.
“…….”
나는 그들을 바라보는 저승사자의 너른 등을 다소 애틋한 마음으로 응시했다.
쓸쓸한 분위기를 풍기며 꽃이 시든 화분을 어루만지는 그 모습은 평소의 형과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난 이미 꽃나무를 향한 그의 진심을 깨달아버렸으니까.
결과가 열정을 따라주지 않는 이란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운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어떤 결과가 이어지든, 그보다는 과정을 즐기는 자세가 아닐까.
“형, 저승에 돌아가면 발설이 곁에 다른 꽃도 많이 심어요.”
형의 등을 찬찬히 쓸어주며 말했다.
형은 깊게 침잠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제가 심으면 또 금방 시들어 버릴 테지요.”
자신 없이 말하는 목소리가 퍽 안쓰러웠지만, 나는 차마 그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그래도 지옥수 형제들은 돌볼 수 있으니 그게 어디야.
발설이가 잠깐 아프긴 했지만, 죽음의 신성을 가진 형한테는 지옥의 힘이 깃든 지옥수들이야말로 최고의 식물 친구들이 아닐까?
각자에게 잘 맞는 꽃을 피우면 되는 거지.
[ (!) ‘빛이 산개하는 온실’의 클리어 조건이 해금되었습니다! ]
- 클리어 조건 : 칼파브릭샤의 묘목을 벨놋릍긋륫흐흐흐십시오.
어쨌든 한 송이를 제외하고 온실의 모든 꽃이 피었고.
마침내 기다리던 팝업창이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