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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58화 (158/187)

45장. 태초의 바다(2)

던전을 효율적으로 공략하기 위해 일행을 두 팀으로 나눠야 할 상황.

제일 먼저 강림 형이 호구별성과 그림 리퍼를 한 팀으로 추천한 가운데, 우리는 천천히 의견을 모으기 시작했다.

“나는 왕의 곁에서 떨어질 수 없다.”

사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왕의 용태를 살피는 게 최우선이야. 그 몹쓸 놈이 헤집어 놓은 영혼의 상처가 언제 다시 터질지 모으니 계속 지켜봐야 한다.”

그리 말하면서도 내내 사라는 감정꽃을 피우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사실 움직일 때마다 반쯤 육체에 걸쳐 있는 어딘가에서 송곳으로 깊게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고 있었다.

사라만큼은 그걸 꿰뚫어 봤을 테고.

나는 그가 내 곁에서 영혼의 상처를 돌봐야 한다는 말을 부정할 수 없어 한숨을 삼켰다.

“던전에 진입할 인원을 나눠야 한다고 했죠.”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저는 까다로운 던전을 맡고 싶어요.”

저마다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도령님이 저랑 함께 가신다면 다른 쪽은 회복 능력이 없는 채로 던전에 도전해야 하는데, 그럼 당연히 난이도가 낮은 곳으로 가야죠.”

“음…….”

내 말에 먼저 반응한 것은 사라였다.

“그것도 맞는 말이군.”

그는 늘 그러했듯이 곧바로 내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에 더해, 그쪽은 클리어 보상으로 상처 회복 수단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다음으로 단군이 말을 얹었다.

“회복 능력이 없어도 어느 정도 수습할 수 있을 테니 합리적인 의견입니다.”

“음, 우리 전하는 아직 몸이 안 나았는데 괜찮겠어?”

호구별성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내 뜻에 공감하면서도 영 내키지 않는다는 투였다.

“네, 저는 정말 괜찮아요.”

나는 그녀에게 부러 평소처럼 웃어 보였다.

“그러니까 저랑 도령님이 까다로운 던전으로 가는 게 최선이에요.”

호구별성은 더 만류할 명분을 꺼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의 인과를 살필 수 있는 사람이 각각 필요할 테니, 저희도 둘로 나뉘어야 해요.”

바리가 자신과 단군을 가리키며 말했다.

타당한 말이었으므로 모두가 수긍했다.

“보다 까다로운 곳에는 단군이 가는 게 맞겠죠. 저보다는 단군의 눈이 더 깊으니까요.”

“큰 차이는 없습니다만 말씀하신 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담담히 이어지는 말에 단군이 부드러운 얼굴로 덧붙였다.

모르는 사이 많이 가까워진 듯 서로를 높게 평가하는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면 벌써 셋은 정해졌군. 까다로운 던전에 인간 친구 한 명. 꽃 친구 한 명. 그리고 우리 킹.”

그림 리퍼가 정리에 나섰다.

“마지막으로 어려운 던전이라면 당연히 전투원이 한 명 더 붙어야겠지?”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강림 형을 향했다.

형은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나랑 떨어질 생각도 없었다는 게 잘 느껴지는 반응이었지만, 어쨌든 그림 리퍼가 형이 이쪽에 합류할 이유까지 그럴듯하게 붙여준 모양새가 되었다.

“자, 그러면 이렇게 사 대 삼으로 나눠 보자고.”

팀 구성을 마무리한 그림 리퍼가 호구별성과 바리를 돌아보며 우아한 몸짓으로 고개를 숙였다.

“숙녀분들을 지킬 기사가 되어 영광입니다.”

팀 배정에 불만이 없다는 뜻에서 일부러 더 능청스럽게 구는 것이겠지만, 저 즐거운 표정은 은근히 진심 같았다.

게다가 호구별성이 씨익 웃어주는 걸 보니 분위기도 꽤 좋은 모양이고.

……으음, 그래도 애 앞에서 역신과 사신이 너무 가까워지진 않겠지?

“아, 맞아. 그러고 보니 던전 내부에서는 거리와 상관없이 전음이 통하나 보더라고.”

그때 호구별성이 깜빡했다는 듯 내게 말했다.

“흩어지더라도 최소한 생사는 알 수 있다는 뜻이지.”

전음이란 원래 같은 신화에 소속된 이들이 주고받을 수 있는 귓속말 기능이지만, 아쉽게도 거리에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태초의 바다 던전 안에서는 어디서든 전음이 가능하다니.

다행한 일이었다.

둘 이상의 세력이 경쟁하며 108개의 던전을 공략하려면 필연적으로 인원을 나눠야 하는데, 그때 정보 공유만큼 중요한 게 몇이나 되겠어.

우주강도단 주제에 웬일로 그런 알짜를 챙겨줬을까 생각하며 갸웃하자, 설명을 잇던 호구별성이 불현듯 인상을 썼다.

“근데 통화료가 붙어.”

“통화료요?”

“그래, 1분당 100우주화. 만 원 정도야.”

“새삼스럽지만 정말 파렴치한 양반들이네요.”

나는 도통 끝이 없어 뵈는 우주 침략자들의 만행에 혀를 찼다.

그러다 문득 스치는 생각에 그림 리퍼를 보았다.

“그러면 그림 리퍼도 잠깐 저승 신화에 들어올래요?”

전음 기능을 쓰려면 같은 신화에 소속되어야 하니까.

바리나 호구별성이 있다지만 혹시 모른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그도 일단 저승에 들어와 있는 편이 좋겠지.

“오, 그럼 그럴까?”

그림 리퍼가 별 반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림 리퍼……벨멎냇번룐렷놓꽥룀묀뤽뱄’가 저승에 소속되었습니다. ]

그런데 그를 저승 신화에 초대했을 때.

뜻밖에도 오류가 섞인 팝업창이 떠올라 눈을 끔뻑였다.

호구별성부터 도깨비들까지 수십 차례 저승 신화에 새로운 인물을 초대해 왔지만, 오류가 섞인 창이 뜬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음?”

내 반응을 이상하게 여긴 그림 리퍼가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킹?”

“아…… 아니, 그게요.”

나는 그의 물음에 잠깐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림 리퍼, 혹시 제가 상태창을 잠깐 살펴봐도 될까요?”

내게는 저승의 최고신으로서 저승에 소속된 자들의 상태창을 열어 볼 권한이 있었다.

상태창을 열어 보면 방금 떠오른 오류가 일시적인 것인지 영구적인 것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우리 킹이라면 얼마든지.”

그림 리퍼는 내 요청을 흔쾌히 허락했다.

“외국인 직원을 채용하려면 신상을 면밀히 살펴봐야 하는 법이지. 불법체류자일 수도 있잖아.”

장난스러운 대답에 나도 가볍게 웃으며 그의 상태창을 켰다.

[ 그림 리퍼……벨멎냇번룐렷놓꽥룀묀렐벼 (저승사자) ]

(!) 현재 베깰냇번뤄흐흐흐 신격이 베꼬됐그딸뢍뤼꽹럇결흐흐 상태입니다.

* 권능 – 사후세계, 죽음, (!)벨놋냇밥띤흐흐흐, (!)벨넹냘흐

* 스킬 – [L]대낫 소환(lv.1), [L]법멉겨긍됩흐흐흐 죽음(lv.1)

* 체력 100/100

* 근력 100/100

* 마력 100/100

* ······

그런데 그의 상태창을 열었을 때 나는 한층 더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그림 리퍼.”

나는 상태창을 닫으며 다시 그에게 물었다.

“상태창은 처음부터 이랬어요?”

한눈에 봐도 비정상적인 상태창.

모르는 척 넘어갈 수는 없었다.

임시라고는 해도 그를 저승에 받아들인 참이며, 무엇보다 그동안 쌓인 정만큼 그가 걱정되었으니.

“아아, 그거?”

그림 리퍼가 여상하게 턱을 매만졌다.

“조선에서 눈을 뜬 후로 그렇게 됐더군.”

아무렇지 않은 말투에 얼굴은 여전히 쾌활한 웃음을 머금은 채였다.

“뭐, 한 번 눈을 감았었으니까. 애초에 정상적인 상태가 아닐 거야.”

그러나 평온한 태도로 입에 담는 말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

나는 그런 그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라졌다 돌아온 것이 이유라기엔, 마찬가지로 인간에 의해 깨어났다고 추정되는 호구별성의 상태창은 아주 멀쩡했으니까.

어쩌면 그림 리퍼 또한 애써 불안을 억누르는 것일지도 모르지.

애꿎은 내가 들쑤셨다가 괜히 그의 마음만 어지러워질까 싶어 결국 입을 다물었다.

“너무 마음 쓰지 마, 킹.”

그림 리퍼는 밝게 웃음 지었다.

“무릇 죽음이란 평생의 시간이 맺은 알곡을 낫으로 베어 추수하는 것과 같지. 되살아난 것이야말로 이치를 거스르는 것 아니겠어?”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장난스럽게 헝클어뜨리면서.

“기껏 수확한 밀을 더 기르겠다고 땅속에 묻는 것과 뭐가 다르냔 말이지.”

그 말을 들으며 천천히 깨달았다.

그는 북유럽에서 종말을 맞았을 때부터 이미 죽음을 초연히 받아들였음을.

오히려 낯선 땅에서 되살아난 지금을 유난히 여기고 있음을.

“그런다고 이미 베어낸 밀이 더 자라진 않아. 그저 썩게 될 뿐.”

그래, 그가 사신으로서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지 않음을.

***

두 팀으로 나뉜 우리는 각각 던전으로 향했다.

태초의 바다라는 이름과 달리 던전은 현대의 도시와 같은 모양새였다.

단군과 바리는 던전의 인과를 살피며 간단한 지도를 그렸는데, 주거단지와 공원, 쇼핑 시설 등이 있어 꼭 대도시 같은 인상이었다.

어떻게 보면 저승 던전과도 구성이 비슷했다.

공무원들의 디자인도 재탕하는 게으른 우주강도단인데, 던전 디자인이라고 재탕을 안 할까?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래도 바다는 바다라는 건지 항구와 해변이 있다는 점이었다.

부산이나 인천, 울산 같은 도시가 연상되는 배경이랄까.

따지고 보면 바탕이 된 신화는 서역의 유해교반이건만 무대는 또 한반도의 항구 도시라니.

“많은 던전이 있습니다만, 개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유해교반 신화를 바탕으로 한 던전이었습니다.”

길 안내를 맡은 단군이 천천히 설명했다.

선한 신 데바와 악한 신 아수라의 싸움으로 시작되는 우유의 바다 휘젓기.

그것은 선신과 악신이 바다를 휘저으면서 세상에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이 함께 태어났다는 신화였다.

이를테면 행운의 신 락슈미와 불행의 신 알락슈미 자매가 함께 태어났다거나, 풍요를 상징하는 신성한 암소 카마데누와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는 치명적인 독 하리하리가 함께 나왔다거나 하는 식이다.

“한데 원본 신화와 달리 순서가 뒤바뀌었더군요.”

“순서가 뒤바뀌어요?”

“본래라면 우유의 바다를 휘젓고 나와야 할 결과물들이 인과를 뒤짚고 던전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얼음 산호 던전에서 얻었던 암리타가 떠오르며 자연스레 그의 말을 이해했다.

암리타야말로 유해교반 신화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불사의 영약인데, 그것이 태초의 바다 퀘스트가 시작되기도 전 엉뚱한 던전에서 등장했으니까.

……물론 미완성 암리타라고 적혀 있긴 했다만.

“저기 보이는군요. 거의 다 왔습니다.”

단군이 앞을 가리켰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대왕님.”

옆에서 걷던 강림 형이 물었다.

짙푸른 눈이 내 몸을 진중히 훑어 왔다.

나는 얼른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이제 정말 괜찮아요. 도령님이 아까 상처에 꽃을 덧대어 주셨잖아요.”

사라는 앞서 출발하기 전에 공들여 피운 감정꽃으로 내 상처를 마저 돌봐주었다.

덕분에 고통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그는 약으로 달여서 먹은 것이 아니니 아직 주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형이 걱정을 멈추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전투는 저와 저자로 충분합니다. 대왕님께서는 부디 몸을 보중하시는 것에만 신경 쓰시지요.”

형이 단군을 흘끗 곁눈질하며 말했다.

여전히 탐탁지 않은 시선이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단군처럼 실력 있는 도사가 합류한 게 정말로 못마땅한 건 아닐 터였다.

“이곳입니다.”

마침내 단군이 걸음을 멈추었다.

“어…… 여기는.”

나는 그가 안내한 방향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여기는 뭔가 온실 같은데…… 맞나요?”

도착한 곳은 한옥 형태로 다듬어진 아주 큰 유리 온실이었다.

투명하지만 투명하지 않은 유리벽 너머로부터 환한 빛이 새어 나와서 마치 보석이 빛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만 무언가 기이한 작용을 하는지 유리로 된 벽임에도 내부는 흐릿하기만 할 뿐 잘 보이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 칼파브릭샤를 토대로 만들어진 온실 던전입니다.”

단군이 가볍게 설명했다.

“예상되는 난이도는 영웅담. 최종 클리어 조건은 보스 몬스터와의 전투일 테지만, 그에 앞서 약간의 미션 수행이 필요합니다.”

미션이라면 뭘 말하는 걸까 싶어 이어질 설명을 기다리자, 그가 그 이상은 잘 모르겠다는 듯 멋쩍게 웃었다.

“온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꽃을 기르는 방향으로 추측되는군요.”

그런데 그러한 대답이 나온 순간.

방금 전까지 내 안위를 걱정하던 강림 형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의외의 광경을 목격한 나는 잠깐 멈칫했다.

……잘못 봤을 리는 없고.

아무래도 형은 그새 지옥수를 넘어 모든 꽃나무를 사랑하는 수준에 이른 것 같았다.

식물 테라피가 그 정도로 효과적이었나?

“대왕님, 앞장서겠습니다.”

뭐…… 그래, 형이 행복하면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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