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장. 태초의 바다(1)
붉은 옷자락이 보였다.
쏟아지는 피를 연상케 할 만큼 붉디붉었으며,
그 위로 수 놓인 금빛 자수는 별을 뿌린 것처럼 화려했다.
처음 보는 옷임에도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자세히 살피려 할 때였다.
“아…….”
시야에 들어오는 짙푸른 눈동자에 움직임이 덜컥 멈추었다.
그 눈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음에도.
정신이 몽롱하니 상황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내 목을 조르던 검은 팔.
내 혼을 헤집던 검은 팔은 기억이 나는데.
“정신이 드십니까.”
익숙한 눈동자에 이어 귓가에 닿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제야 어두운 방에 불이 켜지듯 의식이 빠르게 선명해졌다.
그래, 남해 용왕…… 강철이…… 아니, 정체불명의 그것이 내 인벤토리에서 억지로 보물을 꺼내서─
거기까지 떠올리자마자 벌떡 몸을 일으켰다.
“태초의 바다는…… 윽!”
그러나 직후 몸 안쪽이 잡아 뜯기는 듯한 통증에 절로 입이 다물렸다.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대답 대신 큰 손이 어깨와 등을 감싸왔다.
“육체의 상처와 달리 회복이 더딥니다.”
몸에 닿는 서늘한 손길에 한발 늦게 내가 형의 품에 쓰러져 있음을 알았다.
대체 언제부터 정신을 잃었던 걸까.
조각조각 떠오르는 기억들을 되짚는 사이, 형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놈이 혼을 건드리는 바람에 감정꽃으로 덧대어 놓은 상처가 터졌습니다.”
언뜻 사실만을 전하는 건조한 목소리였다.
업경은 여전히 그의 감정을 읽지 못했다.
다만 나는 그 음성에서 분노와 불안을 느꼈다.
“그때처럼 독이 퍼지기 전에 노괴가 손은 썼습니다만…….”
설명을 잇던 형이 답지 않게 말을 흐렸다.
몸을 붙든 손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 불편했으나 담담함을 가장한 형의 눈을 보자니 차마 뿌리칠 수도 없었다.
“그럼 혹시 저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고 계셨던 거예요?”
민망한 마음에 괜히 두 손을 모아 잡으며 나를 둘러싼 이들을 돌아보았다.
자개 의자에 앉은 호구별성이 뚱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고, 그녀의 옆에 호위처럼 선 그림 리퍼는 평소와 그리 다르지 않은 얼굴로 눈썹을 으쓱거렸다.
사라는 다소 낯선 꽃을 두 손에 한가득 피우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개화하던 서천의 꽃과 달리 만개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아마 단군이 따로 꽃씨를 주었다던 감정꽃을 꽃감관의 권능으로 피워 내는 것이리라.
……내가 또 부주의하고 유약하게 군 탓에.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정신을 잃은 틈에 적들이 먼저 움직였을 것을 생각하니 스스로가 답답해서 견딜 수 없었다.
“제가 대체 얼마나 시간을…….”
“괜찮아. 부담 갖지 않아도 돼, 킹.”
그림 리퍼가 내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더 이상 북해의 문지기 노릇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인지 동방의 갑옷에서 검은 로브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킹이 깨어나기를 기다릴 겸, 우리 인간 친구들이 최적의 루트를 찾고 있었으니까.”
“최적의 루트……?”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리와 단군이 끝말잇기를 하던 때처럼 무릎을 꿇고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아무런 대화도 않던 당시와는 다르게 끊임없이 의견을 나누면서.
“바다의 신화라는 게 결국 던전 공략이더라고.”
이번에는 호구별성이 말했다.
“그때 왜, 가짜 저승 갔을 때 있잖아. 그때처럼 태초의 바다라는 커다란 던전 안에 작은 던전들이 있는 거지.”
팔짱을 낀 그녀가 여상한 어투로 설명했다.
“그 작은 던전들에서 힘을 모은 다음 최종적으로 겨루는 것 같아.”
“작은 던전들을 누가 먼저 공략하는지가 중요하다는 말이잖아요.”
호구별성은 별다를 것 없다는 태도로 말했으나 나는 오히려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불안해졌다.
“그렇다면 역시 제가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에 남해가 벌써…….”
“아니, 아니, 킹. 부담 갖지 말라니까.”
그림 리퍼가 다시 끼어들었다.
“작은 던전은 총 108개인데 그중에 중요한 던전은 몇 개 없다더라고.”
“108개……?”
예상을 뛰어넘는 숫자에 눈을 크게 떴다.
저승 던전이 시왕지옥을 본뜬 5개의 지옥 던전으로 이루어졌던 것을 생각하면 자릿수부터가 다르지 않은가.
“게다가 던전 108개를 공략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메인 퀘스트는 따로 있어. ‘우유의 바다 휘젓기’ 말이야.”
“아…….”
이어지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유의 바다 휘젓기…… 유해교반(乳海攪拌)은 원래 데바와 아수라의 싸움이었죠.”
힌두교의 창세신화 유해교반의 내용은 이렇다.
선한 신 데바와 악한 신 아수라.
그들은 세상이 처음 열렸던 때부터 끊임없이 서로를 멸망시키기 위한 싸움을 지속해 왔다.
한데 어느 날 데바의 왕 인드라가 저주를 받아 모든 힘을 잃게 되었고, 그 틈을 타고 쳐들어온 아수라가 데바를 몰살하기 직전에 이르렀다.
이에 데바는 주신 중 하나인 비슈누에게 도움을 청했다.
비슈누는 온 세상을 감싼 우유의 바다를 휘저어 불사의 약 암리타를 손에 넣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우유의 바다가 너무나도 광활하여 데바의 힘만으로는 결코 암리타를 얻을 수 없으니, 비슈누는 아수라를 속여 그들의 힘을 빌리라고 덧붙였다.
선한 신이라는 데바가 악한 신이라는 아수라를 속여서 시작되는 아이러니.
그것이 힌두교의 창세신화 유해교반이었다.
“누가 데바고 누가 아수라인지는 이미 정해진 것 같더라고.”
그림 리퍼에 이어 호구별성이 다시 말했다.
“그 팔 여섯 개 달린 괴상한 강철이가 아수라, 그리고 우리가 데바.”
그녀의 말에 나는 바다 무덤 던전을 떠올리며 납득했다.
데바의 왕 인드라의 힘을 쓰던 조각상.
그것을 쓰러트리면서 얻었던 귀속 아이템, 인드라의 무기 바즈라.
“우리가 데바고 그쪽이 아수라라면…….”
그리고 북해 용궁에서 내 목을 졸랐던 누군가의 검은 팔.
“그건 강철이가 아니라 아수라의 왕 브리트라였겠군요.”
브리트라는 물을 감싸는 자라는 뜻으로, 가뭄을 불러오는 자를 의미한다.
나는 그것의 이름을 되씹었다.
“브리트라는 가뭄을 불러온다는 아주 커다랗고 검은 뱀이에요.”
“응? 잠깐, 그거 뭔가 되게 익숙한데?”
호구별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백두산 천지에 나타난 흑룡이 브리트라였다고?”
스스로 말하고도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녀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 말은 즉 탁기에 젖어 용왕이 되지 못한 북방흑룡이 서역의 악신으로 변했다는 것이로구나.”
내내 조용히 있던 사라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기야 짐승이 태양도 삼키던 시절이지. 무슨 일이든지 벌어질 수 있다.”
결국 2만 년 전부터 한반도의 땅에 다른 신화의 존재가 있었다는 뜻인데, 그는 오히려 아득한 옛날이기에 가능하다 여기는 듯했다.
말을 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오직 손에 들린 꽃들에 머물러 있어서, 나는 또 괜히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상대가 아수라의 왕 브리트라라면.”
손을 주억거리며 다시금 신들에게 말했다.
“어쩌면 바다 무덤 던전에서 얻었던 바즈라가 도움이 될 수도 있겠어요.”
본디 신화에서도 브리트라는 숙적 인드라의 바즈라에 죽었으니까.
“…….”
그런데 그 사실을 떠올린 직후.
문득 줄곧 바리하고만 이야기하고 있는 단군에게로 시선이 갔다.
그가 안내했던 던전에서 버릴 수도 없는 귀속 아이템 바즈라를 얻게 되었을 때.
혹시 그것의 존재를 단군이 이미 알았던 게 아닐까 추측했던 순간이 함께 떠올랐기에.
-괜찮으시다면 북해로 가시는 길에 동행하고 싶습니다, 염라.
-바다의 신화를 얻을 수 있게 도와드린다고 말씀드렸지요. 뜻하시는 일에 폐가 되지 않게 하겠습니다.
하여 그가 바다로 내려온 목적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이거야 원, 대체 무슨 조화로 아수라가 조선의 바다에서 나왔나 싶긴 한데.”
말을 듣던 그림 리퍼가 애매한 얼굴을 했다.
“어째 내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군.”
그렇게 따지면 유럽의 사신도 엉뚱하게 한반도의 바다에 있는 셈이니까.
마냥 불평하기 뭐하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한반도의 바다에서 유해교반 퀘스트가 시작된 것도 이상하지만…….”
나는 일련의 일들을 되새기며 다시 말했다.
“남해 용왕의 심장을 이용해 브리트라를 깨워 놓고, 굳이 인드라를 소환하는 던전까지 안배해 둔 것도 이해하기 힘들죠.”
남해 용왕이 브리트라가 된 이상, 인드라를 소환하려던 바다 무덤 던전도 분명 남해와 연관이 있을 텐데.
“왜 굳이 브리트라의 숙적인 인드라까지 부르려고 했을까요.”
“뭐, 그냥 지들이 아수라랑 데바를 둘 다 하려고 했나 보지.”
내 말에 호구별성이 깊이 생각할 것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면 어느 쪽이 이기든 바다의 신화를 얻게 되는 거잖아.”
“아…….”
그렇다면 우리가 인드라의 바즈라를 얻음으로써 그들의 계획이 어그러진 걸까?
“어쨌든 이 던전의 핵심은 예정된 싸움을 대비해 양측이 108개의 던전에서 보상을 모아 힘을 축적하는 거야.”
그림 리퍼가 마저 설명을 시작했다.
“태초의 바다란 게 4개의 보물을 모아야 열리는 거잖아? 원래는 4개의 세력이 겨루는 걸 의도한 것 같더라고. 전쟁 물자를 비축하면서 동맹을 구축하겠지.”
그런 거라면 던전이 그렇게 많은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108개의 던전을 전부 돌 수 있다면 이상적이지만, 그건 힘드니 우리 인간 친구들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보겠다더군.”
최소한의 던전을 공략해서 최대의 보상을 얻는 것.
그것이 곧 바리와 단군이 찾는다는 최적의 루트인 모양이었다.
현실적으로 우리 7명이 108개의 던전을 전부 돌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킹이 쓰러지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우리 인간 친구들은 같은 일을 했을 거란 말이지.”
설명을 마친 그림 리퍼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나 때문에 시간이 지체된 것이 아니라고.
깨어난 이후 계속 안절부절못했던 게 혹시 많이 티 났을까.
나는 그의 마음이 고마워서 부러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상황을 파악하고 나자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이제는 슬슬 괜찮을 것 같아 몸을 일으키려는데, 형은 아직 내 어깨를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마 감정꽃으로 억누른 독이 또 퍼질까 우려하는 거겠지.
결국 형이 보는 앞에서 쓰러진 내 잘못이었다.
짧은 고민 끝에 나는 바리와 단군의 공략 설계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그 딱딱한 품에 늘어져 있기로 했다.
어차피 곧 다시 전투에 나서야 하니까.
그동안 형도 마음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잠시 후.
단군과 바리가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왔다.
“필요한 만큼은 보았습니다.”
단정하게 정돈된 흑발에 검고 깊은 눈이 새삼 많이 닮아 있었다.
“비교적 공략이 수월한 던전과 까다로운 던전이 있으니, 양쪽으로 나누어 움직이는 것이 효율적이겠지요.”
내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일행을 나눈다는 말에 반응한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둘은 이미 정해졌군.”
형이 바로 입을 열었다.
으음, 둘이라면 역시 나랑 형이려나.
아직도 많이 불안한가 싶어 마음이 조금 무거워질 때쯤.
“네놈들은 꼭 붙어라.”
형이 그림 리퍼와 호구별성을 노려보며 짓씹듯이 말했다.
“그거는…… 그거는 이제 네놈들이 잡아라.”
“…….”
형, 죽음의 무도를 또 시전하는 게 그렇게나 싫어?
날 위해서 호구별성과 손을 잡더니, 이제는 나랑 떨어지지 않는 것보다 호구별성과 손을 잡지 않는 게 더 중요해진 거야?
뭐, 형의 과보호를 생각하면 다행은 다행인데…….
아니, 그래도 더 급한 건 형을 억지로나마 융합 풍문에 익숙해지게끔 하는 쪽인가……?
나는 예상과 다른 형의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기분이 미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