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장. 극음의 바다(5)
북해 용궁의 5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우리는 마침내 강철이가 봉인된 마지막 층으로 향했다.
“쯧, 벌써 공기가 다르네…….”
계단을 내려가며 호구별성이 혀를 찼다.
“일단 더워. 패물 빼도 되겠는데?”
그녀가 서해 용왕비의 반지를 낀 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북해의 한기를 막기 위해 필요한 아이템이었기에, 호구별성의 말대로 계단을 내려갈수록 한기 대신 화기가 짙어지는 게 느껴졌다.
“흐음, 원래 이쯤부터 화기가 더 강해지는 것인지 아니면 남해가 봉인을 건드리면서 이리된 것인지는 알 수 없구나.”
계단 밑을 흘끗 내려다보며 사라도 한마디 했다.
“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대왕님.”
강림 형이 검푸른 눈으로 주변을 주시하며 말을 보탰다.
기척이 느껴지지 않으니 5층의 용신들이 어떤 상태일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그들은 한창 강철이의 봉인을 푸는 주술을 펼치고 있을까.
혹은 주술의 여파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일까.
어쩌면 이미 봉인을 풀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만한 주술이라면 자신들의 생명력을 바쳤을 가능성이 큽니다.”
단군이 말했다.
계단을 내려올 때부터 업경의 권능은 그가 흘리는 문자열들을 읽어내고 있었는데, 별다른 말이 없는 것을 보면 당장 인과를 해석하기는 어려운 것 같았다.
“흠, 내가 딱 한 번 이 계단까지 왔던 적이 있거든?”
그때 제일 뒤에서 따라오던 그림 리퍼가 말했다.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덥지 않았어.”
짧고 굵은 내부자의 증언이었다.
이로써 강철이의 화기가 짙어진 건 남해의 개입 이후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
“공간은 이미 완성되었어요. 체계가 정교해서 의미를 해석하기 쉽지 않아 보여요.”
이윽고 문 앞에 다다르자, 단군과 마찬가지로 문자열을 읽던 바리가 차분하게 말했다.
두 도사를 중심으로 흐르는 문자들은 짧은 사이 더욱 빽빽하게 늘어나 있었다.
“들어가죠.”
망설일 것 없이 바로 문을 열었다.
살갗에 축축하게 닿는 더운 습기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의식의 흔적인지 코끝에 짙은 향내도 번졌다.
직후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커다란 연꽃과 연잎들.
바닥은 물론 벽이며 천장까지 빼곡한 연꽃은 아름다운 형태였으나, 벌레 먹은 것처럼 구멍이 뚫린 데다가 군데군데 검은 얼룩까지 보였다.
게다가 연꽃 줄기가 무척이나 긴 탓에 위에서부터 덩굴처럼 늘어져 곳곳에서 길을 막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광경이야?”
별 해괴한 것을 본다는 듯 호구별성이 독기를 뿜었다.
“여기 뭐 밀림이야?”
습기를 잔뜩 머금은 꽃잎은 옷에 닿는 것만으로도 불쾌감을 자극했다.
사방을 뒤덮은 연꽃뿐 아니라 늘어진 줄기들마저 수풀처럼 앞을 가로막았으니, 한 걸음 나아가려면 그것들을 밟고 헤쳐야만 했다.
“연꽃에서 지옥의 기운이 느껴져요.”
손등으로 연꽃을 훑으며 말했다.
업경은 그것들에서 익숙한 어둠을 감지했는데, 문어 용신들이 품었던 어둠과는 조금 달랐다.
“그렇다고 이 꽃들이 지옥의 힘으로 피어난 것 같진 않은데…….”
“문어 용신들의 생명력입니다.”
내 의문에 답한 건 단군이었다.
“흑암지옥의 힘으로 문어 용신들의 생명력을 증폭시킨 뒤 이 주술의 제물로 사용했을 테지요.”
“엄청 기분 나쁜 것들이란 말이네.”
호구별성이 암녹색 신성으로 연꽃들을 쳐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저 귀찮다는 듯 연꽃 덩굴 사이를 뚫고 가는 그녀를 따르며 나는 기분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3층에서 봤던 우주퇴적물들이 떠올라서였다.
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고 그리도 많은 혼을 희생시키며 인과를 뒤틀려는 것일까.
“화기의 근원은 저 안쪽이에요.”
바리가 앞을 가리켰다.
“연꽃의 인과가 소용돌이처럼 빨려 들어가고 있어요.”
“아직 강철이가 눈을 뜨지 않았다는 뜻이군.”
강림 형이 신성을 끌어올리며 내 앞에 섰다.
“앞장서겠습니다, 대왕님.”
앞서 걷는 그를 따라 모두가 천천히 나아갔다.
연꽃에 시야가 가려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5층이 다른 층보다 더 넓어서인지는 몰라도 꽤 오랜 시간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어느덧 형의 걸음이 멎었을 때.
그의 어깨 너머, 금줄로 봉인된 강철이의 머리가 드러났다.
두 용왕이 강철이의 목을 베었으나, 재와 불티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진 몸과는 다르게 계속 살아 움직여서 천신의 금줄로 묶어 두었다던 거대한 머리였다.
“어우, 이게 머리냐, 동굴이냐.”
호구별성이 삐딱하게 선 채 머리를 올려다봤다.
잘라낸 강철이의 머리는 서해 용왕 본신의 머리만큼 컸다.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라지만, 기실 크기만으로도 이무기 터에서 봤던 이무기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과연 천지를 불태우고 태양을 삼켜 재앙을 일으킬 만했다.
“야, 그래서 이걸 이제 어떡하냐?”
이무기의 머리를 살피던 호구별성이 팔짱 끼며 고개를 돌려 왔다.
“딱히 움직이지도 않고. 아직 봉인은 안 풀린 거잖아?”
강철이 앞에 당도했지만 정작 남해의 용왕과 용신들은 보이지 않으니, 말마따나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치가 않았다.
“연꽃의 인과는 지금도 한 점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남해 용왕의 심장일 테지요.”
“연꽃을 없애면 주술의 완성은 멈출 수 있겠어요.”
단군과 바리가 잇달아 말했다.
“그럼 우선 이 연꽃들을 다 없애면 되는 건가?”
그림 리퍼가 검은 신성을 모래알처럼 흩뿌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꽃을 없애는 것 정도는 간단하지만, 되레 간단해서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다소 찝찝한 표정이었다.
“심장…….”
나는 업경의 권능으로 머리가 품은 용왕의 심장을 주시했다.
두근.
심장의 울림이 나의 가장 예민한 여섯 번째 감각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두근.
두근두근.
그 지나치게 선명한 울림에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니야, 강철이는 이미 깨어났어요……!”
다급히 외쳤다.
“저 연꽃은 강철이를 깨우려는 게 아니라……!”
그 순간.
파아아앙!
눈을 찌를 정도로 강렬한 붉은빛이 산개했다.
불로 이뤄진 폭풍에 휩싸인 듯 막대한 화기가 불어 닥쳤다.
그 빛과 열에 살갗 따윈 금방 타들어 갈 만도 했으나, 그 괴이한 화기는 지옥불에 던져진 것처럼 고통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큭……!”
환상통과도 같은 열기에 작게 신음할 때였다.
“크크크, 다시 만나는구나. 어린 왕이여.”
한없이 낮고 두꺼운 목소리가 음산하게 귓가를 스쳤다.
화아아악!
그러나 상대에게 미처 집중하기도 전, 삽시간에 화기가 온몸을 덮치면서 무언가가 내 목을 쥐어뜯을 듯 힘껏 잡아챘다.
“커헉……!”
상대를 인식했을 때는 이미 속수무책으로 그 손아귀에 몸이 끌려 올라가고 있었다.
“대왕님!”
강림 형에게서 검푸른 신성이 쏟아지듯 터져 나왔지만, 그는 무시무시한 얼굴로 주먹을 부들거릴 뿐 차마 공격하지 못했다.
내가 붙잡혀 있는 탓이었다.
“너무 그러지 마라. 당장은 이 몸에 볼일이 없으니까.”
웃음기 섞인 목소리.
분명 이전에 들은 남해 용왕의 목소리였으나, 내 목을 틀어쥔 그것은 난생처음 보는 존재였다.
용처럼 황금색으로 빛나는 눈에 먹물을 뿌린 듯 검은 피부.
인간 남성의 모습을 닮았지만 어째서인지 팔이 여섯이나 되었고, 하반신에는 다리 대신 검은 비늘로 뒤덮인 뱀의 꼬리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무, 슨…….”
알 수 없는 존재를 향해 업경의 권능을 집중했다.
느껴지는 것은 앞서 감지한 막대한 화기와 남해 용왕의 신성.
또한 용왕의 신성에 섞인…… 몹시 이질적인 신성이었다.
이질적인 신성.
나는 그것이 봉인되었던 강철이의 것임을 알았다.
그래, 분명 강철이의 것일 텐데…….
이상했다.
너무나도.
용왕의 저 낯선 모습처럼.
한반도의 것이 아닌 저 기이한 외형처럼.
어쩌면 강철이는, 가뭄을 불러오는 한반도의 요괴 강철이가 아니라…….
“두 용의 비늘을 품었을 테지?”
목을 쥔 손에 힘을 더하며 그것이 내게 물었다.
“윽…… 크읏…….”
고통 탓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지만, 그것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양 다른 한 손을 내 가슴 앞에 올렸다.
“영혼을 가르면 꺼내 올 수 있지.”
여섯 개의 검은 팔에서 일제히 기묘한 문자열이 흩뿌려졌다.
영혼을 가르는 주술이란 아마 혼에 연결된 인벤토리를 뒤지는 것일 터.
“으윽…….”
속이 헤집어지는 감각에 몸을 뒤틀었다.
파지직!
파직!
그것의 팔과 나의 몸에서 크고 작은 스파크가 일었다.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꺼내는 것이니 버그가 발생한 것이다.
“자아.”
이윽고 내 혼에서 두 용왕의 비늘, 태초의 바다를 여는 보물을 꺼낸 그것이 말했다.
“누가 바다의 지배자인지 한번 겨뤄 보자꾸나.”
버그의 여파인가.
아니면 한참이나 목을 붙잡혀 있었기 때문인가.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는 와중 팝업창이 보였다.
[ (!) 벨닒땟흐왕의 보물이 태초의 바다를 베뭘때뱌력뢍딨독딩귐뤠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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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벨닒땟흐왕의 보물이 태초의 바다를 베뭘때뱌력뢍딨독딩귐뤠벅 ]
연달아 떠오르는 오류 섞인 팝업창.
[ (!) समुद्र मन्थन ]
[ (!) समुद्र मन्थन ]
[ (!) समुद्र मन्थन ]
한반도 밖의 언어.
[ (!) 유해교반(乳海攪拌)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
그리고…… 한반도 밖의 신화를 알리는 팝업창이었다.
***
북극점.
우주질서보존회 지구 본부.
지구청장 조옥희는 턱을 매만지며 화면을 주시했다.
화면 속에서는 선글라스를 쓴 거구의 사내들이 저마다 팔을 벌리고 펄쩍펄쩍 사방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한반도의 바다를 관리하는 행정공무원 144팀이었다.
-유해교반?!?!? 저게 왜 튀어나와??!
-한반도 신화가 아니잖아!
-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거야?! 빨리 찾아봐!
패닉에 빠진 공무원들 틈에서 하얀 서류뭉치가 낙엽처럼 나뒹굴었다.
누군가는 의미 없이 책상 사이를 뛰어다니고, 누군가는 엎어진 서류를 보고 재차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몇몇이 선글라스를 들어 올리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이거 누가 아예 신화를 바꿔버린 것 같은데?
-그렇네! 시스템에 개입해서 다른 태초의 바다가 열리도록 만들었어!
본래 사해 용왕의 비늘이 모두 모이면 한반도의 창세신 마고할미가 열었던 태초의 바다를 불러오게끔 되어 있었다.
한반도 각지의 해양 전설들이 던전과 몬스터로서 실체화되었을 것이며,
그리하여 도전자들은 한반도의 바다를 지배할 자격이 있는지 시험받았어야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사해 용왕의 보물이 불러온 태초의 바다는 우유의 바다.
누군가 한반도의 창세신화 대신 힌두교의 창세신화 유해교반을 한반도의 태초의 바다로 바꿔치기하고 만 것이다.
-미친! 이 정도 규모의 버그라니!
-말도 안 돼. 지구 수준에서 이게 가능해?
-설마. 이 정도면 어떤 도사라도 불가능해. 저 단군조차 이런 건 못 한다고!
-그럼 이건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중계되는 공무원들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지구청장 조옥희는 책상에 손을 내려놓았다.
“확실히 이 시점에서는 지구상의 어떤 개체도 저 정도의 인과 왜곡은 불가능하지.”
톡톡.
그녀가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말했다.
“어차피 우주의 시공간은 하나지만.”
44장. 극음의 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