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장. 극음의 바다(4)
“그림 리퍼?”
뜻밖의 등장에 모두의 시선이 금발의 사신 쪽으로 모였다.
“아니, 양놈 사신이 어쩌다 이 밑바닥까지 왔대?”
눈을 동그랗게 뜬 호구별성이 물었다.
이곳은 신들조차도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는 네 번째 바다, 북해.
우리야 고등어 왕자를 데려다줄 겸 바다에 왔다가 여러 사정이 겹쳐 여기까지 왔다지만, 한반도에서 아직도 상평통보를 쓰는 줄 알던 서방의 사신이 네 번째 바다를 찾은 것은 꽤나 놀라운 일이었다.
“으음. 딱히 거창한 일이 있던 것은 아닙니다만, Honey.”
호구별성의 물음에 그림 리퍼가 눈웃음을 지었다.
다정한 호칭을 보아 역신에 대한 호감은 여전한 것 같았다.
“그냥 숙식 제공되는 일자리를 찾다 보니 또 던전을 지키는 일을 하게 되었지요.”
그럼 전에 불가살이 던전에서 보스몹 고승 역할을 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북해 용궁 던전에서 문지기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건가?
불가살이 던전에서도 진짜 고승처럼 삿갓에 승복을 갖춰 입더니.
여기서는 해마를 탄 장수에 어울리는 투구와 갑옷 차림이었다.
던전을 지킬 때마다 역할에 맞게 코스프레를 하는 것을 보면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는 가짜 몸의 기능을 꽤나 유용하게 쓰고 있는 모양이다.
“바다에 온 지는 얼마나 되었지?”
강림 형이 불쑥 물었다.
그림 리퍼가 턱을 매만지며 시간을 가늠했다.
“흠, 부러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너희랑 헤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서 새 고용주를 찾았지.”
그 대답에 새삼 그림 리퍼와 헤어지던 때가 떠올랐다.
막대한 우주퇴적물이 숨겨져 있던 불가살이 던전.
그림 리퍼는 자기한테 그런 곳을 지키라고 의뢰했던 이들의 정체가 궁금하다고 했었는데…… 돌이켜 생각하면 그들은 흑탑의 도사였을 테지.
“꽤 오래되었다는 뜻이군.”
대답을 들은 형이 미간을 좁혔다.
어째서인지 무척이나 불쾌해 보이는 얼굴인지라, 나는 영문을 알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림 리퍼의 말에…… 뭐 거슬릴 만한 게 있었던가?
“전부터 바다에 있었다면, 좀 더 일찍 마주칠 수도 있었거늘.”
내 의문과 상관없이 형의 말이 이어졌다.
“좀 더…… 좀 더 일찍 마주쳤다면, 내가…… 그런 꼴을 겪지 않았을 수도…….”
“아…….”
그제야 형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닫고 작게 탄식했다.
그러니까 형은, 우리가 그림 리퍼를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형과 호구별성이 융합 풍문을 쓰지 않아도 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림 리퍼가 계속 바다에 있었다 한들, 북해 용궁을 지키던 그가 굳이 바다 무덤 던전까지 올 일은 없었겠지만…… 역신에 대한 증오 앞에 그런 이성적인 판단은 무의미했다.
“으응?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었어?”
형의 심상치 않은 반응에 그림 리퍼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얼마 전에 여기 두 분이서 죽음의 무도를 시전할 일이 있었거든요.”
나는 일단 간략하게만 설명했다.
“염병, 이 시꺼먼 놈은 재수 떨어지게 그건 또 왜 들먹여?”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호구별성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잊으려 했는데 형이 먼저 말을 꺼낸 게 못마땅하다는 태도였다.
“죽음의 무도?”
그런가 하면 그림 리퍼는 두 차사가 융합 풍문을 펼쳤다는 소식에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웠다.
“오, 그녀와 손을 잡았어, 강림?”
그러고는 몹시 흥미로운 낯으로 콧김을 뿜으며 형에게 물었다.
“어땠어? 끝내줬어?”
“뭐, 뭐라고…….”
그림 리퍼의 짓궂은 물음에 형이 별 해괴한 소리를 듣는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그러든 말든 그림 리퍼는 두 손으로 뺨을 감싸며 형을 재촉했다.
“Hey, Hey! Come on! 나 이런 얘기 좋아해. 역시 말도 못 할 정도로 좋았던 거야?”
“…….”
아니…… 그…… 유럽 한량이 우리 조선 꼰대를 놀리고 싶은 마음은 알겠다만.
어떡하지.
나는 두 선남선녀가 손을 잡았다는 소리에 지나친 흥미를 보이는 그림 리퍼의 표정과,
천하의 몹쓸 파렴치한을 본 양 꿈틀거리는 강림 형의 눈썹과,
커다란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서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이는 사라를 보며…… 난감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형은 어느새 핏줄이 돋을 만큼 힘껏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사신의 모습에 황급히 형의 팔뚝을 끌어당기며 그를 진정시켰다.
“형, 그만, 진정해요. 저승에 돌아가면 발설이랑 놀 수 있게 휴가 사흘 드릴 테니까요.”
발설이 얘기가 나오자 당장이라도 그림 리퍼에게 달려들 것 같던 형이 비로소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뿐, 형은 서슬 퍼런 눈으로 애꿎은 나를 찍어 눌렀다.
“부족합니다.”
“으음…….”
사흘치 휴가 앞에서도 굳건할 줄은 몰라서 잠시 멈칫한 사이, 폭탄의 심지에 불이 붙듯 형의 주먹에 검푸른 신성마저 모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다시 황급히 그의 팔뚝을 잡아끌었다.
“아, 알았어요. 형이 화를 잘 참으면 일주일 내내 발설이랑 놀기만 해도 아무 말 안 할게요.”
“후우…….”
내가 확언하자 그제야 형이 심마에서 빠져나온 사람처럼 길게 심호흡했다.
“응? 발설이는 또 누구야?”
그러나 일주일의 발설이 테라피를 약속하는 것으로 간신히 사신의 분노를 잠재우자마자, 여전히 꽃 같은 얼굴을 손으로 받친 그림 리퍼가 도드라진 속눈썹을 팔랑이며 눈을 깜빡이더니.
“발설이도 예뻐?”
그런 말을 하고 말았다.
나는 결국 사신을 죽이려 드는 또 다른 사신의 두꺼운 팔뚝에 한동안 고목나무의 매미처럼 대롱대롱 매달려야 했다.
***
잠시간의 소란이 지난 후.
“그러니까, 불가살이 던전을 의뢰했던 인간들은 다시 찾지 못했다고요?”
자초지종을 들은 나는 그림 리퍼에게 물었다.
“그래, 중개해준 정보 길드를 찾아갔지만 이미 비어 있었지.”
그림 리퍼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반년 넘게 던전에 박혀 있었으니까.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하긴 반년이면 작은 길드 정도는 충분히 사라질 수도 있는 시간이죠.”
다만 그림 리퍼에게 의뢰한 것은 흑탑이었을 테니, 그에게 흑탑의 도사들을 중개한 정보 길드의 폐업에 어떤 뒷사정이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지금은 그 흑탑조차 사라져버려서 진실은 아마 영영 알 수 없겠지.
“그럼 여기 오신 건 정말 우연인 거네요?”
나는 흑탑을 더 쫓지 못했다는 그림 리퍼의 말을 곱씹었다.
“맞아, 그냥 새 조건에 맞는 의뢰를 받았을 뿐이야.”
그림 리퍼가 손에 든 투구를 톡톡 건드리며 대답했다.
“숙식을 제공하면서…… 유럽으로 돌아갈 발판이 될 수 있는 일을.”
“유럽으로 돌아갈 발판?”
“육지와 하늘은 길이 막혔지만 바다를 통하면 다른 대륙으로 이동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거든.”
이어지는 설명에 불현듯 떠올랐다.
-그런데 북유럽은 어떻게 넘어갑니까?
-때가 되면 자연히 아실 것입니다.
내게 함께 북유럽에 갈 것을 권유하던 단군의 목소리.
-혹시 조금 늦게 돌아오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꽤 멀리 다녀올 수도 있다고…… 할미가 말씀하시네요.
저승을 뒤로하며 마고할미의 말을 전하던 바리의 목소리.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유럽에 간다면, 지금 눈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그림 리퍼가 아니라 종말 신화를 맞이했던 과거의 그림 리퍼를 만나게 되리란 것까지.
“그래서 용신들의 의뢰를 받았군요. 바다를 통해 유럽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다만 그것을 입에 담지는 않고, 나는 계속해서 그림 리퍼와 말을 나누었다.
“그렇지. 처음부터 물고기 친구들인 줄 알았던 건 아니었지만.”
말을 잇던 그림 리퍼가 과장된 몸짓으로 팔을 크게 벌렸다.
“그냥 옷을 덥게 입은 친구들인 줄 알았는데, Fucking, 소매에서 촉수가 나오는 거야. 정말 얼마나 놀랐던지.”
남해가 던전에 손을 댄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 새삼스러울 것 없었다.
“그림 리퍼.”
다만 그에게 의뢰를 한 게 문어 용신들이라는 확증을 받자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무래도 우리가 당신의 의뢰인들과 싸움이 붙은 것 같은데요.”
“흐음?”
딱히 놀랍지 않은지 그림 리퍼가 어깨를 으쓱했다.
북해 용궁의 문지기 노릇을 하고 있던 와중이다.
1층에서부터 다른 문지기들을 격파하고 내려온 우리는 당연히 그와 반대되는 목적을 가졌을 거라 짐작했을 터였다.
“우리를 5층으로 보내주실 생각은 있으신가요?”
“그러니까 우리 킹께서는, 지금 나더러 의뢰인을 배신하라는 뜻인가?”
“어떻게든 돌려서 말하려고 했지만…… 네, 그렇네요.”
나는 조금 긴장하며 그림 리퍼를 올려다봤다.
그는 여전히 쾌활하게 웃음 짓고 있었으나, 그가 품은 죽음의 신성은 어느새 그 농도가 조금 짙어져 있었다.
다만 나를 위협할 목적이 아님은 느낄 수 있었다.
호구별성이 감정에 따라 독기를 뿜듯이, 그도 생각이 깊어질 때마다 검은 모래처럼 신성을 흩뿌리는 모양이었다.
“일단 나는 모르는 문어들보다야 당연히 안면이 있는 너희가 좋아.”
잠깐의 침묵 끝에 그림 리퍼가 말했다.
“우리 고아하신 레이디는 물론이고, 여기 강림과도 벌써 200년 넘게 우정을 나누고 있는걸.”
그의 말에 강림 형은 그 우정 방금 전에 다 깨졌다는 양 형형한 눈을 했지만, 나와 그의 대화를 방해하지는 않겠다는 듯 팔짱만 꼈다.
“그래, 우리 어린 킹도 꽤 마음에 들고 말이지.”
빙긋 웃은 그림 리퍼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마냥 정 때문에 편을 들어줄 수는 없어.”
“유럽으로 돌아갈 방법 때문이죠?”
나는 그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하며 다시 물었다.
“그럼 혹시…… 우리에게 유럽으로 돌아갈 방법이 있다면 괜찮으실까요?”
“음? 킹은 유럽에 갈 방법을 아는 거야?”
“그게…… 확실하지는 않지만요.”
말을 하면서 나는 흘끗 단군과 바리를 곁눈질했다.
나란히 선 두 도사는 그저 똑같이 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내 말을 거들지는 않았지만, 딱히 부정하지도 않는 모습에 나는 다시금 그림 리퍼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우리도 머지않아 유럽에 가게 될지도 모르거든요.”
“흐음.”
내 답이 썩 명쾌하지는 않은지 그림 리퍼는 미간을 찌푸렸으나.
“뭐, 문어들도 미심쩍기는 마찬가지였지.”
끝내 우리를 보내주기로 마음먹고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 밑에는 무슨 일로 가려고?”
그러더니 바로 다른 질문을 해 왔다.
“가는 것을 막지는 않겠다만, 그것과 별개로 걱정이 좀 되는데.”
“밑에 무엇이 있는지 아시나 보네요?”
“그래, 용왕의 시체로 수상한 의식을 하고 있을 테니까.”
그림 리퍼가 조금 껄끄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단어에 눈을 크게 떴다.
“용왕의…… 시체요?”
“응. 문어들이 관짝에 용왕을 싣고 내려갔거든. 뭔가 특별한 방법으로 살릴 거라던데?”
그림 리퍼의 말에 모두가 같은 추측을 한 듯 시선이 모였다.
동서 용왕의 심장을 빼앗는 데 실패한 남해 용왕이 자신의 심장으로 재앙신 강철이를 깨우려 하고 있었다.
그림 리퍼는 용왕을 죽었다고 말했지만, 용은 북해에 오면 심장이 얼어붙기 때문에 죽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겠지.
심장이 얼어붙은 용왕을 여기까지 데려온 다른 용신들은 잠든 남해 용왕 대신 강철이의 부활을 마저 진행하려는 것이고.
“결국 봉인된 재앙신이 벌떡 일어날 각이라는 거구만.”
상황을 파악한 호구별성이 쯧쯧 혀를 찼다.
“조심해야겠군요. 이대로 강철이가 깨어나는 데 실패한다 해도, 그만한 주술은 끼어드는 것만으로 큰 반동이 있습니다.”
“더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없군.”
단군은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받았고, 강림 형이 덤덤하게 말을 보탰다.
“이런, 결국 가려고?”
일행들의 말에 그림 리퍼가 우리를 돌아보았다.
“네, 용왕이 되살아나기 전에 손을 써야 해요.”
“흐음, 그렇단 말이지.”
그런데 그림 리퍼가 돌연 눈을 가늘게 휘며 웃었다.
“그럼 나도 따라가 볼까?”
“네?”
“어차피 너희를 보내주는 이상 의뢰는 망했고, 그러면 너희가 무사히 돌아와야 유럽으로 돌아갈 가능성이라도 남을 거 아니야?”
말은 그렇게 하지만, 업경의 권능은 그에게서 우리에 대한 걱정을 읽어 내었다.
나는 그런 그의 감정이 새삼 고마워서 그와 마주 웃어 보였다.
“네, 그러면 같이 내려가요.”
이로써 우리는 강철이의 봉인에 맞서기 전에 또 하나의 신화적 존재를 임시 전력으로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