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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54화 (154/187)

44장. 극음의 바다(3)

-멍멍멍!

MVP로 등극한 공을 치하하며 멍군의 엉덩이를 열심히 토닥여줄 때였다.

“다행히 당신을 잘 따르고 있었군요.”

단군이 부드럽게 휘어진 눈으로 나와 멍군을 살피며 말했다.

-멍멍! 멍!

옛 주인을 만나서 반가운지 멍군도 곧장 단군을 돌아보며 붕붕 꼬리를 흔들었다.

“오, 뭐야. 너 얘 알아?”

팔짱을 낀 호구별성이 흥미를 보였다.

“아…….”

그 말에 멍군을 누구한테 받았는지 말하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사라에게 팔을 치료받았을 때 그에게만 말했을 뿐, 다른 두 차사에게는 딱히 언급한 적이 없었다.

“멍군은 원래 단군이 키우던 신수였어요.”

어쩌다 보니 꽤 오랫동안 숨긴 꼴이 되어 조금 멋쩍어진 내가 대신 답했다.

“아, 그랬어?”

호구별성은 별생각 없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사실 호구별성보다도 그 뒤에 선 강림 형의 반응이 신경 쓰여서 그를 힐끔 곁눈질하며 말을 이었다.

“전에 둘만 만난 적 있었잖아요. 그때요.”

“출신도 의심스러운 녀석이었군.”

안 그래도 멍군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형은 기다렸다는 듯이 한소리 했다.

-멍멍멍!

그러든 말든, 멍군은 형이 저에 대해 말하는 게 좋은지 형을 향해 입을 헤 벌렸다.

그런 와중에도 내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멍군을 쓰다듬으며 나는 슬쩍 단군에게 시선을 돌렸다.

형이 대놓고 불편한 기색이었으나 단군은 오직 나와 멍군만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매일 한 번씩 산책시키고 군고구마를 챙겨줘야 하는 것만 빼면 상당히 괜찮은 신수죠.”

한데…… 이어지는 말이 어째 굉장히 신경이 쓰였다.

멍군이 매일 밖에 나와 있는 건가?

거기다 고구마라니, 불을 먹여야 하는 게 아니었나?

“어…… 그랬……어야, 했어요?”

나는 멍군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더하며 물었다.

“……멍군이 요구하지 않았습니까?”

내 물음에 오히려 단군이 눈을 크게 뜨고 되물어 왔다.

“시간마다 나와서는 배를 보이며 바닥에 드러누웠을 텐데요?”

멍군이 그런 식으로 떼를 썼다고?

전 주인에게서 듣는 몹시 생소한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입이 살짝 벌어졌다.

“멍군이…… 그랬어요?”

“멍군이…… 안 그랬습니까?”

언제나 단정하기만 했던 얼굴에서 드물게도 당황이 묻어났다.

누구도 서로의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단군의 반응을 곱씹다가 다시 물었다.

“아니, 내가 정말로…… 신수는 잘 몰라서요. 그럼 산군도 매번 그렇게 나오나요?”

“아뇨, 일반적인 신수는 딱히 그렇지 않습니다만 멍군은…….”

여상하게 대답하던 단군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검은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리는 찰나.

활짝 열린 업경의 권능으로 단군을 향한 멍군의 감정이 흘러들어 왔다.

‘산책.’

‘고구마.’

또한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에 대한 감정도.

‘사랑.’

‘전우.’

‘부하.’

‘부하.’

‘아이.’

음, 으음…….

이걸 밝히면 멍군을 보는 강림 형의 호감도가 아주 조금 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다른 두 차사의 기분이 미묘해질 테니 일단 나만 알고 있자.

“아니, 괜찮습니다.”

한편 단군은 그새 아련해진 눈으로 멍군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쨌든 멍군 덕분에 하루에 한 번씩 밖에 나갈 수 있었으니까요.”

“…….”

이 사람은 대체 천부인 안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던 걸까.

나는 눈썹이 또 제멋대로 쳐지기 전에 헛기침을 하곤 멍군과 눈을 맞추었다.

하얀 털 사이로 사늘하게 빛나는 눈과 마주하자 극복하지 못한 두려움이 꿈틀댔지만, 그래도 열심히 엉덩이를 토닥토닥하면서.

“또 화기를 내뿜는 몬스터가 나오면 부탁해, 멍군.”

-멍멍멍!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빨간 혀를 내민 멍군이 명랑하게 짖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짠 하고 나타나 도와줬으면서도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는 것이 새삼 기특하고 고마웠다.

저승에 돌아가면 꼬박꼬박 고구마를 챙겨줘야지.

***

화기를 먹어 치우는 멍군 덕에 2층 공략도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2층의 신수는 보름을 바다에서, 그다음 보름은 산에서 산다는 아주 커다란 산갈치였는데 하얗게 서리가 내린 몸을 크게 꿈틀거릴 때마다 불벼락이 떨어졌다.

-멍멍멍!

물론 멍군은 사방으로 떨어지는 불벼락마저도 맛있게 먹어치우고는 똑같이 산갈치한테 불벼락을 때려 주었다.

-아, 내가 갈치구이도 참 좋아하는데…….

순식간에 노릇노릇 구워진 산갈치를 내려다보며 호구별성이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그거 알아? 산갈치 머리를 먹으면 천문에 능통해지고 꼬리를 먹으면 지리에 능통해진대.

아마 산갈치가 별에서 산과 바다로 내려와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전설 때문에 전해지는 이야기일 터였다.

어쨌든 호구별성의 얘기가 신기하기도 하고, 불에 구워진 산갈치가 몹시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바람에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산갈치구이로 모였는데.

-멍멍멍!

해맑게 짖은 멍군이 신나게 꼬리를 흔들며 노릇하게 익은 산갈치로 달려들었다.

-그냥 개밥이군.

하얀 털뭉치가 하얀 생선 살을 이리저리 튀기며 맛있게 씹어 삼키는 광경에 강림 형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여전히 총기라고는 눈곱만큼도 갖추지 못한 꼴을 보니 가치 없는 낭설이다.

잠시 뒤, 천문과 지리에 능통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배만큼은 빵빵해진 멍군을 데리고 우리는 3층으로 내려갔다.

“응? 이건 뭐지?”

그런데 3층에 들어서자마자 시야를 가리는 몹시 거대한 물체에 앞서 걷던 호구별성이 멈춰 섰다.

“잠깐, 잠깐! 이거 혹시 오징어 다리냐?!”

거대한 물체의 정체를 파악한 호구별성이 기겁한 목소리로 외쳤다.

“무슨 빨판 하나가 욕조만 해!”

그 말에 나도 서서히 벽인지 기둥인지 모를 것의 형체가 눈에 잡히기 시작했다.

호구별성의 말마따나 그것은 단순히 거대하다는 말로는 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운 오징어의 다리였다.

다리 한 짝이 그 정도였으니, 어쩌면 용왕의 본신만큼 큰 오징어일지도 몰랐다.

“미친! 설마 3층 담당 신수가 이놈이야?!”

호구별성이 별 해괴한 것을 봤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이 정도로 크면 해태의 불꽃으로는 빨판이라도 하나 제대로 태울 수 있을까 싶다만.”

심각해진 사라도 한마디 했다.

그 말대로 이러한 거체를 상대로 멍군이 화염을 되돌려주는 방식은 적절하지 않았다.

또한 거대 오징어가 3층 신수에 불과하다면, 4층에서는 대체 무엇이 나올지도 걱정이었다.

“한데 반응이랄 게 없군.”

검푸른 신성을 끌어올린 강림 형이 말했다.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

깜짝 놀란 호구별성이 큰 소리를 내고, 뒤이어 우리가 우르르 3층에 들어서는 동안에도 다리는 미동조차 없었다.

물론 사이즈가 사이즈인지라 조금만 움직여도 피하기 힘드니 일단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주술을 품고 있군요.”

다리를 살피던 단군이 말했다.

업경의 권능을 통해 그를 중심으로 빛나는 문자열들이 흐르는 게 보였다.

“이 거대한 신수는 이미 죽은 것이 맞습니다.”

북해 용궁의 3층과 거대 오징어의 인과를 읽어 낸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었다.

“이미 어떤 주술의 제물로 바쳐진 상태입니다.”

“제물로 바쳐졌다고?”

단군의 말에 호구별성이 재차 인상을 썼다.

“네, 그저 껍데기뿐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신수의 육을 이루던 피와 살은 단 한 줌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뭐야, 그럼 박제 같은 거야?”

그녀는 가늘어진 눈으로 빨판들을 훑어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겉으로는 물컹물컹해 보이는데.”

“피와 살을 대신하듯 청공과 진토 던전에서 봤던 문자들이 가득 차 있어요.”

설명을 더한 것은 바리였다.

어느새 바리 주위로도 수많은 문자열들이 천천히 휘돌고 있었다.

“한반도의 주술이 아니어서 정확히 읽을 수는 없지만요.”

나는 두 도사의 말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결국 남해의 용신들이 한발 앞서 무언가를 했다는 게 확인되었구나.”

오류가 섞인 팝업창이 떴을 때부터 예상한 일이라지만, 이렇게 거대한 오징어를 이용해 주술을 준비했을 줄이야.

그들이 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는 것인지 가늠하며 오징어를 올려다봤다.

“……어라.”

그런데 오징어가 품은 무언가에 업경이 반응했다.

“안쪽에서…… 뭔가.”

비어 있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가득 차 있는 듯 보이는 기이한 그것은, 내가 알기로 이 우주에 단 하나뿐이었다.

“……우주퇴적물?”

알 수 없는 주술과 우주퇴적물을 품은 거대한 오징어.

나는 업경의 권능이 읽어낸 그것의 본질에 더욱 집중했다.

우주퇴적물은 인과를 왜곡해 발생할 수 없는 사건을 가져온다.

즉, 저것은 주술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일 터.

다만.

“……뭐지? 보통의 우주퇴적물과는 조금 달라.”

우주퇴적물은 결국 하나로 얽힌 인간의 혼이었으니,

본래 가야 할 곳으로 가지 못한 수많은 이들의 일평생을 읽을 수 있었다.

한데 아무리 집중해 보아도 오징어가 품은 우주퇴적물에선 이전과 같은 인간의 생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설마 인간이 아니라…… 용신들의 혼인가?”

그러한 가능성을 떠올렸을 때.

“대왕님, 어찌하시겠습니까.”

강림 형이 낮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3층을 지나치는 것은 문제가 없을 듯합니다. 이대로 4층으로 가시겠습니까?”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우주퇴적물이 용신들의 혼이라면, 신경 쓰인다 한들 그대로 두고 가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은 없었다.

이전에 우주퇴적물을 혼으로 돌렸던 풍문은 사라졌으며, 본디 용신의 혼은 저승에 오지 않고 자연의 기로 돌아가 우주를 순환하게 된다.

그들을 가야 할 곳으로 보내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애초에 나의 권한이 아니었다.

“네, 바로 4층으로 내려가죠.”

나는 잠시간의 고민 끝에 생각을 지우며 대답했다.

어쩔 수 없었다.

용신의 혼은 내가 거둘 수 없는 존재였다.

지금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할 때였다.

돌려보내지 못한 그들의 혼이…… 어떤 사악한 인과를 불러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4층으로 향했다.

5층에 머리를 자른 강철이를 봉인해 두었으니, 4층에는 봉인한 재앙신을 지키는 마지막 문지기가 있을 터였다.

“야, 저놈은 뭔가 분위기가 다르다.”

4층에 내려가자 과연 드넓은 홀 끝에 무언가 서 있었다.

멀찍이 보이는 4층의 문지기의 모습에 호구별성이 살짝 얼굴을 굳혔다.

“그래, 앞서 본 신수들과 달리 완벽한 맹장(猛將)의 모습이구나.”

“저 정도면 말을 걸어도 알아들을 것 같은데요.”

눈을 가늘게 뜬 사라가 그녀의 말을 받고, 나도 문지기를 주시하며 한마디 얹었다.

4층의 신수는 독특하게도 해마를 탄 장수의 모습이었다.

해마의 튀어나온 주둥이에 고삐를 달고 굽은 등에는 안장까지 얹어 놓았다.

게다가 그 위에 탄 장수는 용의 비늘처럼 반짝이는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용신인가?”

호구별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용신이라기엔 물고기 같은 요소가 전혀 없잖아?”

그래, 해마를 탄 장수는 여느 용신들과 달랐다.

용신들은 인간처럼 옷을 입고 직립보행을 하지만 그래도 본래 어떤 짐승에서 신이 되었는지 알 만한 원형은 남아 있었다.

한데 해마 장수는 겉모습만으로는 어떤 용신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갑옷에 투구까지 몇 겹으로 무장하여 몸이 가려진 것을 감안해도 그랬다.

“짐승의 모습이 남아 있지 않은 용신이라면 용뿐인데…….”

강림 형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보통의 용은 북해에 오면 심장이 얼어붙는다고 했으니, 만약 저것이 정말로 용이라면 심장이 얼어버린 용을 모종의 힘으로 조종 중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용신이라기엔…… 조금 이상해요.”

나는 계속해서 해마 장수를 살폈다.

“신성이 너무 이질적이에요.”

업경의 권능이 대상의 본질을 파고들었다.

해마와 장수가 품은 물의 신성.

그리고 그보다도 더욱 장수의 본질에 가까운 깊은 힘.

그리하여 마침내 장수가 품은 신성을 꿰뚫은 순간.

“죽음의 신성……?”

나는 결코 낯설지 않은 감각에 눈을 크게 떴다.

“OH, MY GOD!”

마찬가지로 우리를 알아본 해마 장수도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이게 누구야, 조선의 사신 친구들이잖아!”

반갑게 소리친 장수가 푹 눌러썼던 투구를 벗었다.

바다를 닮은 투명한 벽안과 어둠 속에서도 햇살처럼 빛을 발하는 밝은 금발이 드러났다.

“오랜만이야! 친애하는 강림차사와 조선의 사신들. 그리고 우리 어린 대왕님!”

불가살이 던전에서 헤어졌던 그림 리퍼가 여전히 쾌활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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