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53화 (153/187)

44장. 극음의 바다(2)

북해.

천계의 빛이 닿지 않는 가장 깊은 바다.

사시사철 모든 것이 얼어 붙어있는 극음의 바다.

우리는 드디어 네 번째 바다에 당도했다.

“어우, 다 오니까 확실히 몸이 으슬으슬하다.”

걸음을 멈춘 호구별성이 팔뚝을 감쌌다.

그녀는 인벤토리에서 빨간 반지를 꺼내 손가락에 끼웠다.

서해 용왕비가 챙겨준 반지는 화기를 품었을 뿐 아니라 주변을 밝게 해주는 효과도 있었다.

강철이를 봉인한 북해 용궁에는 빛이 들지 않으니 꼭 필요한 기능이었다.

“네, 벌써 일대에 한기가 가득하네요.”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서해 용왕비의 반지를 꺼냈다.

여전히 북해의 바람은 찼지만, 반지를 끼자 늦가을 정도의 서늘한 온도가 되었다.

일행들이 모두 패물을 착용한 것을 확인한 뒤 다시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산호가 전부 한기에 얼어붙었구나.”

사라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알록달록한 산호마다 눈이 내린 것처럼 새하얀 얼음 결정이 맺혀 있었다.

“한데 그때 봤던 붉은 산호도 종종 섞여 있어.”

그가 멀찍이 떨어진 암석 하나를 가리켰다.

기이하게도 얼음 결정이 맺힌 산호들 사이로 화기를 품은 붉은 산호가 드문드문 자리하고 있었다.

“음, 이렇게 보니 확실히 얼음 산호 던전이랑 비슷하긴 하네.”

호구별성이 얼어붙은 산호와 화기를 품은 붉은 산호를 훑어보며 말했다.

“강철이가 품은 화기의 영향이로군.”

강림 형이 한마디 보탰다.

나는 뒤늦게 얼음 산호 던전에 차가운 얼음 산호와 따뜻한 붉은 산호가 함께 자란 이유를 이해했다.

그 던전은 이곳 북해의 기운으로 만들어진 던전이었으니까.

“화수미제(火水未濟)라…….”

사라가 쯧쯧 혀를 찼다.

“불과 물이 섞이지 못하고 끝없이 대립하니 불길할 수밖에.”

화수미제라면 주역(周易)의 64괘 중 64번째 괘로 흉괘였다.

그는 좋지 못한 괘로 하여금 차가운 북해에 봉인된 뜨거운 강철이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하지만 수화기제(水火旣濟)를 이루면 모든 것이 순리대로 돌아가겠지요.”

옆에 선 단군이 나직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수화기제는 주역의 63번째 괘로 불과 물의 대립을 의미하는 화수미제와 달리 물과 불의 조화를 의미하는 길괘였다.

사라는 말없이 단군을 한 번 곁눈질했다.

평소처럼 무심한 눈이었으나 구태여 시선을 준 걸 보면 그는 단군의 답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5000살의 신과 50살의 도사는 어딘가 통하는 구석이 있는 걸까.

하긴 단군은 원래도 천계와 교류해 왔으니, 천신들과 특히 코드가 맞는 걸일지도 모르겠다.

짙은 한기를 뚫고 계속해서 걸었다.

한참을 더 걷던 끝에 우리는 거대한 암초 앞에 섰다.

얼어붙은 산호로 뒤덮인 암초였는데, 기실 암초라기보다는 바다에 가라앉은 섬처럼 보일 정도였다.

귀수산(龜首山).

이름을 풀이하면 거북이 머리 모양의 산.

산처럼 보이는 그것은 용궁의 신수로, 북해 용궁을 지키는 문지기였다.

그의 발밑에는 다섯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네 번째 용궁이 있으며, 재앙신 강철이가 된 북해 용왕은 가장 아래층에 묶여 있었다.

귀수산은 건드리지만 않으면 그저 산처럼 잠잠하지만, 누군가 북해 용궁에 함부로 접근하면 침입자를 집어삼킨다고 했다.

문지기 귀수산에게 용궁의 문을 열어달라 청하려면 귀수산의 산호로 만든 피리를 불어야 했다.

즉, 피리가 북해 용궁의 열쇠인 셈이다.

“층마다 용궁의 신수들이 지키고 있다고 했었죠.”

용궁의 문을 열기 전에 일행들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강철이의 화기를 눌러야 하니 모두 북해의 한기를 품고 있는 신수들이고요.”

북해는 다른 바다와 달리 용신들이 살지 않고 다만 용왕의 명을 받은 신수들만 강철이의 봉인을 지키고 있는 상태였다.

“우리는 용왕님들이 내려주신 용신의 축복을 받았으니 신수들이 그것을 알아볼 것이라곤 하셨지만요.”

그래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긴장을 풀지 않는 게 좋겠지.

나는 작게 심호흡을 하고 품에서 산호 피리를 꺼냈다.

가볍게 입에 물고 한 가락을 불자, 거대한 암초 사이로 자그마한 문이 나타났다.

산호에 가려진 낡고 녹슨 문.

북해 용궁의 문은 동서 용궁과 달리 몹시 초라했다.

잠시 문 주변을 살폈으나 그 외에 달리 이상한 것은 없었다.

[ (!) 공간의 지배베멋뇬깬뚜흐흐흐이 바뀝니다. ]

그런데 일행들과 함께 문 안으로 들어선 순간 생각지 못한 팝업창이 떴다.

[ ‘극음의 바다’에 입장하벨곽땍귀룔흐흐흐니다! ]

- (!) 해당 던전벨덮됩흐 등급은 ‘영웅담’입베깩됩흐다.

- 클리어 조건 : 북해 용왕 베밖몃벋력루렘꽥뜰볕흐흐를 벨냈겡뱌력루렘꽥랭록흐흐십시오.

던전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팝업창은 이번에도 잔뜩 깨져 있었다.

“뭐야,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몹시 당황한 호구별성이 독기를 흘리며 말했다.

“어이가 없네. 영감탱이들이 방치하는 동안 아예 던전이 된 거야?”

호구별성의 추측대로인 듯한데 당황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라 바로 그녀의 말을 받지 못했다.

설마 용궁이 던전이 되었을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리되었다면 용궁을 지키던 신수들이 호의적일 것 같진 않군.”

강림 형도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말대로였다.

각오한 것 이상으로 상황이 나빠졌다.

우리는 이제 한정된 마력으로 재앙신 강철이에 앞서 용궁의 신수들까지 상대해야 할 터.

용왕들이 마력을 회복할 수 있는 영약을 몇 개 챙겨주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보다 효율적으로 힘을 분배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클리어 조건도 제대로 보이지 않네요…….”

나는 한숨을 쉬며 팝업창을 살폈다.

그나마 읽을 수 있는 글자들로 북해 용왕을 쓰러트리는 게 아닐까 추측할 수 있을 뿐, 던전의 공략법을 온전히 파악하기는 힘들었다.

“만약 이 오류가 누군가 던전을 조작한 탓에 발생했다면, 적은 몬스터뿐만이 아니겠습니다.”

단군이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그럴 것이다.

이전에 얼음 산호 던전에 매복해 있던 문어 용신들처럼, 남해의 용신들이 던전을 조작하고 함정을 팠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남해 용왕이 동서 용왕의 심장을 노린 것은 강철이의 봉인을 풀기 위해서였으니, 그들이 먼저 북해를 찾아 뜻대로 던전을 조작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했다.

우리는 별수 없이 복도 너머로 나아갔다.

천장이 높고 폭이 넓은 복도는 길게 이어져 있었다.

빛 한 점 없이 어두웠지만, 서해 용왕비의 패물을 착용한 덕에 우리의 주변은 가로등을 켠 것처럼 환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데 별다른 지장은 없었다.

“잠깐, 뭔가 오고 있어요!”

문득 바리가 앞을 가리켰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커다란 것이 허공을 헤엄쳐 오고 있었다.

“초롱아귀?”

고래만큼 크다는 것만 빼면 심해어 초롱아귀와 꼭 닮은 생김새였다.

미끌미끌한 타원형 몸은 군데군데 희게 얼어붙은 채였다.

본디 추운 극음의 기운으로 강철이의 화기를 억눌러 왔으리라 짐작되지만, 얼어붙은 몸과 달리 머리에서는 뿔처럼 솟아오른 촉수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강철이가 품은 화기에 오염된 듯합니다.”

단군이 거대한 초롱아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신수보다는 요괴에 가깝습니다.”

순식간에 당도한 초롱아귀가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불이 붙은 기다란 촉수를 휘둘렀다.

화르르륵!

촉수에 붙은 불이 한층 거세지고, 돌연 어둠 속에 나타난 붉은 점들이 형형하게 빛을 발했다.

자세히 보니 뼈만 남은 가시고기들이었다.

그것들이 붉은 눈을 빛내며 초롱아귀의 촉수를 따라 모여들고 있었다.

“저게 첫 번째 신수로군.”

강림 형이 신성을 끌어 올렸다.

“처음부터 힘을 많이 소모할 순 없어요.”

나는 ‘죽음’을 손에 쥐며 말했다.

“가능한 한 마력 없이 상대하고 싶은데…….”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가할 수 있는 물리력을 고민하며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화르르르륵!

초롱아귀의 불꽃이 더욱 크게 타오르더니, 가시만 앙상하던 고기들이 일제히 불꽃으로 달려들었다.

“응……? 뭐야?”

가시고기들의 잇따른 행동에 호구별성이 눈을 끔뻑였다.

“저걸 뜯어먹어?”

그러나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불꽃을 뜯어먹은 가시고기들이 불처럼 새빨갛게 타오르기 시작했고, 나는 그제야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깨달았다.

화르르륵!

화르르르륵!

화르르륵!

살 오른 물고기처럼 불을 통통하게 품은 가시고기 떼가 총알처럼 우리를 향해 빗발쳤다.

“미친, 이제 보니 물고기가 아니라 불고기였구만!”

호구별성이 암녹색 독기를 뿜으며 소리치는 사이.

파아아앙!

검푸른 신성이 쏟아지는 불고기 떼를 덮쳤다.

펑!

펑펑펑!

펑펑!

신성에 닿은 불고기들이 폭죽처럼 터지며 사방에 불꽃을 튀겼다.

화르르륵!

단군은 재빨리 불의 벽을 세워 막아낸 다음, 벽을 이루었던 거대한 화염을 그대로 내던지듯 초롱아귀에게 날렸다.

화르르르륵!

불꽃에 휩싸인 초롱아귀가 몸을 뒤틀었다.

치이이익!

다만 초롱아귀가 품은 북방의 한기 때문인지, 아귀에 붙었던 불꽃은 오래 가지 못하고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래도.

“엇, 저거 녹는다!”

호구별성이 불에 당한 아귀를 가리켰다.

아귀의 몸은 일부가 녹아서 물처럼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꼭 얼음 조각상이 부분부분 녹아내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강철이에 오염되어 화기를 부리지만, 몸을 이루는 것은 여전히 신수였을 적 품었던 한기로군요.”

단군이 아귀를 살피며 말했다.

“결국 화기를 쓰면서도 화기가 약점인 셈이지요.”

대상의 인과를 읽는 그에게서 문자열들이 쏟아졌다.

“던전을 지키던 북해의 신수들이 모두 이런 형태의 몬스터가 되었다면, 그들의 힘을 되돌려주는 방식으로 마력을 아낄 수 있겠습니다만…….”

단군도 5층에 봉인된 강철이를 만날 때까지 힘을 아끼는 법을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화르르륵!

초롱아귀의 촉수가 재차 빨갛게 불꽃을 피웠다.

화르르르륵!

아귀의 몸은 일부 녹았으나, 그 때문에 한기의 힘이 약해진 듯 촉수의 화력은 더욱더 크고 강해져 있었다.

촉수에 맺힌 커다란 불꽃.

그에 훨씬 더 많은 수의 불고기 떼들이 모여들며 우리를 노리는 찰나.

-멍멍멍! 멍멍!

반가운 울음소리와 함께 가슴팍에서 하얀 털뭉치가 튀어나왔다.

“앗……!”

내 다리에 복슬복슬한 뺨을 비벼 오는 삽살개를 보자 불현듯 떠올랐다.

“그래, 멍군이라면……!”

불을 삼키는 해태, 멍군.

굳이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멍군은 단번에 내 뜻을 알아차린 양 꼬리를 붕붕 흔들며 불고기들을 향해 입을 벌렸다.

[ (!) 해태 ‘멍군’이 화기를 빨아들입니다. ]

팝업창이 떴다.

화기를 빨아들인다는 표현 그대로였다.

불고기들의 불꽃은 마치 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는 먼지처럼 멍군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치이익.

치이이익.

화기를 뺏겨 도로 앙상한 가시가 되어버린 고기들이 허망하게 연기를 뿜었다.

-멍! 멍멍멍! 멍멍!

화기를 먹어치운 만큼 몸집이 커진 멍군은 뼈만 남은 고기들을 약 올리듯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 (!) 해태 ‘멍군’이 품었던 화기를 토해냅니다. ]

화르르륵!

화르르르르륵!

멍군은 보란 듯이 제가 삼킨 화기를 초롱아귀에게 거대한 화염으로 되돌려주었다.

단군의 공격에 일부만이 녹았던 초롱아귀는 멍군의 화염에 휩싸이자 저항할 겨를도 없이 삽시간에 녹아버렸다.

마력을 아끼기 위해 화력을 조절한 단군과 달리, 멍군은 초롱아귀가 우리를 죽이기 위해 쏟아낸 화력을 그대로 받아쳤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 이러면 MVP는 우리 멍멍이가 따 놓은 당상이네!”

호구별성이 기특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녀석, 이제야 저승의 신수다운 값을 하겠군.”

강림 형도 흡족한 투로 덕담을 건넸다.

-멍멍! 멍멍멍!

멍군은 반가운 기색으로 강림 형에게 꼬리를 흔들어 인사했다.

-멍멍멍멍!

그러고는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려 자세를 낮추자마자 언제나처럼 달려들어 내 뺨을 마구 핥기 시작했다.

“이 녀석, 도대체 신하의 예는 언제 갖출 게냐!”

그런 멍군의 어리광에 강림 형은 조건반사처럼 험악하게 인상을 썼지만, 나는 멍군을 끌어안으며 엉덩이를 살살 토닥여 주었다.

멍군 덕분에 던전 공략이 훨씬 수월해질 텐데.

착한 아이에게 칭찬은 해도 해도 모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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