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장. 극음의 바다(1)
북해를 향한 여정은 며칠간 계속되었다.
강림 형은 내가 단군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을 여전히 못마땅해했지만 처음보다는 아주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어휴, 이 늙다리 꼰대 새끼야. 애들끼리 놀게 냅둬라.
-그래, 천 살도 더 먹은 큰형님보다야 또래랑 어울리는 게 즐겁지 않겠느냐.
형이 사사건건 나와 단군을 노려볼 때마다 사라와 호구별성이 그만 좀 하라고 심드렁하게 핀잔하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단군이 의외의 방식으로 형에게 약간이나마 호감도를 따낸 게 크지 싶다.
음…… 뭐라고 해야 할까.
단군 본인에 대한 호감도라기보다는 뇌물…… 조공…… 자릿세…… 뭐 그런 것에 가깝긴 한데.
-포털이 복구되었습니다, 염라.
단군이 바다 무덤 던전의 포털을 정비했을 때였다.
-한데 떠나기 전에 던전의 흙을 조금 얻어 가는 것은 어떠신지요.
일행에게 돌아온 그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던전의 흙이요?
-바다는 용신의 영역이니까요. 결국 신의 힘이 깃든 흙이지요.
그는 처음부터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듯 부드럽게 웃었다.
-특히 이곳은 오행의 권능을 담았던 던전이니, 저승의 흙에 비할 바는 아닐지라도 지옥수의 싹을 틔울 만큼의 힘은 깃들어 있을 겁니다.
-아……!
얼음 산호 던전에서 얻은 흑암지옥의 씨앗이 떠올랐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저승에 도착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테니 잠시 용신의 흙을 빌리시는 것도 좋겠지요.
필드에서 지옥의 힘을 증폭시키려면 지옥수가 발아해야 하니 미리 싹을 틔워두라는 말이었다.
물론 작은 싹만으로는 그리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겠지만, 세 번째 천벌 때처럼 일시적으로나마 지옥의 힘을 증폭시킬 준비는 해 두는 게 나으니까.
-화분은 제가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단군은 인벤토리에서 주먹만 한 크기의 작은 화분을 꺼냈다.
몹시 작은 크기였지만 자세히 보니 알 수 없는 문자열들이 빼곡한 게 특별한 주술이 담긴 듯했다.
-흐음, 의견은 좋으나 그렇게 작은 화분이면 땅을 풍요롭게 하는 권능도 필요하지 않겠느냐.
지켜보던 사라가 입을 열었다.
-꽃을 피우려면 빛, 흙, 물이 모두 필요하지. 깊은 바다라도 천신으로서 빛은 내려줄 수 있다만…….
-땅을 풍요롭게 하는 힘이라면 제가 자청비 님께 아주 조금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서천꽃감관의 염려에 단군이 작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땅을 풍요롭게 하는 농경신 자청비와 단군이 교류하는 것은 이미 아는지라, 사라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나머지는 그의 힘으로 싹을 틔울 수 있겠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단군은 내게 작은 화분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물은 이 바다의 것을 그대로 쓰시면 될 테지요. 이 또한 용신의 권능이 담긴 물이니까요.
저승에서 지옥수를 키우던 물도 광천못과 용궁 왕자의 신성이 깃든 물이었으니, 그 또한 문제 될 것은 없으리라.
-말이 나온 김에 물뿌리개도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물에 담긴 신성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게 만들어 두었죠.
그렇게 말한 그는 인벤토리에서 커다란 물뿌리개까지 꺼내 들었다.
화분처럼 주술이 깃든 주둥이에는 모종의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야, 너는 인벤토리에 무슨 그런 걸 넣고 다니냐?
호구별성이 새삼 웃기다는 투로 물었다.
-신단수를 키우다 보니 다른 나무들도 돌보게 될 일이 많았습니다.
-아하, 너 그럼 의외로 강림이랑 잘 맞을지도 모르겠다.
단군이 조금 멋쩍은 얼굴로 답하자 호구별성이 짓궂게 웃었다.
원예가 취미인 저승사자는 그런 호구별성을 한 번 쏘아본 후 서슬 퍼런 눈으로 단군을 응시했다.
변함없이 살기등등한 눈이었지만, 나는 형의 그 형형한 눈빛에서 은밀한 욕망을 엿보았다.
단군은 싫은데 지옥수의 화분은 탐나는 게 분명했다.
-그러면 바로 화분에 씨앗을 심어 볼게요.
던전의 흙을 담은 화분에 씨앗을 심었다.
내 눈에는 그저 평범한 화분이었으나, 꽃감관께서는 씨앗이 잘 자리 잡았으니 하루에 한 번씩 물을 주면 금세 싹이 틀 것이라고 공언했다.
나는 잘 자라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화분을 한 번 쓰다듬은 다음 물뿌리개와 함께 강림 형에게 내밀었다.
-형, 흑암이 물은 형이 챙겨주실래요?
형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잠시 말이 없더니 이내 큰 손으로 조심스럽게 화분을 받아들며 중얼거렸다.
-흑암이…….
나는 자기 주먹만 한 화분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형을 바라보며 흡족해졌다.
발설이는 여기 없지만 대신 흑암이가 생겼으니, 또다시 융합 풍문을 펼치게 되더라도 금방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당분간 형의 인벤토리에는 흑암이가 담긴 화분과 물뿌리개가 자리하게 되었고,
그는 여전히 단군을 꺼릴지언정 흑암이를 일찍 세상에 내놓은 값으로 당장 내쫓자는 주장만큼은 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이어진 여행길.
결국 탈것을 찾지 못한 우리는 며칠 내내 낮에는 걷고 밤에는 야영을 했다.
야행 시에는 단군이 세운 불의 벽이 보초 역할을 했으나, 강림 형은 정말 최소한의 휴식만을 취하고는 불의 벽 안에서도 경계를 서곤 했다.
나는 형도 밤에는 편안히 쉬기를 바랐지만 형에겐 오히려 그게 더 편한 듯 보여서 별다른 말은 얹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 번은 내가 중간에 잠에서 깬 날이 있었는데.
옆으로 누워 눈만 말똥하게 뜨니, 깊은 밤중인데도 팔짱을 끼고 앉은 강림 형의 너른 등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깨어난 걸 눈치채지 못한 형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누군가에게 나지막이 말을 걸고 있었다.
-흑암아, 저승에 돌아가면 너의 형제들이 다섯 있다.
그래, 형의 몸에 가려 보이지 않는 그곳에는 싹이 트지 않은 흑암이의 화분이 있었다.
-당장은 네가 막내겠지만 앞으로 동생들이 넷이나 더 오게 될 터. 그러니 막내라고 형들한테 마냥 응석 부릴 생각은 말거라.
형은 주먹만 한 화분을 내려다보며 진중하게 흑암이를 훈계했다.
-저승의 지옥수가 어리광을 피워서야 되겠느냐.
저승에서 지옥수 형제들을 돌볼 때도 저렇게 깊은 대화를 나누었던 걸까.
그동안 형이 나무들 곁에 머물며 뭘 했는지 비로소 알게 된 기분이었다.
-한데 흑암지옥이 여섯 번째라니 순서가 좀 꼬였군. 알아 두어라. 흑암이 너는 원래 열 번째 지옥이다.
……그렇게 따지면 다섯 번째 지옥인 발설이가 맏형이 된 것부터 문제가 되지 않나 싶었지만.
나는 굳이 티를 내지 않고 계속해서 가만히 자는 척을 했다.
발설이도 한참이나 못 보고 있는데, 모처럼 형의 행복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형제들 소개를 해주마.
타닥타닥.
불의 벽이 모닥불처럼 타들어 가는 소리에 섞여 형의 말이 조곤조곤 이어졌다.
-도산이는 칼을 품은 녀석인데 답지 않게 착하고 싹싹하다.
도산이가…… 그런 성격이었구나.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속으로만 고개를 끄덕였다.
-화탕이는 다혈질이 심하니 조심해야 한다. 그래도 알고 보면 속은 따뜻할 게다.
-한빙이는 다소 실없지만 그래도 내실은 건실한 녀석이지.
그러나 천천히 이어지는 말을 듣던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검수, 그 녀석은 너희 중에서도 제일 딱딱하고 엄숙해.
형이 말하는 지옥수들이…… 사실 잃어버린 우리 형제자매들의 성격을 꼭 닮아 있어서.
생전에 얼마나 공덕을 베풀었는지를 심판하는 지옥인 만큼 열 개의 지옥에서 가장 다정했던 도산지옥의 차사들.
가끔은 화통함이 지나쳐서 사소한 말싸움만으로도 일이 커지곤 했던 화탕지옥의 차사들.
유독 유치한 말장난을 즐겼던 한빙지옥의 차사들.
같은 검사라도 도산지옥 차사들과 달리 자비 없이 냉정했던 검수지옥의 차사들.
그들이 한 명 한 명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려서.
-발설이는 용맹하고 덕이 깊으며 지옥수의 귀감을 두루 갖춘 맏형이다. 지덕체를 모두 겸비했다고 할 수 있지. 너도 저승에 가면 형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음…… 뭐, 발설이 차례에는 참으로 편애가 두드러졌지만.
나는 흑암이에게 지옥수 형제들을 소개해주는 목소리를 자장가처럼 듣다가 어
느 순간 다시 잠이 들었고,
다음 날 아침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형이 흑암이를 도로 인벤토리에 넣은 채 평소처럼 곧은 자세로 일행을 지키고 서 있었다.
한편, 임시 일행이 된 단군과 제일 잘 지내는 것은 의외로 바리였다.
이동할 때는 보통 사라와 호구별성이 앞에서 나란히 걸으며 얘기를 나누고, 강림 형은 습격을 경계하느라 내 뒤에서 몇 발 떨어져서 걸었다.
바리와 단군은 자연히 내 옆에서 함께 걷게 되었는데, 바다 무덤 던전에서 나온 이후로 바리가 간간이 단군에게 말을 걸곤 했다.
지천명(知天命)의 도사와 지학(志學)의 무당 소녀.
나는 두 초인이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는가 싶어 때때로 귀를 기울였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대화는 나처럼 범상한 신은 알아듣기 힘든 이치를 담고 있을 때가 많았다.
아니, 사실 나로선 그걸 대화라고 해도 될지부터가 의문이었다.
이를테면 하루는 저녁을 먹고 일찍 휴식에 들어갔던 날이었다.
강림 형은 흑암이에게 물을 주며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사라와 호구별성은 여느 때처럼 웃는 얼굴로 서로에게 침을 뱉었는데,
바리와 단군은 어째서인지 무릎을 꿇은 채 마주 앉아 있었다.
다만 한참을 서로 마주 보기만 할 뿐, 오고 가는 말은 한마디도 없던지라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단군한테 다가가 물었다.
-혹시 지금 뭐 하고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아, 끝말잇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염라.
-……끝말잇기요?
-네, 정확히는 끝말잇기에서 서로가 이기는 미래를 찾고 있었죠.
둘 다 계속 입을 꾹 다물고 있었으면서 어떻게 끝말잇기를 하나 했는데, 알고 보니 도사들 사이에서 제법 유용한 수련법이라고 했다.
상대보다 몇 수 앞을 내다보느냐가 핵심이라나?
뭐, 강아지를 말하느냐 강물을 말하느냐로 지구 반대편에서는 태풍과 가뭄이 갈리기도 한다는데…… 그런 심오한 우주의 이치는, 솔직히 잘 모르겠고.
-이런.
문득 끝말잇기 수련법에 대해 설명하던 단군이 작게 탄식했다.
-‘해질녘’을 끝으로 제가 지는 미래가 확정되었군요.
아무래도 내가 말을 건 탓에 그의 집중력이 흐트러진 모양이었다.
-미안합니다. 내가 방해했네요.
단순한 놀이라지만 그가 나 때문에 지게 되었으니 멋쩍은 마음으로 사과했다.
-기찻길.
그런데 여태 아무 말이 없던 바리가 별안간 입을 열었다.
-길동무.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어 바리를 돌아보자 이번에는 단군이 말했다.
-무지개.
그러자 바리도 즉시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받았다.
나는 한발 늦게 그들이 끝말잇기를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리, 네가 ‘해질녘’으로 이긴 게 아니었어?
바리는 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빠. 말씀대로 제가 797번째 차례에 ‘해질녘’으로 이기는 미래가 확정되었어요.
-어…… 그러니까 네가 이겼다는 거잖아?
-네, 우주가 그 미래를 선택했어요.
-응……?
-그러니까 이제 우주의 뜻을 따라야죠.
-으응……?
질문과 대답이 겉도는 것 같아 그냥 지켜봤더니 바리와 단군은 끝말잇기를 계속해 나갔다.
그리하여 정확히 797번째에 ‘해질녘’이라는 단어를 끝으로 단군의 패배가 실현되었고,
그제야 장난감을 정리하듯 놀이를 마무리 짓는 두 도사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면서…… 나는 평생 도사를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내 북해에 당도할 때까지, 이렇듯 우리의 여정은 나름대로 평화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