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장. 바다 무덤(5)
바리는 눈을 떴다.
어두운 방에 불이 켜지듯 공간을 구성한 인과가 눈에 들어왔다.
토속성 권능에 도전하는 시험인 만큼 토속성 오행의 성질을 풀어놓은 인과였다.
그중에서도 진토(辰土)였으니, 사계절 중에서도 봄을 의미하며 봄비에 젖어 만물을 생장시키는 땅이었다.
결국 시험의 핵심은 인내.
땅의 작용은 본래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비에 젖은 땅은 씨앗을 품고 생장시키지만, 싹이 트고 자랄 때까지 모든 변화는 땅속 깊은 곳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시험의 방은 그러한 이치를 그대로 풀어놓았다.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바리는 오행의 권능이 씨앗처럼 제 몸에 심어진 것을 느꼈다.
그녀 자신이 진토(辰土), 권능을 싹 틔우는 봄의 대지가 되는 것이 땅의 시험이었다.
만약 오행의 이치를 모르는 이였다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을 터.
제 몸이 벌써 권능을 품었음을 알지 못한 채,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며 성급하게 밖으로 나섰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시험의 방 밖에서는 동료들이 고통받고 있을 테니 더욱 초조해졌으리라.
그러나 바리는 시험의 방에 들어선 순간 그것을 이룬 인과를 완벽하게 이해했고, 아무런 의심 없이 인내했다.
그리하여 인고의 시간이 지난 지금, 그녀는 권능이 발아했음을 감지했다.
[ (!) 시스템이 새로운 권능을 부여합니다. ]
한발 늦게 팝업창이 떴다.
[ 바리 (무당) ]
* 권능 – 천도, 치성, 예지, 오행 ː 토(土)
* 스킬 – [L]천도(lv.1) [L]치성(lv.1), [L]예지(lv.1), [L]땅 흔들기(lv.1)
* 체력 100/100
* 근력 100/100
* 마력 100/100
* ……
바리는 팝업창을 살폈다.
땅 흔들기는 토속성 각성자에게 발현되는 기본 스킬이었다.
토속성 각성자는 대개 땅을 흔드는 힘에 특정 아이템이나 풍문을 합쳐 주력기로 삼곤 한다.
평범한 각성자라면 새로운 권능과 스킬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이었겠으나, 도사인 그녀의 눈에는 팝업창 너머로 새로운 인과가 보였다.
“……스킬 융합은 이렇게 쓰는 것이었구나.”
[ ‘스킬 융합’ ]
- (!) 특정 조건에 따라 두 가지 이상의 스킬을 융합합니다.
스킬 융합은 평범한 각성자도 사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모든 스킬이 융합 가능한 것은 아니었고, 보통은 2레벨 이상으로 성장한 상태여야만 가능하다는 것이 정설로 자리 잡고 있었다.
다만 만물의 인과를 읽을 수 있는 도사에게는 다른 방식의 융합법도 존재했다.
[ (!) ‘치성’과 ‘땅 흔들기’를 융합합니다. ]
스킬을 융합을 시도하자 시야 가득히 무수히 많은 문자열들이 떠올랐다.
본래라면 오랜 시간 치성을 드려 부적에 새겨 넣었을 인과였다.
하나 시스템을 통하면 부적이 아닌 스킬에 직접 인과를 새겨 넣을 수 있었다.
“부적에 치성을 드리지 않고 스킬 융합 시스템으로 구상한 인과를 발현하는 것…….”
찬찬히 인과를 읽어 내리던 그녀가 이내 팝업창을 닫았다.
업신 던전에서 사용했던 바위를 소환하는 주술을 비롯하여 몇 가지 인과가 떠올랐으나, 당장은 새기지 않고 그냥 두었다.
현재 그녀의 치성은 1레벨.
스킬 융합을 사용해도 하나의 주술만 발현할 수 있었다.
어떤 주술을 선택할지는 좀 더 신중하게 고려할 생각이었다.
시험이 끝났다.
새로운 권능과 스킬을 확인했으나 바리는 방을 나서지 않고 잠시 공간을 살폈다.
토속성 오행을 담은 인과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진토(辰土)는 젖은 흙이라 그냥 넘길 뻔했는데…….”
방을 구성한 인과는 분명 비에 젖은 땅을 풀어놓은 인과이건만.
젖은 땅을 풀어놓은 인과를 자세히 살피니 그녀가 해석할 수 없는 문자들이 섞여 있었다.
“청공의 지네에서 봤던 문자들.”
바리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문자들을 살폈다.
청공의 지네가 품은 주술은 그녀가 해석할 수 없는 문자들로 쓰여 있었다.
그것은 지네를 매개로 발현한 주술이 한반도의 주술이 아니었음을 뜻했으니, 그녀는 끝내 그 주술을 해석하지 못했다.
그러나 비에 젖은 땅이라는 인과에 섞어 놓은 문자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비에 젖은…… 비, 빗방울…… 아니, 폭풍우.”
문자를 해석하던 바리가 어느 순간 눈을 크게 떴다.
“폭풍우와…… 낙뢰.”
풀어놓은 인과 중에서 가장 위험한 인과를 헤아린 순간.
우르르릉!
콰아아아앙!
시험의 방 밖에서 굉음이 터졌다.
***
시험을 끝낸 우리는 다소 여유로운 마음으로 바리를 기다렸다.
아직 구석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강림 형은 내버려 두고, 나와 단군, 사라와 호구별성은 한데 모여 앉아 별것 아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슬슬 끝날 모양입니다.”
시험의 방을 돌아본 단군이 말했다.
“공간에 새겨진 인과가 완성되었습니다.”
나는 딱히 변화랄 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무언가가 보이는 거겠지.
자연히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려 할 때였다.
우르르릉!
콰아아아앙!
불현듯 홀의 중앙에서 굉음이 터졌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모두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뭐야, 뭔 소리야?!”
깜짝 놀란 호구별성이 벌떡 일어나며 독기를 뿜었다.
“벼락?!”
말이 떨어지자마자 다시 한번 굉음이 울렸다.
우르르릉!
콰아아아아앙!
사방이 번쩍이며 천둥이 쳤다.
심지어 비바람까지 사납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아니, 갑자기 이게 웬 날벼락이냐고!”
독기를 줄줄 흘리며 외치는 호구별성 옆에서 나는 조용히 공감했다.
무엇이든 발생할 수 있는 던전이라지만 어쨌든 여기는 실내가 아닌가.
시험도 잘 마친 마당에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 (!) 뇌신벨덮됩흐 신벨곗굶긍룃흐흐흐 구현베뀐띄받등렷륑빎. ]
천둥 번개가 거대한 홀을 요란하게 울리는 사이 돌연 오류창이 떠올랐다.
쿠우우웅!
쿠우우우웅!
지진이라도 난 듯 홀 전체가 강하게 흔들리더니 한가운데서 불쑥 커다란 흙덩이가 솟아올랐다.
흙덩이는 아무렇게나 뭉쳐지고 늘어지며 생김새를 바꾸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주물러지는 것 같았다.
“저건 또 뭐 하는 짓거린데!”
이윽고 덩치 큰 남자의 모습으로 변모해 가는 흙덩이를 보며 호구별성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저거 말 탄 거 맞냐? 아니 근데 말이 왜 저따위로 생겼어!”
그것은 말을 탄 남자를 흙으로 빚어낸 거대한 진흙상 같았다.
크기도 몹시 커서 체고가 약 4층 건물 정도였고, 말에는 머리가 세 개나 달려 있었다.
크르르릉!
크르릉!
크르르르릉!
세 개의 머리가 제각각 목을 비틀며 울부짖었다.
우르르릉!
콰아아아앙!
기다렸다는 듯 다시금 홀 가득히 우레가 쳤다.
하늘에서 폭포수라도 쏟아지는지 더욱 두꺼워진 빗줄기는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진흙상 주변으로 흘렀고, 곳곳에서 엉성한 인간의 형태로 덩어리지며 몸을 일으켰다.
그 수는 총 일곱으로, 꼭 기승한 남자를 따르는 수하처럼 보였다.
“허.”
팔짱을 낀 사라가 작게 탄식했다.
“한눈에 봐도 우리에게 호의적이지 않구나.”
사라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걸까.
말을 탄 남자가 우리를 향해 곧장 팔을 휘둘렀다.
우르르릉!
콰아아아앙!
남자의 손짓에 반응하듯 홀 곳곳을 때리던 벼락이 우리가 모여 서 있는 곳으로 떨어졌다.
“대왕님!”
외침과 동시에 검푸른 신성이 번쩍였다.
눈 깜짝할 사이 다가온 강림 형이 내 곁에 와서 섰다.
신성을 끌어올린 그가 버릇처럼 커다란 몸으로 나를 가린 직후, 말을 탄 남자를 수행하는 일곱 수하들이 일제히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파아아앙!
화르르르륵!
검푸른 신성과 새빨간 불꽃이 연달아 물 인간들을 덮쳤다.
녹아내리듯 뚝뚝 물을 흘리며 다가오던 물 인간들은 몰아치는 두 힘에 순식간에 증발해버렸지만, 그 또한 잠시뿐.
우르르릉!
콰아아아앙!
남자의 손짓에 또 한 번 폭우가 쏟아졌고, 사라졌던 수하들이 재차 빗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되살아난 수는 여전히 일곱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저리 쉽게 재생하는 걸 보니 다행으로 여기기도 뭣했다.
“야, 우리 시험 아까 끝난 거 아니었어?!”
호구별성이 잔뜩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단군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업경의 권능이 단군에게서 수많은 문자열들을 비추었다.
“던전이 소환 주술을 품고 있습니다.”
새로이 등장한 적들을 살피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 소환?!”
“하지만 소환 주술이 완벽하게 구현된 것은 아닙니다. 의도라기보다는 오히려 사고에 가까운 듯한데…….”
그는 제가 읽은 것을 설명하려 했으나 그의 말에 집중할 겨를도 없이 거듭 일곱 수하들의 공격이 이어졌다.
파아아앙!
화르르르륵!
그에 발설지옥의 신성과 화염 주술은 수하들의 공격째 그들을 덮쳐버렸다.
몰아치는 두 힘에 물로 이뤄진 몸뚱이는 이번에도 속절없이 증발했으나, 폭우가 계속되는 이상 금세 되살아날 터였다.
“폭우를 내리는 본체를 없애야 하나 본데.”
중얼거리며 말을 탄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업경의 권능으로 지체 없이 그것의 본질을 읽었다.
흙으로 빚어낸 거대한 몸.
그 안에 품어진 무언가.
한데 그 무언가가, 어째선지 여타 몬스터들과는 달리 흡사 신성처럼 느껴졌다.
“급소가 따로 있군요.”
옆에 선 단군이 말했다.
“저 흙덩이를 움직이는 힘의 근원을 없애야 합니다.”
그도 나와 비슷한 것을 보았다.
“맞아요. 흙으로 만든 몸속에 인드라의 힘을 발현하는 매개가 있어요.”
그때 뒤쪽에서 자그마한 기척과 함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 개의 머리를 가진 말, 웃차이쉬라바스를 탄 인드라를 구현한 주술이에요.”
시험의 방에서 나온 바리가 깊은 눈으로 말을 탄 남자를 직시하고 있었다.
“인드라라면 서역의 뇌신 말이더냐?”
인상을 쓴 사라가 바리의 말을 받았다.
“그래, 그래서 저것이 폭우를 부리는 것이로구나.”
나는 인드라를 노려보았다.
업경의 권능이 신성을 감지한 것은, 저것이 정말로 인드라의 신성을 매개로 만들어졌기 때문일까?
그러한 의문을 품자, 파악한 정보를 하나로 규합해서 진실에 가까운 결론을 내리는 업경의 통찰이 뇌리를 스쳤다.
앞서 야마라자의 이름이 적힌 책과 나의 혼으로 힌두교의 죽음의 신 야마를 깨우려고 했던 것처럼.
이 던전도 인드라의 힘을 담은 매개와 다른 누군가의 혼으로 뇌신 인드라를 깨우려 했다고.
그런데 의도대로 주술이 구현된 것이 아니라 사고에 가깝다는 단군의 말과 같이, 어째서인지 진짜 인드라가 아닌 인드라의 힘을 부리는 껍데기만 깨어났다.
또한 거기까지 파악했을 때, 왜 그토록 남해의 용신들이 나를 산 채로 잡아들이려 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다시 한번 내 혼을 제물로 야마를 깨우려고 한 것이다.
……어쩌면, 야마와 인드라 외에도 또 다른 신을 깨우려는 움직임이 있을지도 모르겠는걸.
우르르릉!
콰아아아앙!
인드라가 우리를 향해 폭우를 퍼부었다.
쏟아지는 빗물 속에서 일곱의 수하들이 달려 나왔다.
인드라의 수하라면, 그를 따르는 폭풍우의 의인화 마루트들이 분명했다.
“핵심은 저 말을 탄 놈이군.”
신성을 끌어 올린 강림 형이 짓씹듯 말했다.
“네, 그러나 무작정 본체를 치는 것은 옳은 답이 아닐 겁니다.”
단군이 계속해서 인과를 읽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용신 조각상을 구성했던 인과와 기운이 비슷합니다. 본체 또한 어설픈 공격을 가하면 끊임없이 복구되겠지요.”
“염병, 하나같이 까다롭게 구네!”
호구별성이 암녹색 신성을 일으키며 이를 갈았다.
그럼에도 형과 달리 곧바로 공격에 나서지 못하는 것은, 융합 풍문으로 소진한 마력이 전부 회복되지 않아서일 터였다.
모아 둔 신성으로 마력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는 형과는 달랐으니까.
즉, 적은 더 강한 상대를 내세웠음에도 우리는 잃어버린 전력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
“혹시 그 복구라는 것, 흙으로 하는 건가요?”
그때 차분히 상황을 살피던 바리가 물었다.
그러자 바리를 돌아본 단군이 눈을 휘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이쪽에도 흙을 움직일 수 있는 분이 계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