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장. 바다 무덤(4)
화르르륵!
우리를 둘러싼 새빨간 불의 벽이 걷히고,
그 즉시 창칼을 든 용신상들이 매서운 기세로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손을 맞잡은 두 차사를 중심으로 막대한 신성이 휘몰아치면서, 보이지 않는 힘에 가로막힌 듯 조각들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흐음, 불가살이 던전에서 망령들을 상대할 때와 똑같구나.”
자개 의자에 앉은 사라가 느긋한 얼굴로 말했다.
“춤이 시작되면 적들이 움직임을 멈추는군.”
그의 말대로 죽음의 무도는 풍문이 발동되는 순간 두 신의 신성이 폭발적으로 증폭되면서 적들이 주춤하게 되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이러면 구경하기도 좋지.”
사라가 흡족하게 등을 기대며 내가 안은 팝콘통으로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에 오리지널 팝콘이 가득 쥐어진 모습은 꼭 하얀 꽃이 넘치듯 피어난 것처럼 보였다.
꽃감관은 이런 순간마저 쓸데없이 우아했다.
생불왕이 정성껏 빚어낸 몸이란 이처럼 종종 엉뚱한 상황에서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래, 둘 다 훤칠한 게 조화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데.”
팝콘을 입에 넣은 사라가 5천 년의 미학이 담긴 눈으로 두 신을 살폈다.
“아무래도 사내 쪽은 얼굴을 가려야 그림이 살겠구나.”
냉정한 평가에 나는 멋쩍게 웃으며 두 신의 춤을 지켜봤다.
원래도 아름답기로 이름났던 역신에, 삼백차사들 중에서도 가장 근사한 강림차사가 아니던가.
두 선남선녀가 손을 맞잡은 광경은 그것만으로도 눈길을 끌기 충분했다.
사라의 지적대로 강림 형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창백하게 질렸다는 것만 빼면 아주 멋진 그림이었다.
형은 그녀의 손을 놓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가진 기력을 모두 쥐어짜 내고 있는 것 같았고, 그래서인지 무도를 주도하는 것은 호구별성이었다.
……뭐, 그림 리퍼와 함께할 때와 달리 호구별성도 빨리 끝내고 싶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호구별성은 쭉쭉 뻗은 팔다리로 멋지게 리듬을 타고 있었는데,
강림 형은 뭐랄까…… 온몸이 뻣뻣하게 경직된 자태가 흡사 거대한 나무 기둥처럼 보였다.
“야, 제대로 안 하냐?!”
결국 춤을 이끌던 호구별성이 버럭 성질을 냈다.
“염병, 내가 지금 춤을 추는 건지, 돌부처를 옮기는 건지!”
그러나 계속되는 질책에도 형의 춤은 바람에 떠밀리는 드럼통처럼 점점 더 둔해지기만 했다.
그나마 호구별성이라는 춤바람을 맞아 어떻게든 굴러가고 있을 뿐, 이미 그녀의 성질을 받아칠 여력 따위는 없어 보였다.
“에이, 말을 말아야지.”
영혼을 잃은 형이 대답 없이 흔들리기만 하자 호구별성 역시 입을 꾹 다물곤 혼신의 힘을 다해 드럼통을 굴렸다.
뚝딱거리는 사지를 박자에 맞춰 여기로 끌었다 저기로 미는 역신의 모습은 더없이 고결했다.
그렇게 사신과 역신의 희생 어린 춤사위가 어떻게든 무르익어 갈 즈음.
불현듯 두 신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던 신성이 찬란하게 빛났다.
죽음과 역병의 기운이 완연히 일대를 잠식했다.
[ ‘죽음의 무도’ ]
- 분류 : 풍문(E)
- 내용 : 역병이 죽음과 손을 맞잡았으니, 그것이 죽음의 무도였다.
- 효과 : (!) 해당 풍문은 융합 풍문입니다. 역신과 사신의 조화로 일대에 죽음을 내립니다.
“됐다!”
팝업창이 뜨면서 호구별성이 기다렸다는 듯이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몸은 어느새 인간의 형태를 벗고 암녹색 안개처럼 변해 있었다.
안개로 신을 붓칠한 듯한 자태는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역병을 형상화한 것만 같았다.
풍문이 완벽하게 발현된 것이다.
“호오, 저쪽은 저렇게 되는 건가?”
지켜보던 사라가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변한 것은 호구별성만이 아니었다.
융합 풍문을 발동한 그림 리퍼가 로브를 걸친 악마의 형상으로 돌아갔듯이, 강림 형도 잘 차려입었던 스리피스 정장을 벗고 차사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우와.”
나는 형을 올려다보며 새삼 감탄했다.
검은 갓 아래로 검푸른 눈이 서늘한 빛을 흘렸다.
커다란 몸을 감싼 두루마기 자락은 살아 있는 그림자처럼 일렁였다.
그가 품은 죽음의 신성이 가시화되었기 때문이리라.
칠흑 같은 신성을 갓과 두루마기처럼 휘감은 모습은 저승에서 봐왔던 모습과는 또 달라서 나는 ‘의인화된 죽음’을 새삼 실감했다.
“야, 피차 똑같이 거지 같으니까 빨리 끝내자, 엉?”
형을 위아래로 훑은 호구별성이 연기 같은 팔로 그의 목을 휘감으며 말했다.
스며들듯 감싸 오는 역병의 기운에 죽음은 진저리치며 신음했지만, 빨리 끝내자는 말에는 동의하는지 적들을 향해 굳건히 팔을 들어 올렸다.
촤아아아악!
단 한 번의 손짓.
검은 소맷자락이 반원을 그렸고, 죽음의 신성이 폭풍처럼 적들을 덮쳤다.
역병과 죽음의 창궐에 주위를 가득 메웠던 적들이 가루처럼 바스러졌다.
소요된 것은 그저 찰나.
역신과 사신의 조화는 그토록 불길하고 위협적이었다.
“무척 매력적인 광역기군요.”
지켜보던 단군이 흥미를 드러냈다.
한반도 최강자의 눈에도 죽음의 무도는 뛰어난 풍문인 모양이었다.
공격의 범위와 위력은 대개 반비례하기 마련이니까.
확실히 이 정도로 근사한 광역기는 드물 것이다.
나는 허공에 뜬 영향력을 곁눈질하며 그에게 물었다.
“우리의 시험은 이것으로 끝난 건가요?”
용신 조각상을 모두 쓰러트림으로써 던전의 영향력은 50%가 되어 있었다.
보통은 영향력이 50% 밑으로 떨어졌을 때부터 보스와의 싸움이 시작되곤 하지만, 보스 몬스터가 등장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나머지는 시험의 방에서 치성을 드리는 바리에게 달려 있겠지.
“네, 다른 절반은 권능에 도전하는 이의 몫입니다.”
단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도전자의 치성이 끝날 때까지 마력을 조절하며 쉬지 않고 전투를 벌여야 할 테지만, 저희는 그냥 기다리면 됩니다.”
역시 죽음의 무도를 시험한 것은 옳은 판단이었다.
단군의 확언에 나는 곧바로 두 차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호구별성은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이 표정을 잔뜩 찌푸리고 손을 탈탈 털었다.
그러나 그 옆의 형은 장갑을 털거나 벗을 생각도 못 하는지 여전히 창백한 낯으로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어쨌든 무사히 시험을 끝낸 것은 두 신의 활약 덕분이었다.
나는 우선 호구별성에게 다가갔다.
“누나, 수고…… 어, 음, 많으셨어요.”
다만 가까이서 본 호구별성의 눈빛이 몹시도 흉흉한지라, 나는 뒤늦게 역병의 분노가 무서워서 살짝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게. 진짜 수고 많았지. 생각보다 훨씬 더 지독한 일이었어.”
내 말에 호구별성이 독기를 뿜으며 대꾸했다.
강림 형이 더 괴로워하는 걸 보면 괜찮을 줄 알았건만, 막상 손을 잡고 보니 그것만으로는 버티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다음엔 그냥 너랑 할래.”
퉁명스럽게 내뱉은 그녀는 도통 성이 가라앉지 않는지 씩씩대며 사라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사라가 앉은 의자를 뻥 걷어차며 잔뜩 신경질을 부렸다.
“에잇, 영감탱이! 나도 의자 내놔!”
그래도 기세가 죽지 않은 모습을 보니 나름 괜찮아 보여 다행이었다.
“이리도 간곡하게 부탁하는 모습을 보니 역신답구나, 별성.”
“염병! 빨리 내놓기나 해!”
정답게 대화를 나누는 호구별성과 사라를 뒤로하며, 이번에는 강림 형을 보았다.
충격이 대단했던 걸까.
형의 안색은 조금도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제야 실감한 걸지도 모르겠다.
뒤늦게 자기 손을 내려다보는 형에게서 점차 깊이를 더하는 절망이 전해져 왔다.
마치 부정과 분노, 타협의 시간이 지나고 기나긴 우울의 순간이 찾아온 것 같았다.
“형, 고생 많으셨어요.”
“…….”
조용히 다가가 등을 토닥이자, 깊게 침잠된 눈이 나를 향했다.
평소처럼 표정이랄 게 없는 얼굴이었지만 49년을 함께한 나는 알 수 있었다.
형이 저렇게 상처받은 눈을 하는 것은 세 번째였다.
첫 번째는 저승이 무너졌을 때.
그리고 두 번째는 우리 대왕님께서 돌아가셨을 때였는데.
그래, 호구별성의 손을 잡고 말았다는 것은 형에게 그런 의미였다.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형이 이윽고 나직하게 말했다.
“……발설이가 보고 싶습니다.”
그는 그렇게만 말하고는 더 말할 기력도 없다는 듯 던전 한구석으로 쓸쓸히 걸어갔다.
저승의 멸망, 대왕님의 죽음, 잇따른 참사를 겪고도 형의 너른 등이 그렇게나 작아 보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서, 나는 그저 애틋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형.
처음이라 그렇지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야.
나는 속으로만 속삭이면서 천천히 형에게서 물러났다.
발설이한테 데려다줄 수는 없지만 이대로 바리가 나올 때까지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해줄 생각이었다.
지금 잘 다스려 두어야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융합 풍문을 효과적으로 쓸 수 있을 게 아닌가.
시험이 끝난 홀은 고요하기만 했다.
호구별성은 사라를 구박하는 것으로 융합 풍문의 스트레스를 풀었고, 강림 형은 던전의 구석에 서서 만날 수 없는 발설이 대신 무너진 조각들을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나는 바리가 들어간 시험의 방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내 옆에 앉은 단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단군.”
“네, 염라.”
그는 여느 때처럼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던전의 오류에 대해서 짐작하는 바는 없나요?”
이쪽의 시험은 해결되었다지만 오류창이 뜬 이상 완전히 경계를 풀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니, 혹시.”
따라서 살짝 얼굴을 굳히며 신경 쓰였던 문제를 꺼내 들었다.
“던전에 오류가 있을 것을 짐작하지는 않았나요?”
미래를 보는 그가 던전의 오류를 정말 모르고 인도했을까, 라는 의심.
“물론…… 무언가 있을 수 있다는 짐작은 했습니다만.”
단군은 여전한 미소를 띠고 선선히 대답했다.
“던전에 관련된 미래가 보인 것은 아닙니다. 제가 쉬이 볼 수 없는 미래도 분명 존재하니까요.
“당신도 볼 수 없는 미래요?”
“으음,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좋을까. 우주가 제게 보여줄 수 없는 미래라고 할까요.”
“…….”
썩 명쾌하지 않은 대답에 인상을 찌푸렸다.
-내 선택이 과연 정말로 나의 의지일까?
-저는 한 번도 제가 제 의지로 살아간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언젠가 바리와 나누었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도사들은 스스로 바라는 미래를 설계하고 실현하며 살아가면서도,
결국 자신들이 설계한 미래란 우주의 선택에 달려 있을 뿐이라 말하던 그때가.
“다만 남해가 지옥수를 키울 때 필요했던 땅의 권능을 이곳에서 얻지 않았을까 추측했습니다. 그렇다면 필요에 따라 던전에 어떤 조화를 부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지옥수를 키우기 위해선 분명 많은 권능이 필요했을 터.
단군의 차분한 설명에 나는 천천히 납득했고, 그리하여 마지막 의문을 입에 담았다.
“그럼 왜 미리 말하지 않았던 건가요?”
“아직은 추측에 불과하기도 했거니와…….”
단정한 눈이 부드러운 반원을 그렸다.
“제가 그것을 미리 말했다면 그분의 마음이 불편하셨겠지요.”
“아…….”
작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권능을 얻고 가겠느냐는 물음에 망설임 없이 강해지고 싶다고 대답하던 바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던전에 정체불명의 오류가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바리는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지 못했으리라.
그 애는 우리마저 위험해질 가능성을 보려 했을 테니까.
……그래, 그런 이유였나.
나는 그의 대답에 더는 되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믿기 어려우셔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내 반응을 오해했는지 그는 나직이 덧붙였다.
“머지않아 그분의 눈이 더 깊어지시면, 굳이 제게 신경을 쓰실 필요도 없어지실 겁니다.”
나는 묘한 기분이 되어 단군을 응시했다.
바리의 성장을 바라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현시점에서는 바리조차도 그에 대해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말을 곱씹으면서.
“아니, 나는 믿을 겁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딱히 믿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나와 시선을 맞추던 그는 이내 바리가 들어간 시험의 방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경계는 놓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업경의 권능으로 그의 시야에 비친 문자열이 흘러들었다.
그의 말마따나 던전을 구성한 인과를 계속해서 살피는 모습이었다.
“어떠한 오류인지는 아마 시험이 완전히 끝나면 밝혀지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