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장. 바다 무덤(3)
융합 풍문.
둘 이상의 시전자가 특정한 조건에 따라 시전하는 풍문.
우리에게는 사신과 역신이 손을 잡고 춤을 춤으로써 발동되는 ‘죽음의 무도’라는 강력한 융합 풍문이 있다.
죽음의 무도는 사신과 역신의 조화로 일대의 적들을 한 번에 없애버리는 광역기였으니, 지금 같은 상황에 최적인 풍문이었다.
당장 두 차사가 손을 맞잡고 융합 풍문을 시전하라는 내 명령에, 가장 충성스러운 차사께서는 검푸른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항명하겠습니다.”
“…….”
즉위한 후 처음으로 맞닥뜨린 막내 차사의 항명이었다.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통탄스러움을 느끼며 형을 설득했다.
“형, 우리 지금 위험한 상태잖아요. 아슬아슬하게 전투를 이어갈 필요 없이 눈 딱 감고 한 방으로 끝내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리하지 않아도 저는 대왕님을 지켜드릴 수 있습니다.”
파아아앙!
형이 검푸른 신성으로 재차 용신상들을 쓸어버리며 대꾸했다.
언제나처럼 믿음직스러운 충신의 모습이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죽음의 무도는 우리가 쓸 수 있는 풍문 중에서 가장 강력한 풍문이었다.
다만 아직 강림 형과 호구별성이 한 번도 호흡을 맞춰 본 적이 없어 실전에서 바로 쓰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청공에서도 재생하는 적들을 압도적인 화력으로 해치워야 했지만, 지금보다 더 상황이 급박했기에 이 풍문을 염두에 둘 수조차 없었으니까.
그러니 이 던전은 분명 좋은 연습이 될 터였다.
지금 미리 합을 맞춰 두면, 훗날 광역기가 필요한 순간에 최후의 필살기로 죽음의 무도를 쓸 수 있을 것이다.
파아앙!
파아아아앙!
파아아앙!
하나 강림 형은 내 말을 듣지 않고 일대를 전부 쓸어버릴 기세로 발설지옥 스킬을 퍼부을 뿐이었다.
형의 맹렬한 기세에 조각상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지만, 안타깝게도 그중에 반 이상이 다시 살아나서 덤벼들었다.
나는 되살아나는 조각들을 가리키며 재차 형에게 말했다.
“형, 이 던전은 마력을 아끼는 게 포인트잖아요. 그렇게 몰아붙인다고 해결되는 게 아닌데.”
내 말에도 형은 거침없이 조각들을 날려버리며 말했다.
“모아 둔 신성을 사용하면 마력이야 다소 회복할 수 있으니 문제없습니다.”
“우와! 그러면 죽음의 무도를 써도 형한테는 마력이 남는군요!”
“…….”
아차, 무심결에 본심을 말해버렸네.
나는 부덕한 왕을 향하여 번뜩이는 충신의 눈을 피해 헛기침을 했다.
때마침 창을 든 조각상 하나가 내게 달려드는 통에, 형은 발설지옥의 힘으로 그것을 치우며 나직이 말했다.
“상황이 이토록 위급하니 이 이상 말씀을 듣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파아아아앙!
“다음에 다시 말씀하시지요.”
형은 주변에 있는 적들을 보란 듯이 맹렬하게 쳐내기 시작했다.
전투를 핑계로 융합 풍문 소리는 꺼내지도 못하게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청공에 비하면 순한 맛이지만, 이대로 형을 붙잡고 설득하기엔 적들이 쉴 틈 없이 달려드는 상황인 것도 맞는 터라 일단 별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죽음의 무도를 시험해 볼 최적의 타이밍은 지금인데.
형은 절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화르르르륵!
그때 불현듯 거대한 화염이 우리를 둘러싸듯 치솟았다.
“어…….”
이미 몇 번이나 보았던, 적의 공격을 막아주는 화염의 벽이었다.
나는 눈을 끔뻑이며 화염 주술을 시전한 이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대화를 나누실 시간 정도는 끌 수 있을 겁니다.”
자세한 사정까지야 모를 테지만 눈치껏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단군이 세운 보호벽에 잠시간 적들의 공격이 끊겼다.
덕분에 대화를 피할 구실이 없어진 형이 서슬 퍼런 눈으로 단군을 일견하곤 나를 보았다.
입은 고집스럽게 다물려 있었으나 도끼날처럼 형형한 눈이 꼭 ‘저 인간 놈은 대체 언제 쫓아내실 겁니까’ 하고 묻는 듯했다.
“호오…….”
옆에서 팔짱을 낀 사라가 불의 벽을 둘러보며 나지막이 감탄했다.
“앞서 미로에서도 느꼈다만 꽤나 튼튼한 벽이구나.”
그러고는 나와 강림 형을 돌아보며 여상하게 말했다.
“춤 한 번 출 시간 정도야 얼마든지 버틸 수 있겠어.”
평소와 같은 무심한 눈.
그러나 아주 조금이지만 분명하게 올라간 입꼬리.
당사자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써 감추려는 게 보이는데도 저리 티가 나다니.
매사에 시큰둥한 저승의 최고령자께서는 두 차사의 춤을 대체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 걸까.
“저 노괴가…….”
아니나 다를까 낌새를 알아챈 강림 형이 으르렁거렸다.
“아니, 잠깐만!”
그가 당장이라도 사라에게 달려들 기세로 주먹을 움켜쥐는 것과 동시에 다른 한쪽에서 새된 목소리가 울렸다.
“보자 보자 하니까 어이가 없네?!”
불쑥 독기를 뿜어낸 호구별성이었다.
“전하, 설득하려면 나부터 설득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녀가 신경질 가득한 목소리로 내게 쏘아붙였다.
“왜 난 당연히 시키면 할 거라고 생각해? 나도 저 시커먼 놈한테 귀한 손 내주기 싫어!”
“앗…….”
그 날카로운 태도에 나는 그제야 낭패감을 느끼며 호구별성과 눈을 맞추었다.
생각해 보니 호구별성도 강림 형을 싫어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형만 잡고 설득하려 했으니, 그녀는 당연히 마음이 상했을 터였다.
강림 형이 설득되어도 호구별성이 설득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 아닌가.
아직도 많이 서투르구나.
다음부터는 처음부터 같이 설득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말자, 제연아.
“그래, 그렇지!”
호구별성이 더한 거부감을 품기 전에 서둘러 입을 떼려는데, 나보다도 먼저 나선 강림 형이 무척이나 반가운 얼굴로 호구별성을 돌아보았다.
“삼천 년 만에 처음으로 이치에 맞는 소리를 하는군, 흉물!”
무심코 멈칫한 나는 두 차사를 번갈아보았다.
호구별성의 말에 저토록 기꺼워하는 형이라니.
옛날 일까지야 모르지만 천이백 년 만에 처음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
그에 비해 호구별성은 무언가 오묘해진 표정이 되어선 답지 않게 환해진 강림 형을 빤히 쳐다보았다.
“뭘까. 나 진짜 저놈 손 잡기 싫거든? 근데…….”
말꼬리를 늘린 그녀가 혀로 입술을 핥으며 씩 웃었다.
“나보다 저놈이 더 싫어할 걸 생각하니까 갑자기 기분이 좀 좋아지네?”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나만 죽지 않겠다는 비범한 태도가 과연 역병의 신다웠다.
“역시 태생이 남을 괴롭히는 역병이로군!”
역신에게 배신당한 꼰대가 곧바로 삿대질을 했다.
“사고방식이 아주 고약하기 짝이 없어!”
이유야 어쨌든 호구별성이 마음을 먹었다면 좋은 일이었다.
나는 이 기세를 놓치지 않고 다시 한 걸음 형에게 다가갔다.
“형, 그때 제가 명령하면 따르든지 자결하든지 한다고 하셨잖아요.”
“자결하겠습니다.”
형은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대답했다.
“…….”
정말 죽을 만큼 호구별성이 싫은 걸까?
하지만 기껏 절반이나 왔는데 고작 그런 이유로 뒷걸음질 칠 수는 없었다.
나는 저승에서 가장 용맹스러운 두 차사가 손을 맞잡는 광경을 반드시 보아야 했고, 이 마음을 아낌없이 담아서 눈을 간절하게 떴다.
“그치만 형이 자결하면 이제 우리나라에는 차사가 둘 밖에 안 남는데요.”
내 간곡한 말에 죽음을 각오하던 충신의 눈이 가늘게 흔들렸다.
“정녕 명령을 거두지 않으시겠단 말씀이십니까.”
“네.”
“…….”
“근데 형이 이대로 자결하는 건 무섭긴 해요.”
“…….”
“그러면 함께 저승을 재건할 차사가 둘밖에 안 남으니까…….”
“…….”
차라리 자결하겠다는 형의 의지만큼이나 명을 거두지 않겠다는 나의 의지 또한 확고하다는 어필.
이대로 가면 나라의 재건이 저승의 일등악과 이등악의 손에 달리고 만다.
자신이 떠난 이후를 상상하는 듯, 형은 흔들리는 눈으로 한없이 번뇌한 끝에 짓씹듯 말했다.
“나라가 대체 나한테 해준 것이 무엇이라고…….”
충신이 나라를 저버릴 만큼의 증오라니.
이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무거운 마음이었다.
이쯤 되니 더 이상 형을 설득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형은 목을 자를지언정 호구별성과 손은 잡지 않겠다는 굳건한 얼굴로 변함없이 나를 직시했다.
그 눈에 담긴 의지를 마주하자 결국 한발 물러서는 것은 내가 되리란 걸 직감했다.
세상에는 부러질지언정 결코 꺾이지 않는 것들이 존재한다.
역신과는 손을 잡지 않겠다는 사신의 결연한 의지가 그러했다.
정말로 형이 자결하게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아, 거 손 한 번 잡는 것 가지고 되게 비싸게 구네!”
한데 돌연 호구별성이 퉁명스럽게 끼어들었다.
“여기 사신이 너밖에 없냐? 너 아니라도 딱히 아쉬울 것 없거든?”
그러곤 내게 손을 뻗으며 짓궂게 웃었다.
“어때, 전하. 우리 춤 한번 출까?”
“어…… 아!”
융합 풍문의 포기를 앞두고 상심할 겨를 따윈 없었다.
나는 뒤늦은 깨달음에 눈을 크게 떴다.
그래, 따지고 보면 염라대왕도 사신이잖아!
“그럼 누나랑 제가 먼저 시험해 볼까요?”
지금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진 풍문 중 가장 강력한 광역기를 시험하는 것.
형이 자결을 택할 만큼 호구별성과 춤을 추는 게 싫다면 억지로 설득할 필요 없이 내가 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제가 춤은 잘 못 추는데…….”
다만 다들 보는 앞에서 춤을 추려니, 역시 좀 부끄러워서.
조금 쭈뼛거리며 나서자 호구별성이 자신만만하게 입꼬리를 당겼다.
“짜식, 걱정 말고 이 누나가 하자는 대로만 하면 된다.”
보기만 해도 신뢰가 차오르는 멋진 미소였다.
나는 수줍은 꼬마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호구별성이 내밀어 온 손을 맞잡았다.
“그럼 부디 잘 부탁…….”
그녀가 능숙하게 내 몸을 끌어당기며 스텝을 밟으려는 순간이었다.
“멈춰주십시오……!”
한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안 될 말씀이십니다! 대왕님께서 직접 손을 더럽히시다니요!”
“……?”
이건 또 무슨…… 생각지 못한 행동일까.
의문을 담아 형을 올려다봤다.
어째선지 손목을 쥔 손은 싸늘하게 질린 채였고, 숨까지 미약하게 가빠져 있었다.
“역신에게 더럽혀진 손으로 어찌 나라를 다시 세우신단 말씀이십니까. 대왕님께서 그런 수치를 겪으시는 것을 저는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아니, 형…… 난 호구별성 안 싫어하는데…….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잠자코 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지켜봤다.
별안간 다 죽어가는 그가 너무도 비장했으니까.
“대왕님께 그런 고초를 겪게 할 바에야, 제가…….”
손목을 붙든 충신은 어느새 영혼이 무너지기 직전의 표정이 되어선 끝내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예, 차라리 제가…….”
“누나, 형 하겠대요. 빨리 가죠.”
화염의 벽이 언제까지 버텨줄지 모르는 상황이라 끊어질 듯 느리게 흘러나오는 그의 말을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대충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하자마자 빠르게 말을 끊었다.
“염병, 눈물 나는 충신 납셨네! 눈물이 아주 삼도천을 이루겠어!”
내가 슬쩍 잡힌 손목을 빼내자 호구별성도 시큰둥한 얼굴로 형과 마주 섰다.
형은 전에 없이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와 눈을 맞추고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실감한 듯 낯이 창백해졌다.
한쪽은 이미 빈정상했고, 한쪽은 빈정상하다 못해 넋이 나간 얼굴.
하지만 표정이 뭐 그리 중요하겠나.
어쨌든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두 차사를 지켜보자니 마음이 훈훈해졌다.
무릇 사랑은 증오보다 위대한 법일지니.
형이 호구별성을 미워하는 마음보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다면 그걸로 좋은 일이 아닐까.
그리하여 저승의 위대한 두 차사가 손을 맞잡고 융합 풍문을 펼치게 되었다.
“후후후!”
지켜보는 내내 어떻게든 표정을 관리하던 사라가 그제야 나지막이 웃음을 터트렸다.
“내 이 순간을 기다리며 준비해 둔 것이 있지.”
입꼬리를 시원하게 말아 올린 그가 인벤토리에서 익숙한 자개 장식이 들어간 의자 세 개를 꺼냈다.
도깨비들의 솜씨가 분명했다.
“자, 편히 앉아서 구경하거라, 대왕.”
가운데 자리에 날 앉힌 사라는 그 자신도 내 오른쪽 자리에 앉았다.
구태여 권하지 않아도 단군 또한 알아서 남은 자리에 앉았다.
메이드 바이 도깨비 아니랄까 봐 쿠션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의자는 몹시 편했다.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한 거라면 원래 단군이 앉은 의자는 바리의 몫이었겠지.
곧 펼쳐질 멋진 광경을 바리와 함께 보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취향껏 즐기거라.”
의자에 이어 사라가 내민 것은 팝콘이었다.
오리지널과 캐러멜이 반씩 담긴 팝콘통은 제법 커다래서 끌어안다시피 받아 들었다.
고소한 버터 향기와 달달한 캐러멜 향기가 자연히 코끝에서 맴을 돌았다.
하루 이틀 전에 준비했을 리는 없는데.
사라는 대체 언제부터 이 순간을 기다려 왔던 걸까.
“덕분에 멋진 구경을 하게 되었군요.”
왼쪽에 앉은 단군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손은 자연스럽게 뻗어 와 캐러멜 팝콘을 집어 들고 있었다.
우려와 달리 나름대로 파티에 적응한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조금 안심하며 팝콘통을 단군 쪽으로 살짝 기울여주었다.
그렇게 구경꾼들까지 준비를 마친 후.
형이 고뇌에 찬 눈으로 호구별성에게 말했다.
“기다려라.”
“뭐? 왜 또?”
“장갑과 몸 중 무엇을 버릴지 결정하지 못했다.”
“…….”
장갑이라면 도깨비가 만든 검은색 반장갑일 텐데.
장갑이든 맨손이든 호구별성과 닿은 무언가를 버리겠다는 뜻이잖아.
형의 극단적인 태도에 내가 할 말을 잃은 사이,
호구별성은 그저 귀찮다는 듯 장갑 낀 형의 손을 내려다보곤 턱! 하고 박력 넘치게 그 손을 잡아챘다.
“아, 천 살도 넘은 놈이 염병을 아주 오지게 떠네!”
“으으윽!”
불시에 손을 잡히자마자 형이 괴롭게 신음했지만, 그러든 말든 호구별성은 계속해서 윽박질렀다.
“닳냐? 닳어?! 닳는 것도 아닌데 비싸게 굴고 있어!”
“크으, 크으윽……!”
호구별성의 신경질에 형의 얼굴이 점점 더 하얗게 질려 가는 그때였다.
[ (!) 대상의 카르마에 따라 ‘풍문(E)’이 발동됩니다. ]
모두가 기다렸던 팝업창과 함께,
화르르르륵!
무대의 장막을 걷듯 사방을 둘러싼 화염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