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장. 바다 무덤(2)
오행의 권능을 얻을 수 있는 던전이라니.
뜻밖의 제안에 나뿐만 아니라 차사들과 바리의 시선까지 단군에게 집중되었다.
“이곳은 용의 영역이잖습니까. 멀지 않은 곳에 진(辰)의 던전이 있습니다.”
그가 친절한 어투로 설명을 이었다.
진(辰)이라면 십이지의 다섯 번째인 용이다.
십이지 던전은 한반도 곳곳에 생성되었는데, 오행의 권능을 얻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용이 관장하는 오행은 토(土).
즉, 그곳에 가면 토 속성 권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흐음, 그러고 보니 바리가 익힌 오행이 그쪽이었지?”
호구별성의 눈길이 바리를 향했다.
도사들은 천기를 읽는 것 외에도 주력으로 쓰는 오행 주술이 있다.
바리의 경우에는 토 속성이었다.
다만 아직 오행의 권능을 얻지는 못해서 부적에 미리 치성을 드려 놔야 쓸 수 있다고 했다.
“도사는 다른 각성자보다 오행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지요. 권능을 얻으시면 치성을 드릴 필요 없이 미리 구성해 둔 인과로 주술을 쓰실 수 있을 겁니다.”
단군도 바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두 번째 신분이 적탑의 부탑주인 그는 화 속성 도사이며,
그가 다루는 불의 벽 같은 화염 주술은 화 속성 권능을 얻고 직접 고안한 주술이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일반 각성자들은 오행의 권능으로 각성하더라도 기본으로 주어지는 스킬 외에는 따로 그것을 증폭시킬 풍문을 얻어야 하지만,
도사는 오행을 다루는 인과를 구성해서 직접 주술을 고안한다고.
같은 속성의 권능을 가진 도사일지라도 인과를 해석하는 실력에 따라 쓸 수 있는 주술은 천차만별이란 거구나.
그래서 단군이 한반도 제일인 것이고, 바리 역시…… 한반도에서 손꼽히는 도사가 될 수 있을 테지.
“어떡할래, 바리?”
바리에게 묻자 소녀의 깊고 검은 눈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흔들림도,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 눈동자였다.
“갈래요, 오빠.”
잔잔한 눈동자만큼이나 차분한 목소리.
하나 업경의 권능은 바리의 대답이 떨어지는 순간 아이로부터 밀려들어 오는 묵직한 감정을 읽어 냈다.
“북해로 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고 싶어요.”
위험과 맞닥뜨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닌, 더 높이 올라가고자 하는 향상심에서 비롯된 무게였다.
나는 바리가 그러한 무게감을 내비칠 줄 몰라 조금 놀랐지만 이내 기껍게 고개를 끄덕였다.
***
무사히 한정판 장난감을 주문하는 데 성공했는지 단군은 더 이상 단말기를 확인하지 않았다.
다만 묵묵히 앞만 보며 걸었다.
여전히 일행들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걷는 그가 신경 쓰였지만, 옆에서 느껴지는 새파란 눈빛에 별다른 말은 걸지 못했다.
막상 입을 열자니 무슨 화두가 좋을지 난감한 탓도 있었다.
단군의 안내를 따라 얼마를 더 걸었을까.
마침내 우리는 토 속성 권능을 얻을 수 있는 진(辰)의 던전에 도착했다.
“오, 이거 왕릉이잖아?”
던전 입구 앞에 선 호구별성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감탄했다.
“용왕네 무덤 컨셉이냐?”
그녀의 말대로 던전은 바닷속에 세운 왕릉 같았다.
언덕처럼 높은 봉분은 멀리서도 눈에 띌 정도로 거대했고, 용궁처럼 울긋불긋한 산호와 하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왕릉으로 이어지는 길의 양옆으로는 갑주를 입은 용신 조각상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눈에 박힌 흑진주가 반짝이며 꼭 살아 있는 듯한 생동감을 피워 냈다.
“진토(辰土)의 기운을 담아 용왕의 무덤처럼 만들었나 보구나.”
사라가 재밌다는 듯이 한마디 했다.
용의 기운이 담긴 흙이니 이는 곧 용왕의 무덤이 되었다는 뜻.
그래서인지 갑주를 입은 조각상들은 모두 용의 머리를 한 용신들이었다.
“들어가기 전에 알아 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던전을 안내한 단군이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시다시피 토 오행은 조화와 믿음을 상징합니다. 진토의 던전은 권능에 도전하는 이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하는 이들까지 서로에 대한 믿음을 시험하려 할 겁니다.”
“음, 그러니까 우리한테도 귀찮은 일이 생길 거라는 말이지?”
호구별성이 팔짱을 끼며 어깨를 으쓱였다.
본래 권능을 얻는 던전이란, 권능을 얻고자 하는 이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시련에 맞서는 것을 규칙으로 할 텐데.
이 던전은 특이하게도 파티원들까지 함께 시험을 치르게 되는 모양이었다.
“시험받는 이는 오행의 이치를 깨달을 때까지 오행의 기가 담긴 비석에 치성을 드려야 합니다. 그동안 다른 이들은 밖에서 기다리며 믿음의 시험을 치르게 되죠.”
단군의 설명이 이어졌다.
“시험받는 이를 몬스터에게서 지키는 것입니다.”
듣기에는 간단명료하지만, 기도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채 하염없이 몬스터를 상대하는 일이 과연 쉬울까.
육체와 정신을 동시에 소모하는 시험이 될 터였다.
“그들이 시험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친다면 권능을 얻기 위해 도전한 이는 죽게 되겠지요.”
“흐응, 그래서 서로에 대한 믿음을 시험한다는 거구나.”
호구별성이 가볍게 수긍했다.
“뭐, 어중이떠중이들이야 기도가 얼마나 걸릴지 불안할 테지만 우린 그럴 필요 없지.”
그러고는 씩 웃으며 바리를 돌아보는 것이, 혹시라도 바리가 실패할지 모른다는 의심 따윈 전혀 없는 얼굴이었다.
하긴 그건 나도 다르지 않았다.
오행의 이치를 깨닫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이미 오행 주술을 익힌 바리라면 충분히 해낼 테니까.
“그러면 들어가 볼까요?”
주의사항도 들었겠다, 우리는 왕릉 안으로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 (!) 공간의 지배베멋뇬깬뚜흐흐흐이 바뀝니다. ]
던전에 진입한 사실을 확인하듯 팝업창이 떴다.
[ ‘바다 무덤’에 입장하벨곽땍귀룔흐흐흐니다! ]
- (!) 해당 던전벨덮됩흐 등급은 ‘영웅담’입베깩됩흐다.
- 클리어 조건 : 무덤벨덮됩흐 시험벨덫꿨흐 벴괼뇩력륫흐흐흐하십시오.
“뭐야, 또 오류야?”
팝업창을 뒤덮은 오류에 작게 한숨 쉬자마자 호구별성이 짜증스레 독기를 뿜었다.
“이쯤 되면 아주 한반도에 정상적인 던전이 존재하긴 하는지도 의심스러울 지경이야!”
하필 우리가 찾았던 던전마다 꼭 오류가 있던 게 사실인지라, 나는 그녀를 달랠 생각도 못 하고 그냥 멋쩍게 웃었다.
호구별성의 말마따나 업신 던전 외에는 전부 오류가 있었으니까.
오류 섞인 팝업창을 보자마자 한숨이 나온 것도 내심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한데 웃다가 문득 얼음 산호 던전에서 얻은 암리타에 생각이 미쳤다.
남해 용왕은 분명 한반도 밖의 각성자들과 손을 잡았다.
거기다 그들이 지옥수를 키우던 얼음 산호 던전에서 암리타가 나왔던 것을 고려하면, 남해의 협력자는 역시 힌두교의 힘을 쓰는 각성자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이 던전의 오류는 단순한 오류가 아닐지도 모른다.
얼음 산호 던전처럼 남해가 어떤 목적을 위해 손을 대면서 발생한 오류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렇게 생각하면…… 단군이 먼저 우리를 이곳으로 안내한 것이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걸리고 만다.
던전의 공략법을 알고 있던 그가, 정말 오류의 존재를 몰랐을까.
“아…….”
그런 생각을 하며 나도 모르게 단군에게 시선이 닿았을 때였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날 보고 있던 그가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었다.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도전자를 위한 시험의 방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뿐.
단군은 내게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고 바리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왕릉 내부는 축구 경기장만 한 거대한 홀이었다.
그곳에는 앞서 보았던 용신 조각상들이 열과 오를 맞춰 도열한 상태였는데, 그 한가운데 홀을 가로지르는 단 하나의 길이 나 있었다.
그 길의 끝에 산호와 조개 등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문이 보였다.
아마 그 문이 시험의 방으로 이어지는 것이리라.
“와, 딱 봐도 저 돌대가리들이 살아나서 떼거지로 덤빌 각인데?”
호구별성이 빽빽하게 공간을 메운 용신상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저 뻔하다는 표정을 보니 새삼 신들도 헌터 시대에 익숙해진 것이 실감났다.
“그럼 다녀올게요, 오빠.”
앞으로 나선 바리가 곧게 서서 말했다.
언제나처럼 초연한 눈에서는 긴장감 대신 의연함이 느껴졌다.
“이쪽은 걱정 말고 다녀와.”
가볍게 손을 흔들자 대답 대신 굳건한 믿음이 업경의 권능을 통해 전해졌다.
우리가 도망치지 않겠다는 것이야 물론 당연한 얘기였지만, 그래도 속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는 바리에게서 우리를 향한 신뢰가 전해져 오는 건 분명 기쁜 일이었다.
[ (!) 무덤벨덮됩흐 시험벨덱꿨흐 시벨뎬결흐됩니다. ]
바리가 시험의 방으로 들어간 직후 기다렸다는 듯 팝업창이 떴다.
드르르륵!
동시에 빽빽하게 늘어서 있던 용신 조각상들이 일제히 우리를 쳐다보았다.
“봐라, 내 저럴 줄 알았다!”
호구별성은 되레 의기양양해져선 암녹색 신성을 끌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용신상들이 각자 손에 쥔 흙칼과 흙창을 휘두르며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파아아앙!
암녹색 신성이 번쩍인 순간 조각상들이 볼링공을 맞은 볼링핀처럼 쓰러져서 나뒹굴었다.
파아앙!
뒤이어 검푸른 발설지옥의 신성도 옅게 퍼지며 조각상들을 휩쓸었다.
적의 머릿수가 많기는 하지만 단군이 경고했던 것치곤 너무 약한데.
두 차사가 차례로 용신상들을 쓰러트리는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을 때였다.
“어?”
아무렇게나 깨지고 부서져 바닥을 구르던 파편들은 별안간 자석이 이끌리듯 저들끼리 뭉치더니, 금세 몸을 수복하고 다시 멀쩡한 모습으로 일어섰다.
“미친, 이거 아예 못 쓰러트리는 거야?!”
처음과 다름없어진 적들을 노려보며 호구별성이 독기를 뿜었다.
쓰러트리는 것은 쉬웠지만 그만큼 재생하는 것도 쉬웠다.
무심코 헛웃음이 샜다.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이대로는 꼼짝없는 소모전이었다.
“일정 이상의 힘으로 완벽하게 없애지 않으면 계속해서 일어나는 시스템인 듯합니다.”
화염 주술로 조각의 일부를 불태운 단군이 답했다.
“다만 그러한 방식으로는 마력 소모가 상당하겠지요. 조각상을 전부 없애기 전에 힘이 다해 곤란해질 수 있습니다.”
결국 이 던전의 포인트는 힘을 조절하는 것.
처음부터 막강한 화력으로 조각을 전부 없앨 수 있다면 쉬이 전투가 끝나겠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결국 힘은 힘대로 깎인 채 끊임없이 수복되는 조각상들을 상대해야 한다.
권능에 도전하는 시험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만큼 상당히 지난한 싸움이 될 터.
“……음?”
단군의 조언에 따라 ‘막강한 화력’에 대해 생각하던 나는 멈칫했다.
홀 안을 빽빽하게 채운 용신상들 사이로 두 차사의 신성이 연달아 번쩍이는 것을 보자 불현듯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모든 조각을 압도적인 힘으로 한 번에 없앨 방법.
있잖아?
그래, 언젠가 사신과 역신이 춤사위를 벌였던 것처럼.
마침내 저승에서 가장 용맹한 두 차사가 손을 맞잡고 무수한 적들을 쓰러트릴 때가 온 것이다.
“형.”
나는 검푸른 신성을 번쩍이며 적들을 쳐내는 충신을 곧게 응시했다.
“형, 왕의 명령이면 뭐든지 따르는 것 맞죠?”
“……?”
내 물음에 언젠가 같은 질문을 들었던 충신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참으로 늠름하여 나는 방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