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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46화 (146/187)

43장. 바다 무덤(1)

북해로 떠나는 길.

하룻밤 푹 쉬고 든든한 아침 식사까지 마친 우리는 마침내 용궁을 나설 준비를 했다.

아직 용궁의 정비가 끝나지 않아 별다른 의전 없이 두 용왕이 직접 배웅을 나왔는데 그 자리에는 뜻밖에도 저승 삼신이 함께였다.

원래도 딱히 살가운 면이 없는, 20년 전 우리 대왕님께서 저승의 문을 닫을 때도 그럼 이제 바다로 돌아가겠다며 훌쩍 저승을 떠났던 양반인지라 그녀가 배웅을 나온 것은 꽤나 의외였다.

그런 내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기라도 한 걸까.

저승 삼신이 퉁명스럽게 팔짱을 꼈다.

“하여튼 반가운 기색이라곤 눈곱만큼도 없구나, 새 염라.”

미간을 찌푸린 그녀가 못마땅한 기색으로 혀를 찼다.

“내가 네 독을 고쳐준다고 용왕의 가호도 내놓았는데 고맙다는 소리도 없고.”

아, 그러고 보니 단군이 내 독을 고칠 감정꽃을 들고 올 수 있던 것은 저승 삼신 덕이었다.

상황이 상황이라 그녀와 따로 말을 나눌 겨를이 없었다.

나는 차오르는 민망함에 뒤늦게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나을 수 있었습니다, 저승 삼신님.”

고개를 들자 황금빛 용의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꼬리가 사납게 올라간 터라 다른 용들보다도 훨씬 더 매서운 인상이었다.

엉터리 생불왕 노릇을 하다가 밀려나자, 모든 아기들이 태어난 지 100일 만에 온갖 병에 걸려 죽게 되리라 저주했던 고약한 신.

새로운 생불왕이 아기가 태어나면 너를 위한 제를 올려주겠다며 달래고서야 저승에 와 죽은 아기들을 돌보게 된 저승의 삼신.

그 드센 용의 눈과 마주하자 나는 꼼짝없이 그녀와의 강렬한 첫 만남을 떠올렸다.

47년 전, 내가 저승 삼신이 돌봐야 할 갓 난 쌍둥이의 명부를 찢었을 때였다.

그녀는 노발대발하며 나를 자신의 궁으로 불러들였고, 아기들의 명부를 찢은 죄로 눈물이 쏙 빠질 만큼 혼쭐을 냈다.

-너는 아직도 생이 죽음보다 귀하다 여기겠지. 그래서 그런 짓을 저질렀을 테고.

매사에 시큰둥하고 퉁명스러운 저승 삼신이었으나, 그때만큼은 오래된 신의 현묘한 눈을 하고서 그녀는 말했다.

-천만에! 생과 사는 떼어놓을 수 없고, 그렇기에 생과 사는 동등하다! 저승왕의 차사가 어찌 그것을 모르느냐!

언제든 명부를 찢을 수 있는 내게 그녀는 몇 번이고 거듭하여 말했다.

-그러니 이것의 죽음의 무게다, 어린 차사여.

-사람을 살리고자 할 때 너는 반드시 이 무게를 되씹어야 할 것이다.

-그 생이 과연 이만한 무게를 가졌는지,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것이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그녀는 내게 가르쳐주려 했던 것이리라.

차사가 명부를 찢으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를.

모든 차사들이 언젠가는 깨닫게 되는 그 뼈아픈 진실을.

“그새 탄생의 아들이 되었더군.”

“아…….”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이승 삼신이 저승 삼신에게도 나를 아들이라고 말했구나.

이승 삼신을 새로운 어머니로 모시고 절을 올렸음에도 다른 이의 입에서 전해 듣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아직도 죽음보다 생이 더 귀하더냐.”

저승 삼신이 물었다.

“…….”

나는 그 질문에 멋쩍게 웃었다.

그녀가 대답을 듣기 위해 물은 것이 아님을 느꼈기 때문이다.

꿰뚫을 듯 날카로운 용의 눈이 내 심장께, 잘랐으되 끊기지 않은 탯줄을 향했으니까.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더 할 말 없다는 듯이 시선을 거두어 두 용왕을 보았다.

“뭐 해? 바쁜데 빨리 줄 거 주고 애들 보내.”

“으음…….”

저승 삼신의 재촉에 동해 용왕이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품에서 작은 함을 꺼냈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진주와 조개로 장식한 것이 한눈에 봐도 귀해 보이는 함이었다.

“이것은 동해와 서해의 보물이네, 염라.”

용왕이 함을 열어 보였다.

“용의 비늘이지.”

그의 말대로 함에는 푸른색 비늘과 흰색 비늘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에엥? 영감탱이들, 설마 자기 비늘을 보물이라고 모셔 둔 거야?”

잔뜩 실망한 호구별성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난 또, 용궁이 3만 년씩이나 아껴 뒀다길래 어떤 귀한 보물일까 기대했는데!”

“흠흠.”

동해 용왕은 호구별성의 반응이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하곤 함을 닫았다.

“보통의 비늘과는 다르네. 여의주와 함께 만들어진 비늘이니까. 여의주처럼 동서 바다의 정기가 담겨 있지.”

“어쨌든 비늘이란 거잖아.”

“……끄응.”

동해 용왕이 덧붙인 설명에도 호구별성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결국 용왕은 침음하며 내게 함을 내밀었다.

“어쨌든 잘 부탁하네, 새 염라.”

“네. 걱정 마세요, 용왕님.”

나는 건네받은 함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보물을 모두 모으면 태초의 바다가 열린다고 했지.

그렇다면 여기에 남북 용왕의 비늘까지 더해지는 순간 바다의 신화가 시작되는 걸까.

“자, 새 염라야. 이것도 받아 가라.”

동해 용왕에 이어 서해 용왕도 내게 무언가 무거운 꾸러미를 넘겼다.

“화기가 담긴 패물이랑 영약, 북해로 가는 지도. 그리고 간식도 좀 넣었다.”

화기가 담긴 패물이라면 한랭한 산호를 얻으러 갔을 때 썼던 서해 용왕비의 패물일 것이다.

북해에는 빛이 닿지 않는 데다가 극음의 기운으로 몹시 춥다고 했으니 꼭 필요할 터였다.

그런데 살짝 열어본 꾸러미 속은 어째 알록달록한 게…… 패물과 영약보다도 간식이 더 많이 보였다.

“……?”

아니, 이거 그냥 간식 꾸러미 아냐?

식사 때마다 내 옆에 앉아 이것도 저것도 다 먹어 보라며 그릇에 얹어주던 서해 용왕 아닌가.

내가 북해로 떠나면 더는 챙겨주지 못하니 그게 못내 마음 쓰였던 걸까.

꾸러미는 산호를 갈아 넣은 약과처럼 내가 유독 잘 먹었던 간식들로 가득한지라, 용왕이 먹여주는 밥에 배가 터질 듯 괴로웠던 것도 잊고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조심해서 다녀오시오, 염라!

그때 불쑥 이 자리에 없는 이의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어라.”

나는 고개를 들고 다시 서해 용왕을 바라봤다.

왜 그에게서 막내 왕자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했더니, 익숙한 고등어가 서해 용왕의 풍성한 수염 속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거기 계셨어요, 왕자님?”

“음, 막둥이가 원래 내 수염을 좋아해.”

서해 용왕이 대신 대답했다.

“원래는 본신일 때만 하던 놀이인데, 그새 애가 더 작아지는 바람에 이 모습으로도 할 수 있게 됐지.”

문득 살이 너무 쪄서 동굴에 몸이 끼었던 서해 용왕의 본신이 생각났다.

많이 크긴 했지.

탈을 씌우러 올라갈 때도 콧구멍에 잘못 빠질까 봐 긴장할 정도였으니.

그토록 거대하다면 어린 용 정도는 충분히 용왕의 수염을 덮거나 가로지르며 놀 수 있었을 거다.

“무사히 돌아오면 새 염라 너도 내 수염에 들어가서 놀게 해줄게.”

서해 용왕이 수염 속의 고등어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인심 쓴다는 듯이 뿌듯해 보이는 얼굴에 나도 옅게 웃었다.

“네, 기대하고 있을게요.”

용왕의 수염 속에 누워 보는 것도 나름 진귀한 경험일 테니까.

“흠, 그럼 인사는 다 된 거지?”

지켜보던 저승 삼신이 상황을 마무리하며 우리를 돌아봤다.

“영감탱이들이 2만 년 전에 싼 똥을 치우러 가는 것이니 모쪼록 별일 없길 바란다. 저승 놈이 바다에서 죽을 순 없지 않느냐.”

상대가 저승 삼신이란 걸 고려하면 정말이지 상당한 덕담이었다.

나는 저승 삼신과 용왕들에게 다시금 고개를 숙인 뒤 일행들과 함께 천천히 용궁 문을 나섰다.

***

음, 용궁 밖으로 나온 것은 좋은데.

“…….”

용궁을 벗어나 걷기를 한참.

나는 조금 난감한 기분으로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흐음, 생각보다 더 많이 걷는구나. 무언가 탈것을 얻어올 걸 그랬어.”

“그러게. 그러고 보니 용신들은 해마를 닮은 신수를 길들여서 타고 다닌다던데, 어릴 때 들은 얘기라 완전히 까먹고 있었지 뭐야.”

“덕분에 다리 아프고 좋구나, 별성.”

사라와 호구별성은 여느 때처럼 가볍게 담소를 나누며 걸었고.

“적당한 탈것을 찾지 못하면 며칠 야영을 해야 할 듯합니다.”

강림 형은 옆에서 조용히 필요한 간언을 건넸으며.

“바리, 너는 좀 어때? 오래 걸어도 괜찮겠어?”

“이 정도는 가뿐해요. 어렸을 때부터 산에서 살았는걸요.”

“하긴 새벽 세 시에 깨서 치성을 드리는 네가 허구한 날 잠만 자는 영감탱이보다 팔팔하겠지.”

호구별성은 사라와 얘기를 하다가도 종종 어린 바리를 챙겨주었는데.

“…….”

나는 임시 일행이 된 단군을 힐끔 곁눈질했다.

용궁을 나온 이후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다른 차사들은 인간인 그에게 굳이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바리는 간혹 묘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긴 했으나 따로 말을 걸지는 않았다.

단군 또한 일행들의 태도에 괘념치 않고 우리와 약간 떨어져서 걸을 뿐이었다.

그 사이에서 정작 불편해지는 것은 나였다.

폭삭 망했다가 겨우 다시 모은 식구들.

하루가 멀다 하고 으르렁거리지만 그래도 나름 사이좋은 파티라고 생각해 왔는데…… 겉도는 인원이 생겨버린 것 아닌가.

나를 제외한 다른 일행들은, 심지어 단군 본인마저도 딱히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에게 눈길을 줄 때마다 강림 형이 날 빤히 바라보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힐끔거리게 되었고,

그가 한 걸음 떨어진 채 핸드폰…… 아니, 헌터 전용 단말기만 내려다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하아.”

단군과 우리의 관계가 마냥 긍정적이지는 않다지만 그래도 그렇지.

당장 북해는 물론이고 훗날 북유럽에도 함께 가야 할 텐데, 그때도 내내 단말기만 보게 할 순 없지 않은가.

결국 나는 형이 못마땅해할 걸 각오하고서 단군에게 다가갔다.

“뭔가 중요한 게 있나 봐요?”

단말기에 관심을 보이며 물었더니, 집중하고 있었는지 드물게도 단군의 눈이 살짝 커지며 놀란 감정을 드러냈다.

“아, 죄송합니다. 한정 판매 알림 메시지가 와서요.”

“한정 판매요?”

뭐 특별한 아이템이라도 사는 걸까?

호기심에 슬쩍 그의 단말기 화면을 보았다.

한데 눈에 들어온 것은 아이템이 아니라 유명 장난감 기업의 로고가 박힌 블록 장난감이었다.

기와집 위에 고래가 누워 있었는데, 청색 몸통에 빛을 쏘자 결 하나하나가 별이 쏟아지듯 은빛으로 반짝이는 모습이 연출되어 있었다.

“어…….”

생각지도 못한 물건에 나는 바로 반응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을 비틀어 표현한 건가?

한정판이라서 그런지 언뜻 봐도 무척 예쁘긴 한데…….

-이를테면 포기했던 한정판 장난감이 재판매된다든가, 그런 미래는 다행히 이제 보이지 않거든요. 그런 건 미리 알면 재미없지 않습니까.

한발 늦게 그가 이전에 했던 말이 기억났다.

수도 없이 많은 미래가 보이는 와중, 사소한 기쁨에라도 집중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어 보였던…….

그래, 그때 그 말은 진심이었구나.

“그러고 보니 장난감을 좋아한다고 했었죠.”

부러 가볍게 화제를 이어가자, 그는 단정한 눈을 휘며 환히 웃었다.

“네, 좋아합니다.”

이런 말을 하기엔 좀 그렇지만, 일순 장군의 모습으로 보일 만큼 어린아이 같은 미소였다.

인간을 말하며 지친 듯 웃던 그때와는 많이 달랐다.

한반도 최강의 각성자라는 사람이 그토록 아이처럼 웃을 수 있다는 게 새삼 놀라워서 기분이 묘해졌다.

-아, 등록해 주시는군요.

뒤이어 떠오른 것은, 단군이 메신저 아이디가 적힌 쪽지를 건네주던 그날.

-새 친구가 생기는 건 15년 만입니다.

“…….”

그는 늘 속내를 감추었고, 해서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단편적인 조각이라 할지라도 하나씩 판에 올리다 보면 끝내 만들어지는 그림이 있었다.

10년이 넘도록 한반도 인구 절반이 안티팬인 데다, 15년간 메신저로 안부를 나눌 수 있는 친구조차 사귀지 못했으며, 일신의 낙이라곤 방구석에서 장난감을 만지는 것뿐인…… 그러한 남자의 초상이었다.

이걸 어쩌면 좋지.

나도 모르게 눈썹이 자꾸만 팔자로 쳐졌다.

강림 형의 서슬 퍼런 시선을 느끼면서도 도저히 단군에게서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형은 나한테 인간에게 너무 마음을 쓴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저건…… 인생이 너무 불쌍하지 않아?

나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놈이 친구는커녕 인간에 지쳐서 장난감만 좋다고 저러는데, 인간적으로 측은지심이 생길 수밖에 없지 않냐고.

이쯤 되면 일상에 자극이 필요해서 단군으로 개명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짠해지는 마음에 섣불리 말을 붙이지 못하고 바라보고만 있는데, 단군이 어느새 단말기를 집어넣으며 표정을 바꾸었다.

“염라, 제안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여전히 웃음 짓고 있으나, 조금 전 보여주었던 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정돈된 미소였다.

“북해에 가시기 전 잠깐 던전에 들르는 것은 어떠신지요.”

“던전이요?”

나는 그가 별안간 꺼내 든 다른 말에 의아해졌다.

“예. 근처에 오행의 권능을 얻을 수 있는 던전이 존재합니다.”

단군은 바리를 일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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