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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43화 (143/187)

41장. 확전(4)

지키고자 하는 이의 수만큼 분신을 만드는 도산지옥의 권능.

증폭한 마력으로 생성된 117개의 분신들이 일제히 남해 용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모든 분신들이 쥔 검에는 용왕 자신이 쏟아 낸 힘이 열두 배 증폭된 채였다.

“허어……!”

남해 용왕이 비로소 낭패감을 드러내며 눈을 부릅떴다.

그가 뒤늦게 손아귀에 힘을 모았지만, 사방에서 달려드는 분신들을 모두 피해낼 재간은 없을 터.

촤아아악!

촤아아아악!

촤아아악!

수없이 이어지는 분신들의 일격이 모여 황금빛 칼날의 산을 이루었다.

속수무책으로 베여 나가는 남해 용왕의 앞에 선 나는 마지막으로 그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었다.

[ (!) 필드의 법칙을 감지합니다. ]

그 안으로 팔을 뻗자 남해 용왕이 품었던 법칙의 핵이 내 손안에 들어왔다.

오행 ː 수(水), 오행 ː 목(木), 오행 ː 토(土).

세 개의 오행을 비롯한 수많은 법칙들이 느껴졌다.

신화전에서 핵을 처리하는 두 가지 방법.

내 권능을 더하여 법칙의 주도권을 빼앗든가, 혹은 아예 파괴해버리든가.

남해 용왕의 경우, 도산지옥의 권능으로 본신에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하여 그 과정에서 그가 품고 있던 핵 또한 조금만 힘을 더해도 파괴할 수 있을 만큼 약해진 상태였다.

“이쪽의 승리 조건은 왕을 지키는 것. 그러니…….”

나는 핵을 쥔 손에 힘을 실으며 말했다.

“당신이 설계한 법칙을 파괴하면 왕을 향한 위험은 사라지고, 승리 조건도 완성될 테죠.”

“크크큭…….”

남해 용왕이 문득 웃기 시작했다.

“안 되지, 안 돼. 이걸 뺏기면 신앙이 너한테 고스란히 가버리지 않더냐.”

법칙의 핵이 파괴되기 직전, 용왕이 내뱉은 말에 나는 그의 노림수를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이런……!”

패배가 확정된 신화전에서 마지막으로 취하는 전술.

필드에 투자한 자원을 상대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모든 자원을 폭파하는 것.

[ (!) 공간의 법칙이 무효화됩니다. ]

내가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팝업창이 떴다.

쿠우우웅!

쿠우우우웅!

굉음이 울리며 남해 용왕을 중심으로 공간이 일그러졌다.

사방이 소용돌이에 빨려들어 가듯 어지러이 흔들렸다.

그러다가 일순.

콰아아아앙!

폭음을 내며 크게 흔들렸다.

[ ‘왕을 벨검몃밍랩룩논꽥딤냘흐흐’ 필드가 해체되었습니다! ]

남해 용왕이 필드를 전개했던 자원을 전부 폭파시킴으로써 남해의 필드가 저절로 해체되었다.

[ ‘동해의 주인’ 필드가 신화전에서 승리했습니다! ]

[ 신화전이 남긴 카르마가 재구성됩니다! ]

[ 카르마 포인트를 ‘1,100,000’ 획득합니다! ]

[ 신앙을 ‘300,000’ 획득합니다! ]

신화전에 승리함에 따라 남은 자원을 모두 손에 넣었다.

하나 결과적으로 이쪽이 투자했던 자원을 그대로 돌려받았음에 지나지 않았다.

“하아…….”

나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동해 용궁의 궁정 안이었다.

필드가 사라지면서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다만 100여 명의 동해 용신들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바닥 곳곳에 이리저리 쓰러져 있었다.

“뭐야, 이건 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호구별성이 혼란스럽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봤다.

“끝났어?! 끝난 거야?! 우리가 그놈을 이겼어?!”

“일단…… 이기기는 한 듯 보인다만.”

사라가 그녀의 말을 받으며 인상을 썼다.

“어째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구나.”

그가 손을 뻗어 남해 용왕이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용왕이 있던 자리에는 그저 알 수 없는 문자들만이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남해 용왕은 주술로 도망쳤어.”

다만 그곳에는 사라진 용왕 대신 핏물이 흥건히 고여 있어, 도산지옥의 권능이 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래봤자 도망쳤으니 회복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겠지.

“염병! 그렇게 똥폼 잡더니 꽁무니를 뺐어?!”

상황을 파악한 호구별성이 독기를 뿜었다.

나는 그녀가 성을 내는 것을 바라보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일단 모두 무사하니까 다행이에요.”

하마터면 몰살당할 뻔한 것은 사실이니 그냥 가볍게 수긍해주길 바랐건만, 내 말이 끝나자마자 사라와 호구별성이 시선이 곧장 나를 향했다.

직접 입을 열진 않았으나 업경은 두 차사의 복잡한 감정을 전해 왔다.

내가 남해 용왕을 카르마 등급 필드로 끌고 들어간 사이, 그들이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까지도.

단군이 곧바로 마력을 공급하는 꽃나무를 설계한 것을 보건대 아마 내 대신 계획을 설명해 줬을 터였다.

그리고 그것으로는 사라와 호구별성의 걱정을 덜어줄 수 없었을 터였다.

“아…….”

그것을 곱씹자 어느덧 내 곁에 다가선 이를 향해 신경이 곤두섰다.

두 차사와 달리, 업경이 아무것도 읽지 못하는 형에게로.

“형…….”

곁에 선 강림 형이 검푸른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여느 때처럼 불쾌한 일은 없냐는 물음조차 없이 그의 눈은 다만 내 몸을 살폈다.

도산지옥 스킬을 쓰기 전에 사라의 권능으로 몸이 회복되었으니, 카르마 등급 필드에서 입었던 상처는 전부 사라졌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상기하며 멋쩍은 얼굴로 설명인지 변명인지 모를 말을 이었다.

“그, 죄송해요……. 당장 설명할 시간이 없어서 카르마 등급 필드부터 열었는데.”

그러나 몇 마디 하지도 못하고 끝내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상처야 사라졌지만, 남해 용왕을 붙잡고 시간을 끄는 동안 형을 걱정시킨 사실마저 없던 일이 될 수는 없으니까.

-그리 다치실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단 말씀으로 들리는군요.

-왜 제게 그런 방식이라 미리 말씀해주지 않으신 겁니까.

-몸이 이리 상하셨잖습니까.

귀철 던전에서 형을 화나게 만들었던 때가 떠올랐다.

안 그래도 독에 당하는 바람에 형이 책임감을 느끼는 때에 같은 방식으로 형을 상처 입히고 말았다.

나를 바라보는 형의 눈이 무거워 절로 시선이 떨어졌다.

차마 형과 눈을 맞추지 못하고 바로 앞에 있는 그의 넥타이만 바라보며 말을 고를 때였다.

“고생이 많았네, 염라.”

동해 용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대가 결국 서해에 이어 동해도 지켜 냈군.”

신화전의 진행을 멈추기 위해 나무로 변했던 그는 다시 용신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용왕님…….”

잠시 머뭇거린 나는 결국 말을 더 잇지 못하고 형에게서 몸을 돌렸다.

“용왕님도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내 위로 섞인 말에 동해 용왕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쓰러져 있는 용신들을 돌아보며 다른 말을 꺼냈다.

“그대도 알다시피 우리 용왕들에게는 그대의 업경처럼 대상을 살필 수 있는 혜안이 있지.”

고개를 끄덕였다.

서해 용왕도 나를 처음 봤을 때 용왕의 혜안으로 저승의 사정을 꿰뚫어 보았으니.

“나무는 또 다른 나의 본신이네. 나는 목기(木氣)를 품은 동방의 청룡이니 말일세. 뿌리 깊은 나무가 되면 혜안도 함께 깊어지지. 그래서 그 모습으로 오윤 그놈의 속내를 살폈네만.”

그렇다면 나무가 되었던 것이 단순히 내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단 말인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용왕의 무거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놈은 동해 용신들의 육을 빼앗아 군대를 만들 속셈이더군.”

“……군대요?”

“그래……. 지옥의 권능을 심은 군대 말이네.”

생각지 못한 말에 미간을 좁혔다.

용신들의 몸을 뒤덮었던 흑암지옥의 포자, 그리고 일격몰살이라는 말도 안 되는 법칙을 전개하려 했던 남해 용왕이 떠올랐다.

동해의 용신들도 지옥수를 심은 문어 용신들처럼 만들고자 했지만, 그게 틀어지자 아예 다 없애버리려고 했던 걸까.

“한데 그것이 다가 아니야. 지옥의 권능을 심는 것은 과정이지 목적이 아니었네. 그게 무엇인지는 끝내 보이지 않았네만.”

가늘게 눈썹을 떨던 그가 돌연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그들이 노리던 용의 심장은 다행히 그대 덕에 모두 지켰군.”

“아…….”

나는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마찬가지로 쓰게 웃었다.

“네, 그렇네요. 두 분 모두 무사하시니까요.”

또 한 번 긴 한숨이 샜다.

“서해 용왕님께서 돌아오시면 좀 더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있겠죠.”

***

동해의 깊숙한 협곡.

서늘한 냉기가 감도는 동굴 앞에 드리워진 누군가의 그림자가 있었다.

오랜 세월 동해 용왕의 어의로 살아온 붕어 용신이었다.

그는 길게 기른 수염을 쓸어내리며 천천히 동굴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 동굴은 동해의 영역에 있음에도 북해의 냉한 기운이 머무는 곳 중 하나였다.

일 년 내내 얼음이 녹지 않는 동굴.

그 안에는 얼마 전에 한랭한 북방의 산호로 심장을 얼린 서해의 용왕이 잠들어 있었다.

“지금쯤이면 동해도 끝이 났겠구먼…….”

잠든 용왕 앞에 선 붕어 용신이 품속에서 날카로운 단도를 꺼냈다.

작지만 흑암지옥의 힘을 품은 신철이었다.

용왕 본신의 비늘은 뚫을 수 없을지 몰라도, 용신의 모습을 한 지금이라면 이것으로 충분할 터였다.

“3만 년의 세월도 결국 별거 없구나.”

끌끌 웃은 그가 망설임 없이 서해 용왕의 가슴에 단도를 박으려는 순간이었다.

“야.”

강하게 내리꽂히던 단도가 허공에서 덜컥 멈추었다.

“붕어야.”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너 대체 뭐냐?”

단도를 쥔 손목을 부러뜨릴 듯 억세게 움켜쥐며, 어둠 속에서 황금빛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우리 도둑놈 형님이 그러는데, 네가 벌써 3천 년을 어의로 일했다더라?”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진 붕어 용신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수염을 파르르 떨었다.

“용왕…… 어찌……?”

심장이 얼어붙어 깊이 잠들어 있어야 할 서해 용왕이 멀쩡히 눈을 뜨고 저를 보고 있었다.

“이놈, 이제 다 들켰다고 전하 소리도 안 하는 게냐?”

용왕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붕어 용신의 손목을 비틀었다.

“어억……!”

평생 어의로 살며 탕약만 끓여 왔던 그는 별다른 저항도 못 하고 용왕에게 제압되었다.

“대체 어떻게……!”

순식간에 오랏줄에 묶인 붕어 용신이 부릅뜬 눈으로 서해 용왕을 올려다봤다.

서해 용왕의 심장을 얼린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제 손으로 직접 잠들게 한 그가 어떻게 벌써 깨어났는지 붕어 용신은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뭘 어떻게야. 미리 뜨시게 찜질 좀 했지.”

그의 물음에 용왕이 태연하게 붉은 산호를 꺼냈다.

한랭한 북방의 산호를 채취할 때 꼭 필요한, 화기를 품고 있는 산호였다.

“우리 새 염라가 청공의 문어들한테서 재밌는 기억을 읽었지.”

붉은 산호를 휙 내던진 서해 용왕이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이 우라질 붕어가 독이 든 탕약을 먹여서 나를 붕어시키려 한다고.”

‘청공의 문어들’이라 했다.

그럼 이미 그때부터 다 알고 있었다는 건가.

가벼운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용의 분노에 붕어 용신은 수염을 파들거리며 입만 뻐끔댔다.

동해 용왕이 새 염라에게 한랭한 산호를 가져와 달라고 부탁하던 자리에 저 또한 있었다.

계획을 읽은 새 염라가 일부러 그런 그림을 만든 것이다.

또한 알면서도 굳이 새 염라가 직접 산호를 가지러 갔던 것은 흑암지옥의 씨앗을 회수하기 위함이었으리라.

“한랭한 산호가 사는 땅에는 영약이 자라니까 혜와 휼이가 간 김에 얻으려다가 봉변을 당하긴 했다만. 뭐, 독이 퍼진 새 염라가 제일 고생했지.”

쯧, 혀를 찬 용왕이 말을 이었다.

“나는 어린 것들 덕에 아픈 척하면서 잘 숨어 있었단다. 못 본 사이 쪼만해진 막둥이 재롱이나 보면서 아주 푹 쉬었지. 천신이 달여주는 약으로 몸조리도 하고, 형님이 아껴둔 영약으로 보신도 하고.”

그리 말하는 용왕에게서는 정말로 근래에 없던 막대한 신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남해와의 전쟁을 대비해 새 염라가 서해 용왕에게 잠든 척 힘을 비축해 둘 것을 제안한 모양이었다.

“자, 붕어야.”

붕어 용신의 몸을 묶은 오랏줄에 힘이 담겼다.

“우리 이제 돌아가서 진득하게 얘기 좀 해 보자. 네가 3천 년을 동해의 어의로 일했는데, 그럼 너는 대체 언제부터 이 짓을 계획했는지 같은 거 말이야.”

반원을 그리는 황금빛 용의 눈동자가 칼날 같은 형형한 빛을 내뿜었다.

“설마 이걸 3천 년 전부터 계획한 건 아니지 않으냐, 응?”

오랏줄에 담겨 온몸을 죄이는 막대한 신성에 붕어 용신은 꺽꺽대다 그대로 혼절했다.

41장. 확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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