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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41화 (141/187)

41장. 확전(2)

남방적룡 광리왕, 오윤.

남쪽 바다의 지배자를 중심으로 필드가 요동쳤다.

가볍게 들어 올린 손에는 흑암지옥의 기운을 휘감고 있었다.

그가 오도전륜대왕님의 권능을 가진 것이 틀림없었다.

“용왕이 지옥의 힘을 손에 넣었구나…….”

곁에 선 사라가 인상을 썼다.

“다른 용왕들과는 깊이가 다른 힘이 느껴집니다. 단지 저자가 손에 넣은 지옥의 권능 때문만은 아닌 듯합니다만.”

신성을 끌어올린 강림 형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시왕지옥의 권능을 눈앞에 둔 만큼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을 터였다.

“필드를 전개한 막대한 자원의 영향일 거예요. 그걸로 대체 어떤 법칙을 만들고 품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형의 의문에 답하며 남해 용왕을 살폈다.

내가 가진 자원의 수십 배에 달하는 자원이 그의 손에 깃들어 있었다.

그런데 업경의 권능을 통해 느껴지는 그것이, 기이하리만치 불길했다.

악인의 업과는 다른 불길한 무언가가 남해 용왕을 중심으로 번지고 있었다.

그것이 그저 인간의 믿음에서 비롯된 신앙이라면, 왜 이다지도 불길하게 느껴지는 걸까.

“근데 남해 영감탱이, 서해 영감한테 독은 왜 먹였어?”

호구별성이 독기를 뿜으며 물었다.

“형제잖아. 3만 년 한 바다에서 살아 놓고 왜 이제 와서 형님한테 염병이야?”

“글쎄…….”

그녀의 물음에 남해 용왕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바다의 분노에 달리 이유가 필요할까.”

후회도, 원한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은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웃음.

그 웃음에 불현듯 단군과의 대화가 곱씹혔다.

-이를테면…… 사해 용왕이 의미하는 자연의 다면성이라든가.

-동해 용왕이 인간이 문명을 통해 길들인 자연이라면, 남해 용왕은 반대로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재해로서의 자연이라는 뜻인가요?

앞서 나누었던 대화처럼, 눈앞의 존재에게서는 다른 동서의 용왕과 달리 길들일 수 없는 난폭한 자연의 힘이 느껴졌다.

“……!”

그것을 느낀 순간.

업경의 권능이 그에게서 막대한 악의를 감지했다.

콰아아아아앙!

직후 남해 용왕을 중심으로 돌풍이 휘몰아쳤다.

파장창!

파장창창!

파창!

그 돌풍은 괴이하게도 그를 둘러싼 공간을 말 그대로 깨부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유리처럼 갈라지며 날카로운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용신들은 방어조차 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바닥을 굴렀다.

“큿……!”

나는 그 혼란 속에서 남해 용왕을 직시하며 작게 신음했다.

공간이 부서져 내리는 것 따윈 그저 부차적인 현상.

업경의 권능은 남해 용왕이 노리는 것을 꿰뚫어 보았다.

황당하게도 업경이 내게 전해 오는 건 진정 이 공간의 모든 것을 멸해버리겠다는 단 하나의 의지뿐이었다.

“그런 게…… 가능한가?”

그의 뜻을 읽어 내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권능을 더욱 집중했다.

신화전 필드의 법칙은 전능하지 않다.

설계자가 인과를 해석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법칙의 문구 생성에 제약이 있을뿐더러,

제아무리 뛰어난 설계자라 한들 결국 본인 및 소속된 신화가 가진 스킬과 풍문이 밑바탕이 된다.

따라서 아무리 신화전이라고 해도, 한 번에 모든 것을 멸하는 법칙을 만들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 게 가능하다면 신화전은 진작 하나의 법칙으로 다 쓸어버리는 싸움이 되었을 터다.

한데 어째서일까.

대상의 본질을 읽는 권능은 그 말도 안 되는 현상의 실현을 단언했다.

“단군!”

나는 다급히 설계자의 이름을 불렀다.

“남해 용왕이 품은 법칙이 뭡니까!”

업경과는 다른 시선으로 대상을 파악할 수 있는 이에게 물었다.

“……!”

단군의 표정이 일순 굳어지고, 업경의 권능이 단군에게서 무수한 문자열들을 비추었다.

“……일격몰살.”

시시각각 대상의 인과를 파악하는 남자가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그뿐이라는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용왕을 일격에 즉살하지 못하면 모두 죽습니다.”

그 말이 떨어진 직후.

“크크큭.”

말도 안 되는 법칙을 품은 필드의 설계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히 재미있는 일이야. 이런 식으로 신성을 쓸 수 있다니.”

흑암지옥의 권능을 두른 손에 쥐어진, 막대한 자원을 품은 법칙의 핵.

그것이 ‘몰살’이라는 단 하나의 법칙을 실현하기 위해 세차게 흔들렸다.

파장창!

파장장창창!

파장창창!

계속해서 공간이 부서져 내렸다.

날카로운 파편이 사방을 할퀴고 찢었다.

하나 그 모든 것은 한낱 과정에 불과했다.

여기서 막지 못하면 그 황당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법칙이 기어코 실현되고 말 것이다.

“안 돼……!”

막아야 한다.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며 남해 용왕에게 달려들었다.

[ (!) 공간의 지배법칙이 바뀝니다. ]

새로이 법칙을 전개하는 설계자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

[ 염라 ‘이제연’이 자신의 업으로 필드를 전개합니다. ]

- (!) 해당 필드의 등급은 ‘카르마(K)’입니다.

- 해체 조건 : 시전자의 카르마 완전 해체

신앙과 카르마 포인트를 무효화시키는 공간을 펼쳤다.

한순간에 시야가 뒤바뀌었다.

스스로 카르마 등급 필드를 펼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당장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검기만 한 공간이었으나, 나의 평생으로 쌓아 올린 필드는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허…….”

내 필드에 갇힌 용왕이 가소롭다는 듯이 나를 돌아보았다.

“핏덩이 왕 혼자서 날 막아 보겠다는 건가?”

그가 손에 쥐었던 법칙의 핵은 사라져 있었다.

이곳에서 신앙과 카르마 포인트는 쓸 수 없으니, 공간을 깨부수던 그 막대한 힘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존재는 여전히 재앙과도 같았다.

쌍방의 카르마로 전개되는 필드이기에 느낄 수 있었다.

-혹시 제주도에 돌이 많은 이유를 아시는지요, 염라.

-아마…… 섬사람들에게 진노한 남해 용왕이 사흘간 홍수를 일으켜서 돌밖에 안 남았다고 하죠.

남해 용왕의 신화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공포와 경외가 담긴 신화였다.

먼 옛날, 남해 용왕이 자신의 아들을 인간의 섬으로 귀양 보냈을 때.

척박한 환경에 하루건너 하루꼴로 배를 곪으며 살아 왔던 섬의 인간들은 용왕의 아들에게 아무것도 대접할 것이 없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박씨 성의 인간 한 명만 마 뿌리 하나를 나눠 먹은 것이 전부였다.

제 목숨 부지하기도 힘들었던 인간들이 결국 귀한 아들에게 아무것도 바치지 못했다는 소식에.

남해 용왕은 마 뿌리를 나누어 먹었던 박 씨만을 매로 만들어 변고를 피하게 하고는, 섬이 돌밭과 가시덤불로 뒤덮이도록 몇 날 며칠 폭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매로 변한 박 씨가 배가 고파 물고기 한 마리를 주워 먹으려고 하니, 용왕은 그에게마저 진노하여 그를 매 모양의 바위로 만들어버렸다.

그것이 남쪽 바다의 신화였다.

사나운 파도가 육지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휘몰아치는 돌풍에 삶의 터전이 밟힐 때마다,

인간은 그것이 어찌할 수 없는 용왕의 분노라며 경외하고 두려워했으리라.

경외하고 두려워하며 부디 그 분노를 거두고 물러가기를 빌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 이유 없는 재해의 현신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새로운 염라여…….”

성큼 다가온 남해 용왕이 내게 팔을 휘둘렀다.

“나는 그 눈을 안다.”

파아아아악!

검은 파도가 해일처럼 난폭하게 밀려들었다.

그가 품은 흑암지옥의 권능과 남해 바다의 신성이 담긴 파도였다.

“그 눈은 필경 인간의 눈이구나.”

파아아아아악!

드높이 치솟은 파도가 인간은 범접할 수 없는 재해 그 자체가 되어 나를 덮쳤다.

“큭……!”

피할 새도 없이 파도에 온몸이 부딪혔다.

아무렇게나 떠밀려 바닥으로 내쳐졌다.

파아악!

파아아아악!

파아아악!

몸을 일으킬 여유 따윈 없었다.

연달아 몰아치는 파도에 그대로 정신없이 바닥을 굴렀다.

느껴졌다.

지금 나를 몰아세우는 이 힘의 근원이.

억겁의 세월 동안 이어진 자연에 대한 경외와 공포가, 신화적 존재로서 실체화한 것이다.

“나의 분노를 맞닥뜨릴 때마다 살려달라고 엎드려 빌던 인간의 눈이야.”

파아아아아아악!

거대한 해일이 다시 한번 나를 집어삼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일시에 가해지는 충격에 정신이 흐릿해졌다.

흠뻑 젖은 몸은 거친 물살을 가르고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가누기 어려웠다.

나는 난파선 조각처럼 몇 번이고 물속을 구르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이 재해가 지나가기를, 속수무책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재앙에서 무사히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이 전부였다.

자연 앞의 인간이란 결국 그런 존재였다.

“크으읍, 쿨럭……!”

몇 번이고 바닥을 구른 끝에 겨우 눈을 떴다.

“으윽……!”

눈을 뜨자마자 목을 쥔 손에 그대로 끌어 올려졌다.

타오르듯 붉은 머리칼 아래로 황금빛 용의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봤다.

“이, 대로……!”

나는 숨이 막혀 가늘게 경련하는 손으로 나를 들어 올린 용왕의 팔을 쥐었다.

“그냥, 당하지는……!”

약하게 떨리는 손끝을 억지로 바로 세우며 내가 품은 힘을 끄집어냈다.

[ 업경(L) ]

대상의 업으로 신성을 증폭시키는 세 개의 거울.

[ 검수지옥(L) ]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험에 빠뜨린 이를 벌하는 칼날의 지옥이 용왕을 향해 펼쳐졌다.

촤아아악!

촤아아아아악!

촤아아아악!

날카로운 은빛의 신성이 칼날의 숲을 그리며 남해 용왕을 몰아붙였다.

굳건하던 그의 몸이 일순 비틀거리더니, 서슬 퍼런 지옥의 권능에 사정없이 베여 나갔다.

“하아, 하……!”

목을 죄던 힘이 풀리면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뿌옇던 머릿속이 맑아지고, 파도에 짓이겨졌던 몸 곳곳에서 한발 늦게 얼얼한 통증이 올라왔다.

그러나 지옥의 권능에 용왕이 주춤하는 것도 잠시뿐.

“크큭……크크큭!”

죄인의 몸을 베는 칼날의 숲 사이로 용왕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옥, 지옥이라.”

파아아아악!

커다란 웃음에 이어 또 한 번 집채만 한 검은 파도가 내게 쏟아졌다.

파아악!

파아아아악!

파아아악!

거듭 파도에 삼켜진 몸에는 버틸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왜 용왕은 업경으로 증폭된 검수지옥의 칼날에도 멀쩡한 걸까.

파아아악!

파아아아악!

시간의 흐름을 인지할 수 없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난폭한 신성 앞에 위도 아래도 알아보지 못하는 채 엉망진창으로 휘둘렸다.

“말해 보아라, 새로운 염라여.”

그러다 문득, 거친 파도 소리를 뚫고 동굴을 울리는 듯한 저음이 아득한 의식 너머에서 흘러들어 왔다.

“네가 벌하겠다는 나의 업은 대체 무엇이란 말이더냐.”

아.

나도 모르게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나의 권능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자연에는 선악이 없거늘.

업을 비추는 업경은 과연 무엇을 비추고, 업을 벌하는 지옥은 또한 무엇을 벌한단 말인가.

그것을 깨닫자 일격몰살이라는 그 허무맹랑한 법칙의 근원마저 이해했다.

뛰어난 설계자일지언정 일격몰살 같은 밑도 끝도 없이 폭력적인 법칙은 실현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법칙을 실현한 자가 재해의 현신이라면.

모든 것을 파괴하고 지나갈 때까지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던 신화를 법칙의 핵으로 삼는다면.

필드에 사용된 막대한 신앙과 카르마 포인트로 신화를 증폭하여, 일대를 전부 파괴하는 자연의 재앙 그 자체를 실현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쿠우우우웅!

그 가능성을 떠올린 찰나 용왕과 나의 카르마로 전개한 필드가 매섭게 요동쳤다.

“그래, 어디 원대로 해 보거라.”

어지럽게 뒤흔들리는 필드 한가운데 고고히 선 용왕이 말했다.

“저 밖의 모든 것들을 지키려거든, 여기서 네가 나를 없애는 수밖에 없지 않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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