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장. 확전(1)
우리는 단군을 따라 미로를 내달렸다.
길을 안내하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업경의 권능이 그의 시야에 담긴 문자열을 비추고 있어 나는 그가 시시각각 미로의 인과를 해석하고 있음을 알았다.
“미로 안에 깃든 법칙이 옅어지고 있어요.”
한참을 내달렸을 무렵 바리가 조용히 말했다.
“이 미로는 더 이상 우리를 용신들과 분리할 수 없을 거예요.”
“그럼 머지않아 적들과도 마주치겠구나.”
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수의 기척이 느껴집니다, 대왕님.”
내 옆을 지키던 강림 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출구가 가까운 듯합니다.”
강림 형은 신성을 끌어올리며 곧 마주하게 될 적들을 대비했다.
그에 나 역시 업경의 권능을 더욱 날카롭게 곤두세웠다.
좁았던 길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이곳저곳에 솟아올라서 우리를 가로막던 벽도 서서히 모습을 감추면서, 어느 순간 우리는 무척 거대한 공간에 도달했다.
“아……!”
발걸음을 멈추면서 나도 모르게 신음했다.
“용신들이……!”
동해 용궁을 지키던 수백의 용신들이 새까만 포자에 잠식된 채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쓰러진 그들의 몸을 뒤덮은 검은 포자는 흑암지옥의 성분과 같았다.
충격적인 광경에 잠시 얼어붙었던 나는 재차 걸음을 내디뎠다.
용신들과 가까워질수록 아주 미약하게나마 생동이 느껴졌다.
“……아직 다들 살아 있어.”
안도하기에는 일렀지만 최악의 상황은 면했음에 절로 한숨이 샜다.
흑암지옥의 어둠에 의식을 잃은 상태였으나 적어도 죽은 것은 아니었다.
“필드가 만든 어둠입니다.”
용신들을 살피던 단군이 말했다.
“신화전에서 승리하면 어둠을 걷어 낼 수 있을 겁니다.”
쓰러진 용신들이 흑암지옥의 악몽에 시달리는 일은 없으리라는 확언이었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무거운 마음으로 대답했다.
“이기면 되는 거니까.”
애초에 나는 신앙을 쌓지 못한 용신들을 대신해 신화전에 참전했다.
동해 용왕이 내게 신뢰를 보여준 만큼, 나도 그들을 구해야만 했다.
“전하, 저것 좀 봐라.”
주변을 살피던 호구별성이 독기를 뿜었다.
“나무! 그 염병할 나무가 또 있어!”
그녀가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린 나는 표정을 굳혔다.
멀찍이 서 있는, 산호처럼 알록달록한 기둥에 가지가 촉수처럼 꿈틀대는 기괴한 나무.
흑암지옥의 씨앗을 회수했는데도 여전히 흑암지옥의 권능을 품고 있는 지옥수였다.
“……!”
그것을 확신한 순간 업경을 통해 끔찍한 잔상이 흘러들어 왔다.
“지옥수를 심은 용신들을 다시 하나의 나무로 엮었군요.”
업경의 권능이 보여준 것은 거대한 지옥수 너머 산 채로 뒤엉킨 문어 용신들이었다.
몸속에 지옥수의 권능을 심었던 용신들을 어둠에 녹여 나무의 형태로 새로이 빚어낸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현재 신화전을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법칙을 만드는 힘으로, 용신을 녹여서 나무로 빚는다는 말도 안 되는 법칙마저 만들었기에.
“잠깐, 저쪽에.”
불현듯 사라가 손을 들었다.
“나무가 하나 더 있구나.”
그의 말대로 지옥수 건너편에 또 다른 나무가 하나 더 있었다.
주위에 새카만 안개가 깔린 지옥수와 달리, 청옥색의 신성을 품은 나무였다.
갈기처럼 흩날리는 푸른 잎새에 높이 뻗은 기둥도 몹시 크고 푸르렀다.
그 모습을 눈에 담자마자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나무가 아니었다.
나무의 정체를 깨달은 순간 업경이 그의 뜻을 전해 왔다.
“미친, 저거!”
동시에 나무의 정체를 알아본 호구별성도 목소리를 높였다.
“저거 동해 영감이잖아!”
얼핏 나무처럼 보였던 그것은 기실 거대한 청룡이었다.
동쪽의 목(木) 기운을 품은 동방청룡 광덕왕이 나무로 변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배도가 9%에서 멈추었던 이유가 있었군요.”
[ ‘동해의 주인’ 필드가 신화전을 진행 중입니다. ]
- 승리 조건 : 왕 수호
- 지배도 : 9%
동해의 필드는 벌써 긴 시간 고착된 상태였다.
용신들은 모두 지옥수에 당해 쓰러졌고, 남은 동해 용왕이 나를 기다리며 스스로를 나무로 바꾸어 버티고 있었다.
“설계자 권한을 이용해 공격을 포기하는 대신 방어력을 높이는 쪽으로 법칙을 바꾸었습니다.”
단군이 동해 용왕이 변한 나무를 훑으며 말했다.
동해 용왕에게 깃든 법칙을 파악하는 중인지 그가 읽어 내리는 수많은 문자열들이 업경에 비춰졌다.
“오빠, 지옥수에서도 다른 법칙이 느껴져요.”
지옥수 방향을 응시하던 바리가 말했다.
“함부로 건드리면 지옥수가 품은 어둠이 더욱 퍼질 거예요.”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어. 동해 용왕님의 뜻이 느껴지거든.”
나는 동해 용왕의 나무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업경의 권능으로 그를 살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내게 자신의 뜻을 전하길 바랐고, 나는 그가 왜 공격을 포기했는지 알 수 있었다.
“지옥수 안에 법칙의 핵이 있어. 그런데 그걸 파괴하려 하면 어둠에 당한 용신들이 해를 입어.”
결국 청공에서 재생하는 문어 용신들을 상대로 고전했던 이유와 비슷했다.
압도적인 힘으로 한 번에 없애버리지 않는 이상, 공격은 의미가 없다.
오히려 지옥수의 어둠을 퍼트림으로써 적을 더 강하게 할 뿐이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압도적인 힘으로 지옥수를 벨 힘이 있습니다, 염라.”
단군이 말했다.
“필드에 카르마 포인트와 신앙을 더해주시지요.”
손에는 어느새 청옥색의 큐브, 새로운 법칙의 핵을 쥐고서.
“동해 용왕을 포함한 이곳 용신의 수는 총 백 하고도 열둘. 분명 충분할 겁니다.”
나는 그가 추가하려는 새로운 법칙이 무엇인지 바로 짐작했다.
“얼마나 필요합니까?”
현재 우리 측 지배도는 9%로, 그마저도 용신들만 사용 가능한 자원이었다.
그래도 내가 모은 신앙과 카르마 포인트를 필드에 더하면 지배도를 높일 수 있었다.
“대략 카르마 포인트 55만, 신앙 15만 정도면 되겠군요.”
큐브를 굴리며 잠시 생각하던 단군이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내게는 세 번째 천벌과 서해 용궁에서의 신화전으로 대략 115만의 카르마 포인트와 31만의 신앙이 모인 상태였으니, 딱 그 절반 정도의 양이었다.
“혹시 몰라 절반은 남겨 두려고 합니다.”
내가 가진 자원의 양을 정확히 아는 것처럼 단군이 덧붙였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수긍했다.
“필요한 만큼 쓰세요.”
어차피 신화전에서 승리하면 전부 회수하게 될 자원이었다.
단군 정도의 설계자가 자원을 허투루 쓸 리도 없으니 거리낄 이유가 없었다.
“……뭐?”
한데 단군이 말한 만큼 자원을 더했을 때.
“1%p밖에 안 올랐다고?”
[ ‘동해의 주인’ 필드가 신화전을 진행 중입니다. ]
- 승리 조건 : 왕 수호
- 지배도 : 10%
팝업창을 확인한 나는 당혹을 감출 수 없었다.
가진 자원의 절반을 투자했음에도 지배도가 1%밖에 오르지 않았다는 것은, 남해 측이 그보다 몇십 배나 더 큰 자원을 쏟아부었다는 뜻이었다.
순식간에 미로를 전개할 때부터 막대한 자원을 투자했다는 건 알았다만 이렇게까지 압도적일 줄이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때 단군이 다시 말했다.
차분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
그 순간 주어진 정보를 규합해 하나의 결론을 내리는 업경의 통찰이 나를 꿰뚫었다.
지금 단군은 무언가를 예지한 상태였다.
“14분 20초쯤 걸릴 것 같습니다.”
대체 무엇을 예지한 것인지 묻기 위해 입술을 떼려는 찰나.
그의 법칙 생성이 시작되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그것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나는 끝내 더 묻지 못하고 혹시 있을지 모를 불시의 공격에 대비하며 업경의 권능에 집중했다.
“그러니까, 저놈이 지옥수를 한 방에 쓰러트릴 조건을 만든다 이거지?”
“지옥수가 조용한 게 신경 쓰이는군.”
“흐음, 적측 설계자는 모습을 감춘 것 같은데 긴장해야겠구나.”
상황을 파악한 차사들도 신성을 끌어 올렸다.
[ (!) 새로운 법칙이 완성되었습니다. ]
[ (!) ‘동해의 주인’ 필드에 새로운 법칙이 추가됩니다. ]
그러나 긴장이 무색하게도 법칙은 아무런 방해 없이 완성되었다.
파아아앙!
팝업창이 떠오름과 동시에 연녹색 신성이 시야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일대를 둘러싼 신성은 이윽고 기둥과 가지가 하얗게 빛나는 아름다운 나무의 모습으로 변했다.
“두 번째로 바치는 꽃이군요.”
순백의 나무에서 형형색색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꽃을 피워 내며 단군이 말했다.
“당신만을 위한 꽃입니다.”
그의 말과 동시에 흐드러지는 꽃잎이 나를 감쌌다.
[ (!) 신성한 나무가 당신에게 축복을 내립니다. ]
처음 보는 팝업창이었으나 무슨 효과를 지녔는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단군이 세 번째 천벌을 상대할 때, 그에게 막대한 마력을 공급했던 것처럼.
저승의 자원을 먹고 만개한 나무로부터 마력이 흘러들어 왔다.
그래, 지금 가장 필요한 스킬을 완벽하게 시전할 수 있는 마력을.
“……좋습니다.”
나는 곧장 무기를 바꿔 쥐었다.
‘죽음’이 아닌, 황금빛 신성이 깃든 진광대왕님의 대도로.
[ 도산지옥(L) ]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이 담긴 스킬을 시전했다.
[ 도산지옥의 권능이 당신의 신성을 복사합니다! ]
- 구현 가능한 분신 수 : 117
필드에 전개된 새로운 법칙에 따라 구현된 백여 개의 분신들이 나와 함께 지옥수를 노리고 달려들었고,
촤아아악!
촤아아아아악!
촤아아아악!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일제히 검을 휘둘렀다.
쿠우우웅!
쿠우우우웅!
이변은 없었다.
압도적인 힘 앞에 지옥의 나무가 굉음을 내뿜으며 무너져 내렸다.
“……잠깐.”
그러나 공격을 마치고 사라지는 분신들 속에서, 나는 문득 스치는 불길한 감각에 몸을 떨었다.
“뭘 품고 있던 거지?”
지옥수가 무너지면서 안에 품고 있던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파아아아앙!
돌연 청옥색 신성이 눈을 찌를 듯 번쩍였다.
그 막대한 신성에 무심코 눈을 감아버린 건지 아니면 그저 시야가 빛으로 흐려졌을 뿐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이런…….”
낯선 목소리가 귀를 강하게 울렸다.
“생각보다 일찍 잠에서 깨버렸군.”
한없이 낮고도 두꺼운 목소리였다.
“너 때문이지 않느냐, 새 염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타오르듯 붉은 머리칼 아래 황금빛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만물을 내려다볼 만큼 몹시 큰 키에, 기이하게도 나이대를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의 남자였다.
노인 같기도 했고, 장년 같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청년 같기도 한.
분명 인간을 닮은 형태인데도 결코 인간의 기준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얼굴이었다.
“당신이…….”
나는 지금까지 마주했던 신화적 존재들과도 전혀 다른 존재처럼 느껴지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직접 이 신화전을 설계했군요.”
붉은 머리칼과 용의 눈동자.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상대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남해 용왕.”
내 말에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우리 큰 형님도 참 못났지. 창피한 줄 모르고 이런 핏덩이 꽁무니에나 매달리다니.”
휘몰아치는 지옥의 권능을 손에 감은 채로.
“그게 마음에 안 들어서 이 동해를 다 쓸어버리려고 왔단다.”
남해 용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필드가 폭풍우 치는 파도처럼 불길하게 요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