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39화 (139/187)

40장. 개전(4)

콰아아앙!

산군을 중심으로 일어난 폭발.

화르르르륵!

단군이 세운 불의 벽이 폭발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듯 높이 치솟았다.

“……!”

나는 눈을 크게 뜨며 상황을 직시했다.

막대한 두 힘이 부딪쳤고, 강림 형은 커다란 몸을 숙여 나를 감싸 안았다.

형의 어깨 너머로 치솟았던 불의 벽이 한순간에 꺼져버리는 것이 보였다.

쿠우우웅!

굉음이 울리며 공간이 강하게 흔들렸다.

산군이 내뿜는 황금빛과 새까만 어둠이 소용돌이처럼 뒤섞이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를 삼키며 격렬하게 팽창하던 두 힘은,

콰아아아앙!

어느 순간 재차 막대한 폭음을 내며 눈 깜짝할 새 사라져버렸다.

“아…….”

작게 탄식하며 나를 단단히 안은 형의 어깨를 붙잡고 살짝 밀어냈다.

형은 선선히 내게서 물러났다.

두 기운이 완전히 소멸했으니 당장의 위험 요소는 사라졌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

산군과 검은 파도, 두 기운이 사라진 미로는 거짓말처럼 고요했다.

맹렬히 뒤엉키던 두 기운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던 사라와 호구별성, 바리도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내가 없는 사이 설계자와 한바탕 전투를 치렀을 텐데, 다행히 모두에게서 큰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일단 다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나는 두 차사와 바리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 뒤 단군을 돌아봤다.

“어…… 그, 산군은…… 어떻게 된 건가요, 단군.”

내 일행은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단군이 소환했던 산군이 파도와 함께 사라져버린 것이 문제였다.

“정말로 사라진 것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군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산군의 풍문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불러내기 위해선 산의 정기를 모을 필요가 있겠습니다만 큰 문제는 아니지요.”

“……그렇군요.”

괘념치 않는다는 듯 차분한 얼굴에 나도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산신령 산군도 해태 멍군처럼 풍문이었구나.

단군의 말로 짐작건대 풍문으로 불러내는 신령이나 신수는 크게 다치더라도 조건에 따라 회복시킬 수 있는 불사의 존재인 것 같았다.

만약 눈앞에서 저런 식으로 사라진 게 멍군이었다면 나는 뭣도 모르고 엄청 불안해했을 텐데.

역시 신수든 산신령이든 풍문을 다루는 것은 나보다 단군이 훨씬 능숙했다.

“그러면 이 미로의 설계자는 처리된 건가요?”

내 식견으로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어 물었다.

“네, 다만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번 설계자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단군이 미로를 둘러보며 설명했다.

“검은 파도가 사라지니 오히려 이쪽의 지배도가 줄었군요.”

[ ‘동해의 주인’ 필드가 신화전을 진행 중입니다. ]

- 승리 조건 : 왕 수호

- 지배도 : 9%

그의 말대로 팝업창의 지배도는 그림자를 해치우면서 16%까지 오른 상태였으나 지금은 다시 9%로 떨어져 있었다.

“미로 설계에 쓴 자원은 그리 아깝지 않다는 뜻이겠죠.”

딱히 유별난 일은 아니었다.

신화전은 카르마 포인트와 신앙을 소모해서 필드를 설계하고, 승리하는 쪽이 필드에 사용된 자원을 모두 차지한다.

그러니 신화전에서 한 번 패배한다면 당장 치르고 있는 신화전뿐만 아니라, 차후 치르게 될지도 모르는 신화전에서 사용할 자원마저 적에게 빼앗기게 되는 셈이다.

때문에 신화전에서는 사용된 자원을 영구적으로 없애버리는 전술도 존재한다.

전술은 두 가지.

하나는 패배가 예상되는 신화전에서 승자가 자원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마지막 한 수로 필드에 사용한 모든 자원을 폭파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적에게 뺏긴 자원을 실시간으로 폭파하는 것이다.

이 경우는 후자였다.

우리는 적들의 그림자를 없앰으로써 산군을 강화시켰지만, 적들은 그 산군을 검은 파도와 함께 폭파시키면서 우리가 빼앗은 지배도까지 함께 날려버렸다.

본인들이 그림자에 소모한 자원을 영구적으로 포기하는 대신 당장 우리 쪽의 지배도를 낮춘 셈이다.

“염라, 당신이 이 미로를 격파함으로써 지배도를 높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겁니다.”

단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겐 저한테 방해받고 싶지 않은 목적이 있나 보네요.”

그의 말을 받으면서 나는 상대측의 팝업창을 살폈다.

[ ‘왕을 벨검몃밍랩룩논꽥딤냘흐흐’ 필드가 신화전을 진행 중입니다. ]

- 승리 조건 : 왕 벨검몃밍랜흐흐흐

- 지배도 : 91%

이쪽의 승리 조건이 왕을 수호하는 것이기에, 어렴풋이 왕을 손에 넣는 것이라고 추측했었는데…… 무언가 다른 뜻이 있었던 걸까.

그들이 미로에 소모했던 신앙 자원을 그대로 두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흡수해 더 강해졌을 터였다.

즉, 더 강해진 내가 그 목적의 장애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아서, 그것을 막기 위해 아예 신앙 자원을 없애버린 것이다.

“게다가 동해 용왕님 쪽은 지배도가 9%에서 오르지 않고 있어요.”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어쩌면 패배가 가까운 상황에서 어떻게든 신화전이 더 진행되는 것만이라도 막으며 저를 기다리고 계실지도 모르겠어요.”

결국 동해 용왕과 합류해서 신화전의 또 다른 설계자를 무너트려야 했다.

“이대로 다른 설계자와 맞닥뜨리면 돌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단군이 다시 말했다.

“신화전에서 승기를 잡더라도 방심할 수 없는 이유죠.”

“카르마 등급 필드 말이군요.”

나는 곧바로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카르마 등급 필드는 신앙이나 카르마 포인트와 상관없이 자신의 생을 걸고 싸우는 생사결의 필드였으니.

신화전에서 승산이 없을 경우에는 차라리 설계자를 카르마 등급 필드에 가두어 죽이는 전술도 가능하다.

이때는 카르마 등급 필드의 시전자 역시 목숨을 각오할 수밖에 없는데, 이렇다 보니 신화전은 결국 수장끼리의 생사결로 결판이 나는 경우도 많았다.

다만 신화전에서 카르마 등급 필드를 전개할 수 있는 것은 신화의 수장이나 설계자에 한정된다.

무분별하게 생사결을 벌이면 신화전 시스템의 의미가 없으니까.

신화전의 규칙에 따르지 않고 강자가 약자를 상대로 마구잡이로 학살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흐음.”

이야기를 듣던 호구별성이 고개를 갸웃하며 쭉 뻗은 검지로 턱을 긁적였다.

“근데 딴 놈들은 왜 너한테 생사결을 안 거는 거야?”

이야기를 듣다 보니 단군을 둘러싼 한반도의 정세에 흥미가 생긴 모양이었다.

“너랑 다투는 나머지 전설급 각성자들. 그놈들이 차례로 너한테 생사결을 걸면 너라도 살아남긴 힘들 텐데?”

신도 수 2천만 명의 천부인은 한반도에서 가장 많은 신앙을 쌓은 전설이다.

한반도의 다른 전설들이 단군의 천부인과 신화전을 벌이면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신앙과 카르마 포인트로 힘을 높일 수 없는 카르마 등급 필드라면 또 모른다.

카르마 등급 필드에서는 단군도 쌓아놓은 신앙이 아닌 본인만의 힘으로 싸워야 한다.

그는 분명 한반도에서 가장 강한 각성자일 테지만, 차륜전이란 그걸 뒤집는 한 수가 될 수 있다.

“대여섯 명 이상의 전설급 각성자들과 연달아 생사결을 치른다면 아무래도 그렇게 되겠지요.”

단군이 호구별성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덕분에 제가 여태 살아남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는 가볍게 눈을 휘며 덧붙였다.

장난기마저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그에 나는 도리어 조금 인상을 썼다.

‘덕분에 살아남았다.’

그런 방식으로 단군을 쓰러트릴 수 있다고 해도, 그들은 절대 그리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연이은 생사결은 틀림없이 한반도 최강의 각성자를 죽일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마지막에 단군을 꺾는 데 성공한다 한들 앞서 단군에게 덤볐던 이들은 반드시 죽는다.

먼저 생사결을 걸었던 각성자는 죽어 없어지고, 남은 각성자들은 천부인과 죽은 각성자들의 전설까지 손에 넣을 기회를 잡는다.

그러한데 과연 누가 먼저 단군에게 생사결을 걸겠다고 나설까.

‘덕분에 살아남았다’는 건 그런 뜻이었다.

“그분들이 동맹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기로 결심하셨다면, 제가 새로운 대왕님께 처음 인사드린 곳은 아마 저승이었겠지요.”

“생각보다 신랄한 놈이었네, 이거.”

마찬가지로 그의 말을 이해한 호구별성이 팔짱을 끼며 단군을 훑어보았다.

그녀의 반응에 조금 심란해진 나도 단군을 바라봤다.

도의보다 사익을 바라는 이들의 음해에 시달려 왔던 남자가, 바로 그 사익을 바라는 마음에 기대어 살아남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인간을 인간에게 맡겨선 안 됩니다.

내게 그리 말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을 터였다.

그것이 15년 간 인간을 지켜온 남자의 결론이라는 사실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가슴 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착잡해졌다.

그런 눈으로 인간을 바라봐 왔다면, 당신은 대체 무엇 때문에 인간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걸까.

23년의 세월을 건너 다시 만난 영웅은 마치 오랜 시간 폐허에 버려졌던 성상(聖像) 같았다.

고결한 풍모는 여전하였으나 가까이 다가가면 풍화되어 닳아 없어진 얼굴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그가 아무렇지 않게 냉소를 내비칠 때마다, 나는 그를 그렇게 느꼈다.

“대왕님,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때였다.

불현듯 강림 형이 내게 물었다.

“곧장 동해의 용신들을 찾아 나서시겠습니까.”

“아, 음…….”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는 머뭇거리며 형을 돌아봤다.

단순히 말 그대로의 질문은 아닐 터였다.

우리보다 신화전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는 단군이 합류했지만 어쨌든 일행을 이끄는 건 나임을 환기하기 위한 말이었고,

또한…… 단군에게서 이만 눈길을 떼라는 표현이기도 했다.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으나 그의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저는 당신께서 왜 그자에게 그토록 마음을 쓰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형은 그때와 똑같은 눈을 하고 있었으니까.

-형, 그 사람은…… 제 업이에요.

-그래서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 사람과 얽히게 되는 것은 결국 내 손으로 저지른 업 때문이라고.

내가 그의 명부를 찢었다는 것을 안다면.

그리하여 그에게 자꾸만 눈길이, 마음이 갈 수밖에 없는 것을 알고 있다면.

형은 신이 되어야 할 내가 한 명의 인간에게 마음을 주는 것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

그러나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형에게 결코 꺼내놓을 수 없는 마음마저 다시금 떠올리고 말았다.

인간이 신의 권능을 넘어서는 것을 목도하던 순간의 희열을.

저승의 모두가 신화의 끝이 올지도 모른다며 두려워할 때, 나만은 인간의 마음으로 깊이 경애해버리고 말았던 순간을.

인간의 손에 권선과 징악의 땅이 무너지던 날, 그리도 비통하게 가슴 아파했음에도.

내가 품은 인간의 마음은 여전히 신을 전복시키는 인간 또한 꿈꾸고 있음을.

……그것을 거듭 되새기면서, 나는 단군에게서 완전히 등을 지며 형을 바라보았다.

“네, 동해 용왕님을 찾아야죠.”

내게 가장 충성스러운 차사의 눈을 마주하며, 우리가 저승의 신으로서 해야 할 일을 상기했다.

“동해 용왕님을 찾아서, 함께 이 신화전을 우리의 승리로 이끌겠습니다.”

40장. 개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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