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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38화 (138/187)

40장. 개전(3)

단군이 새로이 설계한 법칙이 완성되었다.

-크르르릉!

불현듯 크게 울리는 맹수의 울음소리에 뒤를 돌았다.

몸길이가 족히 몇 미터는 될 법한 거대한 대호가 황금빛 가죽을 빛내며 서 있었다.

“아……!”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단군이 천벌을 상대할 때 대동했던 호랑이였다.

짐승의 두 눈은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살기로 형형했다.

-으르르릉!

이빨을 드러낸 짐승이 그대로 그림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콰지지직!

콰지지지직!

그림자가 씹히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피처럼 뚝뚝 떨어진 그림자 조각들이 금세 저들끼리 다시 얽혀 들었지만 짐승의 앞발은 아랑곳 않고 그것들을 짓이기고 후려쳤다.

사냥이 끝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대호의 날카로운 이빨에 그림자는 재생조차 못 하고 무참히 씹어 먹힐 뿐이었다.

그림자를 모조리 먹어 치운 대호가 거칠게 그르렁거리며 단군의 옆에 섰다.

“그새 더 커졌는데……?”

나는 대호의 살기 어린 두 눈을 올려다봤다.

원래도 몹시 큰 호랑이였지만 그림자를 해치우고 돌아온 녀석은 가히 신화적인 크기가 되어 있었다.

살아 있는 성벽처럼 느껴지는 대호의 모습에 살짝 경외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단군에게 물었다.

“새로운 법칙은 저 호랑이를 강화하는 건가요?”

그가 호랑이를 살피면서 대답했다.

“네, 그림자에 분열하고 합쳐지면서 강해지는 법칙이 깃들어 있더군요. 조금 응용해 봤습니다.”

단군은 설명을 덧붙이면서도 시선을 떼지 않고 그가 설계한 법칙을 확인했다.

“산군도 그림자의 힘을 흡수할 수 있게끔 설계했죠.”

“산군?”

장군과 멍군에 이어 이제는 산군인가.

……그야 산군 자체가 호랑이를 의미하니 적당한 이름이기는 한데.

나는 산군에게서 단군으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그런데 이 대호는 정말로 그…… 단군 신화에 나오는 그 호랑이예요?”

천부인의 단군이 커다란 호랑이를 처음 대동하고 나타났을 때부터, 아마도 한반도의 모두가 궁금했을 그것을.

단군은 특유의 옅은 미소를 지은 채로 나를 돌아보았다.

“아뇨, 그냥 지리산에서 모셔 온 산신령입니다. 제 이름이 이름인지라 대부분 그렇게 오해하시지만요.”

“그러면 혹시 그 여성분도 웅녀가 아니신 건가요?”

“그분은 계룡산에서 모셔 온 목신입니다.”

그랬구나.

단군 신화의 곰과 호랑이가 아니라 그냥 산신령과 목신이었어.

뭔가 굉장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게 된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떨떠름했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휘황찬란한 재벌가 저택이 사실 세트장이란 걸 굳이 직접 확인한 기분이랄까.

뭐, 애초에 본인은 딱히 그렇게 보이는 것을 의도하지도 않았다지만.

“그보다 염라, 이 미로를 설계한 설계자는 그다지 중요한 존재가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문득 단군이 다른 말을 꺼냈다.

“중요하지 않다고요?”

“동해 용왕을 상대하는 설계자 쪽이 더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단 뜻이죠.”

말을 하면서 그가 호랑이 산군에게 손짓했다.

-그르르릉!

거칠게 숨을 내뱉은 산군이 거듭 몰려든 그림자들을 물어뜯었다.

우리가 대화를 하는 와중에도 그림자들이 계속해서 공격해 온 모양이지만, 단군이 새로이 설계한 법칙에 따라 그가 부리는 산군만 강해지고 있었다.

적이 강해지는 법칙을 비틀어 아군이 강해질 수 있는 법칙으로 바꾸는 것.

발상 자체가 놀라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 발상을 정말로 설계해 내는 것이 뛰어난 설계자의 덕목이었다.

보통은 그런 법칙을 설계하려고 해도 문구를 완성하지 못하거나, 완성할지언정 실질적으로 법칙이 적용되기까지 훨씬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모두가 머릿속으로 어떤 광경을 떠올릴 수는 있어도, 그 광경을 사진과 똑같이 묘사하는 사람은 극소수인 것과 같았다.

“제 존재를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설계자로 충분하다고 여겼겠지요.”

산군이 앞장서서 미로를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단군은 그 뒤를 걸으며 여유롭게 덧붙였다.

“당신의 신하들도 그들의 예상보다 유능했고요.”

“혹시 다른 분들의 거취도 알 수 있는 겁니까?”

단군의 말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다급히 물었다.

정면을 응시하며 나와 나란히 걷던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웃음 짓고 있음에도 아무 감정도 읽히지 않는 검은 눈동자에 나도 모르게 멈칫하는 찰나.

“당신의 신하들이 설계자와 조우한 듯합니다.”

나를 내려다보던 눈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설계자가 직접 오지 않고 더 강한 그림자만 보내기 시작한 것은, 이 미로 안의 누군가가 그를 붙들고 초조하게 만들어서가 아니겠습니까.”

설계자가 그들에게 위협을 느껴 뒤에서라도 나를 확보하려 한 거라면, 내 차사들이 설계자를 제법 몰아세우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분이 필드를 잘 꿰뚫어 보신 것이겠지요.”

일행들을 모아서 설계자에 맞서도록 이끈 것은 역시 바리일 테고.

단군이 수색을 맡은 그림자를 역으로 이용해서 나를 찾아낸 것처럼, 바리도 미로의 구조를 파악해서 필요한 결단을 내린 듯했다.

“산군이 그림자를 삼켰으니 그를 따라가면 곧 재회하실 수 있을 겁니다.”

산군을 따라 우리는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림자는 결국 설계자의 일부거든요.”

설계자의 일부라.

나는 미로를 설계했던 문어 용신을 곱씹었다.

그림자들끼리 서로를 삼키고 더욱 거대해지는 힘은 곧 문어 용신의 몸에 심어진 흑암지옥의 권능을 바탕으로 했을 터였다.

새삼 그들이 훔친 오도전륜대왕님의 권능을 빨리 되찾자고 다짐하는 와중.

-크르릉!

앞장서 가던 산군이 돌연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르르르릉!

산군은 거친 숨소리를 흘린 뒤 그대로 달려들었다.

“……!”

직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나는 일순 숨을 들이켰다.

지금까지 덤벼 온 그림자들이 크고 작은 개별적인 것들의 모임이라면, 이번에 시야에 들어찬 것은 드높이 치솟은 시커먼 파도였다.

사방을 뒤덮을 만큼 거대한 파도가 살아 있는 재해처럼 새까맣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씨, 저건 또 뭐야! 저거 쓰러트릴 수 있긴 한 거야?!”

그리고 그 파도 너머에서, 아주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저거 이제 내 독은 하나도 안 통한다고!”

호구별성의 목소리였다.

파아아앙!

이어서 드높은 파도 위로 익숙한 빛이 번쩍이는 게 보였다.

내게는 너무도 익숙한 발설지옥의 신성이었다.

촤아아아악!

발설지옥의 신성에 당한 검은 파도는 일순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그러나 물을 벨 수 없듯 파도도 도려낼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인지라 곧바로 구멍을 메우고 위로 솟구쳤다.

“야, 저거 어째 우리는 이제 안중에도 없다?!”

호구별성이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씩씩거리는 게 고스란히 들려왔다.

강림 형이 검은 파도를 공격했음에도 아무런 반격이 없는 것에 의문을 느끼는 듯했다.

“형태를 유지하는 것마저 포기하고 왕을 노리는 거예요. 우리의 역공이 예상보다 컸던 것 같아요.”

이번에는 바리였다.

거리낌 없이 감정을 드러내는 호구별성과 달리 변함없이 차분한 어조였다.

“저 파도를 앞지르면 대왕님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군.”

또한 뒤이어 들리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신경이 곤두섰다.

파아아앙!

파도 너머 천장을 물들이듯 재차 검푸른 신성이 번쩍였다.

강력한 신성에 일순 파도가 양쪽으로 갈라지며 크고 검은 것이 앞으로 달려 나왔다.

“형……!”

나는 그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땅을 박찼다.

형을 부른 순간, 동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곧장 나를 향해 오는 익숙한 눈동자에 어쩔 수 없는 안정감이 느껴졌다.

“대왕님…….”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다소 갈라진 것처럼 들렸다.

“불쾌한 일은 없으셨습니까.”

한순간에 내 앞에 선 형은 내 어깨를 쥐고 급히 내 몸을 살폈다.

파아아앙!

동시에 발설지옥의 권능이 검은 파도를 거듭 우그러뜨렸다.

내 어깨를 쥔 그의 손에도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평소보다 격렬하게 느껴지는 신성.

나는 급작스레 공간이 변화하기 직전 나를 붙잡기 위해 뻗어 오던 팔을 떠올렸다.

“저는 괜찮았어요, 형.”

꽉 붙들린 어깨에서 아주 약간의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손을 부러 떼어내기보단 잔뜩 힘이 들어가 평소보다 더 딱딱하게 느껴지는 팔뚝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독을 치료하는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내 곁을 지켰던 형이었다.

나를 찾아 미로를 헤매는 내내 불안이 컸을 것이다.

“그렇게 위험하지도 않았어요. 저기…… 단군도 있었고요.”

그런데 형을 안심시키려고 말을 잇다가 더욱 차갑게 가라앉는 검푸른 눈에 살짝 주춤했다.

“……그렇군요.”

형은 그저 그렇게 대답했을 뿐이었지만.

“또 저자가 먼저…….”

낮은 목소리로 덧붙여진 말에 나는 작은 낭패감을 느꼈다.

아무래도 형은 아직 잊지 못한 모양이었다.

앞서 혼이 납치되었을 때, 단군이 먼저 나를 찾았던 일을.

내가 그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다시 말하면 단군이 나의 위험을 알아채고 먼저 행동하는 것이 영 탐탁지 않은 듯했다.

형은 아직 그를 믿지 않기 때문에.

내가 아직도 그에게 지나치게 마음을 쓴다고 여기기 때문에.

며칠 전 내가 단군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했을 때에도, 끝내 자리를 비키지 않고 지켜본 것은 아마도 그래서였으리라.

“형, 그것보다 형은 어떻게 된 거예요?”

나는 화제를 돌렸다.

“……바리가 차사들을 찾아서 설계자에게 이끌어주었습니다.”

형이 다시금 파도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미로는 우리가 왕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설계되었으니 왕에게 닿으려면 설계자를 먼저 쳐야 한다더군요.”

등을 보인 형이 전투 자세를 취했다.

검은 파도로부터 나를 지키려는 듯이.

“그렇게 설계자와 교전하던 중, 그자의 몸이 터져 나가면서 검은 파도로 변했습니다.”

그럼 설계자 본인이 저런 모습으로 변모했단 말인데.

상상하자니 꽤나 기이한 광경이었다.

“마저 처리하겠습니다.”

형이 그 자리에서 발을 떼지 않은 채 발설지옥의 신성을 일으켰다.

파아아앙!

검푸른 신성이 또 한 번 파도를 가르는 순간.

-크르르렁!

산군도 거칠게 포효하며 검은 파도에 달려들었다.

콰지지직!

콰지지지지직!

거대한 대호가 파도와 뒤엉키며 아주 묽은 점액질 같은 몸뚱이를 물어뜯을 때마다 황금빛 신령의 자태는 더욱 영롱하게 빛을 발했다.

“우와, 저것 봐라?”

파도와 산군 너머 호구별성이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잘 싸우는데? 우리가 뭐 거들 필요도 없겠다!”

그녀의 공격이 통하지 않던 검은 파도를 산군이 먹어 치우고 있으니 놀랄 만도 했다.

“필드에 영향을 미치는 법칙이 깃들어 있어요. 애초에 검은 그림자를 상대하기 위해 설계되었네요.”

바리는 보자마자 산군에게 깃든 법칙을 파악했다.

“흐음, 그럼 해결될 때까지 이대로 별성 뒤에 숨어 있으면 되겠구나.”

연이어 사라의 느긋한 목소리까지 들렸다.

마지막으로 사라의 안위까지 파악하고 나니 그제야 작게 한숨이 샜다.

아직 끝나지 않았음에도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헤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만났다는 실감에 이토록 안도하게 되는 건지.

-크르르르릉!

이대로 산군이 검은 파도를 먹어 치우고 수월하게 끝나리라 생각했을 때였다.

콰지지직!

콰지지지직!

“……이런.”

산군의 이빨에 파도가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단군이 입을 열었다.

“그새 상대도 새 법칙을 심어뒀군요.”

드물게도 미약한 당황이 묻어나는 어투였다.

화르르르륵!

동시에 산군과 파도를 둘러싸듯 불의 장벽이 치솟았다.

“최대한 그것에서 물러서십시오. 함정이 있습니다.”

또한 그의 경고와 함께.

콰아아아아아앙!

어둠을 먹어 치우던 산군을 중심으로 새까만 폭발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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