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장. 개전(2)
“언제부터…….”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를 따라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도돌이표처럼 뒤따르는 생각을 도무지 떨칠 수 없었다.
내 물음에 한발 앞서 걷던 단군이 나를 돌아보았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리는 걸음을 멈추었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검은 눈이 나를 향했다.
나의 시선과 나의 모든 감각 또한 그 하나만을 향했다.
여전히 업경의 권능은 그에게서 아무것도 읽어 내지 못했다.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못하리라 생각했음에도 눈을 떠버렸을 때부터.”
아무것도 읽지 못하는 와중 그의 목소리만이 선연히 귓가에 들려왔다.
“제 시간은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와 내가 암묵적으로 딱 그만큼만 언급하기로 한, 23년 전의 어느 날.
그가 그날을 다시 입에 담았다.
사람과 사람이 말을 나눌 때,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모르는 것은 기실 당연하다.
하나 나는 업경의 권능이 단군에게서 아무것도 읽지 못한다는 이유로 불안에 가까운 혼란을 느꼈다.
선택적으로 진심을 내비치는 남자가 가감 없이 들려주는 속내를 도통 짐작할 수 없어서.
그럼에도 그가 나를 그의 신으로 여긴다는 말만큼은, 내가 알아봐주기를 의도한 진심이라서.
“한데, 염라.”
그리하여 그가 내준 대답 앞에 마땅한 반응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단군이 가벼운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가능하다면 제게 설계자를 맡겨주시는 게 어떠신지요.”
그와 나의 관계에 이 이상의 진전을 바라지 않는 것처럼, 당장의 현실로 나를 잡아끄는 말이었다.
“어렵지 않습니다만, 지금 바로 말입니까?”
나는 별수 없이 단군이 돌린 화제에 편승했다.
당장은 동해 용궁과 함께 신화전에서 승리하는 것이 우선이거니와, 스스로도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으므로.
“네, 이쪽도 슬슬 영향력을 높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화르르륵!
단군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와 나를 중심으로 새빨간 불꽃이 번졌다.
어느새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검은 그림자들은 화마에 휩싸여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림자들이 불탄 자리마다 남은 그을음을 돌아보았다.
“언제 또 이렇게 많이…….”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도, 그사이에 또 그렇게 많은 그림자에 둘러싸였다는 것에 절로 긴장이 올라왔다.
“이동 주술에 기척을 죽이는 주술이 섞여 있었습니다.”
단군이 대답했다.
“저들의 목표는 당신입니다. 당신이 좀 더 취약한 것도 당연하겠지요. 그들이 뭘 위해 신앙과 카르마 포인트를 쏟아부었겠습니까.”
화르르르륵!
다시 한번 우리를 중심으로 불꽃이 번졌다.
“당신을 차사들과 떼어놓은 것도 같은 이유일 테고요.”
화르르륵!
이번에는 거대한 불의 벽이 우리를 둘러쌌다.
혼이 납치되었던 때에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모든 스탯이 1에 고정되어 방어력을 갖추지 못했던 당시처럼, 언제 몰려들지 모르는 그림자들을 대비한 방호벽이었다.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염라.”
그의 말에 신화전의 중계창을 살폈다.
[ ‘동해의 주인’ 필드가 신화전을 진행 중입니다. ]
- 승리 조건 : 왕 수호
- 지배도 : 16%
단군이 그림자들을 태워버림으로써 우리가 속한 필드의 지배도가 7%p 올랐다.
그의 말대로 지금 태운 그림자에는 이전과 다르게 더 정교한 법칙이 깃들어 있었다.
단지 불태운 것만으로도 공간을 전개한 신앙과 카르마 포인트를 일부 빼앗을 수 있을 만큼.
“설계자 권한을 넘겨주시면 이 영향력으로 새로운 법칙을 하나 추가하고 싶습니다.”
신화전의 필드.
신앙과 카르마 포인트를 소모해서 설계자가 법칙을 바꿀 수 있는 공간이다.
상대 진영에서 지배도를 빼앗아 오면, 우리 진영의 설계자도 빼앗은 신앙과 카르마 포인트로 법칙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
다만 그 법칙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 정말로 무슨 일이든 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니, 시스템상으로는 가능하되 시스템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자가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바로 권한을 넘겨드릴게요.”
[ (!) ‘동해의 주인’ 필드 시스템에 접근합니다. ]
새로운 팝업창이 떴다.
현재 우리가 진행 중인 신화전의 필드는 둘이다.
남해 측에서 전개한, 오류가 섞여 이름을 알 수 없는 필드.
동해 측에서 전개한, ‘동해의 주인’ 필드.
그리고 ‘저승’은 현재 ‘동해의 주인’ 필드에 합류한 상태였다.
동해 용궁과 같은 신화에 소속된 것은 아닌지라, 동해 용궁과 우리는 서로의 소속을 유지한 채 일종의 동맹을 맺었다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동해의 주인’ 필드를 전개한 동해의 용신들과 별개로, ‘저승’의 최고신인 나에게는 내가 접근할 수 있는 설계자 권한이 따로 있었다.
또한 이 설계자 권한을 ‘저승’에 속한 다른 이에게 넘기는 것도 가능하다.
[ (!) ‘동해의 주인’ 필드의 설계자 권한이 확인되었습니다. ]
시스템에 접근하자 나를 둘러싼 공간은 알 수 없는 문자열들이 빽빽하게 가득 차 있는 다른 차원으로 바뀌었다.
업경의 권능으로 단군의 시야를 간접적으로 체험했을 때 본 것과 비슷했다.
이 문자열들이야말로 신화전 필드를 구성한 인과였다.
나는 개중에서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몇몇 문자들로 손을 뻗었다.
[계] [한] [계] [설] [자] [인] [권]
내가 선택한 일곱 개의 문자.
그것들은 곧 스스로 배열을 바꾸며 온전한 팝업창이 되어 나타났다.
[ 설계자 권한 인계 ]
설계자 본인이 읽을 수 있는 문자를 조합하여 새로운 법칙을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 신화전 중간에 새로이 법칙을 더하는 방법이었다.
단, 설계자 권한으로 시스템에 접근해도 인과를 전개하는 문자를 읽을 능력이 없다면 사실상 의미가 없다.
신화전 필드를 처음 전개할 때만큼은 능력이 부족해도 어느 정도 문자열을 읽을 수 있게 시스템이 도와주지만, 이렇게 중간에 법칙을 더할 때는 오직 제 능력으로만 해석해야 했다.
따라서 신화전 도중 유의미하게 새로운 법칙을 더할 수 있는 설계자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했다.
단군은 그런 소수의 설계자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설계자일 것이다.
한반도 최고의 도사인 그는 분명 저 문자들을 평범한 설계자보다 훨씬 더 많이 읽어 낼 수 있을 테니까.
[ (!) ‘주단군’이 ‘동해의 주인’ 필드의 새로운 설계자가 되었습니다. ]
설계자 권한의 인계를 마친 순간 단군의 손에 청옥색으로 빛나는 작은 큐브가 생성되었다.
새로이 가시화된 법칙의 핵이었다.
“음…….”
단군이 손에 쥔 큐브를 굴리며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이거, 생각보다 꽤 생소한 필드군요.”
설계 시스템에 접근해서 필드의 인과를 뜯어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럴 것 같아서 나름대로 간략하게 구상했습니다만, 그마저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겠습니다.”
단군마저도 그 문자들을 전부 해석하지 못한다는 말에 조금 놀랐지만, 빠르게 납득했다.
모든 문자를 해석하는 게 가능하다면 어떤 법칙도 만들어 내는 전지전능한 신이나 다름없으니까.
“또한 제약도 더 따를 것 같고…….”
문자를 조합해 문구를 완성하더라도, 거기에 의도하지 않은 규칙이 따라붙는 것.
그것이 제약이다.
‘시스템 권한 인계’라는 문구를 완성했을 때 아무런 제약도 붙지 않은 것은 기존의 신화전 시스템에 의거해 설계자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단군이 새로운 법칙을 더하려 한다면 반드시 그 법칙을 제약하는 다른 문구가 따라붙을 것이다.
[ 특정 풍문으로 공격에 성공할 때마다 체력 스텟을 올림 ]
예를 들어 위와 같은 새로운 법칙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면.
[ 상대에게 특정 공격을 당할 때마다 체력 스텟이 떨어짐 ]
다음과 같은 제약도 함께 생성되는 것이다.
다만 뛰어난 설계자일수록, 같은 법칙이라도 제약을 줄일 수 있는 문구를 구상할 수 있다고 한다.
“법칙 생성 시간도 예상보다 조금 더 걸릴 것 같습니다.”
큐브가 그의 손에서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법칙 생성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그때.
화르르륵!
화르르르륵!
그가 세웠던 불의 벽이 갑자기 크게 흔들렸다.
화르륵!
화르르륵!
화륵!
불의 벽 너머에서 이전보다 훨씬 커진 그림자들이 꿀렁거리며 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불의 벽은 끊임없이 치솟으며 우리에게 접근하는 것들을 막아냈지만, 결국 닳고 닳아 구멍이 나듯 조금씩 틈을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나는 검을 쥐며 그에게 물었다.
새로운 법칙을 생성할 때면 응당 시간이 필요하다.
새로운 법칙이 온전히 적용될 때까지 설계자는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그동안 그를 지키는 것 또한 신화전의 일부였다.
“음…….”
손에 쥔 큐브를 움직이며 단군이 대답했다.
“약 3분 40초가 필요합니다.”
나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제법 시간을 잡아먹는군요.”
신화전이란 본디 정교하고 거대한 판이다.
그만큼 설계자가 새 법칙을 완성하기 위해선 몇 시간씩 걸리는 일도 많았다.
애초에 신화전에서 유의미한 법칙을 새로이 더할 수 있는 인물은 무척이나 적었고, 그러한 설계자가 있는 신화전이라면 장기간 치러지는 진짜 전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해 용궁에서처럼 새 법칙을 더하는 일 없이 소규모로 벌이는 신화전이 보다 일반적이며, 승리는 승리 조건을 먼저 취득한 쪽의 몫이다.
그런데 겨우 3분 40초라니.
그것은 결국 단군이 얼마나 실력 있는 설계자인지를 증명하는 말과도 같았다.
물론 현재 가용할 수 있는 영향력이 최대 7%에 불과한 만큼 새롭게 만든 법칙이 그리 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한들 3분 40초는 상식적이지 않은 시간이었다.
화르르르륵!
한데 별안간 우리를 보호해주던 불의 벽이 높이 치솟았다.
그러고는 한순간 바람에 촛불이 꺼지듯이 꺼져버렸다.
“……!”
나는 모습을 드러낸 검은 그림자들에 숨을 삼켰다.
따라다니는 것 외에 별다른 기능이 없던 이전과 달리 눈앞에 있는 것들은 방금 한 차례 커졌던 것보다도 더 큰 몸집을 지녔으며, 더욱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촤아아아악!
망설일 것 없이 그것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악!
촤아아아악!
죽음이 그리는 칼날나무 앞에 그림자들이 사정없이 찢겨 나갔다.
그러나 그도 잠시뿐.
스스스!
스스스스!
산산이 조각났던 것들이 꿀렁꿀렁 모여들더니 서로를 잡아먹고 더욱더 거대한 그림자가 되어 다시 일어섰다.
“역시 그냥 검으로는 안 된다 이거지.”
인상을 찌푸리며 보다 위협적으로 변한 녀석들을 노려보았다.
처음에는 내 허리 높이에 불과했던 그림자들이 이제는 내 키만큼이나 커져 있었다.
내가 벌어야 할 시간은 고작 3분 40초.
검이 통하지 않는다고 해서 마력을 소모할 수는 없었다.
촤아아아악!
촤아아아아악!
재차 그림자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큿……!”
녀석들은 크기만 커진 게 아닌 듯, 베어낼 때마다 손목이 작게 시큰거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지켜 드려야 하는데 어째 당신이 저를 지켜주시는 꼴이 되었군요.”
뒤쪽에서 단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친절한 어투였으며 분명 사과의 말이었건만, 듣고 있자니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촤아악!
촤아아아악!
그러나 기분이 이상하건 말건 내가 해야 할 일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쪽을 둘러싼 그림자들을 향해 끊임없이 검수지옥의 초식을 휘두르는 사이.
[ (!) 새로운 법칙이 완성되었습니다. ]
[ (!) ‘동해의 주인’ 필드에 새로운 법칙이 추가됩니다. ]
마침내 기다렸던 팝업창이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