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36화 (136/187)

40장. 개전(1)

저승 신화에 받아달라니.

상상조차 못 했던 부탁에 나는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당혹감이 길어지는 나와는 달리 단군은 여느 때처럼 옅게 미소 지은 채였다.

“실은 다른 분에게 신단수 전설을 양도한 상태입니다.”

이어지는 말은 더욱 당혹스러웠다.

“전설을…… 양도했다고요?”

“네, 아시다시피 풍문은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야 나도 해태 멍군의 풍문을 양도받았으니 그게 가능하다는 건 아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에 단 열 개밖에 없는 전설을 양도한다는 발상이 좀 말이 안 되니까 그렇지.

“지금 저는 천부인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단군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저승 신화에 합류해 남해와 신화전을 치르고 싶습니다.”

순간적으로 주춤했다.

그 말이 꼭 나를 돕기 위해 저승의 구성원이 되겠다는 말로 들려서였다.

“물론 영구적인 의미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내 반응이 탐탁지 않다고 느꼈는지 그가 조금 조심스러워진 어투로 덧붙였다.

“당신이 바다의 신화를 온전히 얻게 되실 때까지만 저승의 구성원으로 활동하고 싶습니다, 염라.”

그렇게 말하며 단군은 또다시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저도 천부인으로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양도했던 신단수 전설을 다시 돌려받을 수 있다는 뜻이리라.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신단수 전설을 맡긴 상대는 믿을 만한 인물입니까?”

나는 누군가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도 구태여 돌려 물었다.

단군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네, 적탑의 탑주께 맡기고 왔습니다.”

예상했던 답이었다.

“그분 정도의 강자라면 다른 각성자에게 전설을 빼앗길 가능성은 무척 낮으니까요.”

또한 그렇기에 또 다른 의문을 불러오는 답이었다.

적탑과 천부인이라는 서로의 두 번째 소속으로 얽혀 있으면서도 물밑에서 서로를 견제하던 두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설을 맡길 수 있는 두 사람이…….

대체 어떤 관계인지 좀처럼 짐작이 되지 않았으니까.

“혹시 그분과 어떤 관계인지 물어봐도 됩니까?”

나는 의문을 숨기지 않으며 다시 물었다.

“그분은 제 손위 형제입니다.”

그가 선선히 대답했다.

……역시 가족이었던 건가.

주도혁과 주도영.

남매라 하기에는 외모부터 분위기까지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새삼 눈에 밟힐 뿐, 앞서 추측했던 관계인 터라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혈육이라면 전설을 맡길 만큼 신뢰할 수도 있겠군요.”

단군은 이런 내 말에 대답도 대꾸도 없이 그저 웃기만 할 따름이라, 나는 잠시간 그와 눈을 맞추다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 탑주와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당신도 알겠지만, 이라는 말은 굳이 더하지 않았다.

“그러셨군요.”

직접 언급한 적은 없으나 단군은 내가 적탑주 주도영과 만나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까지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그는 적탑주가 내게 접근할 것을 알고 화속성 공격을 막아 주는 해태, 멍군을 내주었으며,

그것을 내가 눈치챘다는 사실 역시 알 터인데도 부러 입에 올리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불편했다.

주도영과 만났던 이후로 줄곧 마음에 담아두었던 거북함을 이제는 단군에게 풀어놓아야 했다.

지금, 자리에 있는 것이 그와 나 둘뿐인 이때에.

“당시 적탑주가 제게 그러더군요.”

-나는 그가 왜 당신을 원하는지 알아요, 염라.

적탑주 주도영이 내게 했던 말을 곱씹으며 말했다.

-권선과 징악의 신인 당신이 내리는 벌은 결국 신의 뜻이 될 테니까요. 인간은 그것에 감히 의문을 표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보이던, 신을 증오하는 인간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당신과 내가 손잡은 세상이 두렵다고요.”

단군의 표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당신은, 당신이 바라는 세상을 완성하기 위해 권선과 징악이 필요한가요?”

내 직설적인 물음 앞에서도 그의 미소에는 티끌 한 점 존재하지 않았다.

“당신이 어떤 말을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드러운 분위기를 두른 남자의 온기를 띤 목소리.

“앞서 말씀드렸듯 저는 신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무척이나 단호했다.

-단군 말입니까?

-그래요, 그 남자를 신으로 만들지 말아요.

-하지만 그는 신이 될 생각이 없다고 하던데요.

-그 말을 정말 믿어요?

나는 적탑주와의 대화를 재차 떠올렸다.

단군의 말은 나와 적탑주의 대화를 알고 있다는 긍정, 나아가 그녀의 말이 거짓이라는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었다.

“언젠가 제가 당신께 흑탑의 토벌을 부탁드렸을 때, 당신은 제게 당신께서 흑탑을 치시기를 바랐는지 물으셨죠.”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정직한 길드에서 장군 모습의 그를 만났을 때 물었던 질문이었다.

그때 나는 내가 흑탑을 상대로 선전포고한 것마저 나의 의지가 아니라 단군이 우주에 청한 것이 아닐까 의심했으며,

그는 내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않고 넘어갔다.

“네, 저는 당신께서 그리하시기를 바랐습니다.”

당시에는 제대로 답하지 않았던 것을, 그가 이제 와서 대답했다.

“저는 흑탑을 칠 수 없었으니까요.”

검고 깊은 눈이 불현듯 냉소를 담았다.

“……같은 인간이니까.”

나는 그의 냉소에 대꾸 없이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답은 딱히 나의 추측과 다르지 않았다.

인간인 단군은 정치적인 입지 때문에 나설 수 없으니, 인간의 법에 얽매이지 않는 염라가 나서야 했다고.

“하지만 당신은 다르시겠죠, 염라.”

……그러나.

“당신이 나선다면 그건 신의 뜻이 될 테니까.”

그렇다 한들 그것을 단군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것은 묘한 기분이었다.

“인간을 인간에게 맡겨선 안 됩니다.”

15년의 세월 동안 인간 세계의 안정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남자가 내린 결론이었다.

“아니, 어떤 인간도 인간 전부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말이 맞겠죠.”

강함과 고결함을 모두 갖춘 남자가 인간을 위해 15년을 바쳤으나, 누군가는 반드시 그의 흠을 잡기 위해 혈안이었던 것처럼.

“그러니 저는 환생할 겁니다.”

단군은 담담하게 선언했다.

“가장 이상적인 신이 돌보는 한반도에.”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업경의 감각이 밀려들었다.

“……!”

그리고 그 앞에서 나는 또 한 번 당황하고 말았다.

그가 가리켜 말한 가장 이상적인 신이 다름 아닌 나라는 사실에.

언제나 보이는 것만을 보여주던 그가 드러낸 말도 안 되는 진심에.

“제가 누구에게 말했든, 그 어떤 신도 지금 당신과 같은 얼굴은 아니었을 겁니다, 염라.”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단군이 쿡쿡 웃었다.

“…….”

다만 어째서인지 그 웃는 얼굴 위로, 신을 미워하던 누군가의 증오 어린 얼굴이 흐릿하게 겹쳐져서.

나는 그가 왜 하필 나를 골랐는지 느릿하게 이해했다.

탯줄을 잘랐으나 끝내 뽑지 않은 나는 그런 얼굴을, 인간의 얼굴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신이었다.

하나…….

결국 단군이 바라는 것도 결국 인간을 이해하는 신이 아닌가.

그렇다면 적탑주는 왜 그토록 단군을, 단군이 만들겠다는 세상을 두려워했던 걸까.

“모쪼록, 제 다음 생은 건물주로 잘 부탁드립니다.”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의문으로 저를 바라보기만 하는 내게 단군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전과 똑같은 농담의 반복.

나는 조금도 웃을 수 없었다.

이제는 그 말이 그의 현생을 희생해서 나를 한반도의 신으로 만들겠다는 말과 똑같이 들렸으니까.

“시간을 꽤 지체한 것 같군요.”

장난기를 지운 단군이 미로를 돌아보았다.

“저것들의 움직임이 달라졌습니다.”

그의 말마따나 사방에 달라붙은 그림자들은 보다 눈에 띄게 꿀렁거리고 있었다.

아니,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더욱 역동적으로 변했다.

화르르륵!

그러나 어느 순간 일제히 불타오르며 알 수 없는 문자열을 불티처럼 흩뿌렸다.

단군의 주술이었다.

“설계자를 만날 때까지 가급적 힘을 쓰시는 일은 없게 하겠습니다.”

순식간에 주변에 있던 그림자 전부를 불태운 그가 나를 돌아봤다.

“한데 아직 저를 저승 신화에 받아주지 않으셨습니다만.”

내가 제안을 거절할 거라곤 조금도 생각지 않는 것처럼, 그저 잊은 것을 상기시키듯 여상한 말투였다.

[ ‘주단군’을 저승에 받아들이겠습니까? ]

[ 예/아니오 ]

그를 받아들일지를 묻는 팝업창이 떴다.

나는 짧은 망설임 끝에 별수 없이 그를 받아들였다.

[ ‘주단군’이 저승에 소속되었습니다. ]

팝업창을 확인한 단군이 먼저 등을 돌렸다.

“그럼 앞장서겠습니다, 염라.”

-인간을 인간에게 맡기면 안 됩니다.

나는 그를 따라 발걸음을 내디디며 그가 한 말을,

-그래서 저는 환생할 겁니다.

-가장 이상적인 신이 돌보는 한반도에.

가장 신에 가까운 인간이 인간을 지켜 오면서 내린 결론을 곱씹었다.

그리하여 몇 번이고 되풀이해 생각했다.

그가 나를 어떻게 보아 왔는지를.

대체 언제부터 나를 그리 봐 왔는지를.

나를 신으로 보는 그의 시선이, 내게 얼마나 이질적으로 느껴지는지를.

왜냐하면 내게 단군은.

첫 번째 천벌에서 12명의 운명을 바꿨던 주도혁은.

인간 대 인간으로서,

신의 권능을 넘어선 인간에게 경애를 품게 만든 존재였으니까.

나는 아직도 23년 전의 그때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우주는 정녕 신의 시대를 끝내겠단 말인가!

모든 인간의 운명을 점지해 온 살아 있는 것들의 왕이 바꿀 수 없는 운명 앞에 절규하던 것과.

-명부가 빗나갔다고?

-괴물에게 죽는 것은 항상 정확했잖아!

-그래, 설령 던전이라도 삼신의 눈을 피할 순 없어!

-그런데 이번에는 괴물이 먼저 죽었어!

생불왕조차 바꿀 수 없었던 운명을 인간의 손으로 바꿔 낸 순간을.

-모든 저승의 신들은 은연중에 생각했다.

-죽음이 무너진 것은…… 대별왕의 실종이 아니라, 어쩌면.

-어쩌면, 12명을 살린 그자로부터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고.

그것이 설령 내가 사랑했던 땅의 존재들을 위협하게 될지라도.

-18,828명 중 고작 12명이 아니다. 중요한 건 생불왕 삼신할미조차 손대지 못한 운명을, 저자가 바꿨다는 거지.

그때 나는 분명, 인간이 신을 넘어섰다는 것에 희열마저 느꼈다.

그 희열에 저승의 존재로서 스스로를 불경하다 여기면서도, 내가 품은 인간의 마음은 운명을 바꾼 인간의 존재를 경애했다.

-……왜 그런 선택을 했습니까?

-제가 제일 강했기 때문입니다.

-단지 당신이 제일 강했기 때문에 천벌을 쓰러트렸단 겁니까?

-제가 제일 강하다는 게, 그분들보다 더 오래 살아야 할 이유는 되지 않으니까요.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인간이 인간을 위하는 마음인 것을 진심으로 경애했다.

그런데 그런 당신이 나를 가장 이상적인 신으로 여긴다고?

스스로 신의 자리에 올라 모든 인간에게 신으로 불리겠다 마음먹었다 한들 그에게만은 그것이 낯설었다.

그게 모순된 마음인 줄 알면서도 그러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불경함을 느낄 만큼 당신을 인간으로서 경애해 왔건만.

당신은 대체 언제부터 나를 당신의 신으로 여겼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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