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장. 합류(6)
신화전의 설계자가 공간을 뒤바꿔버린 탓에 일행들과 헤어지고 말았다.
사방은 높다란 벽으로 둘러싸인 미로였다.
출구가 있는지조차 불확실한 미로에 갇힌 가운데, 신화전의 팝업창을 통해 동해 용왕과 병사들의 상태만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 ‘동해의 주인’ 필드가 신화전을 진행 중입니다. ]
- 승리 조건 : 왕 수호
- 지배도 : 9%
“9%에서 더 변하지를 않네.”
그렇다면 설계자를 상대로 고전하고 있거나, 어떠한 이유로 신화전이 진행되지 않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동해 용왕과 병사들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기 전에 빨리 합류해야 할 텐데.
“……일단 이 미로를 빠져나가는 게 먼저야.”
괜한 조급함에 휩싸이기 전에 먼저 상황을 되짚었다.
“어차피 왕이 목적이라면 나한테도 설계자가 찾아오겠지.”
애초에 이 공간은 나를 노리고 설계되었다.
그럼 공간을 뒤틀어 놓은 당사자를 쓰러뜨리면 미로도 해체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있는지 모를 출구를 찾아 헤매는 것보다는 설계자를 치는 것이 빠를 것이다.
스스스!
그런데 그때 무언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바로 손에 든 ‘죽음’을 겨누자, 바닥에 납작하게 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림자?”
그림자처럼 검고 슬라임처럼 흐물흐물한 그것은, 납작하게 퍼진 동시에 액체같이 꿀렁거리며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자세히 살펴보니 퍽 낯설지 않은 기운이었다.
“문어 용신들에게 깃들어 있던 어둠과 성분이 같아.”
그렇다면 저 꿀렁거리는 그림자 또한 문어 용신인 설계자가 설계한 필드의 일부일 터.
촤아아아악!
더 가까이 오기 전에 그림자를 베었다.
그림자는 별다른 저항 없이 두 동강이 났다.
성분이 성분인 만큼 무해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동강 나고도 그 자리에서 꿀렁거릴 뿐인 그림자는 딱히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럼 이런 걸 왜…… 응?”
그러나 갸웃하며 고개를 든 직후,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뭐가 이렇게 많아!”
미로의 천장과 벽, 눈에 닿는 모든 곳이 어느새 곰팡이가 핀 것처럼 검은 그림자들로 뒤덮여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공격성도, 공격력도 갖추지 못한 그것들이 필드를 뒤덮고 있는 이유가 뭘까.
다르게 말하면 필드를 뒤덮을 필요가 있되 공격력까지 필요치는 않다는 뜻.
그렇다면 가장 그럴듯한 목적은…….
“설계자는 이것들을 통해 나를 찾고 있는 건가?”
수색.
내가 미로 어디에 떨어지든 그 위치를 특정하기 위해서.
어떤 시스템으로 작동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그림자 하나를 베었다는 사실만큼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럼 머지않아 마주치겠어.”
검을 쥔 손에 힘을 실으며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사방에 가득한 그림자들이 나를 따라 움직였다.
그렇게 그림자들에 둘러싸인 채 계속해서 걷기를 얼마간.
스스스!
스스스스!
불현듯 내 주위의 그림자들이 꿀렁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뭔가 있나……?”
갑작스러운 변화에 업경의 권능을 곤두세웠다.
그런데 집중할수록 오히려 안개에 둘러싸이듯 권능이 흐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곧 상대가 업경에 대응하고 있다는 뜻인지라, 나는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업경의 권능이 상대를 읽어내지 못해도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을 잡아채는 것만은 오감으로도 충분했다.
다가오는 상대를 향해 검을 겨누고 신중하게 거리를 쟀다.
그리하여 그의 존재감이 검이 닿는 영역에 들어선 순간 팔을 휘둘렀으나.
파앙!
뜻밖에도 연녹색 빛이 번쩍이면서 검을 휘두른 내 팔이 먼저 튕겨 나갔다.
“어…….”
공격이 저지되면서 그제야 한발 늦게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
“죄송합니다.”
눈이 마주친 상대가 빙긋 웃어 보이며 손을 내저었다.
“제가 당신을 헷갈리게 했군요, 염라.”
사흘 만에 모습을 드러낸 단군이 내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몸은 회복되셨습니까?”
곱게 흐트러진 흑발 아래로 반원을 그리는 눈이 나를 부드럽게 응시했다.
“어…….”
설계자가 아니라 단군이었구나.
잠시 그를 멍청하게 바라보다가 조금 멋쩍게 검을 내렸다.
“……덕분에요.”
완전한 회복은 아니라지만, 내가 이만큼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은 그가 천계의 감정꽃을 가져다준 덕이었으니.
“그러고 보니 아직 고맙다는 말도 못 했네요. 고맙습니다.”
사흘 전에 마주쳤을 때는 단군이 용궁에 왔다는 사실만으로 크게 놀란 데다, 곧 있을 신화전이나 바다의 신화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제대로 감사를 전할 기회가 없었다.
뒤늦게 인사하자 그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 사람 좋은 웃음에 왠지 모를 어색함을 느낀 나는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제가 어느 쪽에 있는지 알고 온 겁니까?”
나를 스멀스멀 따라오던 검은 그림자들은 단군이 나타나면서부터 그를 꺼리듯 다소 거리를 두고 꿀렁거리고 있었다.
혹시 단군이 무슨 조화를 부린 게 아닐까 싶어 물었더니, 그는 아무렇지 않게 벽과 천장에 붙은 그림자들을 훑어보며 긍정했다.
“왕을 사냥하기 위해 설계된 공간이니까요. 위치를 탐색하는 장치가 있을 것 같아 공간의 인과를 조금 살펴봤습니다.”
그가 말하는 사이 업경은 단군으로부터 알 수 없는 문자열들을 읽어냈다.
그 문자열들이 바로 공간의 인과일 터였다.
도사들이 보는 세상은 일반적인 물질계 외에 그 물질계를 이루는 인과로 이루어져 있다.
물질계 너머의 인과를 보는 것은 프로그램의 소스를 뜯어보는 것과도 비슷했다.
내 눈으로는 읽을 수 없어도 업경의 권능은 단군의 눈이 읽어내는 문자열을 비출 수 있었다.
그의 눈을 들여다봄으로써 그의 눈에 비친 것을 알 수 있는 셈이었다.
물론 단군을 통해 세상 인과를 풀어놓은 문자열을 본다 한들, 내겐 그것을 해석할 재주가 없으니 그냥 도사들 눈에는 저런 게 보이는구나 할 뿐이지만.
“도사들은 신화전을 치를 때 아주 유리하겠군요.”
새삼 작게 감탄하며 단군을 바라봤다.
신화전이란 결국 설계자가 목적에 맞춰 공간의 법칙을 설계하면서 시작되는 것.
인과를 해석하는 눈이 뛰어날수록 설계를 쉽게 꿰뚫어 보고 이용할 수 있을 터였다.
지금 단군이 미로를 만든 설계자보다도 먼저 나를 찾아낸 것처럼.
그러니 단군의 천부인이 누구도 함락시키지 못할 철옹성인 것도 당연했다.
막대한 신앙도 신앙이지만, 애당초 한반도 최고의 도사인 그는 한반도 최고의 신화전 설계자였으니.
“당신께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단군이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대답했다.
“제가 아니라도 깊은 눈을 지닌 분이 곁에 계시지만요.”
아마 바리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하긴 바리라면 공간의 인과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차사들보다 바리를 먼저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네.
바리도 단군처럼 공간의 설계를 꿰뚫어 보고 나를 찾고 있을 테니까.
다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은 단군이어서, 조금은 어색한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귀와 목을 살짝 덮는 흑발.
소매와 목깃에 검은색 포인트가 들어간 흰색 두루마기 코트.
곤복과 면류관 차림일 때와는 달리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어 한결 편안한 인상이었다.
“이번에도…… 좀 젊어 보이네요.”
“이쪽이 본모습이거든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사는 신체가 최고조에 오르는 20대 중반 무렵 몸과 정신의 성장이 멈추니 별로 이상할 것 없는 말이었다.
의문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단군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
“사실 천부인의 단군을 30대로 설정한 것은 실수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수요?”
무슨 뜻인가 싶어 귀를 기울이자 그는 긴 한숨까지 내쉬었다.
“20대의 몸과는 다르지요.”
“어…….”
“조금만 움직여도 하루 종일 뻐근하고, 피곤하고.”
“그렇군요…….”
……음, 농담이겠지?
반응할 타이밍을 놓치고 떨떠름하게 눈알만 굴렸더니 단군은 거듭 빙긋 웃었다.
“이 모습이 진짜 주단군입니다.”
……주단군 모드도 따로 있었구나.
그동안 봐왔던 그의 모습들…… 곤복을 입은 천부인의 단군, 적발의 도혁주, 안경 쓴 10대 장군을 차례로 떠올렸다.
그 모든 건 다 컨셉이고 저게 본캐라는 말이겠지.
“……그런데, 단군.”
장난기까지 느껴지는 그 수려한 얼굴을 잠시간 바라본 나는 생각 끝에 재차 입을 열었다.
그와 둘만 남은 상황은 어색했지만, 한편으로는 지금이 아니면 쉬이 꺼낼 수 없는 말이 떠올라서였다.
“혹시 바다의 신화에 대해 짐작 가는 것이 있을까요?”
그래, 아마도 인간인 그하고만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나는 새삼 50년 전의 세상을 곱씹었다.
나는 헌터 시대와 비헌터 시대를 모두 겪은 마지막 세대였다.
나와 함께하는 신들은 그들의 신화가 실제 있었던 역사처럼 말하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신화가 인간이 만들어 낸 이야기였던 세계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나 신의 자리에 올라 신들과 함께 하고 있는 이상, 그들과는 그러한 인간의 관점에서 신화를 이야기할 수 없었다.
단군은 다르지 않을까.
그는 인간이니, 인간의 관점에 더 가까운 시선으로 신을 바라보지 않을까.
다만 2022년생인 단군은 신화가 현실이 된 이후에 태어난 인간이었다.
당연하게도 신화가 이야기였던 2021년 이전의 세계를 알지 못했고, 따라서 신들처럼 신화를 실존하는 역사로 여겨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어떻게 신화를 바라볼지 가늠하며 그의 답을 기다렸다.
“글쎄요,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는 생각합니다만.”
단군이 미소를 거두고 담담히 대답했다.
“사실 저는 사흘 전의 대화에서 다른 것을 떠올렸습니다.”
“다른 것이요?”
“네, 이를테면…… 사해 용왕이 의미하는 자연의 다면성이라든가.”
사해 용왕이 의미하는 자연의 다면성이라.
신을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역시 단군도 신화를 실제 역사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낸 어떠한 상징으로 여기는 걸까.
세상의 인과를 읽는 깊고 검은 눈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혹시 제주도에 돌이 많은 이유를 아시는지요, 염라.”
뒤이어 이어진 그의 물음.
나는 잠시 눈을 끔뻑이다 아는 대로 답했다.
“아마…… 섬사람들에게 진노한 남해 용왕이 사흘간 홍수를 일으켜서 돌밖에 안 남았다고 하죠.”
대답하면서 사흘 전에 들었던 동해 용왕의 말을 곱씹었다.
-나는 그것으로부터 인간과 우리의 길이 갈렸다고 생각하네.
인간 문명의 시작.
그것을 기점으로 인간의 길과 짐승의 길의 갈라짐을 받아들였다는 말을.
그러자 한발 늦게 확연해졌다.
이승 삼신이 저승 삼신에게 승리함으로써 짐승과 길을 달리하는 인간 문명이 시작되었고, 끝내는 짐승이 인간에게 밀려날 것이라고 말하던 동해 용왕.
그리고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자연재해 그 자체로서 인간의 터전에 해를 가했던 남해 용왕의 차이가.
“동해 용왕이 인간이 문명을 통해 길들인 자연이라면, 남해 용왕은 반대로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재해로서의 자연이라는 뜻인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단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초의 바다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을지라도 사해 용왕의 신화를 되짚어 볼 필요는 있겠다고요.”
그 말을 듣고서, 나는 끊어내지 못한 탯줄을 떠올렸다.
인간의 마음을 끊어 내지 못했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마음으로 신을 바라봐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단군은 차사들과 공유할 수 없는 단상을 나눌 수 있는 상대였다.
탯줄을 끊고 인간의 관점을 벗어난 차사들은, 결코 사해 용왕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지 않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문득 단군이 다른 말을 꺼냈다.
“다만 그에 앞서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염라.”
“……부탁이요?”
단군이 ‘부탁’이라는 말로 무언가를 요청해 온 것은 처음이 아니었으나 여전히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내가 그의 행동 하나에 아쉬움을 느낀다면 모를까, 딱히 그가 내게 부탁을 해야 할 만한 위치는 아니었으므로.
“네, 부탁입니다.”
이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군의 그린 듯한 눈이 곱게 접혔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할 수 없어 조금 경계하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당신의 저승 신화에 저를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 부탁이라는 것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을 아득하게 벗어나 있었다.
39장. 합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