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장. 합류(5)
사흘은 빠르다면 빠르게, 느리다면 느리게 지나갔다.
대외적으로 나는 독 때문에 병석에 누워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방에서 나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 핑계가 아주 거짓인 건 아니라서 실제로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보내기는 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감정꽃을 달인 약을 먹으면 금방 잠이 들어 답답함을 느낄 새는 거의 없었다.
온몸에 퍼졌던 흑암지옥의 독은 어느 정도 치료되었지만 사라는 완치된 게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감정꽃을 통해 영혼에 독이 작용하는 것을 막았을 뿐, 독 자체를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했다나.
그래도 단군이 꽃씨까지 가져다준 덕에 또 독이 퍼진다 한들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꽃감관의 권능을 불어넣으면 씨앗은 금방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울 테니까.
그렇게 아침저녁 하루 두 번 약을 먹었다.
약 기운에 몽롱해질 때는 유독 누군가가 떠오르곤 했다.
심장을 얼린 채 아무런 꿈도 없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서해 용왕.
같은 독에 당했기에 짐작할 수 있는 그의 마음을 생각하다 보면 나는 어느샌가 잠들어 있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언제나 강림 형이 잠들기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내 곁을 지키고 있었다.
현신한 상태에서는 인간과 똑같이 피로가 쌓인다.
사흘 내내 같은 자세로 자리를 지키는 일은 형에게도 무리가 될 터였다.
-저를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대왕님께서는 몸을 돌보시는 데 집중해 주십시오.
그런데 만류해도 계속 이런 말이나 하니까, 똑같은 대답을 세 번이나 들은 다음부턴 말을 더 꺼내기도 미안해졌다.
그렇다 보니 방에 찾아오는 이 중 가장 반가운 건 호구별성이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방에만 있으면 심심해서 어쩌냐며 용신들에게서 놀잇감을 빌려 왔는데, 그게 무려 윷판이었다.
-흉물답게 이런 상황에도 놀 생각만 하는군.
-헹, 넌 절대 안 끼워준다. 끼고 싶으면 아주 울면서 빌어야 할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우리가 윷놀이를 할 때면 형은 내 뒤에서 조용히 팔짱을 끼고 지켜보곤 했다.
형이 끼지 않아서 윷놀이는 다른 두 차사, 나, 바리 이렇게 넷이서만 했는데, 딱히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사흘 내내 나와 바리가 한 편, 호구별성과 사라가 한 편이 되었다.
편을 나누는 방식은 별거 없었다.
윷을 하나 던져서 앞면이 나오는지 뒷면이 나오는지로 정했다.
-별성, 네가 던지거라.
-말도 네가 알아서 옮기거라.
-그래, 그래. 혼자서도 잘하니 아주 기특하구나.
사라는 윷을 던지는 것마저 귀찮아해서 호구별성이 사라 몫까지 던진 터라, 사실상 호구별성 혼자 우리를 상대한 거나 다름없었지만.
-오빠, 이 말 움직이면 다음에 도가 나와서 언니한테 잡힐 것 같아요. 다른 말 움직일까요?
-오빠, 다다음 차례에 걸이 나와서 언니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업을까요?
호구별성에게는 안됐지만 마고할미를 등에 업은 만신 바리의 육감은 굉장했다.
중요한 순간마다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적절하게 말을 움직였으니까.
그 덕에 우리의 말은 호구별성에게 한 번도 잡히지 않았다.
반대로 호구별성의 말은 도착을 앞두고 족족 우리에게 잡혀버렸지.
그렇게 우리는 사흘 내내 전승을 이어 갔다.
나는 언제고 호구별성이 ‘바리 육감 이제부터 금지야!’라며 막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패배의 분노가 향하는 곳은 사라였다.
-영감! 대체 할 줄 아는 게 뭐야? 윷도 못 던지는 게 앞일도 못 봐? 왜 이렇게 쓸모가 없어!
-너랑 같은 편을 해주고 있지 않느냐.
-뭐야?!
사라를 구박하면서도 호구별성은 끝까지 바리의 육감을 막지 않았다.
언젠가는 바리와 한 편이 될 거라면서.
하지만…….
-왠지 사흘 내내 오빠랑 같은 편이 될 것 같았는데, 진짜로 그렇게 됐네요.
직후 충격과 배신감으로 굳어버린 호구별성을 강림 형이 한껏 비웃었더랬다.
그렇게 사흘.
아침저녁으로는 약 기운에 취해 잠들고, 깨어 있는 동안에는 윷놀이를 하면서 보낸 시간을 돌이켜보며 나는 침대에서 내려섰다.
“……이제 슬슬 시간이 된 거지?”
해가 질 무렵이었다.
윷판을 정리한 호구별성이 사뭇 진지해진 낯으로 물었다.
“단군, 그놈이 오늘 저녁 때 놈들이 찾아올 거랬으니까.”
그리 말하는 그녀의 눈빛은 묘해서, 단군의 말을 신뢰하면서도 신뢰한다는 사실 자체를 거북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네……. 곧 신화전이 시작되겠네요.”
그녀의 말을 받으며 단군을 생각했다.
아마도 용궁 어딘가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을 그는 사흘 내내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용태는 괜찮으십니까, 대왕님.”
줄곧 내 옆을 지키며 상태를 살펴 온 강림 형이 물었다.
나날이 괜찮아지는 걸 봤으면서도 내가 정말로 신화전을 치러도 될지 염려하는 기색이었다.
“독은 대부분 억제되었다. 일부러 혼을 자극하지 않는 이상 전처럼 쉬이 상처가 터지는 일은 없을 거야.”
사라가 나 대신 대답했다.
그 말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형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나는 보란 듯이 힘차게 검을 들었다.
“괜찮아요, 형. 이제 오른팔도 멀쩡해진걸요.”
그런데 하필이라고 해야 할까.
쿠우웅!
그렇게 형을 돌아보는 순간에 일대가 진동하면서 이질적인 기운이 번져 왔다.
[ (!) 해당 영역의 카르마가 당신의 카르마에 반응합니다. ]
신화전의 필드가 전개되었음을 알리는 팝업창이었다.
[ ‘왕을 벨검몃밍랩룩논꽥딤냘흐흐’에 입장벴녀땍궐러흐흐흐습니다! ]
- (!) 해당 벴넹냇방뜁흐흐흐의 등급은 ‘미완벨곗곈꽹띰결흐흐설’입니다.
“……!”
한데 신화전의 필드를 알리는 창에 오류가 섞여 있었다.
“……신화전에서 오류가 났다고?”
자연히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번 신화전에 앞서 오류창을 띄웠던 암리타.
그것을 상기하자, 어쩌면 한반도가 아닌 다른 신화의 각성자가 신화전을 벌여서 오류가 일어난 걸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잇달아 뇌리를 스쳤다.
그게 아니라면 혹시 생각지 못한 변수가 있는 걸까.
[ ‘동해의 주인’에 입장하셨습니다! ]
- (!) 해당 필드의 등급은 ‘미완성 전설’입니다.
재차 신화전의 필드를 알리는 팝업창이 떴다.
처음 전개된 필드와 달리 이쪽 필드는 제대로 된 팝업창이었다.
“그래도 동해 용왕네는 알기 쉽네.”
호구별성이 실소하며 말했다.
“둘 다 오류가 났으면 어느 쪽이 우리 팀인지도 모를 뻔했잖아.”
일리 있는 말인지라 나도 헛웃음을 흘렸다.
[ (!) 공간의 지배법칙이 충돌합니다. ]
[ (!) 현재 신화전(神話戰)이 진행 중입니다. ]
두 필드 간의 신화전이 시작되었다.
신화전의 규칙에 따라 우리는 두 필드 중 하나를 선택해 참전할 수 있다.
[ ‘왕을 벨검몃밍랩룩논꽥딤냘흐흐’이 당신의 참전을 권벴녁띄받듬흐흐흐다! ]
- 승리 조건 : 왕 벨검몃밍랜흐흐흐
- 지배도 : 99%
침략자들의 필드가 먼저 우리에게 참전을 권했다.
“지배도가 99%라…… 확실히 동해 용왕님께서 곤란하시겠어요.”
지배도는 신화전을 전개한 신앙과 카르마 포인트를 얼마나 지배하고 있느냐를 의미한다.
결국 이 신화전을 전개한 신앙과 카르마 포인트는 전부 상대의 자원이라는 뜻이다.
침략자들은 그것을 이용해 용왕을 무력화시킬 셈이고.
[ ‘동해의 주인’이 당신의 참전을 권합니다! ]
- 승리 조건 : 왕 수호
- 지배도 : 3%
이어서 동해의 필드도 우리에게 참전을 권했다.
“응? 그 짧은 사이 지배도가 좀 올랐는데?”
팝업창을 확인한 호구별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해 용왕님과 전사들이 선전하고 있나 봐요.”
나는 반갑게 그녀의 말을 받았다.
신화전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전개한 필드의 규칙에 따라 상대가 쏟아부은 신앙과 카르마 포인트를 역으로 빼앗을 수 있다.
동해 용궁 쪽의 지배도가 올랐다는 것은, 말 그대로 용궁을 침략한 자들을 상대로 동해 용궁 측이 제법 잘 싸우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쪽의 승리 조건이 왕을 수호하는 것이라면, 저쪽의 승리 조건도 어느 정도 예상이 되는구나.”
사라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용왕과 우리의 왕을 모두 노리고 있겠지.”
다만 나의 경우에는 생포가 목적이었으나, 동해 용왕은 어떻게 하려는 건지 확실치 않았다.
바다의 신화가 목표라면 제일 가능성이 높은 건 역시 경쟁자를 미리 제거하는 일이려나.
[ ‘동해의 주인’에 참여합니다! ]
- 승리 조건 : 왕 수호
- 지배도 : 4%
동해 용궁 진영을 선택하자마자 떠오른 팝업창.
나는 또다시 1%p 높아진 지배도를 확인하곤 차사들을 돌아보았다.
“서해 용궁에서 벌였던 신화전과 달리 이번 신화전은 분명 설계자가 있을 거예요.”
설계자란 신화전을 전개한, 법칙의 핵을 품고 있는 존재다.
쉽게 말해 일대를 던전화하면서 스스로 던전의 보스가 된 것과 비슷하다.
서해 용궁에서 치른 신화전의 목적은 용신들이 물러간 땅에서 지옥수를 키우는 것.
즉, 실시간으로 필드의 법칙을 조작할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그때는 설계자 없이 지옥수가 법칙의 핵을 품고 있었고, 지옥수의 핵을 부숨으로써 신화전을 끝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때와 달리 신화전의 설계자를 직접 상대해야 할 터.
“그리고 신화전의 설계자는 여러 명일 수도 있어요.”
“여러 명?”
“네, 그러니까 던전의 보스가 여러 명인 거죠.”
“하긴 노리는 게 왕 둘이라면, 그쪽에서도 급을 맞춰 나와야 할 테지.”
알아들었다는 듯 사라가 수긍했을 때였다.
“습격입니다.”
나지막하되 내리꽂히는 듯한 목소리와 동시에 검푸른 신성이 번쩍였다.
파아앙!
발설지옥의 신성이 방 안을 뒤덮고, 나 역시 그에 즉시 반응하여 언제든 반격할 수 있게 검을 단단히 고쳐 쥐자마자.
콰아아앙!
폭음이 울리면서 방이 거세게 요동쳤다.
“이런, 깨어 있잖아?”
지진이라도 발생한 것처럼 일대가 흔들리는 가운데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 못 차리고 있대서 그냥 집어가면 될 줄 알았는데.”
어째선지 일전에 들었던 것과 비슷한 목소리였다.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나를 카르마 등급 필드에 끌어들였던 문어 용신과 흡사한 외관을 지닌 그녀는 어느새 우리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설계자네요.”
바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공간의 기가 저 용신을 중심으로 비틀려 있어요.”
대상의 인과를 읽을 수 있는 무당의 눈은 설계자가 품은 법칙의 핵도 읽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시시각각 변하고 있고요.”
문어 용신을 주시하던 바리가 한마디를 더한 순간.
“뭐, 귀찮게 내가 전부 상대할 필요는 없겠지.”
문어 용신이 여러 쌍의 팔을 크게 휘저었다.
“어때, 우리 중 누가 먼저 왕을 찾는지 같이 숨바꼭질해 볼까?”
콰아앙!
콰아아아앙!
그녀가 즐거운 기색으로 소리쳤다.
곧이어 거친 폭음과 함께 일대가 흔들렸다.
“뭐야, 잠깐!”
호구별성의 외침과 함께 사방에서 벽이 솟아올랐다.
“갑자기 공간이 바뀌잖아!”
“왕을 고립시킬 속셈이구나……!”
호구별성에게서 암녹색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적들의 노림수를 알아챈 사라가 황급히 나를 돌아보며 팔을 뻗었다.
“대왕님!”
사라보다도 가까이 있던 강림 형이 먼저 나를 잡아채기 직전.
콰아아아아앙!
시야에 들어찬 것은 형이 아니라 거대한 벽이었다.
가지를 치듯 곳곳에 솟아오른 벽.
그것들은 공간을 분리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분리한 공간을 멋대로 뒤섞기 시작했다.
“……무슨.”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벽이 솟는 건 발을 딛고 선 바닥만이 아니었다.
벽에서 벽이, 천장에서 벽이, 그렇게 솟아난 벽에서 또 다른 벽이 치솟았다.
온갖 방향에서 솟아나는 벽은 이제 그것이 벽인지 천장인지 구분하기도 힘들었다.
나를 둘러싼 공간이 순식간에 재구축되었고 눈에 들어온 모든 것이 뒤흔들렸다.
“이런……!”
그리하여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나는 전혀 다른 공간에 서 있었다.
낭패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흔들림이 멈춘 땅에는 드높은 벽이 내 앞뒤로 길을 만들고 있었다.
천장은 다시 판판해져 있었으나 그건 더 이상 내가 머물던 침소의 푸른 천장이 아니었다.
나는 직감했다.
이곳은 옳은 길을 고르지 못하면 영영 갇혀 버리는 미로였다.
“신앙을 얼마나 쏟아부었길래 공간까지 마음대로 뒤바꾸는 거야…….”
설계자는 신화전 필드의 법칙을 조작하니, 이론적으로는 순식간에 공간의 형태를 바꾸는 것 또한 가능하다.
그래,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목격하자 숫제 황당함이 밀려왔다.
한반도 밖에서 왔다는 자들.
그 정체 모를 자들은 그만큼 압도적인 신앙을 쌓았다는 뜻일까.
“하지만 신화전이란 게 꼭 신앙을 쏟아붓는다고 이기는 것도 아니니까.”
새삼 피어오르는 긴장감을 애써 가라앉혔다.
불시에 덮쳐 올 적을 대비해 업경의 권능에 힘을 더하며, 나는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