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장. 합류(4)
나는 동서의 용왕을 대신하여 바다의 신화에 도전하기로 했다.
이야기를 마친 용신들이 먼저 방을 나섰고, 사라는 내 상처에 쓸 약을 더 달여야 한다며 뒤이어 자리를 떠났다.
그다음으로 호구별성이 좁은 방에 우르르 몰려 있어 봤자 답답하기만 하다며 바리를 데리고 나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기실 용신들이 왕족 대우하며 내어준 방은 좁지 않았다.
내가 일행들의 걱정을 사는 걸 불편해하니까 부러 자리를 비켜준 것 같았다.
해서 지금 내 곁에는 강림 형과 단군이 남았다.
단군 또한 전할 것은 다 전했다며 일찌감치 물러가려 했지만 내가 잡았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강림 형이 결코 떨어지지 않을 기세로 목석처럼 서 있는지라, 나는 형의 눈치를 보느라 쉬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솔직히 나는 단군과 단둘이 이야기 나누고 싶었는데.
형은 절대 자리 안 비켜주겠지.
지금도 독대가 웬 말이냐며 온몸으로 소리치는 것 같고.
결국 길게 한숨을 내쉰 나는 옆에 형을 대동한 채 입을 열었다.
“왜 내가 바다의 신화를 얻어야 하는지 다시 말해줄 수 있을까요, 단군.”
내가 먼저 입을 열기까지 내내 침묵하던 단군이 나와 눈을 맞추었다.
“이미 말씀드린 이유로도 충분하지 않으신지요.”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여느 때처럼 차분하게 미소 지은 그를 보며 나는 반대로 표정을 굳혔다.
“어째서 당신이 직접 도전하지 않는지 이유를 듣고 싶어요.”
재차 물으면서 업경의 권능에 힘을 더했으나, 여전히 그에게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역시나 내게 속내를 내비치지 않으려 했고, 그런 그를 파헤치기에 아직 내 권능은 모자랐다.
“제가 나선다면 동해 용왕님께서 받아들이시지 않으셨겠죠. 그분에게 있어 당신은 은인이지만, 저는 그냥 낯선 육지의 것이잖습니까.”
때문에 나는 그 원론적인 답변 앞에 계속해서 석연치 않은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만 말씀드리자면…….”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덧붙였다.
“저는 머지않아 하늘의 신화에 도전하게 됩니다.”
하늘의 신화.
자연스레 사랑과 희망 병원에서 얻었던 원천강의 풍문이 떠올랐다.
하늘의 신화에 대한 도전 자격을 얻는다고 설명되었던 천계의 풍문.
당시에는 무슨 뜻인지 모르고 넘어갔지만, 바다의 신화에 도전하게 되면서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바다의 신화를 얻으면 바다의 왕이 되듯, 하늘의 신화를 얻으면 하늘을 아우르는 왕이 되는 것이군요.”
그것을 깨닫자 자청비를 비롯한 천신들이 이미 단군과 교류를 나누고 있던 것이 곱씹혔다.
천신들은 벌써 단군을 새로운 하늘의 왕으로 세울 대비를 하고 있던 걸까.
“당신께서 바다의 신화를 얻으시는 데 도움을 드린다면, 당신께서도 제게 도움을 주실지 모르잖습니까.”
그는 가볍게 말했지만, 나로서는 차마 가볍게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렇다는 건, 역시 제게 빚을 지우겠다는 건가요?”
나를 내세우는 데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처럼 들려서.
-나는 당신과 그 남자가 손잡은 세상이 오는 게 무서워요.
또한 그것이, 언젠가 적탑주 주도영에게 들은 말을 떠올리게 해서.
“아니요, 제가 도와드린다고 해서 당신께서 제게 똑같이 돌려주셔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그의 입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물론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그저 저승의 대왕님께 잘 보이려는 마음에서입니다. 전 언제나 당신께 잘 보이고 싶은걸요.”
……설마 또 건물주 타령인가.
이번에도 속내를 제대로 밝히지 않고 농담으로 넘길 셈이구나.
본인이 그러겠다면 무슨 말을 더해도 소용없었다.
그런 생각에 입을 다물었는데 혹 언짢아 보였던 걸까.
단군이 천천히 미소를 거두었다.
“정말로 한반도의 다른 각성자들에게 바다를 넘겨선 안 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나지막이 말하는 그의 얼굴은 어딘가 덧없어 보였다.
……그래, 언젠가 내게 후생을 말하며 지어 보이던 웃음처럼.
“저는 당신이 한반도의 열 번째 전설을 갖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염라.”
“…….”
“당신께서는 제가 하지 못할 일을 해주실 테니까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우주가 내게 천벌을 맡긴 이유는 단군이 고착시킨 한반도를 깨트리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그 말은, 꼭 단군 본인도 그것을 바랐다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그야 신들보다도 천기를 잘 읽는 인간이니, 나의 존재가 한반도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지 않겠지만…….
“내가 다쳤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생각이 복잡해져서 말을 돌렸다.
차사들도 난감해하던 천계의 꽃을 몸소 가져다준 걸 짚어내며.
그가 내 위험을 미리 읽고 대처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전에 혼만 납치당했을 때도 그러했고, 적탑주와 대면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필요할 때마다 그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가 나를 주시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에는 어쩔 수 없이 거북함이 피어올랐다.
“삼신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예상외였다.
그러나 납득하는 건 어렵지 않았고, 순순히 납득하자마자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그는 대체 어떻게…… 삼신과 그렇게 가까이 지내게 된 걸까.
삼신이 사랑과 희망 병원에서 천부인의 길드원으로 나타났던 것을 생각하면, 꽤나 긴밀하게 연결된 것 같은데.
“삼신은 제게 천기를 읽는 법을 가르쳐주신 분입니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단군이 연달아 놀라운 말을 꺼냈다.
“갑자기 너무 많은 것이 보여서 혼란스러울 때, 그분께서 보는 것을 제어하는 법을 가르쳐주셨죠.”
“그분이…… 인간한테 직접 가르침을 내리셨다고요?”
난생처음 듣는 말에 나도 모르게 반문했다.
내가 아는 생불왕은 결코 인간 한 명에게 관심을 보일 신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썩 내키지는 않아 하셨죠.”
단군이 옅은 웃음기를 띤 목소리로 덧붙였다.
“가르쳐주실 때까지 그냥 제가 그분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분을…… 쫓아다녀요?”
인간한테 쫓겨 다니는 삼신이라니.
더욱 상상할 수 없는 그림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뭐, 너무 많은 게 보여서 오히려 눈에 뵈는 게 없었다고 할까요.”
단군은 그제야 조금 멋쩍은 얼굴로 변명했다.
다만 그것에는 짧은 말로는 전부 담을 수 없는 많은 것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이대로 미쳐서 죽든, 아니면 신께 노여움을 사서 죽든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다 결국 삼신께서 제게 가르침을 내려주셨죠.”
멋쩍어하던 얼굴에 다시금 무게가 실렸다.
“그게 우주의 뜻이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제 눈에 그분이 계속해서 보인다는 것이.”
단군이 그녀를 계속 쫓아다닐 수 있었던 것을, 삼신은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라고 받아들였다는 것일까.
어찌 보면 단군의 능력이 뛰어나서 삼신이 가르침을 내렸다는 이야기였지만, 정작 그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인간과 신임에도 둘은 어딘가 닮은 면모가 있었다.
그들이 당연하다는 듯 사용하는 운명론적 표현들은 내게 단군과 삼신을 비슷한 존재로 느껴지게끔 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물었다.
“한데…… 갑자기 너무 많이 보이셨다고요?”
“네, 처음부터 그렇게 보였던 것은 아니었거든요.”
도사들은 능력이 한 번에 성장하기도 하는 걸까?
그렇게 이해하려는 순간 그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20여 년쯤 전에, 갑자기 너무 많은 것이 보이게 됐죠.”
단군의 말은 그것으로 끝이었지만, 재차 조용히 미소 짓는 그와 마주한 나는 그가 무엇을 가리켜 답한 것인지 알아차렸다.
그의 능력이…… 무엇을 계기로 그렇게 성장했는지를.
“…….”
그러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들을 입 밖으로 꺼내기엔, 줄곧 내 옆을 지키고 있는 강림 형이 신경 쓰였다.
정자세로 선 채 미동도 없이 서늘한 눈으로 단군을 내려다보는 형.
내가 단군과 대화를 하고 싶어 하니 일부러 끼어들지 않고 지켜보고만 있지만, 나는 형이 단군을 탐탁지 않아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형이 그를 탐탁지 않아 하는 것은 결국, 내가 그를 살렸기 때문이고.
내 손으로 직접 살려낸 그에게…… 지나친 호의를 보인다고 생각해서.
그러나 강림 형을 의식하며 망설이다가도, 한 가지는 확인하고 싶어서 조심스레 입을 뗐다.
“……그러면, 삼신께 가르침을 받고 나서는 괜찮으신 건가요?”
너무 많은 것이 보여서 미쳐 죽을 것 같았다던 그는, 지금은 괜찮은 걸까.
내 물음에 단군은 깊고 검은 눈으로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짧고도 긴 시간.
그의 얼굴에 서서히 특유의 옅은 미소가 번졌다.
“네, 매일 아침 그날의 소소한 즐거움을 기대할 정도로는요.”
수려한 눈매가 장난스럽게 휘어졌다.
“이를테면 포기했던 한정판 장난감이 재판매된다든가, 그런 미래는 다행히 이제 보이지 않거든요. 그런 건 미리 알면 재미없지 않습니까.”
그는 언뜻 괜찮아 보였다.
스스로도 그렇다고 말했다.
큰 미래를 내다보게 된다면, 오히려 큰 의미 없이 지나쳐버릴 작은 일상이 더 소중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게는, 그 말이 사소한 것에 집중하지 않으면 지금도 견디기 힘들다는 말로 들려서…… 거듭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나는 내가 살려낸 남자에게 마음을 쓰고 만다.
되살아난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알고 싶어 한다.
“아직 회복 중이신 것으로 압니다.”
그런 생각으로 입을 다물고 있자 단군이 다시 말했다.
“대왕님께서도 이제 그만 쉬시는 게 좋습니다.”
나를 위하는 말이지만, 사실 단군이라고 이 시간이 편했을까.
대화를 나누는 내내 저승사자가 사늘한 눈으로 내려다보는데 마음이 편한 게 이상하지.
“당신께서는 여전히 독에 당하신 상태이고 저는 용궁에 오지 않았으니, 남해가 신화전을 벌이는 날 다시 뵙겠군요.”
싸움이 시작될 때까지 나를 찾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리 말하는 이를 구태여 붙잡을 이유가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때가 되면 뵙겠습니다, 염라.”
인사를 마지막으로 일어선 단군마저 침소를 나간 후.
나는 나갈 기미 없이 곧은 자세로 서 있는 강림 형을 올려다봤다.
생각해 보니 눈을 뜨고서 지금까지 형과 대화를 나눌 새가 없었다.
“어…… 형은, 계속 거기 서 있을 거예요?”
이제 와서 둘만 남겨진 것이 어색해서 물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쉬십시오.”
형은 단군이 사라진 의자 대신 문을 주시하며 대답했다.
그렇게 말한다고 신경을 안 쓸 수 있으면 정말 사는 게 몇 배는 더 편할 텐데.
나는 짐짓 속으로 툴툴대며 괜스레 이불만 더 끌어당기면서도,
동시에 업경이 형의 마음을 읽을 수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형.”
고개를 숙이고 이불에 새겨진 자수를 만지작거렸다.
“……걱정하게 만들어서 죄송해요.”
별다른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이불 속에 파묻히듯 몸을 눕혔다.
“저는, 대왕님이.”
차츰 졸음이 밀려들 때 즈음.
한동안 침묵하던 형이 나직하게 말했다.
“당신 탓을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 말에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남해와의 신화전까지 앞으로 사흘.
최대한 컨디션을 회복해야 할 텐데, 공연히 갑갑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