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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32화 (132/187)

39장. 합류(3)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말에 모두의 시선이 단군을 향했다.

나 또한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이방인인 내가 모든 바다의 왕이 되어야 한다니, 분명 쉬이 받아들일 수 없는 발언이었다.

한데 그보다 나를 더 당혹스럽게 한 것은, 수천수만 년의 세월을 살아온 신화적 존재들 사이에서 아무렇지 않게 그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 명의 인간 그 자체였다.

내가 품은 것이 당혹감이라면, 이곳에 모인 다른 신들이 느낀 것은 거북함이었다.

신의 영역에 들어선 인간에 대한 본능적인 거북함이 업경의 권능을 통해 뚜렷하게 전해져 왔다.

그것을 모를 리 없음에도 단군은 부드러운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로 태연자약하게 자리를 지켰다.

“이유를 들을 수 있겠나?”

짧지 않은 침묵 끝에 동해 용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새 염라가 바다의 신화를 가져야 하는 이유 말일세.”

괜히 입술을 달싹이며 동해 용왕과 단군을 바라보았다.

나는 정신을 잃은 사이 단군과 신들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 모른다.

그저 저승 삼신이 빌려준 반지를 지니고 내 독을 고칠 천계의 꽃을 가져왔기에, 용신들이 그가 용궁에 머무는 것을 허락했다는 사실만 전해 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허락을 결코 흔쾌히 내주진 않았을 터였다.

용궁은 본디 왕족의 은인 외에는 허락되지 않는 곳인바, 감히 인간이 숨어들었는데 어찌 불쾌하지 않을까.

업경의 권능으로 밀려드는 동해 용왕의 마음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와 같았다.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했으나 기실 언제 집채만 한 파도가 쳐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마음으로 눈앞에 선 인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불안해서 용신과 인간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염라대왕님께서 힘을 빌려주지 않으신다면 동해는 사흘 뒤 있을 남해의 습격을 막아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단군이 내놓은 이유를 듣자마자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나를 높이 평가하는 것 이전에 바다의 지배자를 상대로 지나치게 무례하다는 생각을 거둘 수 없었다.

“아니, 그…….”

나는 급히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까 그랬죠. 당신과 저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용신들의 눈을 피했다고.”

그가 축복의 힘으로 기척을 숨겼으니 단군의 방문을 아는 것은 이 자리에 있는 세 용신과 내 일행들뿐.

“그 말은 즉 당신과 제가 적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뜻입니까?”

단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대왕님께서 흑암지옥의 독에 당해 움직이실 수 없다 여길 테니까요.”

옆에 선 강림 형이 무서운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

아마 크게 다쳤던 내가 바로 싸움에 나서는 게 내키지 않는 것이겠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당장 단군의 입을 다물게 할 기미는 아니었다.

“동해의 병사들과 내가 건재한데 굳이 귀빈을 나서게 할 생각은 없네.”

먼저 반대를 표한 건 동해 용왕이었다.

“다친 새 염라를 싸움에 휘말리게 해선 안 되지.”

용왕의 눈썹이 살짝 떨렸다.

부탁을 받고 얼음 산호를 채취하러 갔던 내가 습격을 당한 것에 큰 책임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동해 용궁의 저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용왕의 말에 단군이 차분히 대꾸했다.

“다만 상대는 동해 용궁에서 신화전을 벌일 것입니다.”

“아…….”

“신화전?”

나는 그 말에 담긴 뜻을 곧장 알아듣고 탄식했으나, 우주질서보존회의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은 용신들은 설명을 요하는 눈으로 단군을 주시했다.

“신화전에서는 신앙을 사용하여 신성을 더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이용해 동해 용왕님과 용궁의 전사들을 무력화시킬 테지요.”

“서해에서도 근원을 알 수 없는 힘과 겨룬 적이 있었지.”

서해 용왕비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서해의 용신들은 이미 흑탑과 신화전을 벌인 적이 있어 빠르게 납득했다.

그들은 끝내 신화전에서 승리하지 못한 채로 동해로 피신해야 했으니까.

“그렇다면 흑탑 외에도 남해와 손을 잡은 각성자가 있다는 뜻이겠네요.”

암리타.

흑암지옥의 나무에서 얻었던, 한반도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이 땅의 바다로 흘러들어온 신화의 흔적을 떠올렸다.

“한반도의 각성자는 아닙니다.”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단군이 말했다.

“바다의 신화는 꼭 한반도의 각성자가 아니라도 얻을 수 있거든요.”

마저 설명한 그가 이야기를 되돌렸다.

“그러니 동해 용궁에서 신화전이 벌어질 경우 신앙을 쌓지 않은 동해는 승리하기 힘듭니다.”

“육지에서 인간의 신앙을 얻은 새 염라라면 이길 수 있다, 이건가.”

동해 용왕이 길게 침음했다.

“결국 동해를 지키려면 새 염라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거군.”

“……제 힘을 동해에 빌려드리는 것은 상관없습니다만.”

그 대화에 다소 부담을 느낀 나는 이불에 덮여 보이지 않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굳이 제가 바다의 신화를 얻어야 한다는 건 아직 납득이 되지 않는데요.”

“반드시 대왕님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군이 아무렇지 않게 긍정했다.

“이 바다의 신화를 가질 수 있다면 한반도의 각성자인 편이 낫고, 한반도의 각성자가 가져야 한다면 새로운 염라가 가장 낫다고 판단했을 뿐이니까요.”

듣기 전보다 마음이 더 불편해지는 설명이었다.

사해 용왕은 바다의 신화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이었으니.

“네 바다의 용왕님들께서는 형제간의 우열을 두지 않겠다는 뜻에서 그 신화를 봉인해 두셨지만, 더 이상은 힘드실 겁니다.”

내 마음과 달리 단군의 어조는 여전히 차분했다.

“단 하나의 신화를 위한 싸움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기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우주질서보존회도 바다의 신화가 완성되길 바라고 있겠지.

어쩌면 한참 전부터 이곳 상황을 지켜보는 중일지도 모르고.

“……알겠네.”

동해 용왕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하지.”

뒤이어 그의 현묘한 황금빛 눈동자가 나를 담았고,

“남해에 동해의 보물을 빼앗기지 않게 도와주게, 염라.”

나는 찰나지간 용의 시선에 사로잡힌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대가 이 바다의 왕이 되어주게.”

신뢰가 깃든 목소리였지만, 그 말을 냉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아뇨, 용왕님.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나는 즉답했다.

“남해를 저지하는 것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되찾아야 할 것 이상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진심이었다.

애당초 용왕들의 다툼에 끼어든 것은 남해가 가진 흑암지옥의 권능을 되찾기 위해서였을 뿐, 그 이상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하물며 그게 용왕들이 3만 년의 세월 동안 비밀리에 지켜 온 신화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한데 이런 내 말에도 동해 용왕은 쓰게 웃기만 했다.

“내 이미 동서의 바다는 그대를 우리와 똑같은 왕으로 대우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그대 역시 모든 바다의 왕이 될 자격이 있어.”

“그건…….”

물론 그렇게 말하기는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용궁에 머무는 동안 왕족에 준하는 편의를 제공하겠다는 의미로 여겼다.

그런데 동해 용왕은 정말로 나를 그들과 똑같은 왕으로 대우할 생각이었다.

똑같이 대우하다 못해 모든 바다의 왕이 될 자격마저 내어주려고 했다.

내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과는 별개로 업경은 그의 마음을 그리 전해 오고 있었다.

“생불왕의 신화를 알고 있는가, 염라.”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바라보던 그가 불쑥 다른 말을 꺼냈다.

질문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그의 황금빛 눈동자를 마주했다.

“2만 년 전, 먼저 육지에서 생불왕 노릇을 한 것은 내 큰 딸이었지.”

동해 용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서부터 못된 짓을 일삼는 바람에 쫓아버렸던 아이야.”

두 바다의 피를 받아 태어난 동해 용왕의 첫째 딸은 성정이 포악하기로 유명한 신이었다.

나자마자 어머니 동해 용왕비를 깨물었고,

두 살 때는 아버지 동해 용왕의 수염을 불태웠다.

세 살 때는 집 안의 곡식을 엉망으로 흐트러뜨렸으며,

네 살 때는 남의 집 곡식에마저 손을 댔다.

다섯 살 때는 남의 집에 돌을 던졌고,

여섯 살 때는 아이를 울렸으며,

일곱 살 때는 어른에게 욕을 했고,

여덟 살 때는 나쁜 소문을 퍼트린 것에 이어,

아홉 살 때는 급기야 거짓말로 불화를 조장하기 시작했다.

참다못한 동해 용왕이 물 밖으로 딸을 내쫓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동해 용왕비는 쫓겨난 딸에게 아이를 점지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인간들의 생불왕이 되어라 일렀다.

“내 딸이 생불왕 노릇을 했을 때 인간은 아이를 만드는 법은 알았지만 제대로 낳는 법은 알지 못했지.”

제대로 해산하지 못한 산모들이 죽어 나가니, 그제야 하늘의 신들에게 아이를 낳게 하는 법을 배운 신이 인간을 찾아와 새로운 생불왕이 되었다.

그것이 생불왕 이승 삼신의 신화였다.

“나는 그것으로부터 인간과 우리의 길이 갈렸다고 생각하네.”

동해 용왕이 말을 이었다.

“그때 우리는 인간과 함께 살았지. 아니, 인간이 짐승인 용을 섬겼다는 말이 맞겠어. 그런데 인간들에게 새로운 생불왕이 내려오면서…… 죄가 죄인 줄 모르는 짐승의 야성이 아니라 인간을 돌보기 위한 하늘의 지식이 인간을 맡게 되었을 때, 짐승과 인간의 길이 갈린 거야.”

용왕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동시에 삼신의 말을 떠올렸다.

탄생의 삼신이 운명을 점지하고, 죽음의 염라가 인간에게 책임을 지게 하면서 비로소 인간의 시대가 열렸다는 그 말.

동해 용왕은 그것을 용, 나아가 짐승들의 시점으로 말하고 있었다.

“바다에 찾아온 그대를 보니 그때와 같은 기분이 드네. 우리의 시대가 다시 한번 저물어간다는 생각이.”

-그런데 염라, 인간이 정말 그런 힘을 부릴 수 있는 겐가?

청공에서 돌아온 후 그가 했던 질문이 다시금 생각났다.

짐작하건대 그는, 그때부터 자신의 힘만으로는 바다를 지킬 수 없을 것이라 예감했던 게 아닐까.

“……용왕님께서 그리 생각하셨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황금빛 눈동자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으며 천천히 대답했다.

“용왕님의 말씀을 들으니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이 들어요.”

2만 년 전, 새로운 생불왕의 등장으로 인간과 짐승의 길이 갈렸다는 신화를 곱씹으며.

“육지의 제가 바다의 신화에 도전함으로써 앞서 갈라졌던 육지와 바다가 다시 맞닿게 되었다고요.”

3만 년의 세월을 바다를 지킨 짐승들의 신에게 말했다.

“모든 바다의 왕이라는 것의 정확한 의미는 모르겠지만 제가 정말로 그런 게 된다면…… 그건 어느 하나가 저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신화와 짐승의 신화가 다시금 하나로 엮인다는 뜻이 될 겁니다.”

그는 내 말에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단군이라고 했던가.”

그저 황금빛 용의 눈으로 나를 잠시간 바라보기만 하다가 내가 아닌 단군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 말이 맞군 그래.”

그의 주름진 눈이 나릿하게 감겼다.

“한반도의 누군가가 바다를 가져야 한다면, 이 이상은 없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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