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31화 (131/187)

39장. 합류(2)

파아앙!

검푸른 신성이 번쩍였다.

검은 두루마기 자락이 저 멀리 날아가는 것이 눈에 박혔다.

나는 뻗었던 팔을 한발 늦게 거두며 긴 숨을 내쉬었다.

“……하아.”

숨을 고르면서 망연히 시선을 내렸다.

방금까지 나와 권법을 겨루던 정웅 형이 바닥에 누워 있었다.

대(大)자로 뻗어 하늘을 보던 그가 이윽고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이거야 원, 저승에서 800년을 굴렀는데 2년짜리 막내한테 지다니.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 있겠나?”

말은 그렇게 해도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땀에 젖은 얼굴을 훔쳤다.

“어…… 그, 제가 형을 이겼어요?”

실감 없이 묻자, 얼마쯤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보고 있던 다른 형들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막내야! 2년 걸렸다!”

“크으으, 막둥이가 결국 우리를 전부 자빠뜨리는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2년밖에 안 돼서 전부 다 쓰러질 줄이야!”

“역시 발설지옥의 보물을 엉뚱한 지옥에 뺏긴 거라니까!”

형들의 호들갑에 괜히 볼이 간지러웠다.

나는 내게 몰려들어 연신 머리며 어깨, 등을 쓰다듬는 형들 사이에서 어색하게 웃었다.

밤마다 형들에게 끌려와서 발설지옥의 권법을 배운 지 2년.

스물여덟 명의 형제를 모두 쓰러트리면 졸업이라던 그날이 바로 오늘인 것 같았다.

처음 끌려왔을 때만 해도 볼이 퉁퉁 붓도록 두들겨 맞느라 과연 그런 날이 올까 싶었는데.

결국 형들을 모두 쓰러트렸다는 사실에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잘했다, 막내야.”

국양 형이 뿌듯하게 웃으며 내 손목을 쥐었다.

“이렇게 잘하는데 왜 그동안 칼질만 했어?”

아.

나는 장난스러운 물음에 순간 멈칫했다.

“발설지옥의 차사면 주먹을 써야지!”

스스로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 가는 게 느껴졌다.

즐거움이 담뿍 담긴 웃음소리, 나를 둘러싼 따뜻한 손길, 형들의 생기 넘기는 눈빛.

익숙한 타박은 도리어 그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는 과거임을 실감하게 했다.

“……그게, 쓰는 법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는데요.”

눈가에 큰 점이 있는 김단 형, 수염이 멋진 순포 형, 뺨에 긴 흉터가 있는 석래 형…… 나는 스물여덟 명의 형들을 하나하나 눈에 새기며 말했다.

“발설지옥의 힘만 쓰려고 하면 자꾸…….”

형들이 생각나서 못 썼어요.

채 말을 잇지 못한 채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고아하게 뻗은 염라궁의 처마 대신 어두운 천장이 보였다.

나를 둘러쌌던 형제들의 온기는 간데없이 묘한 한기가 살갗을 축축하게 덮어 왔다.

“으윽…….”

가늘게 신음하며 상황을 되짚었다.

형들의 꿈을 꾼 것 같은데…… 언제부터 잠든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문어 용신을 상대로 발설지옥의 신성을 썼던 것은 기억이 나는데.

그래서 내가 필드를 빠져나왔던가?

문어 용신이 죽은 거면, 그럼 차사들은…….

“……!”

문득 마지막으로 마주쳤던 검푸른 눈동자가 뇌리를 스쳤다.

“형……!”

서둘러 그것을 찾아 몸을 일으키는 찰나.

“여기 있습니다, 대왕님.”

곧바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정신이 드셨습니까?”

그의 물음에 몸을 움찔 떨며 옆을 돌아보았다.

형은 내 침대 옆에 의자를 두고 차분히 앉아 있었다.

흐트러짐 없이 곧은 자세를 하고서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어째서인지 나는 그런 형의 모습에서 기나긴 인고의 흔적을 읽었다.

오랫동안 지켜만 보느라 지쳐버린, 그래서 아무것도 표현할 수 없게 되어버린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기억이 어두워 제대로 생각나는 게 없다 해도 그가 무엇을 기다렸을지 모르지 않았다.

“형…… 저, 이겼죠?”

정신을 잃기 전, 이 단단한 눈동자 위로 더없이 선명한 감정이 일렁였던 것을 상기하며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 잘하셨습니다.”

오늘따라 더욱 푸르러 보이는 눈이 살짝 감기며 그런 대답이 돌아온 순간.

-잘했다, 막내야.

꿈속에서 만났던 형들의 목소리가 함께 얽혀 왔다.

내게 묻고 싶은 게 많을 터인데 형은 먼저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다.

형을 걱정시켰음에도, 그런 형의 걱정을 내가 불편해하기 때문이었다.

형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 마음이 편해질 리 없는데.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걱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내게 그 마음은 언제나 미안하고 불편한 것일 텐데.

그걸 알면서도 적당한 말을 생각해 내지 못해서, 그렇게 갑갑한 침묵에 떠밀리고 있을 때였다.

“전하, 일어났냐?”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몸은 괜찮아? 영감이 약 쓴다고 바로 편해지지는 않을 거랬는데.”

평소와 달리 머리를 길게 풀어 헤친 호구별성이 걱정스레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의식적으로 형의 눈을 피하며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아, 제가 약을…… 먹었나 봐요?”

“그래, 감정꽃을 달인 약이었지.”

내 물음에 대답한 건 호구별성에 이어 들어온 사라였다.

“감정꽃……?”

“혼살이꽃을 대체할 꽃들이다. 영혼에 독이 퍼졌으니 말이다.”

그 말만으로 상황을 파악하기에는 어려웠지만, 영혼에 독이 퍼졌다는 말만은 이해했다.

카르마 등급 필드에 끌려 들어갔을 때 흑암지옥의 독이 온몸으로 퍼졌던 게 어렴풋이 기억났다.

그렇게 마음을 잡으려고 애를 썼는데, 나는 기어이 당해버렸구나.

혼살이꽃을 대체할 꽃이라면 아마 천계에서만 구할 수 있을 터였다.

당연히 구하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자연히 불안이 솟았다.

“저 혹시, 제가 오래…… 잤을까요?”

청공에서 읽은 문어 용신들의 기억에 의하면 남해가 동해를 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는데 그런 때에 쓰러지다니.

그사이 동해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가 뒤늦게 걱정이 들었다.

“별일 없었으니까 남의 집 걱정 말고 우리 집 걱정이나 해라.”

호구별성이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다만 곧바로 한숨을 내쉬는 것이, 차사들에게 정말 쓸데없이 걱정을 끼쳤음을 실감한지라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직 궁금한 것은 많았지만 말을 할수록 무거워지는 분위기에 섣불리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이불 밑으로 손을 모아 쥔 채 차사들의 눈치를 보았다.

어쨌든 형도, 호구별성과 사라도 딱히 어딘가를 다친 듯 보이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틀이 지났다. 아직 놈들이 쳐들어오기까지는 며칠 더 시간이 더 있다더구나.”

사라가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이다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며칠 더 시간이 있다고요?”

꼭 누군가에게서 들은 미래를 전하는 것 같지 않은가.

“혹시 바리가 그새 미래를 봤나요?”

“아뇨, 오빠. 저는 아니에요.”

때마침 방에 들어온 바리가 질문에 답했다.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미래를 봤어요.”

그리 말을 잇는 아이의 뒤에서 생각지 못한 이가 걸어 들어왔다.

“무사히 눈을 뜨셔서 다행입니다.”

검은 머리칼 아래로 모양 좋게 뻗은 눈매가 반원을 그렸다.

마주칠 때마다 다른 모습이었지만, 오늘 걸친 하얀 두루마기 코트는 낯설지 않았다.

“앞서 드린 인사는 듣지 못하셨을 테니, 다시 인사를 드려야겠군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선연하게 귓가를 울렸다.

“천부인의 단군이 새로운 저승의 왕을 뵙습니다.”

나는 잠시 내가 아직 꿈을 꾸는 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침대에서 반쯤 몸을 일으킨 채 다소 난감한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해 용왕과 동해 용왕비, 서해 용왕비가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거기에 원래 내 곁에 있던 차사들과 바리, 단군까지 함께하니 결코 좁지 않은 방임에도 꽉 찬 것처럼 느껴졌다.

“일단…… 단군이 용궁에 와 있음을 아는 건 여기 계신 분들뿐이라는 거죠?”

어쨌든 들은 것을 차근차근 정리해 보았다.

“그래, 인간이 궁에 숨어들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나도 꽤나 놀랐네만.”

동해 용왕이 단군을 흘끗 곁눈질하며 긍정했다.

“그 아이가 직접 용왕의 가호를 빌려주었다고 하여 당장 경계는 풀었네.”

“저승 삼신께서 그런 호의를 베푸실 줄은 몰랐어요.”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단군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곧게 뻗은 손가락에 끼워진 은색 반지가 청옥색 신성을 발하고 있었다.

육지의 것이 바다에서 숨을 쉬게 해주고, 그에 더해 기척까지 숨겨주는 힘이 깃든 반지.

그는 그것을 저승 삼신에게서 빌려와 나를 치료할 감정꽃을 전해주었다고 했다.

“대왕님의 독을 치료하기 위해 왔습니다만, 이후를 고려하면 저와 대왕님의 존재를 감추는 편이 유리하다 판단하여 무례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반지를 낀 손을 공손히 모으며 단군이 설명했다.

용궁에 몰래 들어온 것을 사과하는 깔끔한 태도였다.

한데 존재를 감추기 위해서 용궁 안팎의 눈을 피했다면, 단군은 곧 있을 싸움에서 그와 나의 참전으로 적의 허를 찌를 계획인 걸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우선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사흘 뒤에 찾아올 남해 용신들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단군의 설명이 이어졌다.

“하나는 여기 계신 염라대왕님.”

아직 그들이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과,

“그리고 또 하나는 ‘바다의 신화’입니다.”

나로서는 잘 알지 못하는 신화에 대한 이야기였다.

“바다의 신화? 그게 뭔데?”

내게만 생소한 것은 아니었는지 호구별성이 불쑥 끼어들었다.

“…….”

그에 비해 동해 용왕은 단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린 듯 작게 눈썹을 떨었다.

“어찌 인간이 그런 것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용왕이 다소 경계가 어린 얼굴로 그의 말을 받았다.

“그래, 오윤이 그놈이 노리는 게 결국 바다의 신화였단 말인가?”

“아니, 그 전에 그 바다의 신화란 게 뭐냐니까?”

호구별성이 답답해하며 재촉했다.

동해 용왕은 영 내키지 않는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쉽게 말하자면 네 개 바다의 왕이 되는 걸세.”

“네 개 바다의 왕?”

“그래, 지금은 우리 사해용왕이 네 바다를 나누어 가졌지만, 그 신화를 완성하면 네 바다를 아우르는 하나의 왕이 탄생하는 게지.”

“오, 그러면 바다의 황제네?”

호구별성이 감탄사를 흘리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반면 동해 용왕의 미간은 그의 불안한 심정을 대변하는 것처럼 찌푸려졌다.

“우리도 정확한 내용은 알지 못하네. 그저 네 개 용궁이 지켜 왔던 보물을 한데 모으면 태초의 바다가 열린다는 것밖에는.”

“뭐야, 그럼 뭔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고 그냥 보물만 지킨 거야?”

호구별성의 물음에 동해 용왕이 어쩐지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넷이서 이미 네 바다를 나누어 가졌으니, 굳이 형제끼리 싸울 필요도 없지 않나.”

“음…….”

그 말대로 네 용왕이 각각 바다의 지배자가 되었다면 형제끼리 우열을 가려도 별 의미가 없었다.

호구별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오윤이 그놈이 바다의 신화를 손에 넣지 못하도록 막으면 되는 것인가?”

동해 용왕이 무거운 얼굴로 다시 물었다.

“비슷하긴 합니다만…… 정확히는 남해 용왕이 아닌 다른 분이 얻으셔야 합니다.”

부드러운 미소를 띄운 단군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예, 여기 계신 염라대왕님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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