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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30화 (130/187)

39장. 합류(1)

한라산 백록담.

섬을 만든 거대한 지모신이 앉을 자리가 필요해서 깎았다는 호수.

산서에 산개한 안개 사이로 푸른 갈기를 휘날리는 백룡이 고아하게 목을 뻗었다.

호수에 비친 황금빛 용의 눈동자가 심연처럼 깊다.

하늘에서는 용이 불러온 구름이 쉼 없이 비를 내렸다.

파도치는 물의 지배자가 인간의 발걸음을 끊을 요량으로 벌써 몇 달째 내리는 비였다.

쏟아지는 빗물과 깊게 고인 호수 속에서 용은 무언가를 읽어 내듯 한참이나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필요한 것은 보이시던가?”

문득 빗소리에 섞여 드는 목소리에 용이 시선을 돌렸다.

아무도 찾지 않던 호숫가에 누군가 곧게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눈이 마주친 이가 팔짱을 끼며 용을 올려다보았다.

“꽤 오랫동안 육지에 나와 있던 것 같던데.”

큰 키에 백발을 단정히 비녀로 틀어 올린 노인이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검푸른 소매와 서늘한 안광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영원히 젊은 신들 사이에서 드물게도 나이 든 모습이었지만, 2만 년을 살아온 용은 그녀에게서 언제나 앳된 소녀를 봤다.

-호오.

오랜만에 마주친 악우(惡友)를 향해 용이 꼿꼿하게 고개를 들었다.

-이거 명진국 따님아기씨 아니신가.

짓궂은 인사말에 아기씨라 불린 생불왕도 눈을 휘며 웃어 보였다.

“그래, 내 친구 용궁아기씨를 보러 왔지.”

그녀의 답에 용은 슬며시 물 밖으로 몸을 뻗었다.

청옥색의 신성이 거대한 백룡을 감싸더니 어느 순간 바람에 촛불이 꺼지듯 잦아들었고,

갑주처럼 찬란하던 비늘 대신 고운 비단옷이 크고 늘씬한 몸을 휘감았다.

저승 삼신.

죽은 아기들을 돌보는 또 하나의 삼신이 용의 모습을 벗고 물 밖에 섰다.

거칠게 휘날리는 서해의 하얀 머리칼은 동해의 푸른빛 또한 섞여 있어 파도를 형상화한 것만 같았다.

두 바다의 피를 이어받은 용신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대야말로 하늘에 있는 줄 알았는데, 여기서 생불왕을 볼 줄은 몰랐군.”

길게 기른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저승의 삼신이 이승의 삼신을 바라보았다.

현기가 깃든 노인의 얼굴에 고운 소녀의 얼굴이 겹쳤다.

생불왕의 천명을 받고 하늘에서 내려온 명진국 따님아기씨.

산모들이 나이 든 산파를 더 편안히 여긴다는 이유로 노인의 모습이 되었으나, 저승 삼신은 남색 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고 내려온 앳된 소녀를 기억했다.

나서부터 온갖 패악을 부렸다는 이유로 물 밖으로 쫓겨난 용의 딸과 달리, 처음부터 생불왕의 천명을 받고 인간의 시대를 열었던 천신의 딸이었다.

먼저 와서 생불왕 노릇을 했던 용의 딸은 아이를 점지하는 법은 배웠어도,

아이를 태어나는 법을 배우지는 못해 뱃속의 아이를 꺼내지 못하고 산모를 고통스럽게 하였다.

반면 나중에 온 천신의 딸은 휘황찬란한 하늘의 궁전에서 아이를 점지하는 법부터 아이를 태어나게 하는 법까지 모두 배우고 내려 와,

능숙하게 새 생명을 탄생시켰다.

둘 중 누가 생불왕의 천명에 걸맞는지는 자명하였다.

그럼에도 타고나기를 성정이 못된 용의 딸이 천신의 딸이 내 자리를 빼앗았다며 뺨을 때리고 악을 쓰니, 하늘은 두 소녀에게 생불왕의 자리를 두고 꽃을 피우는 재주를 겨루게 했다.

용의 딸이 기른 나무는 하나의 뿌리에서 하나의 가지만 자랐다.

하나의 가지에 겨우 핀 꽃 한 송이도 금세 시들어버렸다.

천신의 딸이 기른 나무에서는 사만오천육백 개의 가지가 자랐다.

각각의 가지마다 고운 꽃들이 풍성하게 만발했다.

훗날 인간들이 말하길 재주가 좋은 천신의 딸은 이승에 남아 만물을 점지하는 생불왕이 되고,

재주가 덜한 용의 딸은 저승에 가서 저승의 삼신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용의 딸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생과 사가 하나인데 어디 잘나고 못난 것이 있으랴.

다만 생은 그 모습이 여럿인지라 여러 꽃을 피운 소녀가 이승을 맡고,

죽음은 그와 달리 모습이 하나뿐인지라 하나의 꽃을 피운 소녀가 저승을 맡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천신의 딸께서 궂은 날씨에 물가는 웬일이시지?”

저승 삼신이 이승 삼신을 마주보며 물었다.

“앉아서 천 리를 보고, 서서 만 리를 보는 생불왕께서 나처럼 물에서 세상일을 들여다볼 것도 아닐 테고.”

비딱하게 고개를 갸웃했더니 이승 삼신이 미소를 거두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그대한테 부탁할 게 하나 있거든.”

“부탁?”

생각지 못한 말에 저승 삼신이 눈썹을 굽혔다.

“내가 그대한테 해줄 게 뭐가 있다고?”

“글쎄, 새로 얻은 아들놈이 영 손이 많이 가서 말이야.”

“아들?”

이어지는 말에 저승 삼신이 좀 더 인상을 찌푸렸다.

2만 년 동안 남의 자식이나 받아주던 신이 이제 와 아들이라니.

무슨 소린가 싶어 쳐다보니 이승 삼신이 태연히 대답했다.

“그래, 내 아들.”

언제나 냉랭하던 눈에 묘한 온기를 띄면서.

“새 염라.”

“아.”

그제야 저승 삼신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막내 놈.”

상투도 안 올린 앳된 얼굴을 떠올리며 그녀가 턱을 문질렀다.

“그놈이 결국 염라가 됐던가?”

“어째 그대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그럼 알지.”

의아함이 서린 말에 저승 삼신이 코웃음을 쳤다.

“언젠가부터 염라 그놈이 꼭 옛날의 나처럼 보였거든.”

“옛날의 자네라면?”

“물러가야 할 이.”

짧게 내뱉었더니 이승 삼신이 입을 다물었다.

저승 삼신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놈이 뭐가 문젠데?”

그에 잠시 침묵했던 이승 삼신은 비로소 할 말을 꺼냈다.

“그놈이 아파.”

“아파?”

“서해 용왕과 같은 독에 당했어.”

“흠, 그렇군.”

용도 꼼짝 못 하는 독에 당했으니 고생깨나 하고 있을 터였다.

커다란 백룡과 다르게 조그맣고 어린 녀석이니 더욱이.

“근데 그게 뭐? 3만 년 살아온 외조부도 못 일어나는 마당에 내가 뭘 해주겠어?”

저승 삼신은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시큰둥하게 물었다.

“독을 고쳐줬으면 해서 자네를 찾아온 게 아니야.”

“그러면?”

“용왕의 가호를 빌려줬으면 좋겠는데.”

용왕의 가호란 육지의 것이 바다에서 숨 쉬게 하는 용신의 축복을 일컬음이다.

“그대는 이미 2만 년도 전에 받았잖아?”

“물론 내가 쓰려는 건 아니지.”

이승 삼신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용신의 축복 말고 용왕의 가호가 필요해. 그대가 동해 용왕비에게 받은 것 말이야.”

이승 삼신이 덧붙인 말에 저승 삼신이 인상을 찌푸렸다.

“새 염라가 아프다더니, 대체 뭣 때문에 기척을 없애주는 힘까지 필요한 건데?”

이승 삼신이 가리켜 말한 것은 몰래 용궁에 드나들 수 있게 해주는 특별한 반지로, 아버지에 의해 쫓겨난 딸이 가여워 동해 용왕비가 내려준 가호였다.

쫓겨난 지 2만 년이 지난 지금이야 굳이 집구석에 몰래 기어들어 갈 이유가 없으니 빌려주는 것쯤 어렵지 않았다.

다만 갑자기 와서 대뜸 그걸 내어달라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왜긴, 내가 용궁에 몰래 들여보내야 할 놈이 있으니 그렇지.”

미심쩍어하는 저승 삼신에게 이승 삼신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하여튼 자식이 못나면 어미가 귀찮아지기 마련이야. 안 그런가?”

이승 삼신은 저와 새 염라를 두고 한 말이었지만, 저승 삼신은 그게 꼭 자신과 동해 용왕비 모녀를 가리키는 것 같아서 괜히 못마땅하게 팔짱을 꼈다.

***

동해 용궁의 침소.

독이 퍼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왕의 곁에서 호구별성이 침음했다.

눈 감은 앳된 얼굴이 생기를 잃고 하얗게 질려 있었다.

상처가 가득한 마른 몸 위로는 색색의 꽃잎이 덧없이 뿌려진 채였다.

부활의 권능이 시시각각 몸의 상처를 치료했으나, 가느다란 숨결이 이어질 때마다 삿된 기와 함께 다시금 살갗이 갈라지고 피가 흘렀다.

독기를 몰아내지 않는 이상 몸을 고치는 것은 깨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무의미한 연명에 불과했다.

무겁게 침잠한 방은 왕의 미약한 숨소리만 간간이 들리는 게 전부였다.

호구별성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얼굴로 왕만 내려다보는 강림, 불안한 얼굴로 문가에 선 바리를 돌아보고는 한숨을 쉬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까 지금, 이 독을 고치려면 천계에 가야 한다고?”

그녀의 물음에 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로서는 그 방법밖에 없다.”

그는 벌써 몇 시간 째 마력이 차오를 때마다 꽃잎을 새로 피웠으나 왕의 상태는 호전될 기미가 없었다.

“영혼을 해치는 마음의 독이야. 혼살이꽃이 필요하건만 지금 내 부활의 권능은 완전하지 않아.”

가짜 몸에 현신한 이후 사라는 네 개의 꽃에 담긴 부활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었고, 그중 혼을 담당하는 혼살이꽃은 포함되지 않았다.

저승의 바리네 조부모를 완전히 살려 내지 못한 것 역시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상처를 고치는 걸 떠나 망자를 완전히 되살리려면 다섯 꽃이 모두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비슷하게 기능할 만한 것이 감정꽃이다. 지난번 자청비에게 물으니 천계의 화원에는 아직 꽃이 남아있다고 했다.”

저승의 서천꽃밭은 서쪽 하늘의 꽃밭이라는 이름을 가졌고, 그 이름과 같이 서천의 모든 꽃은 천상의 화원에서 시작되었다.

부활의 오색 꽃은 서천꽃감관만의 권능이 되었지만 다른 꽃들은 하늘의 힘으로 기를 수 있을 터였다.

“웃음꽃, 울음꽃, 화남꽃. 이 셋이라도 있어야 혼에 손을 쓸 수 있을 거야. 그마저도 본래 큰 천을 덧대야 할 것을 조각조각 기워 놓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그럼 빨리 천계로 가자.”

이마를 쥔 호구별성이 짜내듯이 말했다.

“영감탱이들이라도 같은 천신한테는 문을 열어주겠지. 나랑 강림을 들여보내주지 않으면 영감이라도 가서 꽃을 받아와.”

“그리하면 왕의 몸을 돌볼 이가 없지 않느냐.”

다시 한번 검붉은 상처 위에 꽃을 피우며 사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다친 왕을 데리고 하늘로 가자니, 왕을 노리는 놈들이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지.”

청공에서도, 얼음 산호 궁전에서도 왕을 노리는 이들의 습격이 있었다.

그나마 용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용궁마저 떠난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젠장, 나 혼자라도 다녀와야 하나?”

한숨을 쉰 호구별성이 중얼거리듯 자문했다.

사라는 왕의 곁을 떠날 수 없고, 강림은 왕의 곁을 떠날 리 없으니 남은 것은 그녀뿐이었다.

다만 호구별성이 간다고 해서 천계가 문을 열어줄지가 문제였는데.

“알 게 뭐야, 안 열어주면 그냥 들이받아야지. 난 발이 빠르니까 서두르면 아마…….”

기실 그것 외에 다른 수가 없었다.

호구별성은 아주 작은 망설임조차 빠르게 지워버렸다.

그녀가 천계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을 떠올리며 최소 소요 시간을 계산하고 있을 때였다.

“잠깐만요……!”

문가에 기대서 있던 바리가 불현듯 등을 떼고 뒤를 돌았다.

“누군가…… 오고 있어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세 차사가 동시에 신성을 끌어올렸다.

바리의 말과 달리 그들은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용신들이 굳이 기척을 숨기고 찾아올 이유가 없으니 부정한 목적을 지닌 자가 분명했다.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그 즉시 불청객을 향해 검푸른 발설지옥의 신성이 쏘아지고 암녹색 역병의 신성이 휘몰아쳤다.

어느 때보다 빠르고 첨예한 선공에는 다친 왕에게의 접근을 결단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실려 있었다.

그러나 두 차사의 공격이 상대에게 닿기 직전.

화아아아악.

부드럽게 피어난 연녹색 신성이 두 힘을 감싸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꺼트려버렸다.

“이 새끼가……!”

예상 밖의 실력에 차사들의 기세가 더욱 흉흉해졌다.

공기가 저릿하게 느껴질 정도의 살기가 퍼져 나가는 것과 동시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두 차사가 재차 손을 쓰려 할 때였다.

“죄송합니다. 용신들의 눈을 피하려다 보니 본의 아니게 결례를 범했군요.”

몹시 수려한 얼굴의 청년이 빙긋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천부인의 단군이 새로운 대왕님을 뵙습니다.”

우아하게 떨어지는 하얀 두루마기 코트 위로, 왕에게 바칠 꽃을 한 아름 품에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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