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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28화 (128/187)

38장. 죄인(6)

-막내……야.

-제연아…….

시체 같은 모습으로 변한 발설지옥의 형제들이 내게 손을 흔들었다.

삭아버린 갓끈과 넝마가 된 두루마기 자락이 덧없이 나부꼈다.

“아…….”

무심코 탄식하며 엉망이 된 형제들을 올려다봤다.

-이리 와라…….

차갑게 식은 손이 어깨를 붙잡았다.

선명한 감촉에 몸을 떨자 그의 손이 갈퀴처럼 살갗을 파고들었다.

다정하게 붙잡는 손길에서 나를 해치겠다는 질척하고 선명한 악의가 느껴졌다.

“큭…….”

통증을 견디며 나를 둘러싼 차사들을 보았다.

단순히 환상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손길이, 그들의 모든 것이 물리력을 가진 것처럼 나를 조금씩 갉아먹었다.

죽는 것이 나을 만큼 고통스럽게 만들겠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고통스러운 환상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독처럼 퍼지며 고통을 가했다.

지옥수의 씨앗을 회수했음에도 적들이 가진 흑암지옥의 왜곡된 힘은 계속해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술사를…… 쳐야 해.”

형들의 환상에 둘러싸인 채로 업경의 권능에 집중했다.

이 환상을 빠져나가려면 결국 이 환상을 만들어낸 문어 용신을 쓰러트려야 했다.

청공에서 그랬듯이 환상을 불러온 문어 용신은 필드의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을 터였다.

그녀를 찾아내서 쓰러트리고 필드를 나가야 한다.

내 차사들의 도움 없이, 나 스스로.

-제연……아.

스물일곱 명의 차사들이 검은 파도처럼 사방에서 나를 짓눌러 왔다.

“……윽.”

나는 그들의 환상 자체가 술사의 몸을 숨길 수 있게 해주는 술법임을 알아차렸다.

그녀를 찾아 업경의 권능에 집중해도, 나를 덮치는 차사들의 환상은 내 업경의 감각까지 자꾸만 왜곡시키려 들었다.

앞으로 내달려야 하는데 암막이 겹겹이 늘어져 눈앞을 가로막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천을 치우지 않으면 속도를 낼 수 없듯이, 차사들의 환상을 잘라내지 못한다면 그녀에게 도달할 수 없을 터였다.

“베어야 해. 전부 다, 베어내야 해.”

입술을 짓씹으며 손에 쥔 검에 힘을 더했다.

-표정이 안 좋구나, 막내야…….

형제 한 명이 그런 내게 혀를 차며 손을 뻗었다.

얼굴 반쪽이 처참히 뭉개져 있었지만 나머지 반쪽만큼은 선명히 기억에 남아있는 얼굴이었다.

내가 다칠 때면 누구보다 먼저 서천꽃밭의 꽃을 꺾어다 주었던 삼언 형이었다.

-형들이…… 싫으냐?

그저 내게 고통을 주려는 목소리에 그리워 마지않는 형제의 온전한 얼굴이 겹쳐진다.

-제연아, 무리하지 마라.

환상보다도 더욱 선명한 과거의 기억이 덧씌워진다.

파아아악!

마음을 누를 새도 없이 오른쪽 어깨에서 검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터진 상처보다도 고통스러운 건 나를 보고 있는 수십 개의 가짜 눈들이었다.

형제들을 흉내 내는 환상.

그것들이 보내는 시선 하나하나에 가슴이 꿰뚫리는 것처럼 아팠다.

“미안…… 미안해요.”

나는 이제야 그 고통의 이유를 깨달았다.

“내가, 형들을, 모욕되게 했어요.”

환상을 실제와 구분하지 못해서 괴로운 것이 아니었다.

나를 가둔 이는 일부러 이런 환상을 만들어 냈다.

내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 흑암지옥의 힘으로 내 기억을 이토록 처참하게 왜곡해버린 것이다.

그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괴로웠다.

내 형제들을 이런 식으로 이용당하게 만들 만큼 내 마음이 약하다는 것이,

이제는 다시 만날 수도 없는 그들이 내 약점이 된다는 사실이 괴로워서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이 지옥에 갇힌 것은 전부 내 탓이었다.

내가 내 형제들을 나의 지옥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니까…….”

이를 악물고 손에 쥔 검에 힘을 더했다.

내 몸을 속박한 주술은 여전히 내 몸을 죄어 왔다.

상관없었다.

업경의 권능에 집중해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악!

어둠에 맞서 형제들의 환상을 베어냈다.

-이런, 왜 이러는 게냐, 막내야.

-우리한테…… 네가.

-막내……야.

-제……연아.

검날에 갈라진 형제들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물었다.

파아아악!

파아아아악!

그들이 질문할 때마다 겉만 아물었던 상처가 또 하나씩 터졌다.

일그러진 가짜들 위로 잃어버린 나의 형제들이 연이어 겹쳐졌고, 나는 그 괴리가 지옥의 함정이란 것을 알면서도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큿!”

어느 순간 버겁게 떨리기 시작한 왼팔에 부러 단단히 힘을 주었다.

강림 형과의 대련으로 좌수검에도 빠르게 익숙해졌다지만 그것으론 충분하지 않았다.

파아아악!

한 번 무리가 생기자, 어깨와 팔은 금 간 얼음판에 균열이 번지듯 몇 번이고 아문 살갗을 찢고 피를 뿜었다.

“안…… 돼, 빨리.”

아랑곳하지 않았다.

살이 찢기고 피가 쏟아져도 내 할 일은 달라지지 않았다.

촤악!

촤아아악!

촤아악!

검을 휘두를 때마다 환상 속 목소리도 선명해졌다.

-제연아.

-제연……아.

무시하려고 노력했다.

저것은 내가 맞서야 할 상대였고, 버거울지언정 왼팔은 아직 움직였다.

파아아아악!

불현듯 시커먼 핏물이 솟구쳤다.

검을 휘두르던 왼팔이었다.

“아……!”

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타버리는 듯한 격통이 일었다.

챙그랑.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놓쳐버린 검이 허망하게 바닥을 굴렀다.

“하아, 하아…….”

숨을 토해 내며 당장이라도 꺾일 것 같은 무릎을 바로 세웠다.

형제들의 환상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싸워야 해.

환상도, 고통도 신경 쓰지 마.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저 눈앞에 있는 저것들을…….

-막내야, 정말로 우리가 또다시 죽기를 바라는 게냐?

아.

내 형제들의 얼굴을 빼앗은 것들이 웃는다.

아무렇게나 뭉개진 얼굴로 일그러진 조소를 짓는다.

파아아악!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기분이 들었다.

직후 양팔을 넘어 전신에서 칠흑색 피가 살을 가르고 뿜어져 나왔다.

영혼을 갉아먹던 흑암지옥의 독이 완전히 퍼진 것이 느껴졌다.

파아악!

파아아아악!

그간 팔과 어깨로는 만족하지 못했다는 듯 육신이 사정없이 터져 나갔다.

살갗이 미어지고 뼈가 부러지는 통증이 엄습했다.

목구멍이 꽉 막혀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땅을 짚고 있었다.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 해도 온 신경이 끊어져버린 것처럼 신체가 말을 듣지 않았다.

“아, 아으…….”

바닥을 구르는 검을 내려다보며 몸을 떨었다.

단 하나의 생각만이 머릿속을 온통 뒤흔들었다.

내 탓이다.

내가 부족한 탓이다.

형제들의 환상보다도,

환상에 나를 가둔 술사보다도,

이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환멸이 요동쳤다.

“끝났네.”

그때 형제들의 목소리를 비집고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칼도 못 쓰잖아?”

너덜거리는 형제들의 환상 속에 선연한 비웃음이 섞여들었다.

“반쪽짜리 신 주제에 귀찮게 하긴.”

온몸에 퍼져버린 독에 눈을 뜨고 있기도 힘들었다.

끌어올렸던 업경의 권능은 이미 힘을 잃고 고꾸라진 채였다.

그럼에도 흐릿한 의식 속에서 여태 보이지 않았던 검은 촉수들이 아른거렸다.

……거기였나.

나는 멍하니 꿈틀거리는 그림자를 올려다봤다.

이제 와서 문어 용신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무언가를 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승리를 예감한 그녀가 환상을 풀고 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아직 의식은 남아 있구나. 그럼 좀 잘까?”

검게 꿈틀거리는 팔이 내 목을 붙들고 높이 들어 올렸다.

거칠게 끌어 올려진 몸은 허공에서 무력하게 흔들렸다.

“끅…….”

목이 거세게 조여드는데도 나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양팔만 움찔거렸다.

숨통이 뻑뻑하게 우그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시야가 점멸했다.

장막이 내려오듯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잠깐, 아니지. 생각해 보니 이대로는 좀 아쉬워.”

그녀는 머리 위로 들었던 나를 제 눈앞으로 홱 끌고 오더니 자상으로 얼룩진 얼굴을 비틀어 웃었다.

“똑똑히 봐라. 무능한 왕 때문에 모두가 죽어 나가는 꼴을.”

꺼져 들던 의식이 한순간 또렷해졌다.

그 찰나의 순간 떠오른 것은 필드 밖에서 날 찾고 있을 나의 차사들이었다.

죽는 게 나을 만큼 고통스럽게 하겠다는 그녀의 저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나는 그녀의 인질이 되어 차사들을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

그것만큼은 절대 안 돼.

흐릿한 시야에 이제는 없는 형제들의 등이 떠올랐다.

왕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불태운 이들이었다.

그들의 마지막을 되새기며 그들이 남긴 유산을 손끝에 휘감았다.

[ 발설지옥(L) ]

그들에게서 내게로 이어진, 우리 지옥의 유지.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나의 다섯 번째 지옥이 펼쳐졌다.

“뭐야?!”

검푸른 신성이 휘몰아쳤다.

내 목을 틀어쥔 문어 용신이 당황한 낯으로 뒷걸음질 쳤다.

“뭐야, 이 힘은……!”

엉망진창으로 부러진 팔은 여전히 손끝 하나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내가 이어받은 유지란 그런 것이었다.

파아아앙!

검푸른 빛이 번쩍였다.

직후 나를 붙잡고 있던 팔이 뜯기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사정없이 날아갔다.

허공에 떠 있던 몸이 추락했다.

제대로 설 힘조차 없는 몸이 꼼짝없이 바닥에 나뒹굴기 직전, 발설지옥의 권능으로 내 몸을 받아 세웠다.

꽉 막혀 있던 숨구멍으로 들이차는 공기에 절로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나는 수십 미터를 날아가 필드 벽에 부딪쳐 떨어진 문어 용신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녀와의 거리가 멀고, 내 몸뚱이가 형편없이 망가져 있다 한들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극에 달한 발설지옥의 권은 손에 닿지 않고도 적을 짓이기는 염동력이었으니.

“너는 여기서 죽을 거야. 내 차사들에게 가기도 전에.”

내동댕이쳐진 몸에서 촉수들이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게 보였다.

그에 다시 한번 신성을 일으키며 발설지옥을 펼치려던 때였다.

“……형들.”

어둠에 왜곡되지 않은 형제들의 모습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환상이되 환상이 아니었다.

카르마 등급의 필드는 자신이 겪어 온 모든 것을 엮어 내는 필드.

형들이 내 신성에 힘을 더하고 있었다.

쌍방의 카르마로 전개되는 필드이기에 섞여 드는 나의 업이었다.

때로는 너무 아파서 밖으로 꺼내지 못할 슬픔이, 결국 나를 강하게 만들 때가 있는 것처럼.

파아앙!

파아아아앙!

파아아앙!

발설지옥의 신성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필드 안을 검푸른 빛으로 물들었다.

“뭐, 뭐야, 뭐, 야아, 아악!!”

보이지 않는 힘에 짓이겨진 그녀가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재생할 여력 따위는 남기지 않아.

파아앙!

파아아앙!

나는 남은 마력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채로, 다만 희미해진 의식처럼 꺼져 가는 업경의 권능에 의지해 계속해서 발설지옥의 신성을 휘둘렀다.

파아아아악!

터져 나가는 어둠에,

어느 순간 한계에 달한 내 의식마저 완전히 검게 잠식될 때까지.

***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바위에 시선을 빼앗긴 잠깐 사이에 왕이 사라져버렸다.

강림은 왕이 사라진 자리를 망연히 내려다보았다.

얼핏 보였던 것은 문어 형태의 용신이었다.

청공에서 맞닥뜨린 자들과 똑같이 불경한 기운을 품고 있는 자였다.

보자마자 함정임을 깨달았으나 그것은 너무도 뒤늦어서.

왕에게 달려들던 그자를 쳐내려는 찰나 왕은 사라졌다.

“씨, 어떻게 된 거야……!”

낯빛이 어두워진 호구별성이 사방을 둘러봤다.

“어디 갔어, 얘! 설마 또 잡혀간 거야?!”

“아니…….”

그녀의 물음에 강림이 대답했다.

그 시선은 왕이 사라진 자리에 붙박인 채였다.

“분명 이 자리에 있다.”

그녀는 왕의 흔적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으나, 그는 보이지 않는 왕의 신성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이 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우리가 닿을 수 없는 거다.”

왕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지지 않았는데 닿을 수가 없다.

심장이 차갑게 식는 느낌에 그는 텅 빈 주먹을 움켜쥐었다.

“……필드구나.”

사라가 낮게 말하고는 침음했다.

“생사결의 필드야. 그 공간을 열면 외부와 단절되니까.”

그는 정황을 토대로 왕이 처한 상황을 짐작했다.

“처음부터 우리의 왕을 노렸어.”

“잠깐, 생사결?”

그 말에 호구별성이 언성을 높였다.

“그럼 지금 우리 핏덩이 혼자 목숨 걸고 싸우고 있단 거야?”

그녀가 조급하게 왕이 사라진 자리를 돌아보았다.

“걔 지금 마력도 없잖아……!”

“이기면 된다.”

그녀의 말에 강림이 자르듯이 대꾸했다.

“이겨서, 나올 거야.”

단호히 대답하면서도 그는 그것이 확신인지 바람인지 알 수 없었다.

머리가 뜨거웠다.

분노인지 무력감인지 모를 것이 그의 전부를 잠식한 기분이었다.

비이성적이고 무의미한 행위임을 알면서도 아무 곳이나 헤집고 싶은 충동이 치솟앗다.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

그 사실을 직면한 강림은 기약 없이 멈춰 버린 시간 속에 갇혔음을 실감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내리누르며 기다렸다.

아무것도 부수지 않고, 다른 차사들에게 화풀이하지 않고, 저 자신을 후려치고 싶은 걸 감내했다.

그런 강림을 본 호구별성과 사라는 어떤 말도 얹지 않았다.

그들이라고 해서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멈춘 시간을 따라 잠자코 멈춰 있었다.

그저 싸움이 끝날 때까지, 숨을 죽이고.

“아.”

하여 시간이 얼마나 멈춰 있었는지조차 감히 가늠하려 들지 못할 때가 되어서야.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던 용신 남매가 입을 열었다.

“공간의 기운이 흐트러진다.”

그러나 그들 남매가 말하기에 앞서 누군가는 이미 한발 먼저 달려 나가고 있었으니.

파아앙!

빛이 번쩍이면서 사라졌던 이가 생사결의 필드를 뚫고 나왔다.

“──!”

여러 충동을 억누르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사내가 다급히 팔을 뻗었다.

“……형.”

턱 끝까지 검게 중독된 채 전신이 찢기고 부러져 돌아온 막내,

아니 왕이 품 안에서 입술을 달싹이다 끝내 그 말만을 남기고 눈을 감았을 때.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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