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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27화 (127/187)

38장. 죄인(5)

“대왕님, 문제가 있으십니까?”

곁에 다가온 강림 형이 물었다.

나는 그제야 손에 들린 암리타를 차사들에게 들어 보였다.

“예상치 못한 아이템이 나와서요.”

“이게 뭔데? 우유처럼 생겼다.”

암리타를 들여다보며 호구별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힌두교의 창세신화인 유해교반(乳海攪拌)의 영약이었다.

우유의 바다에서 탄생한 영약답게 작은 병 안에서 찰랑거리는 암리타는 평범한 우유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마력을 100% 채워준다니까, 동해 용왕님이 주신 내단만큼 좋은 거긴 한데요.”

나는 암리타를 젖병처럼 흔들어 보면서 설명했다.

“아이템 설명에 오류가 섞여 있어요.”

심지어 만질 때는 스파크까지 튀었지.

지금껏 별 희한한 버그들에 시달려 온지라, 효과가 좋다 한들 정말 사용해도 될지 의심스러웠다.

“뭐, 내키지 않는다면 그냥 버리거라.”

팔짱을 낀 사라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으음, 그래도 마력을 채워주는 아이템은 흔치 않아서요.”

언젠가 마력이 바닥나서 긴급한 상황에 맞닥뜨리면, 분명 버린 걸 후회할 것 같고.

짧은 고민을 끝낸 나는 ‘미완성 암리타’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결국 흑암지옥 스킬은 활성화되지 않았네요.”

지옥수를 처리하고 흑암지옥의 씨앗까지 회수했으나 스킬창의 흑암지옥 스킬은 여전히 비활성 상태였다.

“하긴 지금 활성화된 다섯 개의 지옥 스킬들도 그랬었죠. 저승 던전에서 왕의 권능을 얻어 스킬을 활성화한 것과 서해 용궁에서 씨앗을 얻은 건 별개의 일이었으니.”

나는 스킬창을 괜히 한번 훑어보았다.

“역시 씨앗과 별개로 왕의 권능을 얻어야만 활성화되나 봐요.”

저승 던전에서 오도전륜대왕님의 권능을 가져간 자.

그자가 문어 용신들에게 지옥수를 심었을 터였다.

어쩌면…… 외국의 전설을 가졌을지도 모르고.

“대왕님, 그래도 목적했던 바는 다 이루셨습니다.”

강림 형이 말했다.

“지옥수와 한랭한 산호를 얻으셨지요.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형의 시선은 내내 나를 향해 있었다.

차분하게 말을 잇는 목소리에서 되레 일을 마쳤으니 서둘러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느껴졌다.

흑암지옥의 어둠에 당한 상처가 낫지 않는 이상 아마 그의 태도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네, 일단 용궁으로 돌아가요.”

나는 그 사실을 구태여 언급하지 않고 형의 말에 수긍했다.

그렇게 삼차사와 구출한 용신 남매와 함께 클리어된 던전을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근처에 있던 암초가 폭발했다.

부서진 암초 조각과 함께 근처에 있던 산호가 사방으로 튀었다.

“허?!”

“뭐야?!”

“바위가?”

나를 비롯해 깜짝 놀란 모두의 시선이 바위로 향했다.

“대왕님!”

그러다가도 강림 형은 허를 찔린 얼굴로 다급히 나를 돌아보았다.

파아아앙!

이쪽을 감싸듯 검푸른 신성이 번쩍였다.

[ (!) 공간의 지배법칙이 바뀝니다. ]

그러나 무슨 상황인지 채 파악하기도 전에 팝업창이 떴다.

[ 용신 ‘카드루’가 자신의 업으로 필드를 전개합니다. ]

- (!) 해당 필드의 등급은 ‘카르마(K)’입니다.

- 해체 조건 : 시전자의 카르마 완전 해체

던전을 클리어하고 막 돌아가려던 시점이기에 미처 예상하지 못한 한 수.

상대를 죽이지 않는 한 나갈 수 없는 생사결의 필드였다.

“이런……!”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필드 안에 들어와 있었다.

용신의 카르마로 전개된 필드여서일까.

빛이 닿지 않는 심해에 내던져진 듯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일부러 바위로 시선을 끌고 덮쳤어.”

카르마 등급의 필드는 외부와 단절된 이공간이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일행의 눈에는 갑자기 나타난 용신과 내가 눈 깜짝할 새 사라진 것처럼 보일 터였다.

‘죽음’을 꺼내 손에 쥐었으나 필드를 전개한 상대가 보이지 않았다.

습격에 대응하기 위해 업경의 권능을 끌어올렸다.

“저런, 긴장하지 마세요.”

불현듯 뒤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순히 따라오시면 해치지 않는답니다, 대왕님.”

“……!”

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촉수 같은 팔이 목을 휘감았다.

그녀는 청공에서 마주친 자들과 같이 문어 형태의 용신이었다.

축축한 빨판이 살갗에 닿는 감각이 기분 나쁠 정도로 선명했다.

“어차피 저를 상대할 마력도 없으실 테지요.”

이어진 말에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지옥수를 상대하느라 마력은 소진되었고, 카르마 등급 필드이기에 ‘신앙’을 사용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던전에서는 필드를 전개할 수 없다는 특성 때문에 상대 역시 조용히 숨어 던전이 클리어되길 기다렸으리라.

“저항하지 않으면…… 정말 해치지 않습니까?”

부러 떨리는 손끝을 감추듯 그러쥐며 물었다.

스스로 듣기에도 긴장을 숨기려 애써 담담한 체하는 목소리였다.

“물론이지요. 얌전히 계시면 움직임만 봉쇄하겠습니다.”

그녀가 목에 감았던 팔을 조금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촤아아악.

직후 목을 감은 팔에서 검은 기가 피어올랐다.

흑암지옥의 어둠이었다.

청공에서 문어들이 휘두르는 어둠에 몸이 묶였던 감각과 비슷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지옥수의 힘을 품고 있었다.

지옥수의 본체에서 흑암지옥의 씨앗을 회수했음에도, 앞서 지옥수를 심은 자들은 계속해서 권능을 부릴 수 있는 모양이었다.

“자아, 착하게, 손에 든 무서운 건 내려놓고…….”

문어 용신의 팔에서 피어오른 어둠이 몸을 구속하는 문자열이 되어 몸을 죄였다.

“……내 일행은 어떻게 됐죠?”

어둠이 내 몸을 완전히 속박한 것이 느껴졌다.

말을 끊고 다급하게, 그러면서도 한층 더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구속 주문을 완성한 문어 용신이 흡족한 눈치로 목에 감은 팔을 스르륵 풀었다.

“이동 주술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곱게 따라오신다면 다른 이들은 건들지 않을게요.”

친절한 대답이었으나 업경의 권능은 그 말에 담긴 거짓을 꿰뚫어 보았다.

파아악!

순식간에 오른쪽 어깻죽지에서 새까만 어둠이 터져 나왔다.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차사들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사실 앞에서만큼은 속으로도 담담할 수가 없었다.

“큿…….”

벌어진 상처에 이를 악물었다.

“저런. 남해에 도착하면 상처부터 치료해 드리지요.”

문어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남해라.

목적지는 남해인가.

결국 이렇게 나를 다시 잡을 생각이었기에 내가 지옥수의 씨앗을 회수하는 걸 내버려 둔 것일 수도 있겠어.

들은 것을 곱씹으며 잠시 숨을 골랐다.

이대로 필드 밖으로 나가면 나는 인질이 되고 말 터였다.

순순히 따르는 척 업경의 권능을 곤두세웠다.

상처가 터져버린 것은 낭패였으나 문어 용신이 경계를 푸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내가 아직 검을 쥐고 있다는 것조차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방심해 있었고,

나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통증은 무시했다.

업경의 권능으로 몸을 속박한 주술에 맞서 몸을 움직였다.

촤아아아악!

몸을 속박한 주술을 뚫고 검을 뻗었다.

청공의 문어 용신들을 상대했을 때처럼, 업경의 감각을 통해 ‘붙잡혀 있되 붙잡히지 않았다’는 것을 되새기며 휘두르는 검이었다.

“크윽!”

몸을 구속한 주술이 즉시 거세게 죄여 왔지만, 동시에 꿈틀거리는 팔 네 개가 깔끔하게 잘려 바닥에 투두둑 떨어졌다.

“아악……!”

불시에 팔을 잃은 문어 용신이 비명을 질렀다.

절단면에서 청공의 문어들처럼 드문드문 덩어리진 검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이…… 이, 무슨!”

“마력이 없어도 칼은 쓸 수 있습니다.”

파아아악!

몸을 묶은 어둠이 실체를 가진 것처럼 살갗을 파고들었다.

“크윽!”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업경으로 주술에 맞서며 끊임없이 찌르고 베어냈다.

절반가량 남아 있는 팔을 하나씩, 또 하나씩 잘라 나갔다.

촤아아아악!

“아악!”

그리하여 끝내 모든 팔을 잃은 문어 용신이 비명을 질렀다.

“이래도 당신은 나를 산 채로 데려가야 할 테고요.”

촤아아악!

촤아아아아악!

촤아아악!

좌수검으로 그려내는 검수지옥의 초식.

새벽 대련과는 달랐다.

눈앞의 상대를 상처입히고 죽음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검이었다.

파아악!

파아아악!

내 몸을 구속한 주술이 사정없이 나를 죄여 왔다.

하나 그것은 나를 완전히 해할 수 없었다.

“나는 당신을 죽이고 나갈 겁니다.”

촤아아아악!

마력이 담기지 않았다 한들 ‘죽음’이 그린 검수지옥의 초식은 문어 용신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쉴 새 없이 휘두른 검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게 된 문어 용신이 가늘게 움찔거렸다.

“하아, 하…….”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쓰러진 용신을 내려다보았다.

생사결의 필드는 지속되고 있었다.

뭉뚝하게 잘린 그녀의 몸 곳곳에서 검은 액체가 산 것처럼 흘러나와 꿈틀거렸다.

“……역시, 검만으로는 안 되는 건가.”

가늘게 눈을 좁혔다.

단면에서 흘러나온 어둠은 이내 슬라임처럼 출렁이며 뭉치기 시작했다.

청공의 문어들이 그러했듯 재생하려는 게 분명했다.

“그래, 선택의 여지가 없구나.”

산산조각 난 문어가 완전히 재생하기 전에 인벤토리에서 ‘미완성 암리타’를 꺼냈다.

파직!

꺼내든 순간 병을 쥔 손에 작은 스파크가 튀었지만 개의치 않고 그대로 복용했다.

[ (!) 미완성 암리타(낮흐흐흐)‘의 효과로 마력이 ‘100%’ 회베몄뇩밤럼흐흐흐니다. ]

오류창이 떴다.

그리고.

파지직!

파지지직!

전신에 스파크가 일었다.

“윽…….”

전신을 뒤덮은 통증과 열기에 머릿속이 울렁거렸다.

바닥났던 마력은 전부 채워졌으나 술에 취한 것처럼 시야가 핑 돌았다.

땅을 디디고 있는 감각이 흐려지며 똑바로 서는 일조차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빨리…… 끝을.”

떨리는 손으로 어떻게든 검을 고쳐 쥐면서 스킬을 시전하려던 그때였다.

파아아아악!

“크윽!”

몸을 구속했던 주술이 내 몸을 가차 없이 죄었다.

“이, 게 감히……!”

낯선 영약의 효과로 시간을 지체한 사이, 몸을 재생시킨 문어 용신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곱게 봐주려고 했더니, 감히……!”

“아으윽!”

끊어 낼 기세로 몸이 죄어드는 고통을 견디며 그녀를 직시했다.

“널 죽일 수 없으니, 그걸 이용해서 나를 죽이겠다?”

몸을 일으킨 그녀는 온전히 재생한 상태가 아니었다.

넝마가 된 것을 검은 천으로 덧댄 듯한 모습이었는데, 잘려 나간 자리에 새로 돋은 시커먼 팔이 기괴하게 구부러지고 비틀렸다.

“좋다. 그럼 나 또한 너를 차라리 죽기를 바랄 만큼 고통스럽게 살려 두마!”

화상 자국처럼 검게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가 소리쳤다.

검고도 흉측한 여러 쌍의 팔이 알 수 없는 문자열을 그렸다.

불길하게 빛나는 문자열 아래, 그녀가 피처럼 흘린 어둠이 뱀이 엉겨 붙듯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 아…….”

꿈틀대며 얽히던 어둠이 변했다.

내가 아는 형태로.

내가 아는 얼굴로.

-이런…… 막내야. 또…… 다쳤구나…….

-그래, 우리…… 막내가 또…….

-제연아, 많이…… 아프냐?

검은 두루마기 자락이 흩날렸다.

처음 흑암지옥의 어둠에 당한 이후 줄곧 상처를 들추었던 내 형제들의 체취가, 또다시 의식을 송두리째 집어삼키려 들었다.

다만 달랐다.

이번에 들이닥친 그것은 그 시절이 그립기에 괴로운 환상이 아니었다.

나는 몸이 죄어드는 고통도 잊고서 멍하니 그들을 올려다봤다.

-이리…… 와라, 막내야…….

-자아…….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형제들은 하얗게 뼈가 드러나고 살점이 문드러진 끔찍한 모습이었다.

-왜…… 제연아.

-이런 모습은…… 싫으냐?

-형……들이.

처참한 몰골이 된 형제들이 한없이 그리운 목소리로 그리 속삭였을 때.

-형들이……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느냐, 막내야.

나는 죽는 게 나을 만큼 고통스럽게 해주겠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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