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장. 죄인(4)
[ ‘불타는 지옥의 개’ ]
- 분류 : 무용담(E)
- 권능 : 오행 ː 화(火), 징악(懲惡)
- 내용 : 그 개는 불타는 지옥의 화신일지니.
- 효과 : 해태 멍군(lv.2)을 소환합니다.
멍군의 레벨이 오르면서 그의 풍문이 무용담으로 변모했다.
-멍멍!
불을 뿜어내는 하얗고 복실복실한 몸이 검붉은 신성을 발했다.
-멍멍멍!
신성을 두른 멍군이 용맹하게 짖으며 얼음 산호를 감싼 화탕지옥의 불길 속으로 달려들었다.
[ (!) 해태 ‘멍군’이 화탕지옥의 불길과 공명합니다. ]
거듭 팝업창이 떴다.
파아앙!
멍군을 중심으로 막대한 신성이 휘몰아치면서 빵실하고 부스스했던 흰 털이 구름처럼 고아하게 휘날렸다.
본래에도 마냥 작지 않았던 중형견의 몸은 숫제 사자만큼이나 커지더니 털에 가려져 있던 눈까지 형형한 빛을 띠었다.
[ (!) 해태 ‘멍군’이 화탕지옥의 불길을 삼킵니다. ]
“와아…….”
나는 멍하니 성장한 멍군을 바라보았다.
“불길이…….”
내가 불러낸 화탕의 불길이 멍군에게 깃들고 있었다.
불길은 사그라들었지만 멍군이 품은 검붉은 신성은 더욱 깊어져 갔다.
“화기를 그대로 흡수했구나.”
멍군이 품은 강력한 신성에 얼음 산호가 내뿜던 날카로운 얼음 파편은 우리에게 닿기도 전에 녹아내렸다.
물방울이 되어 투명하게 산란하는 얼음 파편 한가운데 선 신수의 위용이 몹시도 비범했다.
“호오, 이제야 좀 신수 같구나.”
지켜보던 사라가 말했다.
“나름 괜찮은데? 뿔이 없어서 아직 해태 같진 않지만.”
호구별성도 한마디 보탰다.
-멍멍멍!
머리를 꼿꼿이 세운 멍군이 칭찬에 답하듯 강맹하게 짖었다.
“아직도 말하는 것은 새끼 개처럼 품위가 없군.”
두 차사와 달리 강림 형은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듯이 눈썹을 굽혔지만.
-멍멍!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금 짖은 멍군이 산호를 향해 입을 벌렸다.
[ (!) 해태 ‘멍군’이 화탕지옥의 불길을 토해냅니다. ]
화르르르륵!
“……!”
해태의 갈기처럼 새하얀 불길이 얼음 산호를 덮쳤다.
화탕지옥의 신성을 품은 불기둥이 눈부시게 타올랐다.
순백 그 자체인 백염이었다.
화르륵!
화르르륵!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백색의 불꽃 폭풍이 얼음 궁전을 휩쓸었다.
얼음 산호가 지배하는 법칙의 영향력은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 (!) 얼음 산호가 베관띈극똴흐흐흐습니다. ]
그리하여 마침내 영향력이 ‘0%’으로 변한 순간 새로운 팝업창이 떴다.
[ (!) 얼음 산호에 붙잡벴눠냇밝똴흐흐흐 얼음베멸굶궈력렸꽝꽹뜰목흐흐. ]
[ (!) 얼음 산호에 붙잡벴눠냇밝똴흐흐흐 얼음베멸굶궈력렸꽝꽹뜰목흐흐. ]
[ (!) 얼음 산호에 붙잡벴눠냇밝똴흐흐흐 얼음베멸굶궈력렸꽝꽹뜰목흐흐. ]
연달아 떠오른 팝업창은 해석할 수 없는 오류로 뒤덮여 있었다.
쿠우우웅!
쿠우우우웅!
얼음 궁전 전체가 진동하면서 얼어붙었던 벽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어? 쟤네는 왜 같이 녹아?!”
호구별성이 당황하며 녹아내리는 얼음벽을 가리켰다.
그 속에 갇혀 있던 용신들이 그들을 가두었던 얼음과 함께 지워지듯 사라지고 있었다.
“아마 던전에 오류가 생겨서겠죠.”
나는 오류창을 곱씹으며 녹아내린 얼음 산호를 주시했다.
얼음 산호는 녹은 상태로도 여전히 흑암지옥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
멀쩡한 던전이었다면 조건을 충족했을 때 용신들이 풀려났겠지만, 지옥수를 키운 삿된 힘이 던전 자체를 일그러트리는 것 같았다.
-멍멍!
백염을 쏟아 낸 멍군이 힘차게 짖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파아앙!
그러고는 한순간 검붉은 빛에 휩싸였다.
“오잉? 다시 작아졌네?”
호구별성이 눈을 끔뻑이며 멍군을 내려다봤다.
삼켰던 불을 다 토해내서일까?
아니면 화탕지옥의 스킬을 끝내서일까?
사자만큼 커져서 구름 같은 털을 휘날리던 멍군은 다시 대걸레 같은 삽살개로 돌아와 있었다.
-멍멍멍!
눈이 마주친 멍군이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시원하게 짖으며 다시 내 안으로 폴짝 뛰어 들어왔다.
“아…….”
나는 뒤늦게 멍군이 사라진 가슴에 손을 올렸다.
“수고했어.”
전해질지는 모르겠으나, 가슴께를 매만지며 멍군에게 말했다.
쿠우우웅!
쿠우우우웅!
그사이 궁전이 더 크게 진동하기를 몇 번.
완전히 녹아버린 얼음 궁전 중앙에서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흑암지옥의 권능을 품은 지옥수.
서해 용궁에서 본 지옥수처럼 산호를 닮아 알록달록한 나무였다.
잎사귀 없이 뻗은 가지는 마치 촉수처럼 살아 움직였으며, 나무 밑으로는 읽을 수 없는 문자들이 붉게 빛나며 원을 형성하고 있었다.
“원 안으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차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흑암지옥의 권능에 갇히게 되실 겁니다.”
문어 용신들의 기억에서 본 주술을 상기하며 경고했다.
흑암지옥의 어둠을 뚫고 지옥수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업경의 권능을 가진 나뿐이었다.
이곳에 오기로 했을 때부터 일행들과는 이미 이야기가 된 상태였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인벤토리에서 미리 준비한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하나는 서해 용궁에서 지옥수를 벤 ‘진광대왕의 검’이었고,
하나는 동해 용왕이 내어준 특별한 내단이었다.
[ 천년거북의 내단(E) ]
- 천 년의 시간이 빚어낸 내단.
- 마력을 100% 회복시킨다.
상처를 치유하는 포션은 드물게나마 얻을 수 있지만, 마력을 회복시키는 포션은 존재하지 않았다.
최대치가 100에 고정되는 마력을 풍문을 통해 증폭시키는 것이 신화 통합 사업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용왕이 소유한 내단 중에 마력 회복 효과를 가진 아이템이 있을 줄이야.
짐승들의 신, 용의 신뢰를 얻는 것이 신화가 되는 조건이기 때문이려나.
“지옥수의 어둠에 오휼과 오혜를 가둔 것이 느껴집니다. 지옥수를 없애면 구할 수 있겠어요.”
덕분에 화탕지옥으로 소모한 마력을 도로 회복한 나는 다음 스킬을 시전했다.
[ 도산지옥(L) ]
지켜야 할 대상만큼 분신을 만들어내는 황금빛 권능이 손끝에서 뻗어 나갔다.
[ 도산지옥의 권능이 당신의 신성을 복사합니다! ]
- 구현 가능한 분신 수 : 4
도산지옥의 스킬은 삼차사뿐 아니라 잡힌 오휼과 오혜까지 내가 지켜야 할 대상으로 인식했다.
다만 100의 마력으로는 한계가 있어 오휼과 오혜를 포함해도 만들어지는 분신의 수는 다섯 개가 아니라 네 개였다.
필드를 열어 저승의 도산지옥 나무를 불러오면 분신을 좀 더 만들 수 있지만, 던전에서는 필드를 여는 것이 불가능하다.
아마 그것을 노리고 던전을 개조해서 지옥수를 키웠을 것이다.
“한 번에 끝내겠습니다.”
분신들과 함께 ‘진광대왕의 검’을 쥐었다.
길고 날렵한 ‘죽음’이나 ‘탄생’과는 달리 크고 무거운 대도였다.
시왕지옥의 첫 번째 지옥을 지키던 왕의 묵직한 힘이 손끝에 깃들었다.
“부디 조심해 주십시오.”
옆에 선 강림 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나서는 게 가장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걸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형으로선 내키지 않을 터였다.
형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지옥수를 직시했다.
지금만큼은 업경의 권능이 형의 마음을 읽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그럼 갑니다.”
분신들과 함께 지옥수로 달려들었다.
파아아앙!
나무에 접근한 순간 칠흑 같은 어둠이 온 시야를 뒤덮었다.
그러나 고작 그뿐.
나는 업경이 감지하는 지옥수를 향해 멈추지 않고 몰아쳐 들어갔다.
촤아아악!
어둠 속에서 두꺼운 가지가 휘둘러졌다.
보이지 않아도 힘줄이 돋은 끈적끈적한 촉수가 그대로 느껴졌다.
치미는 불쾌감에 인상을 찌푸리며 ‘진광대왕의 검’으로 가지를 받아쳤다.
퍼어억!
퍼어어어억!
퍼어어억!
열두 번의 공격을 흡수하면 열두 배로 되돌려주는 검이 악의를 품은 나무를 노렸다.
네 개의 분신들도 지옥수를 둘러싸고 일제히 같은 검을 휘둘렀다.
오른팔 대신 왼팔로 쥔 검은 조금 어색하게 보일지언정 그간의 단련 덕에 크게 부족하지 않았다.
퍼어어어억!
몇 번의 공방 끝에 마침내 열두 번의 공격을 받아쳤다.
필요한 공력이 모두 모였다.
네 개의 분신과 함께 진광대왕님의 검을 지옥수에 박아 넣었다.
파아아앙!
파아아아아앙!
파아아앙!
검에 담긴 도산지옥의 신성이 지옥수 안에서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켰다.
나와 함께 나무에 검을 박아 넣은 분신들마저 할 일을 마치고 사라지면서 지옥수는 계속해서 황금빛으로 폭발했다.
짧은 시간에 가장 막대한 화력을 내기 위한 도산지옥의 권능이었다.
파아아앙!
눈부시게 산개하는 황금빛 속.
갈라진 지옥수의 틈으로 팔을 집어넣었다.
[ (!) 충돌한 벨뜹겡벤록흐흐흐법칙이 주도권을 법멍때버뤽흐흐흐니다. ]
[ (!) 징벌(懲罰) ↔ 징악(懲惡) ]
오류창이 떴다.
주도권 싸움이 된 것은 지옥수가 품은 권능이 던전의 핵 역할을 했기 때문이리라.
나는 징벌의 권능에 맞서 내 권능에 힘을 더했다.
[ 공간의 벨땍몃밟뒷렉늬꽹뜰목흐흐 바뀝니다 : 징벌(懲罰) → 징악(懲惡) ]
도산지옥의 신성으로 너덜너덜해진 지옥수는 금세 내게 주도권을 빼앗겼다.
[ (!) ‘얼어붙은 산호 궁전’을 클리어 벴놂땍귀룔흐흐흐니다. ]
지옥수가 지배하던 던전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어둠을 품은 나무 또한 산산이 조각났다.
파아아앙!
시야를 가리던 어둠이 유리처럼 깨지면서 갇혔던 용신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염라!”
“그대가 왔었군!”
오휼과 오혜가 깜짝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미안하오. 그대에게 폐를 끼쳤어.”
“얼음 산호의 냉기를 채취하려고 했는데 그대로 어둠에 갇혀버렸소.”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내가 구출하러 왔음을 알아차렸다.
“무사하신 듯하니 다행입니다. 필요했던 냉기는 채취하신 거예요?”
이곳에 온 목적은 서해 용왕의 심장을 얼릴 한랭한 산호와 흑암을 품은 지옥수.
지옥수는 목적했던 대로 처리했으나, 지옥수를 품고 있던 얼음 산호는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고 말았다.
“상관없소. 산호를 채취하던 중에 갇힌 것이니.”
“이미 채취한 것으로도 충분하오.”
얼음 산호가 있던 자리를 걱정스레 힐끔거리자 남매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을 공략하지 않고 곧바로 얼음 산호에서 냉기를 채취했구나.
인간과 달리 던전에 얽매이지 않는 용신이라 그런 판단을 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다 된 거네요.”
나는 그들의 말에 안심하여 웃었다.
“대왕님.”
남매와의 대화가 마무리되자마자 강림 형이 내 곁에 다가왔다.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불안을 전부 숨기지 못한 검푸른 눈이 내 몸을 살폈다.
나는 밝게 미소 지으며 보란 듯이 양팔을 벌렸다.
“아주 멀쩡해요, 형. 도산지옥 스킬로 공략하길 잘한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악의를 품은 나무였으니, 다른 사람을 지키려는 도산지옥은 그야말로 상극이었을 터.
그럼에도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하는 형에게서 나는 짐짓 가볍게 돌아섰다.
“이제 지옥수가 남긴 것을 회수해야겠죠?”
지옥수의 본체는 쓰러졌다.
그렇다면 서해 용궁의 지옥수들과 마찬가지로 씨앗을 남겼을 것이다.
내 말에 형은 더 말을 잇지 않고 물러섰다.
나는 굳이 돌아보지 않으며 지옥수가 서 있던 자리로 다가갔다.
“어라.”
그런데 씨앗을 줍기 위해 자세를 낮춘 순간 예기치 않게 다른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뭐지?”
씨앗 근처에 놓인 작고 투명한 유리병이었다.
그 안에는 종류를 알 수 없는 하얀 액체가 담겨 있었다.
“포션인가?”
지옥수가 포션을 품고 있었다고?
겪어본 적 없는 상황에 이상함을 느끼며 손을 뻗었다.
파지직!
유리병과 닿은 손끝에 작은 스파크가 일면서 포션의 정보가 눈에 들어왔다.
[ 미완성 암리타(낮흐흐흐) ]
- 불사(不死)의 힘이 담긴 우유.
- 마력을 100% 회복벨깬몄눈럴렷륑빎.
(!) 해당 법맏몄깝룃흐흐흐는 인과가 왜곡베뀌땍근룐뢍뱝꽹딤묽뤠밖베깰꿨흐.
이번에도 오류가 뒤섞인 정보창이었다.
아이템의 등급도, 주의 문구도 도통 해석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암리타?”
나는 작게 떨리는 손으로 유리병을 쥐었다.
“그건…… 힌두교의 영약일 텐데.”
삼신의 목소리가 귓가에 되살아났다.
-그래, 너와 내가 한반도의 전설을 가졌는데…… 한반도의 전설급 각성자는 아홉이 더 있었지.
-한반도의 전설은 총 열 개인데 말이다.
어쩌면, 용궁을 노리는 자들에 대한 실마리가 될 수도 있는 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