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24화 (124/187)

38장. 죄인(2)

서해 용왕의 침전.

서해 용왕이 쓰러진 지 꼬박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동해 용왕의 부름을 받은 나와 삼차사는 어의 붕어 용신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왔다.

침대에 몸을 누인 서해 용왕의 곁에 동해 용왕과 동해 용왕비, 서해 용왕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 있었다.

쓰러진 서해 용왕은 독기 때문에 다시금 정기가 꼬이기 시작했는지 감은 눈 아래로 비늘 몇 개가 거칠게 돋은 채였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나와 삼차사는 인사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한숨을 삼켰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는 긴 침묵.

그 끝에서 동해 용왕이 침잠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일에 불러서 미안하네, 염라.”

나는 담담히 그의 눈을 마주했다.

이곳에 올 때부터 우리를 부른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했기 때문이다.

“오흠이 제어하고 있던 독기가 다시금 퍼지고 있네. 그런 와중 녀석의 의식도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어. 깨어 있는 시간이 자꾸만 짧아지는군.”

서해 용왕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눈을 감은 그가 악몽이라도 꾸는 듯 가늘게 신음했다.

흑암지옥의 독기가 날뛰는 탓이었다.

그의 상처가 헤집어지는 탓이었다.

“녀석이 잠든 동안은 약재로 독기를 제어하지만, 이대로 깨어나지 못한다면 그마저도 곧 한계를 맞이하겠지.”

말을 잇던 동해 용왕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독을 완전히 푸는 약이 만들어질 때까지 녀석의 심장을 한기로 멈추어 두는 게 어떻겠냐고…… 어의가 말을 하더군.”

“별, 살다 보니 용왕을 냉동 인간으로 만들자는 말까지 듣게 되네.”

호구별성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찼다.

“다만 용의 심장을 멈추려면 특별한 한기가 필요하네. 북해의 기운이 서린 산호 정도는 되어야 하지.”

동해 용왕이 말을 이었다.

“네 개 바다 중에서도 북해는 특별한 방법이 아니면 갈 수 없네. 하지만 이 동해에도 북해의 기운이 맺힌 곳이 있어.”

나도 조금은 아는 이야기였다.

바다를 지배하는 사해 용왕은 네 개 바다를 나눠 가진 형제였지만, 그중에서도 북해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북쪽에 위치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또한 북해의 용왕, 북방흑룡 광택왕은 어째서인지 신들조차도 그 모습을 본 이가 없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베일에 싸인 존재였다.

어쨌든 동해 용왕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해했다.

북해에 직접 갈 수는 없어도, 북해의 한기가 담긴 산호는 얻을 수 있다는 것.

“해서 이틀 전 산호가 있는 북쪽으로 오휼과 오혜를 보냈네. 그런데…… 그 애들마저 돌아오지를 못하는군.”

서해 용왕의 장남과 차녀마저 돌아오지 못했다고?

나와 삼차사는 동시에 얼굴을 굳혔다.

“그대도 현이와 지냈으니 알 테지. 우리는 물을 통해 뜻을 전할 수 있네. 용궁의 우물에 그 애들이 마지막으로 전한 말은 ‘춥고 어둡다’였어.”

춥다면 북해의 기운이 맺힌 장소에 닿았다는 뜻일 테고,

그에 더해 어둡다면…… 아마 흑암지옥을 말하는 것이리라.

“미안하네. 자네도 팔을 다쳤거늘 달리 맡길 수 있는 이가 없어.”

즉 서해 용왕의 심장을 얼릴 북방의 산호와 서해 용궁의 남매를 구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동해 용왕은 나를 부른 것이다.

현재 용궁에서 흑암지옥의 어둠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건 업경의 권능을 가진 나뿐이었으니.

“…….”

붕어 용신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그는 서해 용왕의 병을 고치지 못해 송구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하여 왕의 심장을 얼려야 한다는 처방을 내린 것까지 몹시 죄스럽다는 몸짓이었다.

“산호와 두 용신을 구해오겠습니다, 용왕님.”

잠깐의 침묵 끝에 나는 동해 용왕에게 대답했다.

“용왕님의 부탁 때문만은 아니니 마음 쓰실 것 없습니다. 저도 흑암지옥의 권능을 계속 쫓아야 하니까요.”

그의 부담을 덜기 위한 말만은 아니었다.

이전에 쓰러트렸던 문어 용신들의 기억에서 한랭한 기에 잠겨 있는 지옥수를 봤다.

그들에게 지옥의 권능을 심은 지옥수의 본체가 있다.

어쩌면 지금 가야 할 곳에 그 본체가 있을지도 모른다.

“남방의 신성이 담긴 패물을 빌려주겠소, 염라.”

곁을 지키던 서해 용왕비가 말을 꺼냈다.

“따뜻한 기운이 그대를 감쌀 터이니 북방의 산호를 손에 쥐어도 얼지 않을 것이오.”

앞서 무게를 더해주는 가락지를 빌려주었듯 그녀는 이번에도 용궁의 보물을 내주었다.

“근방에는 화기를 품은 산호가 있소. 그런데 그 애들은 춥다고 말했지. 그것이 걸리오.”

서해 용왕비가 조금 더 눈빛을 굳히며 말했다.

“북방의 산호를 가져오려면 필히 화기를 품은 산호를 지녀야 함을 그 애들이 모를 리 없는데…….”

흑암지옥의 어둠 외에도 무언가 변수가 존재한다.

용왕비는 그러한 가능성을 말하고 있었다.

“지체할 시간은 없겠지요. 곧바로 다녀오겠습니다.”

그녀의 언질을 되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즉답에 세 용신이 무거운 얼굴로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

한랭한 산호가 있다는 동해의 북녘.

나와 삼차사는 북해의 기운이 맺혀 있다는 협곡에 도착했다.

분명한 위험이 예상되었으므로 이번에는 바리를 대동하지 않았고,

앞장선 내 두 손에는 가야 할 방향을 일러주는 지도와 왕족의 신성에 반응한다는 흑진주가 들려 있었다.

“이곳이 입구군요.”

입구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북해의 기운이 감돈다는 말처럼 산호와 암초가 하얗게 얼어붙은 채였다.

“쌀쌀하다, 야.”

협곡 내부를 훑으며 호구별성이 말했다.

안쪽에서 불어와 살갗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이 그나마 쌀쌀하게만 느껴지는 건 서해 용왕비가 빌려준 남방의 패물 덕분이었다.

“흠…… 이게 그 화기를 품은 산호인가 보구나.”

주변을 살피던 사라가 말했다.

그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붉은 산호가 꽃가지처럼 뻗어 나온 커다란 암석이 눈에 들어왔다.

협곡의 주변이 모두 얼어붙어서인지, 그 부근만 붉게 녹아 있는 게 확실히 이질적이었다.

“남매는 잊지 않고 챙겨갔네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최근에 생긴 것으로 보이는, 군데군데 산호가 잘려 나간 흔적이 있었다.

“그런데 왜 춥다고 했을까.”

그들의 흔적을 살핀 뒤 나 또한 화기를 품은 산호를 일부 채취했다.

남방의 기운이 담긴 서해 용왕비의 패물을 지녔지만 꽁꽁 언 협곡 내부는 이 쌀쌀한 바람의 근원지였으니, 챙길 수 있는 화기는 모두 챙기는 편이 안전할 터였다.

채취한 산호를 다른 차사들에게도 나누어주고 있을 때.

-멍! 멍멍!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흰 털뭉치가 예고 없이 튀어나왔다.

-멍멍! 멍멍멍!

멍군이 밖으로 나온 건 꼬박 2주 만이었다.

새하얀 대걸레를 뒤집어쓴 모습으로 녀석이 복슬복슬한 꼬리를 마구 흔들었다.

“지금 나오면 추울 텐데…….”

한동안 안 나오더니 왜 하필 이렇게 추울 때 나오고 그럴까.

멍군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것은 제멋대로라서, 나는 녀석을 다시 집어넣지도 못하고 그저 난감하게 엉덩이를 토닥였다.

“해태는 화기를 품고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지켜보던 강림 형이 말했다.

“악인을 꿰뚫어 보는 눈도 있고, 데려가면 쓸모는 있겠지요.”

청공에서 보여준 활약을 생각하면 그냥 쓸모 있다는 말은 부족하지만, 어쨌든 멍군이 이곳에 나와 있어도 괜찮다는 건 이해했다.

“하나 여전히 신하의 예는 전혀 갖추지 못하였군요.”

다소 툴툴거리며 덧붙인 형은 명군이 내 품에 파고드는 멍군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이 녀석, 썩 내려와서 대왕님께 예를 차리지 못하겠느냐.”

그제야 멍군이 형을 휙 돌아보았다.

-멍멍!

“응……?”

한데 전과 달리 그 ‘멍멍’에서 어째 형을 반가워하는 기색이 묻어났다.

나는 눈을 끔뻑이며 둘을 번갈아 보았다.

-멍멍멍!

멍군은 강림 형을 향해 인사하듯 꼬리를 팔랑팔랑 흔들어주고는 다시 내게 안기며 뺨을 핥아 왔다.

“허, 여전히 말귀를 못 알아듣는 녀석이로구나.”

형은 더욱 못마땅한 얼굴이 되었으나 멍군은 형의 질책에도 계속해서 꼬리만 흔들었다.

“어…….”

때마침 업경의 감각이 밀려들고, 나는 달라진 두 신화적 존재의 관계를 알아챘다.

형은 멍군을 예와 충을 모르는 한심한 부하로 여긴다.

그런데 멍군은 이제 형을 전우로 생각한다.

청공에서 형과 함께 흑암지옥을 빠져나온 것을 계기로 전우애가 싹튼 모양이었다.

……뭐, 아직은 멍군의 일방적인 전우애였지만.

“일단 제가 안고 들어갈까요?”

어쨌든 시간을 더 지체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품에 안긴 멍군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싸움이 시작되면 멍군도 계속 이렇게 있지는 않을 거예요.”

내 말에 형이 완고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몸도 성치 않으신데 대왕님께서 녀석의 응석을 받아주실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더니 몹시 짜증스러운 눈으로 멍군을 번쩍 안아 들었다.

“차라리 제가 녀석을 옮기겠습니다.”

-멍멍!

멍군은 꼬리를 붕붕 흔들며 그 품에 얌전히 안겼다.

“뭐야, 생각보다 편해 보이는데?”

“흠, 강림 네가 나쁘지 않은 모양이구나.”

호구별성과 사라가 의외라는 눈으로 형과 멍군을 보며 말을 보탰다.

“저승의 신하가 이리 어리광이 많아서야.”

-멍멍멍!

형은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지만 그러든 말든 멍군은 기분 좋게 짖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어, 음…….”

나는 멍군에게서 새로이 밀려드는 감정에 작게 침음했다.

형을 보는 멍군의 감정이, 함께 난전을 겪은 전우애에서 그새 쓸 만한 탈것에 대한 만족감 정도로 변해 있었다.

“크흠.”

그걸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기에 나는 헛기침을 하며 협곡의 입구로 발을 내디뎠다.

“그럼 이제 들어가 볼까요?”

멍군을 품에 안은 강림 형과 두 차사 모두 진중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가 협곡 내부로 완전히 몸을 들였을 때.

[ (!) 공간의 지배베멋뇬깬뚜흐흐흐이 바뀝니다. ]

낯익은 팝업창이 떴다.

오류가 섞인 팝업창이었다.

“던전……?”

뜻밖의 상황에 주변을 둘러보는데 연이어 던전을 안내하는 창이 떠올랐다.

[ ‘얼어붙은 산호 궁전’에 입장하벨곽땍귀룔흐흐흐니다! ]

- (!) 해당 던전벨덮됩흐 등급은 ‘영웅담’입베깩됩흐다.

- 클리어 조건 : 얼어붙은 베멸굶궈렛흐흐흐을 해방벴녀땍귁렵롼륌꽹뙤땟흐흐.

“이런!”

낭패감에 인상을 찌푸렸다.

뜻하지 않게 던전에 들어와버린 것에 더해, 오류 탓에 클리어 조건마저 불확실했다.

“설마 오휼과 오혜가 갇힌 건 던전을 공략하지 못해서였나?”

하나의 가능성이 뒤늦게 뇌리를 스쳤다.

얼어붙은 산호 궁전이라는 이름처럼 협곡은 호화로운 궁전으로 변모했다.

동해 용궁과 닮았으나 눈에 닿는 모든 것이 시리도록 희게 얼붙은 모습이었다.

“아니, 잠깐만!”

그때 호구별성이 소리쳤다.

“여기가 무슨 냉장고냐?!”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로 외치며 그녀가 궁전의 구석을 가리켰다.

“저거 완전히 냉동실에 3년쯤 처박아 둔 수산물 아니냐고!”

몸이 꽁꽁 얼어붙은 용신들이 좀비처럼 뻣뻣한 몸짓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