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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23화 (123/187)

38장. 죄인(1)

-새파랗게 어린놈이 천 년은 굴러야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겠구나.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에 깜짝 몸을 떨었다.

눈이 마주친 아버지가 사늘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날이 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연민이 느껴지는 눈이었다.

2만 년의 세월을 징악의 신으로 군림한 저승의 왕은 이 땅을 찾는 모든 죄인을 그러한 눈으로 바라보고는 했다.

나는 가만히 서서 49년 전의 이날을 곱씹었다.

자살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것이 나의 죄목이었다.

이제 와 그것이 정말로 합당한 판결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때 나는 그 말을 어떤 의문도 없이 받아들였다.

나와 함께했던 삼백의 형제자매 모두가 비슷한 죄목으로 형을 치르는 중이었다.

대개 나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이들이었다.

자살한 이들이 모두 차사가 되는 것은 아니었고, 차사라고 하여 모두 자살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차사들은 나처럼 제 목숨을 포기함으로써 무언가 피해를 입혔다고 들었다.

우리는 판결을 아무런 의구심 없이 받아들였다.

판결에 의문을 가질 기력조차 없었다는 게 더 정확했다.

사는 게 무거워서 도망쳤는데 그 이상 무엇을 더 생각할 수 있을까.

판결에 의문을 가질 만큼 여력을 되찾았을 때,

우리는 이미 우리가 내쳐진 땅을 사랑하고 있었다.

-죄를 용서받을 때까지 이 땅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오랏줄에 꽁꽁 묶인 채 나의 왕을 올려다보았다.

악을 벌하되 연민을 놓지 않는 눈.

그저 과거의 기억인 것을 알면서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리운 눈.

그는 그런 눈으로 내게 천 년의 형을 내렸으며,

다른 형제자매에게 그러했듯 다시는 나를 죄인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렇게 죄인으로 이 땅에 떨어졌던 나는 그의 아들이 되어 이 땅을 살았다.

그렇게 살아서 그의 자리에 올랐다.

죄인으로서 처음 섰던 내가,

이 땅의 옥좌에.

“……!”

그것을 의식한 순간.

눈앞에 펼쳐졌던 어느 과거가,

내가 죄인으로서 저승의 왕 앞에 섰던 순간이,

불현듯 먹물을 뿌린 것처럼 검게 젖어 들었다.

-너는 그저 죄를 짓고 스스로를 죽인 영혼이지 않느냐.

새까만 어둠 속에서 서슬 퍼런 두 눈이 매섭게 빛났다.

-결국 네 본질은 지옥에서 죗값을 치르는 죄인과 다를 바 없어.

얼붙은 칼날처럼 시리게 파고드는 물음이 뒤따랐다.

알고 있다.

그 물음이 진실로 나를 책하는 것이 아님을.

-네가 스스로를 신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나 역시 너를 한 번도 진짜 신이라 여긴 적이 없었지.

알면서도 과거에 스쳤던 그 말이 칼처럼 깊숙이 찔러 들어오는 찰나.

“……하아, 하.”

숨을 크게 내쉬며 눈을 떴다.

또 같은 꿈이었다.

방을 채운 어둠은 무게를 가진 듯 나를 짓눌러 왔다.

몸을 죄던 오랏줄이 다시금 떠오르며 오른쪽 어깻죽지가 크게 욱신거렸다.

“아으…….”

팔을 움츠렸다.

흑암지옥의 어둠에 당한 지도 벌써 열흘째였다.

깨어 있을 때는 사라의 꽃과 스스로의 의지로 그나마 제어할 수 있었지만 잠에 들면 어김없이 아버지와 형제들이 나타났다.

나의 영혼을 가장 흐트러트리는 기억이기 때문이다.

독에 당한 순간부터 스스로의 자격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형제들의 환상에서 시작된 독.

그것은 왕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불태웠던 그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왕이 된 나 자신에 대한 회의로,

그리하여 내가 죄인으로서 이 땅에 왔다는 자각으로 이어졌다.

“한심하긴…….”

잠들기 전까지 오른팔과 어깨를 감싸고 있던 꽃줄기는 이미 진작 역할을 마친 듯 사라져 있었다.

드러난 상처에 사라가 남기고 간 서천꽃밭의 꽃잎을 새로 덧대고 다른 팔로 눈가를 덮었다.

사랑도 미움도 독이 된다는 서해 용왕의 충고를 곱씹으며 마음을 비우기 위해 애썼다.

피로가 누적된 탓인지 재차 잠기운이 몰려왔으나, 얼마 못 가 또다시 다친 팔을 부여잡고 눈을 떠야 했다.

사라와 의관들의 약으로 독을 완전히 풀 때까지,

지난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새벽이었다.

빛이 닿지 않는 깊은 바다였지만 용궁은 천신들의 축복을 받아 육지와 밤낮의 길이가 같았다.

바깥과 똑같이 푸르스름한 새벽길을 걸었다.

동해 용궁의 왕족들이 쓴다는 연무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나는 동해 용왕의 허락을 받아 새벽마다 이곳을 쓰고 있었다.

흑암지옥에 당한 오른팔을 못쓰게 된 건 아니지만 언제 상처가 터질지 모르는 팔을 고집하는 것은 불필요한 아집이었다.

삼신에게 쌍검을 받은 이상 언젠가는 결국 양손에 검을 쥐어야 했으니, 이럴 때야말로 좌수검을 익혀 두어야 했다.

처음에는 용궁의 전사들과 함께 연무장을 쓰려 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은 동해 용왕은 내게 왕족들의 연무장을 통째로 내어주었고, 강림 형은 내 대련 상대를 자처했다.

대련에 몰두한 덕인지 상념에 빠지는 순간이 많이 줄어들었다.

좌수검 수련을 하는 동안에는 비교적 수월하게 흑암지옥의 독을 제어할 수 있었다.

“잠은 충분히 주무셨습니까, 대왕님.”

형은 오늘도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독에 당한 이후 내 기상 시간이 제법 당겨졌음에도 그는 여전히 나보다 앞서 자리를 지켰다.

그의 전신에 감도는 희미한 신성이 느껴졌다.

용궁, 사라수대왕의 저택, 염라궁.

머무는 곳이 바뀌어도 일찍 일어나 신성을 가다듬고 몸을 단련하는 그의 일과에는 변함이 없었다.

“네, 형도 잘 쉬셨어요?”

나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회피하듯 바로 검을 쥐었다.

검푸른 눈으로 나를 살핀 형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검을 빼 들었다.

“이게 얼른 하지 않으면 밍기적거리게 되니까 하기 싫더라고요…….”

멋쩍게 웃으며 검부터 든 것을 변명하자 형은 금세 진중한 얼굴이 되어 수긍했다.

“익숙지 않은 팔에 집중하시려는 것이니 부담이 되실 법도 합니다.”

흑암지옥의 어둠에 닿은 이후 형은 내게 부쩍 조심스러워졌다.

내가 그의 시선을 불편해한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일 터였다.

나는 그가 나의 형이기에 솔직하기 어려웠다.

해서 이번에도 미안한 마음을 숨기며 그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러면 먼저 가 볼게요, 형.”

곧바로 달려들었다.

채애애앵!

형과 내 검이 맞부딪치면서 그의 힘이 묵직하게 팔을 밀어붙였다.

나는 왼쪽 손목과 어깨의 감각에 더 집중하며 그의 검을 받아냈다.

채앵!

채애애앵!

채애앵!

그간의 대련으로 왼팔 근육을 사용하는 것은 그럭저럭 익숙해졌으나 검을 맞댈수록 오른쪽 어깨에도 부담이 쌓여 갔다.

그리고 그 부담을 인식한 순간부터 흑암지옥의 어둠은 내 약점을 파고들었다.

파악!

어깻죽지에서 실낱같은 어둠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찌르는 듯한 흑암의 고통을 삼키며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채애앵!

채애애앵!

채앵!

내게 맞추어 형도 검을 휘둘렀다.

파악!

파아악!

대련이 진행될수록 아주 조금씩, 흑암의 어둠이 어깻죽지를 넘어 팔 전체에서 새는 것이 느껴졌다.

아랑곳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채애애애앵!

그러다 어느 순간 쇳소리가 길게 울리면서 손에 쥔 검이 날아갔다.

파아아악!

동시에 어깨의 상처도 더욱 벌어져버린지라, 나는 남몰래 숨을 삼키면서도 침착하게 인벤토리에서 서천꽃밭의 꽃을 꺼냈다.

“빠르게 익숙해지고 계십니다.”

형이 땅에 떨어진 검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상처도…… 좀 더 버티게 되셔서 다행입니다.”

그 말에 처음 대련을 시작한 날을 떠올렸다.

서로를 해칠 마음이 전혀 없는 대련일지언정 형의 검은 분명 범상한 적들에 비해 무거운 검이었으니, 처음에는 그 검을 한 번 받아내는 것만으로도 상처가 터지곤 했다.

형은 몸이 회복될 때까지 대련을 그만두자고 했고, 나는 그렇기에 오히려 대련이 더 필요하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이런 상태로는 전투가 벌어졌을 때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

떨어진 검을 줍는 형을 바라보았다.

형은 내 좌수검을 칭찬했으나, 나는 그가 마지막 순간 일부러 힘을 실어 내 검을 날려버린 의도를 모르지 않았다.

내게 부담이 되는 대련을 빨리 멈추게 하기 위해서겠지.

그만한 힘이 실렸기에 부담이 축적된 상처가 끝내 터져버린 걸 테고.

……이러나저러나 형에게는 못할 짓이었다.

사실 내가 처음에 검술 대련을 부탁했던 것은 서해 용왕의 차녀이자 서해 용궁 최고의 전사, 오혜였다.

그런데 형이 스스로 대련 상대가 되겠다고 고집했기에 우리는 새벽마다 검을 맞대었다.

“상대가 형이 아니라면 아마 더 잘 싸울 수 있을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그사이 내 앞으로 다가온 그에게서 검을 받아들었다.

내가 싸우는 상황 자체를 바라지 않는 형은 무엇이라고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 새 염라가 그새 실력이 꽤 늘었구만!”

둘뿐인 줄 알았던 연무장에 다른 이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백발을 거칠게 풀어헤친 서해 용왕이 연무장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비실비실한 것이 한 번을 제대로 못 치길래 저게 진짜 오관 놈 후계자가 맞나 했는데 말이야!”

팔짱을 낀 그가 특유의 퉁명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그래도 이제 구경할 맛이 좀 나네.”

우리의 대련을 하루 이틀 지켜본 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는지 형은 별다를 것 없는 반응이었다.

“어쩐 일이세요, 용왕님?”

“심심해서!”

불퉁하게 대답한 서해 용왕이 나와 눈을 맞추며 대꾸했다.

“잠도 안 오고 말이야. 그래서 칼질이나 구경하려고 나왔다!”

“…….”

여상한 말이었으나, 그와 같은 독에 당한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새 염라, 너는 잘 잤냐?”

그가 쉬이 잠들지 못해 나왔음을.

또한 잠을 설친 그가 나를 염려해 구경을 핑계로 굳이 예까지 찾아 왔다는 것도.

“저는 잘 잤어요.”

말 그대로 동병상련이었다.

나는 업경으로 밀려드는 그의 마음에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잘했어. 잘 자야 키가 크지.”

거짓이란 걸 알면서도 그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배고픈데 오늘은 그만하고 빨리 아침이나 먹자.”

그러더니 내 옆의 강림 형을 흘끗 훑으며 말했다.

“새벽마다 불려 오는 네 차사도 빨리 가서 밥이나 먹고 싶을걸.”

서해 용왕이라면 대련을 꺼리는 형의 마음도 진작 눈치챘을 터였다.

“근데 나는 밥을 먹기만 하면 그 붕어 놈이 득달같이 약 먹으라고 달려들어서 아주 성가셔!”

그랬지.

그가 동굴에서 나온 이후, 동해 용왕의 어의인 붕어 용신은 하루 세 번 식후에 맞춰 서해 용왕에게 독기를 푸는 탕약을 바쳤다.

“아니, 그 돌팔이 놈이 맛도 없는 걸 계속 들이밀어! 지독한 놈! 내가 먹는지 안 먹는지 지켜보겠다는 걸 맨날 쫓아낸다, 내가.”

나는 콧김에 날아가던 붕어 용신이 생각나서 작게 웃었다.

“저한테도 계속 약을 가져다주더라고요. 늘 도령님이 거절하시는데도.”

“정말 고약한 놈이라니까, 붕어 놈!”

서해 용왕이 붕어 용신을 욕하며 큰 걸음으로 성큼 앞서갔다.

한데 시원시원한 걸음걸이를 보여주던 그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커흑!”

커다란 몸이 휘청였다.

가슴을 움켜쥔 그가 검붉은 피를 토하며 풀썩 주저앉았다.

“용왕님……!”

나와 강림 형은 다급히 서해 용왕에게 달려갔다.

쓰러진 그의 몸에서 새까만 어둠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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