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22화 (122/187)

37장. 상처(2)

멍하니 서서 꽃병에 담긴 꽃을 바라보았다.

사라가 남겨 둔 서천꽃밭의 꽃들이었다.

이런 식으로 미리 피워 봤자 얼마 못 가서 사라져버릴 테지만, 혹시라도 쉬는 사이 또 상처가 벌어지면 쓰라고 두고 간 것이었다.

사라져도 아까울 것 없으니 웬만하면 쓰지 않는 편이 더 좋다는 말도 함께였다.

지금은 이렇게 곧 사라질 꽃을 꽃병에 담아 둘 뿐이나, 의관들과 탕약을 만드는 데 성공하면 조금 더 오래 보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 상처 말고도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

사라가 꽃병에 꽃을 꽂으며 했던 말을 상기했다.

-네 혼이 사라졌다가 새 몸으로 돌아오고부터였지.

그는 내 몸을 찬찬히 훑으며 말했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어. 한데 그 뒤로 네게서 이전과 다른 것이 느껴진다.

전혀 짚이는 게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때 바리공주님께서도 무언가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리데기가?

-네, 전에 단군과 그분께 도움을 받았을 때요.

-그 둘이 너에게 무엇을 했지?

당시 나는 내게 있었던 일을 차사들에게 일부 숨겼다.

괜히 걱정할 만한 부분들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사라가 그리 물어 오는 이상 나는 나의 차사에게 솔직해야만 했다.

-혼이 이동되었던 그때, 제 혼은 무척 형편없는 몸에 갇혀 있었습니다.

-형편없는 몸?

-주술로 움직임과 능력치가 구속된 몸이었죠. 단군과 바리공주님께서 주술을 풀어주셨기에 지금은 보통의 빙의체처럼 쓰고 있습니다.

-음…….

사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생각하더니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바리데기는 그렇다 치고, 그 단군이라는 자의 손은 믿을 수 있는 게냐?

단군이 내 몸에 손을 썼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는다는 투였다.

기실 나도 단군의 손이 꺼려졌던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짧은 고민 끝에 대답했다.

-……그가 저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단군에게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멍군…… 해태도 그가 주었거든요.

-해태를 그치에게서 얻었다고?

-네. 본래 그의 풍문이었던 것을, 제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면서 넘겨줬습니다.

그때는 물론 주작의 전설을 가진 적탑주를 견제하기 위해 준 것이었지만,

환술 너머로 술사를 꿰뚫어 본 멍군이 없었다면 청공에서 문어 용신들을 쓰러트리지 못했을 것이다.

-흐음…….

가라앉은 눈으로 턱을 문지르던 사라가 이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로선 탐탁지 않다만…… 그자가 무언가 감추고 있다면 생불왕께서 알아채셨겠지.

단군 본인에게 좋은 감정이 없다는 게 여실히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삼신이 천부인의 간부로 위장하며 협력했던 사실은 분명하니 그걸 떠올리고 납득한 모양이었다.

-어째서 지금껏 숨겼던 게냐.

추궁하듯 물어오는 말에 나는 쓰게 웃었다.

어쨌든 단군과 바리공주의 도움으로 멀쩡해졌는데 굳이 걱정을 끼칠 필요가 있을까.

다만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사라의 얼굴에는 언짢은 기색이 가득해서, 나는 내가 또 잘못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앞으로는 도령님께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허, 나한테만 말하겠다는 게냐?

그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내가 대답 없이 웃자 사라는 금세 평소의 무심한 얼굴로 돌아와 놀리듯 가볍게 말했다.

-그래, 내가 아주 신하인지 공범인지 모르겠구나.

말은 그리해도 결국 내가 편한 대로 해주겠다는 뜻이었다.

그 후 사라는 꽃병 속 꽃에 한 번 더 신성을 불어넣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

간밤의 기억을 되짚던 나는 다소 멋쩍은 기분이 들어 손끝으로 꽃병을 톡톡 건드렸다.

이러나저러나 왕이 된 후로 사라에게 크게 의지하고 있구나.

바보같이.

어디든 계속 기댈 곳만 찾으면 안 되는데.

꽃병을 건드리던 손으로 꽃잎을 만지작거리다가, 곧 그마저도 그만두고 침대에 누웠다.

청공에서 돌아온 뒤 상처가 다시 터지는 일은 없었다.

상처가 욱신거릴 때마다 떠오르는 기억을 억눌렀기 때문이다.

하나 마음이란 본디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지라, 기억을 억누르다 오히려 고통이 심해지는 순간도 있었다.

사라의 말마따나 골치 아픈 상처였다.

“그때 동요하지 말았어야지, 제연아…….”

흑암지옥의 어둠은 그것이 가장 가혹한 기억이라고 인지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걸 알면서도 찰나에 당해버린 스스로가 용납되지 않았다.

소중한 형제들과의 기억을,

내 몸을 해치는 독으로 전락시킨 내가…….

“……윽.”

다시금 어깻죽지가 들끓듯 아파 왔다.

나는 몸을 웅크리고 숨죽여 이를 악물었다.

상처가 터져서 팔을 감싸고 있는 꽃을 소모하기 전에.

거듭 기억과 감정을 내리눌렀다.

계속해서 천천히.

시야 한구석에서 흩날리는 두루마기 자락이 조금이라도 흐릿해질 때까지.

똑똑똑.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호했다.

“새염라, 쉬고 있느냐?”

다소 멍멍한 기분이 되어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 문 너머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상체를 일으켜 방문을 돌아보았다.

처음 듣는 음성에도 업경의 권능은 그가 누구인지 바로 읽어 내었다.

“들어오세요, 서해 용왕님.”

문 너머로 말을 건네자 서해 용왕이 곧바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래, 상처는 좀 괜찮고?”

그는 길게 기른 백발을 거칠게 풀어헤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숱이 많은 새하얀 눈썹은 언뜻 깃털 같았다.

나이 든 모습이되, 황금색 용의 눈동자만큼은 청년의 것처럼 생기가 넘쳤다.

청공의 정기를 갈무리하고 용신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를 맞이하기 위해 황급히 침대에서 내려서려는데 그가 큼지막한 손을 휙 저었다.

“뭘 또 일어나, 몸도 아픈 게. 그냥 누워 있어.”

그래도 차마 누울 수는 없어 침대에 걸터앉았더니, 앞에 멈춰 선 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돌려주려고 왔다.”

왕도깨비가 만든 양반탈이었다.

“아, 네…….”

일순 멈칫한 나는 고개를 숙이며 탈을 받아 들었다.

하긴 용신의 모습이 되었으니 더는 필요가 없을 터였다.

“왜? 계속 쓰고 있는 게 좋으냐?”

탈을 돌려준 그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목소리도 듣기 싫게 바뀌었겠다, 이제 나 같은 늙은이는 아주 더 볼 것도 없지?”

탈을 어루만지면서 조금 쓰게 웃었다.

서해 용왕이 이 탈을 쓰고 지낸 잠시간, 그 목소리가 듣고 싶어 자꾸만 말을 걸었던 건 진작 들켰던 모양이다.

“아뇨, 계속 탈을 쓰고 계시느라 불편하셨을 텐데요.”

인벤토리에 탈을 갈무리하고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서해 용왕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한나절 같이 지낸 게 너한테도 딱 좋았을 게야.”

큰 손으로 장난스럽게 내 머리를 헝클어 놓은 그가 내 옆에 앉았다.

“추억에 잠기는 것은 이따금씩. 그 정도가 좋은 게야.”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내 발만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가끔 써달라면 써줄게. 도둑놈보단 내가 나을걸?”

서해 용왕이 재차 퉁명스럽게 말했다.

더 이상 우리 대왕님의 목소리가 아님에도 그 불퉁한 말에 나는 작게 미소 짓고 말았다.

“한데 팔은 괜찮은 게야?”

서해 용왕의 황금색 눈동자가 꽃줄기에 감긴 내 팔을 응시했다.

“그 상처, 참 고약하지 않으냐?”

익숙하다는 분위기를 두른 눈빛과 어투였다.

그에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용왕님께서도…… 흑암지옥의 어둠에 당하셨던 거군요.”

3만 년을 군림한 용왕을 무너뜨린 독이 무엇이었는지.

궁궐에서 떨어진 동굴에 몸을 숨긴 그가 홀로 무엇을 다스리고 있었는지.

“오윤 그 빌어먹을 놈, 아주 몹쓸 자식이지.”

형제가 자신을 해치려 독을 풀었음을 알게 된 이의 눈을 가린 어둠이 무엇이었는지.

“쉽지 않을 게다. 사랑도 미움도 고통이 되는 독이니까.”

또한 그는 내 상처에 깃든 어둠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기억이 결국 몸을 아프게 하리라는 것까지도.

“화가 치밀어도, 슬픔이 치솟아도 죽을 만큼 아프니…… 이거야 원. 아무렇지 않게 될 때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어.”

나는 용궁 전사들이 크게 다쳐 돌아왔을 때, 업경의 권능이 읽은 두 용왕을 각각 떠올렸다.

똑같이 형제를 떠올렸으나, 온갖 감정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동해 용왕과 다르게 기이하리만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던 서해 용왕의 마음을.

……그래.

나도 서해 용왕처럼 아무렇지 않게 형들을 떠올려야만, 이 어둠을 다스릴 수 있는 걸까.

형들에게 왕으로서 더 이상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게 되면…….

그런 생각을 하는데 서해 용왕이 언성을 높였다.

“짜증이 나서 밥이나 막 퍼먹었더니, 살까지 후덕하게 찌고 말이야. 떼잉!”

“아…… 그렇게 되셨던 거군요.”

“그래, 육지 것들은 스트레스성 폭식이라고 하더만!”

툴툴거리던 서해 용왕이 나를 훑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새 염라 너도 짜증 나면 밥이나 많이 먹어. 먹고 푹 자. 너는 살 좀 쪄도 동굴에 낄 일은 없을 거 아냐.”

다정함이 묻어나는 말을 가만히 들으며 그가 찾아온 이유를 온전히 이해했다.

탈을 돌려주겠다는 것은 핑계일 뿐.

그는 같은 독에 중독된 나를 걱정한 것이다.

통통 튀면서도 따뜻한 마음이 업경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져 와서 나도 모르게 조금 웃어버렸다.

그러자 나를 내려다보던 서해 용왕이 또 벌컥 성을 냈다.

“왜 웃어! 내 말이 웃겨?”

“아뇨, 그냥…… 좋아서요.”

“좋긴 개뿔! 좋아하지 마! 난 너 싫어!”

“하하하…….”

그가 성을 낼수록 어쩐지 더 웃음이 나왔고,

기어이 여러 용신들을 날려버린 콧김보다도 더 얼큰한 그의 손바닥에 등짝을 몇 대 얻어맞고 말았다.

***

사라가 용궁의 의관들에게서 약탕기를 비롯한 도구들을 얻어 돌아오는 길.

동해 용왕의 어의인 붕어 용신은 서해 용왕에게 들이는 약과 함께 새 염라의 몫까지 지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사라는 그 제안을 받지 않았다.

붕어 용신이 끓인 약은 그의 왕에게 맞지 않을 터였다.

대신 서해 용왕의 회복을 위해 지었다는 탕약의 조제법을 얻었으니, 사라는 그것으로 직접 약을 지을 생각이었다.

그는 천천히 복도를 거닐며 제가 모시는 왕에 대해 생각했다.

약관의 나이에 멈추고 만 앳된 새 왕을 거북하게 느낀 적은 없었다.

하나 상처를 감추려 드는 꼴을 보자니 매사에 무심한 그도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본래 철이 들어버린 아이는 보기 싫은 법이지…….’

철든 아이는 걱정 끼치는 것을 두려워한다.

걱정해주는 이를 너무 빨리 잃은 것으로 철들었기에 그렇다.

새 왕도 마찬가지였다.

제 곁에 남은 이들에게 걱정 끼치는 것을 두려워한다.

-……발설지옥의 차사들을 봤습니다.

-저는 아직 왕으로서의 마음가짐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제 병이 되고 만 것이겠죠.

-왕이 부족하면 그의 신하들이 해를 입는 법이니까.

잃어버린 형제들을 보았으니 그 상실감에 아픈 것도 당연하건만, 왕은 영 엉뚱한 곳에서 고통의 원인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말해준다 한들, 그 어린 녀석은 쉬이 받아들이지 못할 터였다.

당연한 상실감보다는 마음을 굳게 다지지 못한 자신을 탓할 것이다.

철이 들어버린 아이는 본래 그런 법이다.

‘애초에 마음을 파고드는 독이다. 마음을 도려내지 않는 이상 다스릴 수 있는 방법 따윈 없어. 그런데 자꾸 방법을 찾으려 든단 말이지.’

그 독을 다스려 보겠다는 것은 병이 났는데도 의사를 찾지 않고 혼자 고치려 하는 것과 다름없다.

왕의 상처를 곱씹던 사라는 고개를 저었다.

“내 아들도 아닌데, 참 키우기 힘들군.”

그가 긴 한숨을 내쉬며 방에 다다랐을 때였다.

“허…….”

방문을 가리고 선 검고 커다란 사내가 있었다.

생각지 못한 방문에 사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쩐 일이냐. 내 딱히 너랑 둘이 볼 일은 없다만.”

“대왕님의 상처는 어떻게 되었지?”

귀찮은 티가 역력한 사라의 태도에도 강림은 서늘한 눈매로 제 할 말만 했다.

그래, 이러니까 왕이 말하지 말라던 게지.

사라는 속으로 혀를 차며 팔짱을 꼈다.

철든 어린 왕은 제 하나 남은 형제에게 걱정 끼치고 싶지 않겠지만, 그는 서로를 걱정하면서도 자꾸만 엇나가는 형제가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왕께서 다른 차사들한테는 아무것도 전하지 말라셨다.”

때문에 그는 그대로 방에 들어가버렸다.

누군가의 속이 터지든 말든 심술궂은 한마디만 남긴 채로.

37장. 상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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