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19화 (119/187)

36장. 당신의 눈을 가리는(4)

문자열이 된 먹물이 사슬처럼 얽히며 몸을 죄었다.

“아윽……!”

몸을 죄어 오는 힘에 이를 악물었다.

얼핏 봐도 열댓을 넘는 문어 용신들이 나를 둘러쌌다.

당장 포위한 수만 그 정도일 뿐, 업경의 권능은 훨씬 더 많은 수의 용신이 몸을 숨기고 있음을 감지했다.

“……처음부터 나를 노렸구나.”

의문을 가진 순간 업경의 통찰이 날카롭게 뇌리를 스쳤다.

알고 있는 정보를 하나로 엮어 진실에 가까운 결론을 내리는 힘이었다.

그래.

저들은 처음부터 내가 지네를 태워버릴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어둠 속에서도 지네를 찾아낼 걸 예상하고, 건드리면 흑암지옥의 환상이 펼쳐지도록 함정을 파놓은 것이다.

그것은 저들 사이에 바리처럼 미래를 내다보고 일을 계획하는 자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누구지?”

업경의 권능이 계속해서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읽어 내렸다.

“대체 누가 당신들을 움직이는 거지?”

그런데 업경의 권능이 용신들의 그림자를 꿰뚫어 보는 찰나.

“……!”

이때껏 느껴본 적 없는 격렬한 감각에 숨을 삼켰다.

악인의 업을 읽을 때보다 더욱 강렬한 존재감이 한순간에 나를 휩쓸었다.

용신들 너머에 있는 무언가에 대한 끔찍한 실감이었다.

그것을 읽어 내려는 것만으로도 솜털 하나하나가 타들어 가는 듯한 섬뜩함이 몰려왔다.

“당신들은 대체…… 뭘 감추고 있는 거지?”

그러나 미처 그것에 집중하기 전에 검은 문자열이 더욱 강하게 몸을 죄었다.

“큭……!”

“작전대로 해, 빨리!”

흩어져 있던 문어 용신들이 사방으로 빨판이 달린 팔을 휘저으며 허공에 무언가를 써제꼈다.

해석할 수 없는 문자였지만, 완성돼버리면 돌이키기 힘든 주술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크윽!”

용신들이 주술을 완성하기 전에 구속에서 벗어나야 했다.

몸을 비틀자 문자열이 칼날처럼 몸을 파고들었다.

단순히 살갗을 해하는 것과는 달랐다.

파고들수록 보다 깊고 날카롭게 뿌리내리는 느낌이었다.

대체 무슨 조화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를 구속한 힘은 흑암지옥의 환상과 근원이 같았다.

실체가 없는 힘이 나의 인지를 왜곡해서 온몸을 묶어 놓은 것처럼 느끼도록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 알 수 없는 힘도 인지의 왜곡을 넘어서는 업경의 권능으로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촤아악!

생각과 동시에 몸을 죄는 문자열에 맞서 검을 휘둘렀다.

“아으윽!”

문자열 또한 더욱 강하게 나를 압박했다.

그럼에도 베어야 할 적들에 권능을 집중하자 구속된 몸 곳곳이 짓눌릴지언정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촤아아악!

크게 휘둘러지는 칼날에 주술을 그리던 용신들의 팔이 잘려 나갔다.

“크아악!”

“아악!”

용신들이 비명을 질렀다.

한데 그들에게서 터져 나오는 핏물이 기묘했다.

그들의 체액은 피라기보다는 먹물처럼 검은 액체였으며 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볼 여유는 없었다.

나는 멈추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으윽, 뭐, 뭐야!”

“어떻게 된 건데! 이놈이 무슨 수로……!”

내가 주술을 뚫고 반격해 올 줄 몰랐는지 그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틈을 치고 들어가야 했다.

촤아아악!

촤아아아악!

손에 들린 죽음이 검수지옥의 칼날나무를 그렸다.

초식이 이어질수록 문자열이 내 몸을 조르는 강도 역시 강해졌다.

나는 업경의 권능을 곤두세워 ‘붙잡혀 있되 붙잡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검을 휘둘렀다.

“빌어먹을, 다시 가둬!”

거침없이 이어지는 반격에 한쪽에 비켜서서 지휘하던 커다란 문어 용신이 외쳤다.

“제일 많이 잘린 놈이 알아서 펼치란 말이다!”

직후.

팔이 잘린 용신들 중 몇몇이 눈을 하얗게 뒤집으며 모래 같은 검은 기운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뿌리는 삿된 기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펼쳐졌다.

나는 그 기운이 재차 흑암지옥의 환상을 불러오리라는 걸 눈치챘다.

용신들의 생명력을 바쳐 지옥을 불러오는 주술이 구현되고 있었다.

“아……!”

끔찍하게 그리운 검은 두루마기 자락들이 감옥처럼 드리웠다.

파아아아악!

아까와 똑같이 참혹한 환상 속에서 아무렇게나 일그러진 팔뚝이 검붉은 피를 토했다.

“……으윽.”

통증을 견디며 눈앞을 가리는 검은 환상들을 노려보았다.

-막내야, 이리 와라.

-무리하지 마라.

-형들이 있는데 네가 왜 고생을 해.

벌써 지쳐버리기라도 한 걸까.

더는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도망칠 수 없었다.

저들이 가짜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무력하게 시선을 빼앗겼다.

-제연아, 왜 또 이렇게 다쳤어.

-얼른 꽃밭으로 가야겠다.

-우리 막내, 업어줄까?

더 이상 업경의 권능에 집중할 여력 따윈 없이 눈앞을 채운 지옥에 이대로 영영 갇혀버릴 것만 같았다.

파아아앙!

그 순간 검푸른 신성이 번쩍였다.

“대왕님!”

너무나도 익숙한 외침이 생생하게 귀를 울렸다.

이어서 정장을 입은 크고 너른 등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괜찮으십니까?”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언제나 정돈되어 있던 새하얀 머리카락이 답지 않게 흐트러져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앞의 존재가 정말 형이 맞나.

흑암지옥의 어둠이 다른 환상을 불러온 것은 아닐까.

그러한 생각을 하자마자 작게 몸이 떨렸다.

“대왕님.”

“……형.”

그러나 똑바로 마주해도 고통을 주지 않는 검푸른 눈동자는,

내 앞에 선 이가 환상이 아님을 분명하게 말해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당황한 것은 용신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놈들은 주술을 깰 재간이 없었을 텐데……!”

강림 형에게는 업경의 권능이 없다.

나 아닌 다른 이가 어둠으로 눈을 가리는 주술을 뚫고 나올 거라곤 저들도 예상치 못한 것이다.

바리처럼 미래를 내다본다 한들 저들에게도 분명 한계가 있었다.

“해태가 악인을 꿰뚫어 봤습니다.”

놈들에게서 나를 완전히 가리며 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멍멍멍!

형 옆에 선 흰색 털뭉치가 긍정하듯 짖었다.

“녀석이 술사를 찾아낸 덕에 어둠을 파훼하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내가 업경의 권능으로 어둠을 펼친 지네 괴물을 찾아냈듯이,

멍군은 악인을 꿰뚫어 보는 해태의 눈으로 주술의 시전자들을 찾아냈구나.

즉, 어둠의 매개가 된 지네 괴물 외에도 일행들을 어둠에 가둔 술사들이 따로 있다는 뜻이다.

나는 곧바로 나머지 일행을 어둠 속에서 꺼내 올 방법을 깨달았다.

“그럼 제가 업경으로 나머지 술사들을…….”

“팔은 어떻게 되신 겁니까.”

그런데 말을 채 끝내기 전에 형이 먼저 굳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파아아앙!

내 몸을 살피던 그의 눈이 우리를 노리는 용신들을 향했다.

나를 흑암지옥의 환상에 가두려던 용신들이 발설지옥의 권능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짓이겨졌다.

“…….”

여느 때보다 몇 배나 짙고 강렬한 신성을 휘감은 그에게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검을 움켜쥐었다.

환상에 당한 어깨와 팔뚝은 끊임없이 화끈거리는 통증을 피워 냈다.

지혈되지 않은 상처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기까지 피어올랐다.

상처를 인식한 순간.

나를 멈칫하게 한 것이, 눈 돌리지 못하게 한 것이 거듭 생각났다.

입을 다물었다.

말할 수 없었다.

내게 가장 가혹한 환상이 무엇이었는지, 형에게만큼은 절대.

“사라를 꺼낼 때까지 팔은 쓰지 마십시오.”

형은 내가 답하지 않는 것에 괘념치 않았다.

나를 지키기 위해 돌아선 채 오직 적들을 주시하며 검푸른 신성을 휘둘렀다.

파아아앙!

우리를 둘러싼 문어 용신들이 빠르게 쓰러져 갔다.

누군가는 으스러졌고 누군가는 찢겼으며 누군가는 터져 나갔다.

그러나 우리를 포위한 용신들의 수는 좀처럼 줄지 않았다.

어둠 너머 곳곳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충원을 계속하며 달려들었다.

“……형의 눈으로는 술사들을 쫓을 수 없어요.”

보이지 않는 적들에게 감각을 곤두세우며 대꾸했다.

나머지 일행들을 어둠 속에서 꺼내오려면 술사를 감지하는 업경의 권능이 필요하다.

팔을 치료하는 것이 먼저라고 형은 말했지만, 이대로 형 뒤에 숨어 있는다고 해서 뭔가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형이 엄호해주면 술사를 찾아서 벨 수 있……!”

-멍멍멍!

돌연 멍군이 허공을 향해 짖으며 뛰어올랐다.

파아아앙!

그와 동시에 멍군이 가리킨 곳에서 발설지옥의 신성이 번쩍였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가르고 곤죽이 된 용신이 튀어나왔다.

“뭐야!”

반가운 목소리와 함께 멀지 않은 곳에서 나타난 호구별성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거 왜 갑자기 밝아졌어!”

지금껏 흑암의 어둠에 갇혀 있었으니 한순간에 바뀌어버린 상황이 당황스러울 터였다.

“어? 전하! 아니 너 또 왜 팔이……!”

우리를 발견하고 반가운 기색을 띤 호구별성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미간을 좁히며 곧장 이쪽으로 뛰어왔다.

“나오라는 놈은 안 나오고, 쯧.”

형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에 호구별성은 녹색 역안을 빛내며 이를 드러냈다.

“야, 한 번에 많이 죽이는 건 내가 최고거든?”

그리 말하며 용신들 사이로 짙은 독기를 뿌리는 것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그녀는 이미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저들은 저와 이 흉물이 상대할 테니, 대왕님께서는 숨을 고르고 계십시오.”

호구별성은 형을 노려보면서도 나를 가리듯 그의 옆에 섰다.

-멍멍멍!

두 신과 나란히 선 멍군은 이리저리 고개를 치켜들더니 또다시 허공을 향해 달려들었다.

파아아아앙!

발설지옥의 신성이 번쩍이면서, 몸이 반쯤 날아간 문어 용신이 검은 피를 흘리며 나뒹굴었다.

일행 중 누구도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아 술사 쪽은 아니었으나, 멍군은 해태의 눈으로 숨어 있던 용신들을 잇달아 잡아내었다.

“젠장……!”

우리가 어둠을 파훼할 줄은 전혀 몰랐던 걸까.

흩어진 용신들은 팔다리를 꿈틀거리며 주춤거렸다.

-멍멍! 멍멍멍!

그사이에도 멍군과 강림 형은 서로 합을 맞추어 나머지 일행들과 숨어 있는 용신들을 찾아냈다.

파아아앙!

검푸른 신성이 또 한차례 번쩍이면서 이번에는 사라가 돌아왔다.

“이런…… 벌써 한바탕 일을 치르고 있었군.”

나오자마자 상황을 파악한 그가 낯빛을 어둡게 물들이며 다가왔다.

새하얀 서천꽃밭의 신성이 내 어깨와 팔뚝을 감쌌다.

꽃과 아울러 피어난 부활의 권능은 금세 벌어진 상처를 꿰매고 새살이 돋게 했다.

한데 상처를 내려다보는 사라의 눈은 어째서인지 더 깊이 침체되었다.

“……?”

그 눈의 의미를 몰라 그를 올려다봤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 전에 사라의 손끝에서 또다시 신성이 일어났다.

송이송이 피어난 꽃들은 여느 때처럼 사라지지 않고 회복을 마친 내 팔과 어깨를 붕대처럼 휘감았다.

“……대왕.”

나직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어두웠다.

“적은 네 차사들에게 맡기고 그 팔은 더 이상 쓰지 말거라.”

생각지 못한 말에 입술을 달싹였다.

사라가 내 팔을 치료하는 동안, 우리를 둘러싼 문어 용신들 사이로는 검푸른 발설지옥의 신성과 역신의 짙은 독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두 신이 전투에 집중하고 있음에도 그는 차사들이 동요하지 않게끔 굳이 목소리를 낮춘 것이다.

파아악!

그 뜻을 이해하자마자 별안간 사라가 꽃을 피운 팔에서 검붉은 피가 터졌다.

“……윽!”

갑작스러운 고통에 작게 신음했다.

붕대처럼 팔을 휘감았던 꽃줄기가 살갗에 스며들면서 새로 터진 상처를 고쳤다.

직후 사라는 또 한 번 깨끗해진 팔 위로 새로이 꽃을 피웠다.

마치 거듭 상처가 터질 것을 대비하듯이.

“당장 고칠 수 없는 상처다. 나도 신성을 가늠하며 꽃을 피울 테니 너도 무리할 것 없다.”

사라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면서도 곧장 수긍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젠장, 다 나와!”

대장 격 문어 용신의 외침이 크게 울리자마자 허공 너머에서 수십에 이르는 문어 용신들이 일제히 튀어나왔다.

“한 놈만 빼고 몰살한다!”

그의 명령은 말 그대로 신호탄이었다.

수십의 문어 용신들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벌이는 행동에 눈을 크게 떴다.

“미친! 뭐 하는 거야, 저 새끼들!”

깜짝 놀란 호구별성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왜 갑자기 지들 팔을 쥐어뜯어!”

툭, 투둑.

용신들 스스로 끊어 낸 수백 개의 팔다리가 모랫바닥에 떨어졌다.

집단적 자해 사태를 맞닥뜨리고 당황한 찰나.

잇달아 발생한 광경에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팔다리들.

그 하나하나가 각각의 문어 용신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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