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18화 (118/187)

36장. 당신의 눈을 가리는(3)

강림 형과 멍군이 진중한 면담을 가지는 잠시간.

“음…… 그런데 이 지네 말이야.”

지네 괴물의 거체를 올려다보며 호구별성이 인상을 썼다.

“남아 있는 독기를 보니까 어째 독이 좀 낯설다?”

손끝에서 암녹색 독기를 피워 낸 그녀가 괴물의 외피를 톡톡 건드렸다.

“지네든 두꺼비든 독이라면 내가 다 아는데, 이건 묘하단 말이지.”

“흠, 나는 사체가 눈에 들어오는구나.”

옆에 선 사라가 지네를 훑어보며 말을 받았다.

“불에 꽤 그을렸다만 그 때문에 죽은 것 같지는 않아.”

생명의 꽃을 피우는 신의 눈에도 기이한 면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저 무늬도 좀 기묘해요.”

옆에 선 바리가 말을 보탰다.

“그저 독충이라 얼룩덜룩한 줄 알았는데…….”

무언가를 감지했는지 아이가 손을 뻗어 울긋불긋 얼룩진 다리를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까 글자를 써놓은 것 같기도 해요.”

얼룩진 다리를 응시하며 바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렇다면 분명 주술일 텐데, 저로서는 해석할 수 없는 문자예요.”

자세히 살펴보기엔 다소 껄끄러운 외관이었지만, 듣고 보니 지네의 다리를 휘감은 얼룩이 정말 붓으로 휘갈겨 쓴 글자들처럼 보였다.

“지네의 사체에서…… 기억을 읽어 볼게요.”

짐승에게서 읽을 수 있는 기억은 인간과 달리 순간의 장면과 강렬한 느낌에 불과하다.

그래도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엿보는 일은 가능하겠지.

“어쩌면 바리가 해석할 수 없다는 주술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겠죠.”

나는 지네에게 다가가 권능을 발동했다.

[ 염라의 권능이 죽음의 기억을 읽습니다. ]

권능을 발동하자마자 눈앞이 검게 물드는 감각에 눈을 끔뻑였다.

“……어?”

먹물을 뿌린 듯 새까만 시야.

권능을 발동했음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그러나 곧이어 살갗을 기어오르는 끔찍한 공포에 그것이 지네가 죽기 직전까지 갇혔던 어둠이라는 걸 깨달았다.

“흑암지옥에 당한 채로 날뛰었던 거구나.”

한데 그 사실을 깨달은 직후.

기억을 읽는 권능을 뚫고 짙은 어둠이 내 모든 감각을 덮쳐 왔다.

“이런……!”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린 나는 다급히 일행을 돌아봤다.

“모두 물러나세요! 흑암지옥의 권능을 담은 주술입니다!”

파아아아앙!

그러나 미처 경고를 끝내기도 전, 지네의 거체가 폭발하면서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아니, 이게 뭐야?!”

“허!”

“대왕님!”

차사들의 외침이 뒤섞이는 찰나.

그들의 목소리마저도 어둠에 잠겨 들며 뚝 끊겨버렸다.

살아 있는 것처럼 일렁이는 어둠이 빛과 소리를 넘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이런…….”

작게 탄식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감각을 가리는 흑암지옥의 권능이었다.

업신을 상대했던 용궁의 전사들도 지네를 쓰러트린 순간 이렇게 당했을 터였다.

주술이 발동되기 직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일행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을 테지만, 인지 왜곡을 일으키는 흑암지옥의 어둠에 갇힌 이상 각자 고립된 것과 다름없었다.

“그나마 아직은 어둠뿐인가.”

흑암지옥의 진정한 공포는 눈을 가린 어둠이 영혼의 기억을 읽고 환상을 불러오며 시작된다.

어둠뿐인 주변을 둘러보며 숨을 골랐다.

“환상이 시작되기 전에 어둠을 깨야 해.”

파훼법부터 찾자니 곧바로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주술이 담겼던 지네.

흑암지옥을 불러온 매개가 있다면, 그 매개체부터 파괴하자고.

본래라면 주술을 깨트릴 방법을 알더라도, 흑암지옥의 어둠에 인지가 왜곡되어 실행하기 어려울 터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왜곡된 감각 외에 또 다른 감각이 있었다.

업경.

대상의 본질을 꿰뚫는 권능에 힘을 더했다.

눈을 가리는 흑암지옥의 어둠 너머로 짙은 악의가 느껴졌다.

대상을 가두어 고통을 주겠다는 악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업경이 감지하는 악의에 집중했다.

지네의 다리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던 얼룩덜룩한 문자열이 검붉은 빛을 띠며 요악하게 흔들렸다.

“하아…….”

예민하게 날 세운 업경의 감각이 악의와 업을 읽어 내자 속이 울렁거렸다.

업에 대한 거부감뿐 아니라, 빼앗긴 지옥의 권능에 대한 상실감이 나를 흐트러트리고 있었다.

“……되찾으면 돼.”

애써 힘주어 읊조리며 삼신에게 받은 ‘죽음’을 손에 쥐었다.

날카로워진 업경의 감각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자 점차 주술을 품은 지네에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촤아아악.

업경이 감지한 업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보이는 것에만 의존했다면 결코 닿지 않았을 테지만, 업경의 감각은 지네의 위치를 정확하게 잡아낼 수 있었다.

촤아아악.

촤아아아아악.

칼날의 나무를 그리는 검수지옥의 초식을 펼쳤다.

눈에 보이는 것은 어둠뿐.

하나 초식에 잘려 나가는 지네의 거대한 몸뚱이는 직접 보는 것만큼이나 선명하게 전해져 왔다.

그런데 매개체가 조각조각 찢기는 와중에도 문자들은 여전히 붉게 빛을 발했다.

“이걸로는 주술이 사라지지 않겠구나.”

인상을 찌푸리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스킬에 앞서 검부터 휘두른 것은 마력의 소모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성역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만큼 최대한 아껴 두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매개체를 파괴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면 어쩔 수 없었다.

당장 이 주술을 흔적도 남지 않게 지워 버리는 것이 더 중요했다.

[ 화탕지옥(L) ]

화르르륵!

손끝에서 피어오른 지옥의 불길이 조각난 지네의 몸뚱이를 집어삼켰다.

화르륵!

화르르륵!

불길에 삼켜진 몸뚱이가 부스러지며 재가 되었다.

요악한 빛을 흘리던 주술 역시 새카맣게 일그러져 갔다.

“……이대로 완전히 태워버린다.”

화력을 더하며 어둠을 주시했다.

붉은 문자열이 불길에 타들어 가는 것이 업경의 권능을 통해 전해져 왔다.

또한 눈을 가렸던 어둠도 동이 터 오듯 천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화르르르륵!

불길이 주술을 완전히 뒤덮으며 거대한 기둥으로 솟아오른 순간.

파아아앙!

옅어지던 어둠이 한순간에 점멸하면서 풍경이 바뀌었다.

“……아.”

한데 흑암지옥의 어둠이 걷혔음에도,

드러난 것은 우리가 있던 용궁의 성역이 아니었다.

“……아아.”

화염을 거두며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고운 무늬가 그려진 옥빛의 단청이 보였다.

곧게 뻗은 처마와 붉은 기둥, 그 아래로 단정히 정돈된 돌길이 새겨지듯 시야를 파고들었다.

한눈에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형제들과 함께 49년을 거닐었던 염라의 궁궐이었다.

동시에 알았다.

그것이 진짜일 수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광경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제연아.

귀에 닿는 익숙한 호명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아…….”

새카만 두루마기 자락이 나부꼈다.

시선을 빼앗기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런데도 나를 바라보는 검푸른 눈동자와 끝내 마주해버린 순간.

파아아악!

어깻죽지가 갈라지며 검붉은 피가 터졌다.

흑암지옥의 환상이 몸과 마음을 파고들었다.

“크읏……!”

고통에 이를 악물며 눈앞의 환상을 직시했다.

눈이 어지러웠다.

그러나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부러 입술을 세게 깨물며 대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업경의 권능에 의식을 쏟았다.

자꾸만 과거의 기억을 덧칠하는 가혹한 환상 너머로 타버린 줄 알았던 문자열들이 검붉게 일렁였다.

애써 눈앞의 환상을 무시하고 문자열을 노려보았다.

“매개가 부서지면 완성되는 주술이었어.”

흑암지옥의 주술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어둠을 품었던 지네를 태워버리는 것으로 완전히 구현되고 말았다.

낭패감에 검을 고쳐 쥐는 사이에도 흑암지옥의 어둠은 계속해서 진짜가 될 수 없는 환상을 덧칠했다.

-아이고, 막내야!

-어디 아프냐?

-같이 서천꽃밭이라도 갈까?

나를 직시하는 검푸른 눈동자 뒤로, 내가 이미 잃어버린 이들이 반갑게 웃었다.

발설지옥 차사들의 겉모습을 훔친 어둠이었다.

살갗을 아프게 에는 어둠이 자꾸만 그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리 와라, 막내야.

다정한 울림에 뒤로 몸을 물렸다.

환상이라는 것을 알아도 소용이 없다.

그것이 내게 가장 가혹한 환상이라는 것을 인식한 순간부터,

눈을 가리는 어둠은 죄인의 몸과 마음을 사정없이 파헤치는 지옥이 된다.

그것이 죄인의 눈을 가리는 흑암지옥의 권능이었다.

파아아악!

다시 한번 피가 터졌다.

찢긴 어깻죽지에서 어둠이 녹아든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몸을 다친 고통보다도 마음을 어지럽히는 광경에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나 시선을 빼앗기지 않으려 부러 눈감아도, 내 모든 감각은 자꾸만 환상에 젖어 들고 있었다.

-아직도 몸가짐이 단정치 못하구나, 막내야.

거짓된 목소리에 흐트러지면 안 된다.

거듭 입술을 짓이기듯 물며 다시금 업경의 권능에 집중했다.

인지를 왜곡시키는 환상에 둘러싸였다 한들 결국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나의 감각이었다.

깨진 유리창처럼 몸을 덮쳐 오는 과거의 파편 속에서 어둠의 근원만을 찾아 파고들었다.

파아아악!

또 한 번 어깨에서 격통이 터지는 찰나.

“……!”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아픈 기억들 속에 불현듯 낯선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이렇게 안 쓰러져.

일행도, 형제도 아닌 낯선 자의 목소리였다.

-정신력이야.

-정신력?

-환상이라는 것을 알고 버티는 거지.

-그쪽도 지옥은 잘 안다 이건가?

한둘이 아니었다.

업경의 권능에 힘을 더했다.

잃어버린 형제들의 환상 속에서 본 적 없는 검은 그림자가 일렁였다.

지옥의 권능에 손을 댄 자들.

이 지독한 주술을 시전하고 있는 자들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럼 어떡해?

-버텨 봤자야. 인지하는 시간도 왜곡되니까.

-영겁을 되풀이하는 어둠도 우리에게는 찰나지. 그러니까 곧…….

“……거기구나!”

업경의 권능이 환상의 근원을 꿰뚫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지체 없이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악!

손에 들린 ‘죽음’이 환상 속의 두루마기 자락을 베어냈다.

형제들을 흉내 내던 어둠이 반으로 갈라지고, 무대의 장막이 걷히듯 어둠에 가려졌던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어떻게!”

“말도 안 돼, 찾을 수 있을 리가……!”

모두 문어를 닮은 용신들이었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얼굴과 팔다리에서 기묘한 문양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사방으로 뻗은 다리는 불에 녹은 것처럼 어딘가 뒤틀린 채였다.

“젠장, 어쩔 수 없다!”

가운데 선 용신이 촉수 같은 팔을 휘둘렀다.

촤아아악!

연기가 피어오르는 먹물이 가로지르듯 흩뿌려졌다.

재빨리 피했지만 삿된 기가 섞인 먹물 몇 방울에 닿은 살갗이 저항 없이 타들어 가 상처를 남겼다.

“큭……!”

주변을 돌아보았다.

지옥의 권능을 펼쳤던 용신 여럿이 나를 포위한 와중 일행들은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았다.

마치 저 용신들과 나만 다른 공간에 분리된 것 같았다.

“아직 다른 환술은 깨지지 않았어!”

가운데 문어 용신이 재차 팔을 휘둘렀다.

촤아아악!

뿜어져 나온 먹물이 이번에는 어지러운 문자열이 되어 나를 휘감았다.

“이대로 생포해!”

그와 동시에 넓게 흩어져 있던 다른 용신들이 내게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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