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17화 (117/187)

36장. 눈을 가리는 것(2)

바다의 정기가 고인다는 신성한 청공(靑孔)으로 가는 길.

어느새 주변에는 짙푸른 안개가 깔렸다.

사방에는 푸르스름한 신성을 발하는 산호초가 성벽처럼 둘러져 고아한 위엄이 느껴졌다.

“이제 다 왔소, 염라.”

길 안내를 맡은 오혜가 우리를 돌아보았다.

“이 안개는 용궁의 성역을 지키는 안개요. 용신의 축복을 받지 못한 이는 결코 들이지 않지.”

안개가 주위를 가리는 현상이 곧 청공에 도달했음을 의미했다.

“한데 오늘은 안개가 썩 낯설게 느껴지는군. 마치 우리를 밀어내려는 것 같아.”

말을 잇는 그녀의 얼굴에 사뭇 걱정이 어렸다.

“……성역을 지키던 안개마저 오염이 되었나 보군요.”

나는 그녀의 말을 받으며 일행을 살폈다.

앳된 바리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쓰였다.

-정말 같이 가도 되겠어, 바리?

길을 떠나기 전, 나는 위험이 예상되는 곳에 아이를 데리고 가는 것이 내키지 않아 물었지만.

-제가 가서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아요.

바리는 여느 때처럼 잔잔한 태도로 대답할 뿐이었다.

저승 던전에 갈 때도 같은 말을 했으니 분명 무언가를 감지했을 터.

하나 정체를 감춘 신이라고 생각했던 이전과 달리 평범한 인간 소녀인 것을 알게 된 지금은, 미래를 내다보는 바리의 능력이 든든하면서도 마냥 의지하기에는 마음이 불편해서…… 작게 한숨을 삼켰다.

“헛!”

그때 뒤에 서 있던 호구별성이 숨을 삼켰다.

“잠깐, 저게 그 지네 아니냐?”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주시했다.

거대한 산호초와 모래더미로 너머로 갑충의 단단한 외피가 보였다.

검고 반질반질한 표면 위로 알록달록한 얼룩이 있는 것이 멀리서 봐도 독충 같았다.

“흠, 움직이지는 않는 듯한데.”

눈을 가늘게 뜬 사라가 말을 보탰다.

보이는 것은 외피의 일부와 다리 몇 쌍뿐.

딱히 생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탄내가 제법 납니다. 업신과 혈투를 벌인 모양이군요.”

강림 형이 반장갑을 낀 손에 검푸른 신성을 휘감았다.

사늘한 시선이 갑충과 그 주변을 날카롭게 살폈다.

“해구에서 숨을 다한 듯 보이오.”

오혜가 하얀 머리칼을 휘날리며 성큼 발걸음을 내디뎠다.

우리는 그녀를 따라 좀 더 깊이 들어섰다.

용궁의 성역이라는 신성한 청공이 완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바다의 정기가 고인다는 청공은 그 말 그대로 바닷속에 펼쳐진 거대한 블루홀이었는데, 웬만한 운동장의 몇 배나 되는 경이로운 크기였다.

물속에 물이 또 있다는 것이 눈으로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바다의 용신들은 청공에 깊이 잠겨 들어가 정기를 채취한다고 했다.

“정기에 손을 대지는 않았소.”

청공 앞에 다다른 오혜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정기의 상태를 살폈다.

“아니, 그 누구라도 바다의 근원을 더럽힐 수 없다는 게 맞겠지.”

그러고는 몸을 낮추어 청공에서 물을 움켜쥐었다.

용궁의 정기가 고여 있음을 증명하듯, 오혜의 손아귀에 담긴 물은 청옥색의 신성이 되어 안개처럼 그녀에게 스며들었다.

“용신의 신성을 증폭시키는 힘도 그대로요. 쇠약해지신 아바마마께 가져다드리면 되겠소. 잠시 기다려주시오.”

그녀가 용궁의 정기를 채취하는 동안 우리는 청공 주변을 돌아보았다.

정기를 건드리지 못했다고 하였으나 일대는 오염된 안개로 자욱했다.

시든 해초들과 바스러진 모래더미 아래, 바다를 어지럽혔다던 지네 괴물이 몸이 기이하게 뒤틀린 채 반쯤 까맣게 그을려 죽어 있었다.

“어우야, 진짜 크긴 크다.”

호구별성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괴물의 거체를 올려다봤다.

덩달아 고개를 든 내 시야로 알록달록한 다리들이 마디마디 눈에 들어왔다.

“……보기 좋진 않네.”

영 좋지 않은 비주얼이라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괴물의 시체 옆에 반으로 갈라져서 나뒹구는 황금 두지업상이 보였다.

“이런, 이렇게 두면 안 되는데.”

조금 난처한 마음으로 두지업상에 다가갔다.

“업신은 끝까지 제대로 모셔야지.”

업신상은 1회용 아이템인지라 한 번 사용하면 부서지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버려서는 안 된다.

사용 후에도 제대로 예를 갖추지 않으면 저주가 발현되기 때문이다.

[ 부서진 황금 두지업상(E) ]

-복을 내리고 액을 쫓는다는 두꺼비 업신상.

-크게 손상되어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

습격 때문에 미처 챙기지 못한 듯했다.

다행히 아직 저주는 발현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도 이곳이 용궁의 성역인 이상 확실히 처리하는 게 좋았다.

“아, 그러고 보니 지네와 두꺼비 설화에서도 동귀어진한 두꺼비 사당을 지어줬었는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부서진 상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 (!) 업벨깰겨귿땟흐흐흐 가베둥냈긴딸렷뭐빎 벴는냇렷록흐흐흐가 베뀌땍궈룐뢍녘빎납니다. ]

한데 그 순간 익숙한 오류창이 떴다.

화아아아악!

직후 업신상이 나뒹굴던 자리에서 갑작스레 커다란 화염이 치솟았다.

파아앙!

곧바로 강림 형이 발설지옥의 신성을 번쩍였고,

-멍! 멍멍!

그와 동시에 뜻밖의 털뭉치가 튀어나왔다.

[ (!) 풍문 ‘불을 삼키는 개’의 효과로 화속성 공격이 1회 차단됩니다. ]

“……!”

나는 눈을 크게 뜨며 튀어나온 삽살개를 바라보았다.

해태 멍군.

잊고 있었던 신수가 대걸레 같은 하얀 털을 부풀린 채 내 앞에 늠름하게 서 있었다.

“아니…… 뭐야?”

갑작스러운 등장에 모두가 멍군을 주목했다.

“개? 개 맞아?”

호구별성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흐음, 신성이 느껴지는 게 평범한 개는 아닌 것 같다만.”

사라도 눈썹을 굽히며 멍군을 살폈다.

-멍멍! 멍멍멍!

오랜만에 밖으로 나온 멍군이 꼬리를 붕붕 흔들며 내게 뛰어들었다.

“아, 아하하…….”

얼떨결에 녀석을 품에 안고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

복슬복슬한 털의 감촉이나 개의 따끈한 체온과는 상관없이, 덥수룩한 머리털 아래로 서늘한 삽살개의 눈과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소름이 돋고 말았다.

적탑주와 마주했을 때도 그렇고, 불시의 화염 공격에서 구해준 고마운 녀석이건만 40년 넘게 이어진 삽살개 공포증은 쉬이 없어질 것 같지 않았다.

“개를 품고 계셨습니까?”

강림 형이 다소 매서운 눈으로 다가왔다.

불이 꺼지자 그의 경계심은 당연하게도 느닷없이 나타난 멍군을 향했다.

“그…… 삽살개처럼 생긴 해태예요.”

나는 멍군의 털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해태라면, 신수 해태 말씀이십니까?”

그 말에 형이 관심을 보였다.

“그새 신수를 길들이신 줄은 몰랐군요.”

매섭던 눈매가 바로 부드러워졌다.

어딘가 흡족하게 느껴지는 말투는 꼭 신수를 길들인 공을 치켜세워주는 것 같았다.

“화를 막아주는 녀석이니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내가 직접 길들인 게 아니기에, 형의 말이 듣기 민망해진 나는 그의 눈을 살짝 피하며 대답했다.

“이름은 멍군이에요.”

“훌륭한 이름이군요.”

형이 한층 더 부드럽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멍군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어쨌든 내 손으로 얻은 녀석이 아니란 걸 말하긴 할 것 같아서, 나는 자꾸 내게 머리를 비벼 오는 멍군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말했다.

“제가 지은 이름은 아니고요.”

“어쩐지 신수의 위엄이 느껴지지 않는 이름이었습니다.”

……상사가 지었다고 립서비스 한 거였어?

으음, 단군이 지었다는 사실까지는 굳이 알려주지 않는 편이 낫겠는데.

-멍멍멍! 멍멍!

내 품에 안긴 멍군이 계속해서 명랑하게 꼬리를 흔들었다.

솔직히 그간 여러 일 때문에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나를 반겨주니 그동안 방치한 게 조금 미안해졌다.

그러면서도 삽살개 특유의 사나운 눈과 마주칠 때면 아직도 옛날에 물어 뜯겼던 기억이 떠올라 솜털이 쭈뼛 서는 기분인지라.

녀석을 품에 안고 있으면서도 차마 눈을 맞출 용기는 나지 않았다.

……정말, 날 좋아해주는 건 고마운데 얘는 왜 하필 삽살개로 태어났을까.

“신수를 얻으셨는데 왜 그간 언질을 주지 않으셨습니까?”

나와 멍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강림 형이 물었다.

“아, 이게 풍문의 형태로 들어와서요. 제 안에 그냥 들어오길래 그대로 두었던 건데…….”

대답하면서 멍군을 내려다보았더니 멍군이 빨간 혀를 내밀고 헥헥 소리를 내며 꼬리를 흔들었다.

의식적으로 눈만 피해서 보자 통통하게 털이 찐 게 귀엽긴 귀여워서 나는 다시 녀석을 둥개둥개 어르며 미소 지었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그냥 풀어 놓고…… 키울 것을 그랬…… 으음.”

하지만 막상 말을 꺼내고 보니, 저택 곳곳에서 멍군과 맞닥뜨리고 깜짝깜짝 놀라는 내 모습이 상상되어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

“대왕님께서는 예전부터 삽살개를 꺼려하셨지요.”

형은 드물게도 온화한 얼굴을 하며 그리 말했다.

하긴 형이라면 내가 지금 무슨 걱정을 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대왕님께 폐를 끼치지 않도록 제가 녀석을 잘 교육하겠습니다.”

형이 엄숙한 태도로 돌아와 멍군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내게 복슬복슬한 뺨을 문지르던 멍군은 형이 저를 건드리자 귀찮다는 듯 그르렁거리며 형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저승차사와 해태, 두 신화적 존재의 시선이 맞닿은 순간이었다.

“……이 녀석.”

짧지만은 않은 침묵 끝에 형의 두 눈에서 새파란 불꽃이 튀었다.

“저승의 신하가 되었으니, 대왕님께 마땅한 예를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형의 질책에 삽살개의 비범한 눈에도 순간 형형한 빛이 감돌았다.

-멍멍. 멍멍멍.

낮게 짖은 멍군이 서슬 퍼런 저승사자의 눈을 피하지 않고 직시했다.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 멍군의 눈빛에 형의 곧은 눈썹 끝이 살짝 꿈틀거렸다.

“……허.”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 친 형이 계속해서 멍군과 눈싸움을 했다.

신과 신수가 불꽃을 튀기며 한참 서로를 노려보는 와중.

“뭔, 눈깔도 똑같이 더러운 것들이 서로 째려보고 있어.”

지켜보던 호구별성이 귀를 후비며 한마디 했다.

“흐음, 이제 보니 저놈이 아주 개랑 똑같은 놈이로구나.”

팔짱을 낀 사라는 슬쩍 강림 형을 디스했다.

두 신이 그러거나 말거나 형은 새파랗게 달아오른 눈으로 오직 멍군만을 주시했는데, 근엄하게 몸을 부풀린 멍군이 먼저 형에게 언성을 높였다.

-멍멍! 멍멍멍멍!

멍군이 언성을 높이자 형의 눈이 모욕이라도 당한 듯 희미하게 흔들렸다.

“허.”

그러더니 형도 크고 너른 어깨를 위압적으로 펼쳐 보였다.

“신수라는 녀석이 시정잡배처럼 이리 교양이 없어서야.”

……어라?

형, 그 멍멍을 다 알아듣는 거야?

“따라와라. 내 오늘 너에게 필히 저승의 법도를 가르쳐야겠다.”

목소리를 낮춘 형이 먼저 위엄 있게 등을 돌렸다.

-멍멍……!

결투를 받아주겠다는 듯 멍군도 용맹하게 내 품에서 뛰어내렸다.

-멍멍멍!

크고 검은 저승사자와 복실하고 흰 해태가 나란히 비장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대체 어디로 가겠다는 것인지 모를 두 신화적 존재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나는 눈을 끔뻑였다.

신과 신수가 내게서 멀어져 갈수록, 어째서인지 업경의 권능은 더욱 선명하게 둘의 비장한 속내를 전해주었다.

“……서로를 부하라고 여기는 것 같은데.”

대체 무슨 대화가 오고 가는지 모르겠지만, 업경의 권능은 계속해서 둘 사이에서 싹 트기 시작한 기묘한 라이벌 의식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럼 나보다 멍군이 편하다는 건가?”

달리 말하면, 형은 아직도 나의 어딘가가 불편하다는 뜻일 터인데.

나는 기이하리만치 뚜렷하게 느껴지는 멍군과 형의 감정 교류를 곱씹다가, 형이 처음으로 내게 마음을 닫았던 순간을 상기했다.

-너는 네 위치를 자주 잊는 것 같더구나.

-아직도 새 왕이 네 말 한마디에 고분고분 고개 숙이는 막냇동생으로 보이느냐?

변한 우리의 관계를 꼬집는 사라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그 말에 크게 흔들리던 형의 눈이, 마구 뒤섞여 밀려들다가도 어느 순간 뚝 끊겨버린 형의 감정이, 또다시 의식 깊이 파고들기 전에 나는 그냥 업경의 권능을 닫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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