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16화 (116/187)

36장. 눈을 가리는 것(1)

동해 용궁에서 맞이하는 아침 식사.

커다란 식탁 한쪽에는 동서 용왕 부부와 내가, 반대편에는 내 차사들과 바리가 자리했다.

“이거 먹으면 먹을수록 신기하다.”

해양 버섯으로 빚은 경단을 접시에 올리며 호구별성이 말했다.

“생긴 건 우리가 먹는 거랑 비슷한 것 같은데 아주 묘하고 다른 맛이 난단 말이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경단을 반으로 갈라보는 것이, 뭍에서는 맛볼 수 없는 독특한 풍미가 인상적인 듯했다.

음식의 종류는 육지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건만 육고기와 생선은 쓰지 않고 바다에서 나는 재료들로만 만들어 그럴 터였다.

“그냥 음식을 먹을 뿐인데, 치성을 드릴 때처럼 정기가 모이는 것 같아요.”

옆에 앉은 바리도 조용히 말을 보탰다.

신들의 음식이라서일까.

바리가 인간으로서 따로 치성을 드려야 모을 수 있는 신의 기가 깃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에 비해 사라는 어제나 오늘이나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는 우리 중 가장 오래 살아온 만큼 이미 용궁에서 머문 경험이 있었으니까.

바다의 꽃, 산호로 용궁을 장식할 때 한 번 손을 보태주러 왔었다나.

“…….”

강림 형은 음식을 먹다가도 이따금 맞은편에 앉은 나와 서해 용왕을 바라보곤 했다.

지금처럼.

그의 짙푸른 눈이 나와 용왕을 함께 눈에 담을 때마다 나는 바람처럼 살갗을 스치는 그리움을 느꼈다.

서해 용왕은 우리 대왕님의 모습으로 내 옆자리에 앉기를 고집했다.

덕분에 나는 아침 식사 내내 나를 챙겨주는 용왕의 곁에서 꽤나 난감했다.

“이거 맛있어. 이것도 괜찮고. 바다에 왔으면 이건 꼭 먹고 가야지.”

서해 용왕이 내 접시에 온갖 음식을 끊임없이 쌓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안 먹어? 아직 어려서 먹여줘야 해?”

서해 용왕이 젓가락으로 산더미처럼 쌓인 음식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이제 음식이라기보다는 알록달록한 조형물처럼 보이기 시작한 접시 위를 멍하니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그게, 많이 먹어서 배가 불…….”

“많이 먹긴! 키 더 안 크고 싶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해 용왕이 떼잉 역정을 냈다.

그의 젓가락이 나를 삿대질하자, 나는 조금 억울해져서 항변했다.

“근데 키는 이미 50년도 전에 다 컸…….”

“50년? 진짜 오늘 아침에 태어났구만! 더 커야지!”

……용신들은 성장기가 수백 년씩 되는 건가?

서해 용왕은 정말 날 아기로 보는 건지 내 접시에 담긴 음식은 이제 초 단위로 불어나고 있었다.

탑처럼 쌓아 올린 경단이며 전 위에 해초말이튀김을 또 올리면서 서해 용왕이 쯧쯧 혀를 찼다.

“왕이 됐으면 네 아담한 차사 놈들보다는 커야지!”

“아담…….”

그 말에 멍청히 사라와 강림 형을 바라보았다.

강림 형이야 척 봐도 훤칠하니 크고 탄탄한 체격이고, 사라 또한 강림 형보다야 마른 편이지만 쭉 뻗은 어깨와 골격이 크게 두드러지는 몸이었다.

그런데도 본신이 공룡보다 큰 용왕의 눈에는 그런 두 차사도 아담하게만 보이는구나.

하긴 용신의 모습일 때조차 인간보다 큰 체격을 갖췄으니까.

“골고루 먹어야 큰다!”

서해 용왕이 또 한 번 내 접시에 음식을 올려놓았다.

그런데 이미 접시의 탑은 포화 상태라서 그가 올린 해초전이 굴러떨어져버렸다.

용왕은 신경질적으로 젓가락을 휘두르며 접시 밖으로 나가기 전에 전을 잡아챘다.

“아니, 왜 이렇게 안 먹어! 어디 아퍼?”

“근데 정말로 배가 너무 불러서요…….”

소심하게 말꼬리를 흐리며 젓가락 끝으로 접시를 긁었다.

어제저녁에 옆에 앉았던 서해 용왕비도 이것저것 챙겨주긴 했지만, 그때는 분명 생소한 바다의 음식을 소개해준다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지금 서해 용왕이 챙겨주는 모습은 그때와 많이 달랐다.

나는 신기를 부리듯 재차 탑 꼭대기에 안정적으로 전을 올리는 그에게 물었다.

“용왕님은 정말 아무것도 안 드세요?”

“난 됐어! 이것들도 3만 년을 내리 먹어 봐라, 다 물린다!”

“음…….”

질려서 먹기 싫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사실 업경의 권능은 처음 식탁에 앉은 순간부터 그에게서 격렬한 식욕과 번뇌를 감지하고 있었다.

단적으로 말해…… 내게 음식을 쌓아주는 서해 용왕의 심경은 장기간 지속된 다이어트에 괴로워하며 시뮬레이션 게임 속 애완동물에게 무한히 밥을 주는 심경과 비슷했다.

살이 쪄서 동굴에서 나오지 못한 것이 상당한 충격인 듯했다.

그런 와중 요양하는 동안 보지 못했던 맛있는 음식이 잔뜩 있으니, 은인인 나한테라도 먹고 싶은 것을 먹이면서 대리만족을 하던 것이고.

“빨리, 이거 맛있다니까?”

내가 아까부터 음식을 들지 않자 그는 기어이 직접 먹여주기 위해 젓가락을 들이밀며 재촉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배가 터져 죽을 것 같아서 차마 입을 벌리지 못하고 있는데.

“거 먹기 싫다는데 그만 좀 하지?”

보다 못한 동해 용왕이 구세주처럼 끼어들었다.

“도둑놈은 빠져!”

서해 용왕도 곧바로 응수했다.

2만 년 전 조카딸과의 혼인 이후 바다의 도둑놈이 되었다는 동해 용왕은 손님 앞에서도 도둑놈 소리를 들은 것이 창피했는지 얼굴을 붉혔다.

“이놈, 아무리 그래도 손님들 계시는데 형님한테 도둑놈이 무어냐!”

“그러는 네놈은 장인어른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그런데 듣고 있으니 두 용신의 말다툼은 언제나 서해 용왕이 승기를 잡을 수밖에 없겠는걸.

기세 좋게 핀잔했던 동해 용왕은 결국 장인에게 무어라 할 수 없는지 쓸쓸히 입을 다물었고.

서해 용왕은 그런 사위를 향해 콧방귀를 뀌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밥 다 먹었으면 간식이라도 먹어.”

끊이지 않던 젓가락 세례 대신 이번에는 다과 접시를 내밀면서.

“원래 후식 배는 따로야.”

그러면서 아예 내 입에 약과 하나를 물려주는 터에, 나는 속절없이 그것을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만…… 달콤하면서도 육지의 것과는 또 다른 향긋한 맛에 조금 놀라고 말았다.

이 정도면 몇 개 더 먹을 수 있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다과 접시를 받아든 채 우물우물 약과를 씹을 때였다.

“용왕 전하……!”

돌연 식당 바깥쪽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 왔다.

“크, 큰일 났사옵니다, 전하……!”

갑작스러운 외침에 모두가 일제히 문 쪽을 돌아보았다.

콰아앙!

식당 문이 양쪽으로 거칠게 열리면서 새우, 고래, 문어 등의 용신들 몇몇이 당황한 낯으로 들어왔다.

“전사들이 습격을 당했사옵니다……!”

그들은 왕에게 예를 갖출 정신도 없이 곧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습격?”

예상치 못한 말에 동해 용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예, 전하!”

가운데 선 문어 용신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바다의 정기를 모으러 갔던 전사들이 습격을 당하고 돌아왔사옵니다……!”

***

동해 용왕의 정전(正殿).

갑주를 입은 전사들 사이로 용궁의 의관들이 다급히 움직였다.

상어, 고래, 가재.

한눈에 보기에도 강해 보이는 용신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그나마 의식이 있는 용신들마저도 눈이 풀린 채 멍하니 주저앉은 모습이었다.

“…….”

엉망이 된 용궁의 전사들을 눈에 담으며 나는 가늘게 떨리는 손을 꾹 쥐었다.

상처 입은 이들 주위로 모래바람 같은 검은 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착각이 아니라면 그것은 분명 내게 아주 익숙한 기운이었다.

[ 흑암지옥의 어둠입니다, 대왕님. ]

강림 형이 나지막이 전음을 보내왔다.

시왕지옥의 전 으뜸차사인 그 역시 나와 같은 것을 느꼈을 터다.

흑암지옥은 다른 사람의 미래를 박탈한 죄인을 벌하는 지옥이었다.

그곳에 떨어진 죄인은 타인의 앞날을 가린 벌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끝 모를 고통을 받는다.

죄인의 눈을 가리는 지옥의 어둠은 단지 빛을 몰아낸 캄캄한 상태뿐만 아니라, 죄인이 괴로움에 몸부림치게 만드는 환각을 보여주기도 했다.

습격당한 용신들은 육신의 부상보다도 그들에게 깃든 흑암지옥의 어둠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 저승 던전을 점거했던 자들이 동해에도 손을 뻗친 것 같습니다. ]

이어지는 형의 말에 저승 던전에서 읽었던 기억을 곱씹었다.

흑탑주와 함께 지옥의 권능을 가져간 자들.

서해의 터에서 지옥수를 키웠던 흑탑주처럼 흑암지옥의 권능을 가져간 자도 동해를 점거하고 권능의 힘을 키우고 있던 걸까.

“어떻게 된 일이냐.”

쓰러진 용신들을 내려다보며 동해 용왕이 나직하게 물었다.

아주 낮은 곳부터 보이지 않은 열기로 끓어오르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흑암지옥의 권능에 당한 용신들은 왕의 물음에 답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들을 대신하듯 용신들을 돌보던 의관 하나가 고개를 조아리며 전사들의 말을 전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전사들은 의식을 잃기 전에 정기가 오염되었다는 말만 남기었사옵니다.”

동해 용왕의 어의 붕어 용신이었다.

그의 말에 동해 용왕의 눈이 한층 깊어졌다.

황금빛 눈동자를 파도처럼 일렁이며 그가 침음했다.

“바다의 정기를 탐내는 자들이 있단 말인가.”

습격당한 용궁의 전사들은 우리가 모셔 온 업신을 데리고 곧장 정기를 취하러 갔다.

불과 독을 뿜는다는 지네 괴물에 대비를 했음에도 예상치 못한 변고를 당한 것이다.

거기다 그 상대는 내가 회수하지 못한 지옥의 권능까지 부렸다.

“……제가 가서 조사해 보고 싶습니다, 용왕님.”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쓰러진 분들에게서 제가 잃어버린 시왕지옥의 권능이 느껴집니다. 저로서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입니다.”

차사들과 바리를 돌아보았다.

상의 없이 꺼낸 말이었지만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차분했다.

강림 형이 전음으로 흑암지옥의 이름을 꺼냈을 때부터 이미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짐작했을 것이다.

“자네가 직접 가겠다고?”

내 말에 동해 용왕이 눈썹을 떨었다.

일부만을 보냈다고는 하나 이미 힘 있는 전사들이 당해버렸다.

용궁의 정예들조차 저리 당할 정도이니 휘하의 수하를 아무나 보낼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니 내가 나서는 것은 분명 그에게도 큰 도움이 되는 일이겠으나, 그는 쉬이 동의하지 못했다.

“아니, 자네는 용궁의 귀빈이네. 그런 이에게 위험을 감수하게 할 수는 없네.”

잠깐의 침묵 끝에 동해 용왕이 다시 말했다.

“내가 가지. 왕이 아니면 누가 백성을 지키겠나.”

차분한 목소리와 동시에 업경의 권능을 통해 바윗덩이 같은 감정이 묵직하게 밀려들었다.

조용히 가라앉은 얼굴의 동해 용왕은 그의 바다가 더럽혀진 것에 몹시 분노하고 있었다.

“아니, 형님은 가지 마.”

그런데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서해 용왕이 끼어들었다.

“누구를 보낼 거면 새 염라만 보내. 수하들도 딸려 보내지 마.”

갑작스러운 말에 모두가 서해 용왕을 돌아보았다.

용왕이 직접 가지 말라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전사들마저 내주지 말라는 말은 분명 지나치게 무정히 들렸을 테니.

하나 그는 아랑곳없이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지금 이 순간부터 무슨 일이 벌어지든 동해 용궁의 병력을 비우지 마.”

서해 용왕의 말이 마저 떨어진 순간 정전에 무거운 침묵이 번졌다.

모두가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았기 때문이다.

서해 용왕이 독에 당한 사이 서해 용궁이 무너졌다.

동해를 노리는 정체불명의 적이 용궁의 전사들을 습격함으로써 동해 용궁의 혼란을 노렸을지도 몰랐다.

나는 말없이 두 용왕을 바라보았다.

차분한 얼굴 아래 동해 용왕의 내면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분노와 당혹, 그리고 의미 모를 슬픔이 뒤섞인 격렬한 감정들이었다.

그와 달리 서해 용왕에게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통통 튀듯 선명했던 그의 감정이 기이하리만치 한순간에 무(無)가 되어 있었다.

그것이 이상해서 서해 용왕에게 좀 더 집중하려는 찰나 그의 말이 이어졌다.

“새 염라, 그러니 내키지 않는다면 너도 굳이 위험을 무릅쓸 것 없다.”

양반탈 너머로 황금빛 용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네 개 바다의 일이다. 끼어드는 순간 너는 바다가 다시 하나가 될 때까지 발을 빼지 못하게 될 게다.”

나는 그가 이번 일이 자신을 독살하려 한 남해 용왕과 관련되어 있다고 짐작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제야 업경의 권능이 읽어 낸 두 용왕의 심정이 이해되었다.

동해 용왕이 아직도 형제가 형제를 해치려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서해 용왕은 자신을 해치려 한 형제에 대한 모든 감정을 이성으로 완전히 억누르고 있었다.

“아니요.”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답했다.

“그들이 지옥의 권능에 손을 댄 이상 이미 바다만의 일이 아닙니다.”

“하, 너도 왕은 왕이다 이것이냐?”

서해 용왕이 턱을 괴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가소롭다는 말투였지만, 내 아버지의 목소리를 빌린 그의 말 앞에 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