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장. 아이고, 용왕님(3)
서해 용왕이 머무는 협곡에 다다랐다.
동굴의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며 형을 돌아봤다.
“그럼 형, 다녀올게요.”
형은 여전히 용왕의 콧김을 각오한 충신의 얼굴이었다.
하나 내 한 걸음 뒤에서 멈춘 그는 바위처럼 굳건히 서서 말했다.
“예, 다녀오십시오.”
어제오늘 우리의 관계는 조금 더 나아졌겠지.
업경의 권능은 아직 그에게서 무엇도 읽어 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는 형의 표정과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마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도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위해 나아갈 테니까.
형을 뒤로 하고 용왕의 동굴로 들어섰다.
“우와, 진짜 크고 깊네…….”
동굴의 입구는 거대했다.
발을 내디딜수록 더욱 아득히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빛이 들지 않는 해저 동굴임에도 곳곳에 청옥빛 신성이 횃불처럼 반짝이며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굴 안을 장식한 청옥빛은 단지 주변을 밝힌다는 단순한 효과를 넘어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청옥빛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어느 순간 동굴을 밝히던 청옥빛 신성이 꺼져 들어가고 커튼을 친 듯 어둠이 드리웠다.
용신의 축복 덕에 빛이 없어도 나는 이미 바닷속 어디서든 사물을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축복을 능가하는 힘으로 일부러 가려두었다는 뜻이었다.
“……!”
강맹한 기운이 살갗을 덮쳤다.
예고 없이 압도되는 기분에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장벽처럼 드리운 어둠이 눈앞을 감추었지만, 업경의 권능은 차츰 휘몰아치는 서쪽 바다를 비춰 냈다.
“……아, 안녕하세요?”
그러한 서쪽 바다를 향해, 조금 긴장한 채로 인사를 건넸을 때였다.
-뭬야?!
깜짝 놀란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또 웬 놈이야!
고등어 왕자처럼 머릿속에 직접 전해지는 목소리.
아주 크고 선명해서 그 음성만으로 머리가 울리는 기분이었다.
“염라입니다. 용왕님을 뵈러 왔습니다.”
내게는 용왕이 보이지 않았으나 용왕은 나를 보고 있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숙여 다시 한번 인사했다.
-염라?!
그 순간 불이 켜지듯 어둠이 가시면서 거대한 용의 머리가 드러났다.
-염라가 왔다고?!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한 쌍의 눈동자는 바닷속에 떠오른 두 개의 보름달 같았다.
“우와…….”
나는 그 커다랗고 아름다운 눈을 마주하며 탄성을 내질렀다.
용왕 본신의 거대함에 대해선 꽤 많이 들어 왔음에도 실제로 보니 절로 감탄할 수밖에 없는 규모였다.
이래서 콧김 한 방에 다들 속절없이 날아가버리는 거구나.
제대로 보이는 것은 머리뿐이지만, 이 정도면 지구상에서 가장 큰 공룡이라고 해도 용왕보다는 작지 않을까?
-근데 염라 너 그새 왜 그렇게 작아졌냐?!
나를 마주한 서해 용왕이 그 거대한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2만 살도 넘은 놈이 징그럽게 왜 그런 어린애가 됐어!
그 질문에 자연스럽게 기시감을 느꼈다.
-그새 몰라보게 젊어지셨구려, 염라!
용왕의 질문 위로 우리 작은 고등어의 목소리가 곧장 겹쳐지면서 이 거대한 존재가 내 작은 친구의 아빠라는 걸 실감했다.
“흠흠, 저는 그분이 아니구요.”
그렇다고 그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어서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그분 다음으로 새로이 염라가 된 이제연이라고 합니다.”
-뭬야?! 그놈이 물러났어?! 왜?!
서해 용왕이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곧장 대답하려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동해 용왕 부부며 서해 용왕비까지 알고 있던 사정을 왜 이 양반만 모르고 있던 거지?
앓은 지 오래돼서 세상 소식을 끊고 살았던 걸까?
“그분이 얼마 전에 돌아가셔서, 막내 차사였던 제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놈이 죽었다고?!
커다란 외침과 함께 주변의 바닷물이 격하게 요동쳤다.
거센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물결은 그대로 나를 덮쳐 와 헤집을 기세로 헝클어 놓더니 아주 잠깐만에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음…… 그랬구먼.
납득했다는 기색을 띤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방금 그 물결은 용왕의 혜안으로 나의 사정을 훑은 것이었구나.
염라의 업경처럼 용왕은 혜안으로 타인의 사정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으니까.
-너, 다행인 줄 알아!
서해 용왕이 소리쳤다.
-내가 아무리 그래도 고아한테는 콧김 안 분다!
“…….”
고아가 아니었으면 붕어 용신처럼 콧김을 불어서 쫓아낼 생각이었나 보다.
까칠한 말과 달리 업경으로는 그저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밀려들어 와서 그것이 서해 용왕식 사과라는 것을 알았다.
-근데 여긴 왜 왔어?
서해 용왕이 화제를 돌려 물었다.
-때가 되면 내가 간다고 했잖아!
다시금 짜증이 섞인 목소리였다.
“아, 그게요…….”
나는 좀 난감해져서 서해 용왕을 바라봤다.
업경의 권능은 여전히 그에게서 정체 모를 부끄러움을 비추고 있었다.
한데 용왕의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니 그것을 직접 입에 담아도 될지 좀 염려가 되었다.
“용왕님께서 뭔가 곤란하신 것 같아서요.”
-곤란하긴 뭐가 곤란해!
그래, 이렇게 곧바로 버럭 성을 내고 있잖아.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역시 들키기 싫은 것 같은데.
하지만 여기까지 온 마당에 그냥 물러날 수는 없어서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제가 가진 업경의 권능이 용왕님께서 곤란하다고 알려줬거든요.”
-뭬야! 그럼 내가 동굴에 끼어서 못 나가고 있는 걸 이미 알고 온 거야?!
……어?
그런 거였어?
“……동굴에 몸이 끼셨어요?”
-알고 온 거 아니었어?!
나도 모르게 되묻자 서해 용왕의 거대한 황금빛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이놈, 유도 심문을 하다니……!
이런, 이제는 부끄러움에 노여움까지 섞여들었다.
-지 애비한테 아주 못된 것만 배웠구먼……!
불에 달군 쇠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용의 얼굴을 마주하자니, 불현듯 돌아가신 우리 대왕님께서 서해 용왕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이 떠올랐다.
-푸흐흣! 서해 용왕, 난 그 영감이 콧김만 불어도 웃겨!
바다는 멀고 우리 대왕님은 재판으로 항상 바쁘셨다.
해서 용왕 얘기를 자주 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용궁 얘기가 나올 때면 아주 껄껄 웃으시곤 했는데.
-그놈은 용이 아니라 아주 빠가사리야! 빠가사리!
……이제 막 만났지만 우리 대왕님께서 왜 그렇게 이 양반을 좋아하셨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뭐랄까, 같은 용왕이라도 동해 용왕은 3만 년을 살아온 신을 대하는 기분이었다.
근데 이쪽은…… 솔직히 3만 살짜리 성난 가물치를 대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가물치가 3만 년을 살았으면 영물은 영물이니까.
“동굴에 끼어서 못 나오시는 거였어요?”
어쨌든 무엇이 문제인지 알았으니, 나는 다시 용왕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걱정 마, 살 빼서 나갈 거야!
내 말에 서해 용왕은 잠시 침묵하더니 재차 까칠하면서도 어딘가 근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다이어트 중이셨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해 용왕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몸을 누인 동굴 안쪽은 아직도 장막을 친 것처럼 어두웠다.
아마 살이 쪄서 동굴에 끼었다는 몸을 보이기 싫어서일 것이다.
“그냥 본신의 모습을 벗고 나오시면 되지 않나요?”
다만 의문이 들어 물었다.
동굴에 끼었어도 다른 왕족들처럼 용신의 모습으로 변하면 쉽게 빠져나올 텐데 왜 그러지 않는 걸까?
커다란 본신이 아니라 작은 용신의 몸으로는 독이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없어서?
“혹시 독이 많이 심각하신가요?”
-으음…….
내 물음에 서해 용왕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대꾸했다.
-아냐, 독기는 이제 제어가 되는데. 그것보다는 지금 정기가 꼬여서 용신의 모습으로 돌아가기가 힘들어.
중독보다는 부족해진 정기가 문제였다니.
하긴 애초에 서해 용궁 남매가 두꺼비 업신을 찾았던 것도 서해 용왕에게 정기를 받아다 주기 위해서였지.
“그러면 동굴에서 나오실 생각은 있으신 거군요.”
내 말에 서해 용왕에게서 무언가 들뜬 듯이 통통 튀는 감정이 밀려들었다.
살찐 모습이 부끄러워도 역시 누가 도와주길 바랐던 모양이다.
“……아!”
상황을 파악하니 곧바로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럼 용신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동굴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만큼만 작아지시면 되겠네요.”
내게는 마침 서해 용왕을 도와줄 아이템이 있었으니까.
“혹시 이걸 써 보실래요?”
나는 인벤토리에서 탈을 꺼내 보였다.
지난 천벌 때 요긴하게 사용했던, 왕도깨비가 만들어준 양반탈이었다.
“이걸 쓰시면 돌아가신 저희 대왕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바뀌거든요.”
-뭐야, 염라 그놈처럼 모습이 바뀐다고?!
미심쩍다는 듯 두 개의 보름달이 가늘어졌다.
그럼에도 업경의 권능으로 느껴지는 그의 감정은 또 한 번 기대를 담아 공처럼 통통 튀었지만.
“네, 왕도깨비가 만든 탈이에요. 정기를 보충하실 때까지 이걸로 모습을 바꾸시는 건 어떨까요?”
-흠흠. 왕도깨비 솜씨면 믿을 만하지.
헛기침을 한 서해 용왕이 불퉁하게 말했다.
-그럼 어디 한번 잘 씌워 봐!
잠깐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이상하게 자꾸 웃음이 나왔다.
우리 대왕님도 이런 기분이셨던 걸까.
나는 남몰래 입술을 꾹 깨물며 서해 용왕에게 다가갔다.
“음, 가면이 엄청 작은데 어떻게 씌워드려야 하죠?”
한데 막상 가면을 씌우려고 하니 용왕의 본신이 너무 거대했다.
기실 이걸 씌운다는 표현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대충 콧등에 올려놔 봐.
서해 용왕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머리에 올라타라는 듯 동굴 바닥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내려주었다.
“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주저할 것 없이 용왕의 머리 위에 올라갔다.
비늘이 워낙 단단해서 마치 암석 지대를 걷는 기분이 들었다.
-콧구멍에 잘못 들어가지 않게 조심해.
어쨌든 남의 얼굴을 밟는 것이라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서해 용왕은 아무렇지 않은지 그저 퉁명스럽게 주의를 주었다.
마침 또 하나의 동굴 같은 콧구멍에 다다른지라, 나는 그 깊은 심연에 빠지지 않게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여기다가 씌워 드릴게요.”
사실 씌운다기보다는 서해 용왕의 말마따나 놓아두는 것이지만, 나는 그의 콧등에 조심스레 탈을 내려놓았다.
파아앙!
탈에 깃든 도깨비의 귀기가 검붉게 빛을 발했다.
다행히 아주 큰 머리라도 탈은 쓴 것으로 인식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탈의 힘으로 순식간에 용왕의 모습이 바뀌면서, 용왕의 머리에 올라탔던 나는 그만 발 디딜 곳을 잃고 추락하고 말았다.
“아……!”
미처 생각지 못한 일에 아주 잠깐 멍해진 사이.
“임마, 조심해야지!”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그러다 다친다, 막내야.”
잠깐 눈을 감았다 떴을 때는 이미 우리 대왕님의 단단한 두 팔이 나를 받쳐 들고 있었다.
“아…….”
익살스러운 양반탈 너머로 휘날리는 새하얀 백발과 짙푸른 곤복 자락.
나는 순간 고맙다는 인사도 잊고 나를 받아준 이를 올려다봤다.
정확히는, 탈을 써서 우리 대왕님의 모습으로 변한 서해 용왕을.
“……불편하지는 않으세요?”
그 모습을 새기듯이 눈에 담으며 묻자 서해 용왕이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탈이 다 똑같지, 뭐!
툴툴대듯 답하고는 먼저 성큼 동굴 밖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나도 그냥 옅게 웃으며 그를 뒤따랐다.
그리고 마침내 서해 용왕과 함께 동굴 밖으로 나섰을 때였다.
“다녀오셨습니까, 대왕님.”
기다리고 있던 강림 형이 이쪽을 돌아보는 찰나.
한동안 읽지 못했던 형의 감정이, 가을바람처럼 서늘히 나를 스쳤다.
“…….”
그 감정 앞에 무심코 살짝 커진 눈으로 형을 바라보았다.
형은 드물게도 나보다도 내 옆에 선 다른 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검푸른 눈동자를 응시하며 나는 여태 읽지 못했던 형의 감정이 이 순간 선연히 느껴지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를 휩쓴 감정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향해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형의 그 감정을 나 역시 똑같이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해 용왕님이 용신 모습으로 돌아가기 힘들다고 하셔서 제 탈을 빌려 드렸어요.”
나는 그런 우리의 마음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고 단지 상황만을 설명했다.
형은 잠시 말없이 서해 용왕을 보다가 이내 차분한 얼굴로 돌아와 내 곁에 섰다.
“……그러셨군요.”
그것이 끝이었다.
형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서해 용왕은 빨리 궁으로 돌아가고 싶은지 성큼성큼 크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용왕님, 그 있잖아요.”
“뭐?”
“사실 저는 어릴 때 산호초도 해초인 줄 알았어요.”
“어릴 때야 뭐 불가사리도 불가살이인 줄 알지!”
서해 용왕과 발걸음을 맞춰 걸으며 나는 용왕이 귀찮아하는 걸 알면서도 계속 시답잖게 말을 걸었고,
서해 용왕이 내 말을 받을 때마다 계속해서 희미하게 번지는 감정을 끌어안았다.
묵묵히 내 옆에서 걷기만 하는 형도 사실은 그의 그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계속해서 듣고 싶을 터였다.
궁으로 돌아가는 짧은 길만이라도 그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기를 바라는 나처럼.
35장. 아이고, 용왕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