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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14화 (114/187)

35장. 아이고, 용왕님(2)

서해 용왕은 궁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머물고 있었다.

궁에서 멀어질수록 주변 풍경은 도로 심해에 가까워졌다.

빛이 거의 들지 않음에도 모든 것이 여전히 뚜렷하게 보였는데, 용왕이 우리를 은인으로 맞이하여 물속을 뚜렷하게 볼 수 있는 용신의 축복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하얀 모래 위를 걷고 또 걸어, 마침내 우리는 목적지에 다다랐다.

용왕이 본신을 숨길 만큼 무척이나 거대한 해저 협곡이었다.

“저…… 그럼 소신이 먼저 서해 용왕님께 탕약을 진상하겠사옵니다.”

길을 안내해주었던 용신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붕어 모습의 용신은 동해 용왕의 어의(御醫)로 두 손에는 탕약을 차린 작은 상을 들고 있었다.

서해 용왕의 숨결에도 독기가 스며 있을 수 있으니 독을 중화하는 탕약을 먼저 들인 뒤에 만나라는 동해 용왕의 뜻이었다.

물론 말은 그리했어도, 독기는 핑계고 귀빈들이 서해 용왕한테 봉변을 당하기 전에 자기 신하를 먼저 보내겠다는 속셈이 느껴졌다.

“아니, 근데 쟤는 왜 어의가 붕어야.”

먼저 동굴로 들어가는 붕어 용신의 뒷모습을 보모 호구별성이 말했다.

“쟤 볼 때마다 자꾸 붕어(崩御) 생각나서 찜찜하잖아.”

“…….”

쉬이 받아치기 힘든 농담이라 듣기만 했다.

한데 딱히 농담이 아니었는지 호구별성이 계속해서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붕어는 민물고기 아니야?”

“음…… 그건 그러네요.”

이건 나도 좀 신경이 쓰여서 고개를 갸웃했다.

바다인데 민물고기가 살아도 되는 걸까?

근데 또 따지고 보면 우리도 육지의 것인데 문제없이 숨을 쉬고 있잖아.

민물고기 붕어라도 용신이면 상관없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호구별성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바다에 널린 게 생선인데 왜 하필 붕어냐고! 굳이 민물고기를 어의로 데려오다니, 그게 하필 붕어라니, 뭔가 아주 수상해!”

“1절만 해라, 흉물.”

더 이상 못 들어주겠다는 듯 사나운 얼굴로 강림 형이 핀잔했다.

타당한 의심이라고 해야 할지, 불필요한 망상이라고 해야 할지.

생각에 빠졌던 호구별성이 강림 형을 돌아보며 독기를 뿜었다.

직후.

휘이이이익!

동굴 속에서 거친 바람이 불어오더니.

“에구구!”

탕약을 바치러 들어갔던 붕어 어의가 튕겨 나오면서 빙글빙글 날아올랐다.

아무래도 서해 용왕이 또 콧김을 분 모양이었다.

강림 형에게 독기를 뿜던 호구별성이 그것을 보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이구, 붕어가 붕 떴네.”

“…….”

나는 차마 그 말을 받지 못하고 콧김에 날아오른 붕어 용신에게 달려갔다.

파아앙!

나라도 받아주려고 팔을 뻗는 순간, 검푸른 신성이 번쩍이면서 강림 형이 먼저 오랏줄로 묶어 붕어 용신을 받아 내었다.

“에구구구…….”

오랏줄에 묶인 붕어 용신이 신음했다.

인간을 닮은 왕족들과 달리 붕어에 가까운 모습이었으나, 어쨌든 이족 보행을 하는 데다 곱게 비단옷까지 차려입은 양반이 그리 앓는 소리를 내니까 더 안쓰러웠다.

“서해 용왕님이 많이 언짢으신가 봐요?”

가엾은 붕어 용신을 일으켜주며 물었다.

그를 묶었던 오랏줄은 그가 다시 제대로 일어서면서 스르륵 사라졌다.

“송구하옵니다, 대왕님.”

내 손을 붙잡고 일어난 붕어 용신이 길게 기른 수염을 떨며 대꾸했다.

“소신이 염라대왕님과 막내 왕자님께서 오셨다고 전해드렸사옵니다만, 용왕님께서 때가 되면 알아서 만나겠다고 하셨사옵니다.”

서해 용왕이 알아서 찾을 때까지 오지 말라는 것일까?

동해 용왕이 까칠하다고 미리 말을 해주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좀 당황스러운 반응이었다.

“현이가 왔다는데도 그러셨소?”

오휼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아무리 까칠한 성격이래도 그렇지, 영원히 어린 아이로 머무는 막내가 오랜만에 돌아왔는데도 그런 매몰찬 반응이라면 당연히 신경 쓰일 법했다.

“예……. 막내 왕자님께서 무사히 돌아오셔서 기쁘시다고 한마디 말씀은 하셨사옵니다만.”

붕어 용신이 송구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아바마마께서 기분이 많이 안 좋으신가 보오.

막내 고등어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 원래도 성격이 이상한 양반이긴 했는데, 그래도 너무하네!”

팔짱을 낀 호구별성도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흐음, 뭐 그래도 용왕인데 무언가 뜻이 있지 않겠느냐.”

그나마 사라가 흘끗 용왕의 굴을 곁눈질하며 그를 변호했다.

나는 가만히 용왕의 굴을 바라보았다.

업경의 권능이 크고 깊은 협곡을 직시하자, 용왕이 품은 거대한 바다의 신성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그런데 휘몰아치는 해일 속에서 내게 뜻밖의 감정이 전해져 왔다.

“……?”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짜증?

아니, 그보다는…… 부끄러움에 가까운데.

서해 용왕이 왜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거지?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을 끔뻑이다가, 조금 더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있을까 싶어 업경의 권능을 더해 보았다.

그러나 상대가 용왕이어서인지 권능을 더해도 이 이상 읽히지는 않았다.

다만 서해 용왕이 무언가를 부끄러워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에 더해 붕어 용신으로 콧김으로 날려버린 것 역시 나름대로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도.

“대왕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너무 오래 쳐다보고 있었나?

옆에 서 있던 강림 형이 물어 왔다.

“아뇨, 그냥 업경으로 뭔가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딱히 그런 건 없네요.”

용왕이 무언가를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은 굳이 밝히지 않았다.

그저 궁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서해 용왕을 다시 찾아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용왕의 콧김에 날아가지 않을 방법을 고민했다.

***

그날 우리는 전에 없이 훌륭한 만찬을 즐겼다.

갖가지 해초와 산호로 만들어진 용궁의 요리는 보기에도 화려하면서도 풍미가 깊었다.

재료가 재료다 보니 무척 건강한 맛이 나겠거니 예상했는데 의외로 자극적인 음식도 있어서 먹는 재미도 있었다.

온갖 진미가 가득 찬 식탁에는 서해 용궁의 삼 남매, 동해 용왕과 동해 용왕비, 그리고 서해 용왕비가 함께였다.

“음식은 입에 맞으시오, 염라?”

눈이 마주친 동해 용왕비가 물었다.

동해 용왕의 푸른 머리칼과 대비되는 백발이 과연 서해 용왕의 딸이었다.

단 남편과 똑같이 중년의 외모였으므로 조카딸로 보이지는 않았다.

“네, 아주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해 용왕비께서 어떤 요리인지 세세히 가르쳐주셔서 더 즐겁게 즐기고 있어요.”

말을 덧붙이면서 옆에 앉은 서해 용왕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중년의 모습인 동해 용왕 부부와 달리 서해 용왕비는 새하얀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틀어 올린 노년의 모습이었는데, 붕어 어의를 콧김으로 날려버렸던 서해 용왕과 달리 무척 자애로운 인상이었다.

그녀가 내 옆에 앉아 용궁의 여러 음식들을 하나하나 친절히 소개해준 덕에 나는 식사를 더욱 풍부하게 누릴 수 있었다.

다만 내 곁에 앉은 막내 왕자는 다른 형제들과 어머니를 만나고도 아버지를 만나지 못한 게 신경 쓰이는지 이따금 침울하게 꼬리를 늘어뜨렸다.

나는 우리 고등어 친구의 그런 모습이 못내 눈에 밟혀서 서해 용왕비에게 목소리를 죽여 물었다.

“그런데 혹시 서해 용왕님 콧김에 날아가지 않을 방법이 있을까요?”

“음?”

내 접시에 붉은 산호초 튀김을 올려주던 그녀가 인자한 얼굴을 찌푸렸다.

“혹시 영감이 그대한테도 콧김을 불었소?”

“아뇨, 아직은 아닌데 곧 부실 것 같아서요.”

다른 이들을 만나지 않으려는 부끄러움의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볼 생각이었기 때문에 나는 솔직하게 대꾸했다.

“흐음…….”

무언가 내키지 않는지 서해 용왕비는 잠시 턱을 매만졌다.

“영감을 찾아가시겠다면 내 청옥가락지를 빌려드리겠소.”

그러더니 다시 내 접시에 해초무침을 얹어주며 말을 이었다.

“깊은 물의 신성이 담겨 있는 가락지지. 그 가락지를 끼면 그대는 깊은 물만큼이나 무거워진다오. 그러면 영감이 콧김을 불든 입김을 불든 날아가지 않을 것이오.”

다행히 서해 용왕의 콧김에 날아가지 않을 방법이 생겼다.

나는 그녀가 골라준 음식들을 마저 먹으며 감사를 담아 미소 지었다.

***

식사를 마친 늦저녁.

방에서 잠시 쉰 후 용궁 밖으로 나왔다.

서해 용왕비가 빌려준 청옥가락지를 손가락에 끼고, 붕어 어의에게서 받아온 탕약을 들고서.

이제 콧김에 날아가지 않을 테니 약도 제대로 전해줄 수 있겠지.

“서해 용왕님께 가시는 겁니까, 대왕님?”

한데 뒤에서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도 따르겠습니다.”

강림 형이었다.

용궁 밖으로 나설 때는 따라오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으니, 아까 나와 서해 용왕비가 대화하는 것을 듣고 나보다 먼저 용궁 밖에 나와 기다린 모양이었다.

“어…… 형, 따라와도 괜찮겠어요?”

나는 형과 마주칠 줄 몰라서 조금 놀란 채로 물었다.

“용왕님 콧김에 날아갈지도 모르는데.”

“…….”

형은 잠시 특유의 서늘한 눈으로 침묵했으나, 곧 강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날아가기 전까지는 대왕님 곁을 지키겠습니다.”

날아가지 않겠다는 말은 안 하는구나.

저승의 으뜸차사도 3만 년을 군림한 용왕님 콧김에 버틸 자신은 없나 보다.

근사한 충신의 얼굴로 콧김을 각오하는 게 왠지 유쾌해서 나는 피식 웃었다.

“네, 그럼 같이 가요.”

그렇게 대답하며 한 발을 막 내디딘 순간.

“……제가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어째서인지 형은 그 자리에 붙박인 채 재차 허락을 구하듯 물어 왔다.

“같이 가자고 한 거 아니었어요?”

의아한 마음에 형을 올려다보자마자, 나는 그가 왜 그리 물었는지를 깨달았다.

형은 내가 같이 가지 않으려 할 거라고 짐작했구나.

그래서 만찬 중에는 잠자코 듣고만 있다가 미리 용궁 밖까지 나와서 나를 기다린 거야.

업경의 권능은 여전히 형의 마음을 들춰내지 못했다.

그러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힘과는 상관없이 나는 확신했다.

그가 나의 형이어서,

그렇기에 검푸른 눈동자에 드리워진 미약한 망설임을 알아볼 수 있어서.

“아…….”

새삼 형과 부딪쳤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왜 제게 그런 방식이라 미리 말씀해주지 않으신 겁니까.

-몸이 이리 상하셨잖습니까.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당신께서 하셔야 할 일은 그자가 부르는 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만 그 탯줄을 끊어 내시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는 형의 마음이,

또한 그것이 무겁게 느껴질 때마다 깊어진 갈등이,

그에게 미안해질 만큼 선명하게 되새겨졌다.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망설임을 거두고 먼저 차분한 얼굴로 돌아온 것은 형이었다.

“가시지요. 따르겠습니다.”

곧은 자세로 서서, 살짝 시선을 내린 채로.

“근데 형, 형은 역시 동굴 밖에서 기다리는 게 좋겠어요. 콧김에 날아가면 안 되니까.”

그런 형의 모습에 나도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웃음 지었다.

“서해 용왕님이 정말로 저를 해치지는 않으실 거예요. 그러니 동굴 앞까지만 데려다주세요.”

먼저 발을 내디딘 내게 형이 걸음을 맞추며 대답했다.

“그리하겠습니다.”

바로 대답해 오는 목소리는 잔잔하되 결연했다.

나는 괜히 애틋한 마음이 들어 본래 하지 않으려고 했던 말을 꺼냈다.

“사실 아까 업경의 권능으로 서해 용왕님을 조금 읽었거든요.”

그래도 용왕이 부끄러워한다는 것까지 밝힐 수는 없으니 조금 돌려서.

“무언가 곤란하신 것 같아서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대체 무엇이 부끄럽기에 아무도 만나려고 하지 않는 것인지.

가 보면 알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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