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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13화 (113/187)

35장. 아이고, 용왕님(1)

동해 바다.

백발을 휘날리는 두 용신과 작은 고등어를 따라 천천히 침잠했다.

용신들이 품은 여의주는 빛이 닿지 않아 사방이 먹물처럼 검은 심해에서 영롱하게 반짝였다.

부드럽게 감싸오는 물의 권능에 몸을 맡기기를 한참.

용왕이 허락한 자들만 거닐 수 있다는 바닷길이 어느새 끝을 보이고 있었다.

“백부님의 신성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나와 계시는 모양이군.”

앞장섰던 오휼과 오혜가 말했다.

서해 용왕의 자식인 그들의 백부라면 동해 용왕 오광일 것이다.

용왕이 친히 마중을 나왔다는 말에, 나는 괜히 매무새를 정리하며 남매를 뒤따랐다.

마침내 바닷속 궁궐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였다.

웅대하게 솟은 하얀 성벽과 색색의 산호초에 나는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이전에 봤던 서해 용궁과 마찬가지로, 자연과 문명이 어우러진 바다의 성은 육지의 것과는 또 다른 신비한 멋이 묻어나왔다.

“이야, 생각보다 더 환대를 해주는데?”

옆에 선 호구별성이 목을 쭉 빼며 말했다.

“많이들 나왔네.”

그녀의 말대로 궁궐 앞에는 꽤 많은 용신들이 정렬해 있었다.

문어, 해마, 게, 각양각색의 병사들이 모두 조개와 진주로 장식한 화려한 갑주로 치장하여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

동해 용왕이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의전을 준비한 것이 분명했다.

처마가 멋들어진 용궁의 정문 아래로 푸른 머리칼을 갈기처럼 휘날리는 용신이 서 있었다.

오휼이나 오혜와 달리 나이가 꽤 있는 중년의 모습이었는데, 키는 그들 남매보다도 훨씬 더 컸으며 다부진 몸은 무골(武骨)의 것처럼 옹골차면서도 어딘가 품위가 느껴졌다.

한반도의 동쪽 바다를 다스리는 동방청룡 광덕왕, 오광이었다.

“어서 오게, 새로운 염라여.”

눈이 마주친 그가 황금빛 눈동자를 곱게 휘며 인사를 건넸다.

송충이처럼 짙고 푸른 눈썹에 긴 머리를 거칠게 늘어뜨린 것도 그렇고, 꽤나 쾌남 같은 인상이었는데 눈을 휘며 미소를 짓자 또 몹시 인자해 보였다.

“저승에 새로운 동이 텄을 때부터 그대를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네.”

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길을 따라 양편에 줄지어 선 용신들도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

“동해 용궁이 새로운 저승의 왕을 뵙습니다!”

우렁찬 인사와 함께 동해 바다가 웅장하게 파도쳤다.

“우와…….”

생각지 못한 환대에 나는 왠지 어안이 벙벙해져서 좌우의 용신들을 한 번씩 보고는 다시 동해 용왕을 올려다보았다.

그저 고등어 왕자를 데려다주고자 가볍게 따라나선 것이었는데.

예상 밖의 큰 환대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이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되는데…….”

소심하게 중얼거렸더니, 그걸 놓치지 않고 동해 용왕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대가 서해를 구해주었는데 이 정도는 당연하지 않겠나? 부담 갖지 말게.”

그는 큰 손으로 내 어깨를 두드려준 후 뒤에 선 일행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육지의 신들이여,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가 많았다. 모든 바다는 하나이며 서해의 은인은 결국 동해의 은인일지니, 은인들께서는 부디 내 집처럼 쉬어가기를 바란다.”

그에 삼차사와 바리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3만 년을 살아온 용왕에게서는 신들도 자연히 예를 갖추어 보일 만큼의 깊은 연륜이 있었다.

동해 용왕은 그들에게 흡족하게 웃어 보이곤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만찬을 준비해 두었는데, 어찌하겠나?”

식사부터 할 것인지, 아니면 일단 쉬면서 여독을 풀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오는 길이 짧지 않았을 테니, 혹 피로하다면 그대들이 묵을 방부터 안내하겠네만.”

“아…….”

그 말에 나는 우선 서해 용왕의 남매들을 돌아보았다.

무려 용왕이 대접해준다는 만찬도 물론 기대가 되었지만, 역시 오랜만에 집에 온 막내 왕자를 부모님께 데려다주는 것이 먼저일 것 같았다.

“혹시 서해 용왕님을 먼저 뵐 수 있을까요?”

“서해 용왕?”

“네, 막내 왕자님께서 오랜만에 돌아오셨으니까요.”

“음…….”

한데 내 말에 동해 용왕이 어째 묘한 반응을 했다.

“그 녀석이 요즘 아프다고 좀 까칠하네만…….”

그러면서 말꼬리를 흐리는 것이 무언가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 많이 편찮으신가요?”

나는 그의 말이 신경 쓰여서 물었다.

“일단 그렇긴 하지, 식중독이니…….”

돌아오는 답을 보아하니, 여전히 아프긴 해도 생명의 위협까지는 아닌 듯한데.

“애초에 성격이 고약하긴 하다만.”

미간을 찌푸린 동해 용왕이 말을 이었다.

어째 걱정보다는 짜증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뭐 형제답다면 형제답다고 할 수 있는 반응일까.

그래도 그런 만큼 심각한 상태는 아닌 것 같아서 걱정을 조금 덜었다.

“일단 그놈이 본신으로 지내느라 궁에서 나와 있거든.”

“본신이요?”

“그래, 용으로 돌아가서 심장에서 최대한 멀리 독기를 가둔 게지.”

“아…… 그렇군요.”

같은 양의 독이면 작은 용신의 모습일 때보다 거대한 용의 모습일 때 덜 치명적일 터였다.

“그렇게 본신으로 버티다가, 마침 우리 어의(御醫)가 독기를 푸는 탕약을 완성했는데.”

“약이 완성되었군요?”

“그래, 독기가 퍼지는 것을 막고 서서히 중화시키는 약이네. 보름 정도 꾸준히 복용해야겠지만.”

치료약이 나왔다니 더욱이 다행이었다.

그런데도 동해 용왕의 얼굴은 썩 밝지가 않아서, 나는 계속해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기껏 약을 가져다줬더니, 그놈이 오지 말라고 역정을 내지 무언가?”

“네? 왜요?”

“그러게 말일세, 우리도 대체 왜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네.”

“아…….”

그러니까, 독이 몸에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본신으로 지내던 서해 용왕이 무슨 영문인지 완성된 약을 거부하고 있단 건가?

“엊저녁에도 약을 갖다 바친 어의를 콧김으로 날려버렸어.”

“콧김이요?”

“그래! 이놈이 굴에서 나오지도 않고 그냥 콧김을 불어서 내 신하를 날려버렸다네! 무슨 망나니짓인지, 원!”

말을 하면서도 어처구니없다는 듯 동해 용왕이 혀를 찼다.

무려 용왕의 본신인지라 누운 자리에서 콧김만 불어도 다른 용신들에게는 태풍 같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내가 직접 갔네만.”

“아, 다녀오셨군요.”

“그래, 근데 이놈이 나한테 도둑놈은 썩 꺼지라고 하지 무언가!”

“어…… 도둑놈이요?”

내 물음에 짜증을 내던 동해 용왕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크흠…….”

그러더니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금 점잖은 얼굴을 했다.

“내 마누라가 그놈 딸이잖나.”

“…….”

맞다, 그랬지.

한순간 머리채가 잡혀 신화의 세계로 끌려 들어가는 기분에 나도 덩달아 헛기침을 했다.

동해 용왕의 부인은 서해 용왕의 딸이었다.

네 개 바다를 나눠 가진 사해 용왕은 모두 형제였으므로, 결국 동해 용왕은 자신의 조카딸과 혼인한 것이다.

“혼인한 지가 2만 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그놈이 나만 보면 도둑놈이라고 하지 뭔가.”

“음…….”

여기다 대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나는 적당한 답을 찾지 못해 침음했다.

아니, 뭐…… 용신은 원래 짐승의 신인지라 인간의 잣대를 들이대면 안 될 것 같긴 한데.

하기야 꼭 짐승들의 신이 아니라도, 물 건너 다른 신화들을 생각하면 그렇게…… 특별할 것도 없나?

“내가 그이와 가약을 맺었을 때부터 나만 보면 도둑놈이라더니, 내가 맏딸을 쫓아낸 뒤로는 아주 나만 보면 쓸데없이 역정을 내서 원.”

“……동해 용왕님 첫째 따님이시라면.”

“그놈의 첫 손녀지.”

씩씩거리던 동해 용왕이 다시금 헛기침을 했다.

“내 조카손녀이기도 하고.”

“…….”

남의 집 얘기였지만, 나는 2만 년 내내 형을 도둑놈이라고 욕한다는 서해 용왕에게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그 애가 자네 얘기를 가끔 했네.”

그러다가 문득 동해 용왕이 다른 말을 꺼냈다.

“자네를 보면 반가워하겠군.”

“아…… 그분이 동해에 계셨군요.”

“그래, 지난 염라가 저승의 문을 닫을 때 돌아왔지.”

동해 용왕의 맏딸, 그러니까 서해 용왕의 맏손녀는 죽은 아기들을 돌보던 저승 삼신이었다.

형형하게 타오르던 황금빛 용의 눈동자를 떠올리며, 나는 살짝 몸을 떨었다.

저승 삼신.

두 개 바다의 피를 물려받은 그 신은 사실, 한반도에서 제일 성미가 포악하다는 신이었으니까.

그녀는 본디 지금의 이승 삼신보다도 먼저 생불왕의 천명을 받은 신이었는데,

사실은 진짜로 천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 동해 용왕에게 쫓겨나는 바람에 생불왕 노릇이라도 하기로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자격이 없는 채로 생불왕의 일을 하려다 보니 산모의 겨드랑이에서 아기를 꺼내려고 하는 둥 온갖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 지금의 이승 삼신이 정식으로 생불왕의 천명을 받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저승 삼신은 불같이 화를 내며 이승 삼신의 뺨을 때리고는, 아기들이 100일 안에 온갖 병에 걸리는 저주를 내렸다.

한데 그러한 만행에도 이승 삼신은 당황하지 않고 ‘내 너를 위해 제사를 지내주겠노라’라며 그녀를 달래었으니…… 저승 삼신은 그제야 저승으로 와서 죽은 아기들을 돌보는 저승의 삼신이 되었다.

내가 그분을 처음 뵌 것은 쌍둥이 아기들의 명부를 찢었을 때였다.

물론 우리 대왕님께서도 그때 멋대로 명부를 찢었다며 내 뺨을 때리긴 하셨지만, 사실 진짜로 화가 났던 것은 죽은 아기들을 돌보는 저승 삼신이었다.

소식을 들은 저승 삼신은 그야말로 노발대발하며 우리 대왕님께 나를 내놓으라고 역정을 내셨고.

이게 참, 이승 삼신만큼 나이가 많다는 것은, 이승 삼신과 함께 인간의 시대를 열었던 우리 대왕님과도 동년배란 뜻이라…….

-막내야, 너 저승 삼신이 부른다.

우리 대왕님께서도 그분을 함부로 대하실 수 없었고, 끝내 그분께 나를 넘기시며 말씀하셨다.

-뭐…… 네가 그래도 내 아들인데, 설마 죽이지는 않겠지.

-……?

-그러니까 그냥 눈 딱 감고 한 번 다녀와라. 나도 정말 죽겠다.

-……!

-가서 화내면 듣고, 때리면 맞다가 와.

-……?!

-음…… 내 당분간 일정을 빼줄 테니, 끝나면 서천꽃밭에서 쉬다 오고.

-……?!?!

-얼마가 걸려도 좋으니…… 일단 걸을 수 있게 되면 돌아오너라.

-……?!?!?

잊고 있던 기억에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크흠, 내 딸이지만 그 애의 피는 전부 서해에서 온 게 분명해.”

그새 안색까지 나빠졌는지, 동해 용왕이 나를 살피며 재차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그 애는 잠시 천기를 읽으러 물 밖으로 나가 있으니, 돌아오면 인사를 나누게나.”

“아, 그분이 지금은 궁에 안 계신가 봐요?”

……그러면 저승 삼신이 동해로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 저승으로 돌아가야겠다.

몰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쨌든 오흠 그놈이 지금 심통이 잔뜩 나 있다네.”

잠시 딸의 소식을 전한 동해 용왕이 다시금 서해 용왕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어떤가, 그래도 한번 가 보겠나?”

“음…….”

그의 물음에 나는 짧게 고민하다 서해의 형제들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막내 왕자님이 돌아오셨으니, 인사부터 드리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런가?”

정말로 딱히 내키지 않는지 동해 용왕은 탐탁지 않은 얼굴을 했다.

“그래, 그러면 다녀오게나. 그놈도 설마 은인한테 콧김을 불진 않겠지.”

그리 말하면서도 또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니…… 이거 자칫하면 용왕의 콧바람에 날아가버리는 굉장한 경험을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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