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12화 (112/187)

34장. 업신을 모셔라(5)

업신 던전의 보스몹 황금 돼지를 쓰러트린 후.

집을 돼지우리로 만들었던 돼지 떼를 해치워서일까?

오물로 뒤덮여 있던 마당은 그새 물청소라도 한 것처럼 깨끗해졌다.

집이 더러워져서 떠난 업신을 다시 모셔올 준비가 된 것이다.

“이제 이 돼지머리로 업신한테 정성껏 상을 차려주면 돼요.”

나는 황금 돼지가 드랍한 돼지머리를 일행이 잘 볼 수 있도록 번쩍 들었다.

[ 황금 돼지의 웃는 머리(D) ]

- 환하게 웃는 돼지머리.

- 보기만 해도 복이 올 것 같다.

고사상에 올리는 것처럼 활짝 웃고 있는 돼지의 머리였다.

“업신은 보통 곳간에 모시니까 우리도 곳간에 상을 차리면 됩니다.”

“아~ 진짜 ‘업신 모시기’ 하는 거네?”

단번에 알아들은 호구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업신 모시기’ 같은 고사는 사실 나보다 진짜 신들이 더 잘 알 터였다.

‘업신 모시기’는 ‘업님 대접’이나 ‘업왕 모시기’라고도 불렸던 실제 의례였으니까.

“근데 ‘업신 모시기’를 하는데 상에 그것밖에 안 올려?”

팔짱을 낀 호구별성이 불쑥 말을 더했다.

“금줄도 치고 떡도 올려야지!”

굿판을 받아먹던 역신이라서 그런지 돼지머리 하나로 상을 차리는 게 아무래도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으음…….”

나는 그녀의 말에 턱을 매만지며 업신 던전에 대해 좀 더 떠올렸다.

“일단 던전에 나름 히든 피스가 더 있긴 해요. 찾아보면 상에 차릴 음식이 더 나오거든요.”

다른 손으로는 싱글벙글 웃는 돼지머리를 조물거렸다.

“근데 이게 진짜로 업신이 내려주는 복의 확률을 높여주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이 분분해서요.”

업신이 내리는 보상은 돼지 저금통의 돈을 불려준다는 스물네 가지 복주머니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것.

상을 더 차리든 안 차리든 고를 수 있는 복주머니는 똑같이 하나뿐이다.

게다가 헌터들 사이에서 데이터를 모아 계산해 봤더니 1,000배를 고르는 확률도 딱히 다르지 않았다고.

“상을 더 차리려면 집안에 깃든 액운 때문에 조금 귀찮아져서, 상을 차리는 건 페이크고 공략은 오직 황금 돼지뿐이라는 말도 있어요.”

즉, 기껏 상을 더 차려줘도 업신이 무조건 1,000배로 돈을 불려주는 것도 아닌지라, 업신 던전의 공략은 보통 상에 돼지머리만 올리는 것으로 끝나곤 했다.

그래서 나도 그냥 돼지머리만 올리려고 했던 것인데, 호구별성은 그래도 무언가 아쉬운지 떼잉 소리를 냈다.

“신을 모시려면 당연히 정성을 다해야지.”

차려놓은 굿판이 별로면 저주를 내렸다던 마마신의 말씀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한 소리를 하니, 꼭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돼지머리를 만지작거리다가 일행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용신분들은 어떠세요? 업신을 빨리 모셔 가셔야 하는 건 아닌가 해서요.”

상을 더 차리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겠지만 우선 의견을 물었다.

두꺼비 업신을 필요로 했던 건 병으로 쇠약해진 서해 용왕에게 정기를 가져다주기 위함이었으니.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

“아바마마를 위한 것이니 정성을 다하는 쪽이 더 마음에 드는군…….”

오휼과 오혜가 호구별성의 말에 동의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아픈 아버지를 위해 정성을 다하는 일이었다.

이로써 우리는 흔쾌히 상을 더 차리기로 결정했다.

***

그리하여, 3천 년 경력의 굿판 전문가 호구별성의 진두지휘 아래 업신 던전의 보너스 게임 고사상 차리기가 시작되었다.

집 안에 숨겨진 음식은 감, 사과, 북어, 떡, 전이었다.

이 음식들과 돼지머리를 가져다 업신을 위한 고사상을 차리는 것이 던전 공략의 마지막 관문이었다.

“아휴, 이놈의 까치 떼들!”

나무 꼭대기에 열린 감을 따기 위해 오휼의 등에 오른 호구별성이 독기를 뿜었다.

까치밥으로 남긴 감을 마저 딴다는 설정이었는데, 감을 따려고 하면 사나운 까치 떼들이 달려들었다.

“병이나 받아라!”

-까아악!

역병의 신성에 당한 까치들이 녹색 거품을 뿜으며 아래로 추락했다.

“앗.”

한데 하필이면 그게 강림 형의 너른 어깨 위로 떨어져버렸다.

형은 녹색 거품이 묻은 어깨를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치를 떨었다.

“저 끔찍한 흉물이 감을 올려 봤자 부정만 타는 게 아닌가?”

“…….”

그 말에 나는 무심결에 식중독…… 뭐 그런 것을 떠올리고 말았으나, 호구별성에게 미안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감을 따고, 두 번째 음식인 사과는 별 고생 없이 찾아서 금방 접시 위에 쌓아 두었는데.

남들 다 일하는데 혼자서 팔자 좋게 마루에 누워 있던 사라가 몰래 사과를 한 입 베어 먹다가 호구별성에게 현행범으로 발각되었다.

“아니, 영감! 일도 안 하는 게 고사 음식까지 축내고 있어!”

“음.”

사라는 호구별성의 타박에도 이미 들킨 것 어쩌겠냐는 태도로 사과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뭐, 내 얼굴이 홍옥처럼 어여쁘니 하나쯤 빠져도 되지 않겠느냐.”

그가 느긋한 목소리로 자신을 변호했으나, 아주 당연하게도 호구별성은 즉시 치도곤으로 응징했다.

세 번째 음식 북어는 대문에 달아 놓은 것을 찾아내 가져왔다.

가져오는 일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으나, 우리 마음 약한 고등어가 순수한 눈에서 방울방울 물방울을 쏟아 내고 말았다.

-이 친구는 어쩌다 이렇게 삐쩍 마른 것이오?

우리는 차마 그 친구가 어떻게 쓰이는 것인지는 말해주지 못하고, 각자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마지막으로 떡과 전들은 부엌에서 얻을 수 있었는데.

알록달록한 떡들 중에서도 빨간 시루떡은 빼놓는 것이 포인트였다.

시루떡에는 귀와 신을 쫓는다는 팥이 들어가 있으니까.

“옛날 생각난다.”

시루떡을 치우며 호구별성이 추억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한 4백 년 됐나? 내 상에 시루떡 올려놓은 멍청한 놈한테 상을 엎고 한바탕 동티를 내렸었지.”

얼굴뿐 아니라 목소리도 어딘가 우수에 젖어 있었다.

“그래도 마을 하나를 전부 뒤집어 놓은 건 좀 과했던 것 같긴 해.”

“…….”

“어, 아닌가? 두 개였나? 생각해 보니 옆 마을에도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

나는 거기다가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시루떡을 아주 멀리 치워 두었다.

그렇게 상에 올릴 떡도 고르고, 부엌 입구에 소금과 팥죽을 뿌려 액귀를 쫓은 뒤 아궁이에서 직접 전을 부치는 것이 ‘업신 모시기’를 위한 최종 단계였다.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기름에 동그랑땡과 산적을 차례로 올리던 나는, 문득 스치는 생각에 옆에 선 호구별성에게 말했다.

“누나, 근데 이거는 치우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응? 그게 뭔데?”

“어…… 동태전이요.”

“아.”

“막내 왕자님이 슬퍼할 것 같아서요.”

“음…….”

내 말에 호구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얇은 동태포를 고등어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치웠다.

***

마침내 업신에게 바칠 상이 완성되었다.

적당한 크기의 상 위에는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전과 북어, 빨갛게 잘 익은 사과와 감이 놓였다.

안방을 뒤져 보니 뭔가 고풍스러운 백자에 담긴 술도 나와서, 촛불에 술까지 제법 그럴듯하게 차려진 상이었다.

하긴 굿판 전문가 호구별성과 만신 바리의 검수도 받았으니 적어도 차린 것만큼은 완벽할 터였다.

“역시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하는 게 좋았네요.”

꼭 필요한 공략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차린 상을 보니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주머니에서 만원 지폐 한 장을 꺼내며 농담조로 말을 이었다.

“저승에서도 한번 차릴 걸 그랬나 봐요. 우리도 나름 신장개업인데.”

활짝 웃는 돼지머리에 지폐를 끼우고 곳간을 한번 둘러보았다.

더러워져서 업신이 떠난 집이었기 때문에 제물을 쌓아 놓는 곳간은 텅텅 비어 있었다.

거미줄이 늘어지고 먼지가 굴러다니는 채로, 그저 한구석에 더러운 볏짚만 조금 쌓여 있을 뿐이었다.

“업신은 보통 볏짚에 산다고 하죠?”

나는 그 볏짚을 잠시 바라보다가 상에 놓인 숟가락과 젓가락을 들었다.

이 수저를 그릇에 올리면 ‘업신 모시기’의 시작이었다.

“그러면 제가 대표로 업신께 절을 하겠습니다.”

업신 중에서도 두꺼비나 구렁이는 ‘업장군’이라고 하는데 그중에서도 우리가 모실 두꺼비 업신은 ‘두지업’이라고 불렸다.

나는 상에 두 번 절을 하고는 일어나서 볏짚에 숨어 있을 두지업에게 정성껏 비손했다.

“장군님, 복 주시고 명 길게 해주시고 재수가 넘치게 해주십시오.”

내가 비손하자, 내 뒤에 선 일행들도 두 손을 모았다.

“업장군님, 천 년 만 년 여기 계셔서 고방에 곡식 가득하게 해주시고 집안 편안하게 해주십시오.”

그동안 상을 받기만 했을 신들이 치성을 드린다니 새삼 재밌다는 생각이 드는 그때.

부스럭.

곳간 구석에 쌓여 있던 볏짚에서 기척이 들렸다.

“장군님, 복 주시고 명 길게 해주시고 재수가 넘치게 해주십시오.”

한 번 더 말하자.

[ (!) 업신이 당신의 정성에 탄복합니다. ]

기다리던 팝업창이 떴다.

-껍껍껍.

볏짚 사이로 강아지만 한 커다란 두꺼비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장군님, 복 주시고 명 길게 해주시고 재수가 넘치게 해주십시오.”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비손했더니, 두꺼비가 토실토실한 몸을 흔들며 걸어 나왔다.

-껍껍껍.

돼지머리를 의자 삼아 위엄 있게 앉은 두꺼비가 커다란 눈을 끔뻑였다.

영물답게 검고 깊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두꺼비 위로 이내 알록달록한 복주머니들이 나타났다.

업신 던전의 하이라이트, 복주머니 고르기였다.

-껍껍껍.

어서 골라보라는 듯 두꺼비가 늠름하게 몸을 폈다.

스물네 개의 복주머니 중 하나는 저금한 돈을 무려 1,000배나 불려준다는 주머니였다.

“제가 고르기로 했죠?”

두꺼비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면서 나는 장난스럽게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우리야 반쯤 재미로 하는 것이라지만, 정말로 복주머니에 인생을 건 인간들도 많을 테지.

꽝을 골라도 업신은 최소 2배를 불려준다.

하지만 최대 1,000배까지 불릴 수 있다는 걸 아는 이상 기실 이득을 보면서도 괜히 손해 보는 기분이지 않을까.

“말 그대로 10억 원짜리 복권이네.”

색색의 복주머니들을 훑어보며 하나를 고르려고 할 때였다.

-음? 염라, 그걸 고를 것이오?

별안간 고등어가 말했다.

-그거는 2배짜리라는데?

“네?”

뜻밖의 말에 고등어를 바라봤다.

-저 빨간 것이 1,000배라고 하오.

눈이 마주친 고등어가 지느러미를 살랑였다.

-껍껍껍.

-보시오, 업신도 그거 말고 빨간 것을 고르라고 하는구려.

“어…… 업신 말을 알아들으시는 거예요?”

놀라서 한 질문에 대답한 건 옆에 선 오휼과 오혜였다.

“현이는 원래 육지 짐승의 말도 곧잘 알아들었소.”

“신성이 여물지 않은 대신 짐승의 귀도 닫히지 않았지.”

“……!!”

원래 용신은 짐승의 시대를 열었던 신들인지라, 용신으로 완성되지 못한 막내 왕자는 아직 짐승의 말을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껍껍껍.

-상을 잘 차려줬으니 1,000배로 불려주는 주머니를 가져가라고 말하고 있소.

“어어? 그럼 히든피스가 있던 거네요?”

업신 던전의 숨겨진 공략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상을 제대로 차려주면 업신이 1,000배짜리 복주머니가 무엇인지 알려주는데 짐승의 말로 말해주는 바람에 아무도 그걸 몰랐던 거다!

“우와!”

예상치 못한 행운에 업신이 가르쳐준 복주머니를 골랐다.

[ (!) 업신이 당신의 재물에 축복을 내립니다. ]

[ (!) 10,800,000 우주화를 획득합니다. ]

1080만 우주화.

원화로는 무려 10억 8천만 원이다.

-껍껍껍.

재물을 내린 업신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춤을 추듯 포동포동한 몸을 흔들고는,

파아앙!

그대로 황금빛 두꺼비 조각상이 되었다.

[ 황금 두지업상(E) ]

-복을 내리고 액을 쫓는다는 두꺼비 업신상.

-두꺼비 업신을 1회 소환한다.

업신을 소환할 수 있는 소모 아이템이었다.

이제 이것을 바다로 가져가면 불과 독을 뿌리며 횡포를 부린다는 지네 괴물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보니 업신 중에서도 고등어 업신이 최고였네요.”

황금 두꺼비를 인벤토리에 넣으며 막내 왕자를 돌아보았다.

-그대에게 도움이 되어 기쁘오!

왕자가 의젓하게 지느러미를 으쓱였다.

34장. 업신을 모셔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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