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11화 (111/187)

34장. 업신을 모셔라(4)

꿀꿀꿀.

꿀꿀꿀꿀.

마당 가득히 돼지 떼가 울었다.

둥글고 토실토실한 몸은 던전의 몬스터치고 꽤나 복스럽고 귀여웠다.

크기만 좀 작았다면 데려다 키워도 좋을 만큼.

“황금 돼지를 잡아야 한다고?”

신성을 끌어올린 호구별성이 말했다.

“다 똑같은 돼지 같은데?”

“음, 일단은 그렇죠.”

나는 돼지에게 검을 겨누며 대답했다.

“근데 일단 여기 보이는 돼지들을 잡다 보면요.”

마침 한 마리가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보란 듯이 돼지에게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아악!

-꾸이익!

특별히 강한 몬스터는 아니었던지라 검에 베인 돼지는 저항도 못 하고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파앙!

돼지는 쓰러지자마자 곧바로 하얀 빛에 감싸여서는 작고 동그란 물체로 변했다.

“으잉? 돼지 저금통이네?”

돼지가 사라진 자리에서 분홍색 돼지저금통을 주워든 호구별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네, 그 돼지 저금통을 108개 모으면 황금 돼지가 나올 거예요.”

“아니, 귀찮게 뭘 그렇게 많이 잡아!”

던전의 공략법이 마음에 안 드는지 호구별성이 인상을 썼다.

“거 쎈 놈이나 하나 잡으라고 하지, 잡몹만 떼거지로 잡으라니. 가오 안 살게.”

역신답게 화통한 말이었다.

“그래도 이 던전은 나름 잡는 보람이 있어요, 누나.”

나는 호구별성을 달래며 그녀에게서 저금통을 건네받았다.

“다들 돈은 좀 있으시죠? 여기다 최대 100우주화를 넣을 수 있거든요.”

100우주화는 원화로 따지면 10,000원쯤 되는 돈이다.

인벤토리에서 100우주화를 꺼내자 500원짜리보다 약간 더 큰 황금색 동전이 손바닥에 나타났다.

짤그랑!

나는 그 동전을 돼지 저금통에 넣고 일행들을 돌아봤다.

“저금통에 돈을 많이 넣을수록 소환되는 황금 돼지도 강해지는 대신, 업신을 모시면 저금한 돈을 랜덤으로 불려서 돌려주거든요. 최대 1,000배까지.”

우주화를 넣은 저금통은 다시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러니 다들 돼지를 잡으면 100우주화씩 넣어서 저한테 주세요.”

어차피 한군데로 모아야 하니 당장은 내가 일행들 몫까지 받아두는 게 편할 거다.

“흐음, 그건 좀 재밌구나.”

사라가 흥미롭다는 듯 턱을 매만졌다.

“하긴 무릇 업신이라면 집안의 재물을 불려주는 법이지.”

108개의 저금통에 100우주화씩 넣으면 대충 1백만 원.

그걸 최대 10억 원까지 불릴 수 있다.

다만 돈을 많이 넣을수록 소환되는 황금 돼지도 강해지는 터라 업신 던전은 도전자들을 크게 시험하는 던전이기도 했다.

괜히 욕심을 냈다간 황금 돼지가 지나치게 강해져 쓰러트리지 못할 수도 있고, 고생해서 쓰러트렸다 한들 정작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쪽박만 차게 될 수도 있고.

거기다 결과가 마음에 안 든다고 깽판을 치면 업신이 노하여 저주를 내리기도 했으니.

“우주강도단이 워낙 치사해서, 돈을 최대로 넣은 황금돼지는 무척 강하다고 하거든요.”

업신 던전은 영웅담급 던전이었다.

집을 어지럽힌 돼지 자체는 그다지 강하지 않고, 저금통에 돈을 최소로 넣으면 소환되는 황금 돼지도 보통 돼지들과 별 차이가 없다고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던전의 등급이 영웅담급인 것은, 욕심부려서 돈을 최대치로 넣었을 때의 황금돼지가 그만한 강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영웅담급 던전은 못해도 평균적인 능력치를 지닌 헌터 십여 명이 레이드를 뛰어야 할 만큼 강력하다.

영웅담급 던전 중에서도 특히 위험한 용굴은 아예 길드 단위로 수십 명씩 모여 며칠에 걸려 공략하기도 했다.

“그런데 저 돼지들은 결국 남의 집을 빼앗은 거란 말이죠.”

나는 돼지들을 쭉 둘러보며 말했다.

“도둑질한 자를 벌하는 화탕지옥이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다.

대상의 본질을 읽어내는 업경이 돼지들이 품은 업의 정도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미 그들의 업만으로도 화탕의 화력을 최대로 낼 수 있는데, 대상의 업으로 신성을 증폭시켜주는 업경까지 있으니 조금 욕심을 내도 될 것 같았다.

혹시 내 화탕의 화력이 부족하더라도, 차사들과 1만 살이 넘은 용신도 둘이나 있으니 충분히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 터였다.

“우리는 인간들만큼 재물에 구애받지 않지만요. 그래도 기회가 되면 비상금은 마련해 두는 게 좋겠죠.”

“아, 식구들 밥값이 얼만데. 돈 나오는 걸 마다할 건 없지.”

호구별성이 알았다며 윙크했다.

“기왕이면 천 배 나왔으면 좋겠다!”

그새 목소리가 들뜬 것이 운에 따라 보상이 갈린다는 게 더 재밌는 모양이었다.

……음, 저러다가 쪽박이라도 차면 불같이 화를 낼 게 문득 두려워지기는 하는데.

뭐, 벌써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진짜로 대박이 날 수도 있잖아?

“네, 그러면 일단 돼지부터 잡아 보죠!”

그렇게 돼지 사냥이 시작되었다.

-꾸이익!

-꾸이이이익!

사방에서 돼지들이 비명을 질렀다.

워낙 약한 몬스터들이다 보니 108마리라도 금방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파아아앙!

한쪽에서 검푸른 발설지옥의 권능이 번쩍이고, 동시에 7마리의 돼지가 공중으로 날려졌다가 저금통이 되어 떨어졌다.

강림 형은 쓰러트리는 것보다 떨어진 걸 줍는 게 더 귀찮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돼지 저금통을 집어 들었다.

짤그랑.

짤그랑.

기분 좋게 울리는 동전 소리에 나는 흐뭇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쏴아아아!

서로에게 등을 맞댄 용신 남매를 중심으로 거대한 파도가 일었다.

-꾸이이익!

물에 휩쓸려 간 돼지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짧은 다리로 버둥거리다가 저금통이 되어 사라졌다.

그렇게 모두들 열심히 돼지를 잡고 있을 때.

“아니, 영감은 또 왜 내 뒤에 숨었어?”

황당하다는 듯 소리치는 호구별성의 목소리에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두 손으로 역병을 뿌리면서도 검게 물든 역안으로 사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무 당당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잖아!”

딱히 공격 스킬이 없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훤칠하니 키도 크고 어깨도 넓은 사라가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은 호구별성 뒤에 숨어 있는 게 어째 좀 모양이 빠지긴 했다.

하지만 사라는 거리낌 없이 호구별성의 뒤에서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원래 힐러는 귀족이란다, 별성.”

“염병, 그럼 난 천것이라 돼지나 치고 있냐!”

호구별성이 버럭 성질을 냈지만, 사라는 무심한 얼굴로 샥샥 돼지들을 피하며 계속해서 작지만 든든한 방패 뒤에 숨어 있을 따름이었다.

나는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으며 다시 고개를 돌렸는데.

-꾸이이익!

불현듯 돼지 한 마리가 던전 한구석에 가만히 서 있던 바리를 향해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아, 이런……!”

촤아악!

나는 곧바로 달려가 바리를 노린 돼지를 베어버렸다.

“미안해. 내가 신경 썼어야 했는데.”

돼지들이 약하다는 것도 평균적인 전투 능력을 가진 사람 기준이지, 특별한 공격 스킬이 없는 바리로선 한 마리 상대하는 것도 힘들 것이다.

항상 천도와 치성으로 큰 도움을 준 바리였기에 미처 생각지 못했다.

아직 어린 바리를 굳이 이런 던전에 데려올 필요는 없었건만.

“그냥 차에서 기다리게 할걸.”

후회를 담아 중얼거리자 바리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뇨, 저도 업신이 궁금해서 따라온걸요.”

동시에 바리의 감정이 밀려들었다.

언제나 고인 물처럼 잔잔하기만 했던 평소와 달리,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아이의 마음은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다만 아이의 얼굴은 평소처럼 그저 덤덤하기만 해서, 나도 그냥 모르는 척 바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꾸이이익!

그사이 마지막 돼지가 비명을 지르며 사라졌다.

공격 한 번에 몇 마리씩 처치되어버리니 108마리라 한들 금방이었다.

“그러면 이제 황금 돼지를 불러 볼게요.”

나는 모아두었던 돼지 저금통을 꺼내며 말했다.

파아아앙!

탑처럼 쌓인 108개의 돼지 저금통이 황금빛으로 번쩍였다.

[ (!) 당신이 쌓은 재물이 복록을 불러옵니다. ]

무언가 보스몹의 등장에 어울리지 않는 팝업창이 떴고,

[ (!) 황금 돼지가 나타났습니다. ]

[ (!) 떠났던 업신이 당신의 정성을 기대합니다. ]

돼지 저금통들이 집채만 한 황금빛 돼지로 변모했다.

-꾸이이이익!

마당에 강림한 황금 돼지가 우렁차게 포효했다.

다른 돼지들처럼 통통하고 귀여운 인상이었지만, 비교할 수 없이 거대하고 강해 보이는 몸은 칼로 내리친들 고무처럼 간단히 튕겨낼 것만 같았다.

“바로 화탕지옥을 쓰겠습니다.”

나는 미리 얘기했던 대로 일행들에게 말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대왕님.”

한 발 뒤로 물러선 강림 형이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형이라면 화탕지옥이 충분히 통하리란 걸 짐작할 텐데도, 여전히 걱정을 놓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나는 가벼운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그대로 업경 스킬을 발동했다.

[ 업경(L) ]

허공에 나타난 커다란 세 개의 거울이 투실투실한 황금빛 몸을 비추었다.

츠츠츠!

츠츠츠츠!

직후 나를 중심으로 막대한 기가 뿜어져 나왔다.

내 안의 신성이 몇 배나 증폭되는 것이 느껴졌다.

[ 업경(L)의 권능이 당신의 신성에 공명합니다. ]

돼지를 향해 팔을 뻗었다.

-꾸이이익!

거울에 둘러싸인 황금 돼지가 위험을 감지한 듯 콧김을 뿜으며 내게 달려들었다.

[ 화탕지옥(L) ]

나도 돼지에 맞서 크고 웅대한 불길을 쏟아 냈다.

도둑질한 죄인을 뼛속까지 불태워버리는 화탕지옥의 맹렬한 화마(火魔)였다.

화르륵!

화르르르륵!

불길이 황금 돼지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검붉은 화마의 열기가 사방을 뜨겁게 데웠다.

-꾸이이이익!

화탕지옥에 갇힌 돼지는 지옥의 업화에서 벗어나려 거칠게 버둥거렸지만, 육중한 몸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힘없이 고꾸라졌다.

다만 그것이 돼지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저를 뒤덮은 업화 속에서 돼지는 계속해서 움찔거리고 있었다.

나는 화력이 낭비되지 않고 오로지 돼지만을 불태우도록 더욱 집중했다.

화르르륵!

화르르르르륵!

끊임없이 화탕의 불길이 솟아올랐다.

집채만 한 황금 돼지를 삼켜낸 불은 그보다 훨씬 더 우람하게 효후했고, 마침내 내 마력이 0에 다다르면서 사그라졌다.

“하아…….”

나는 커다란 숯덩이로 변해버린 돼지를 올려다보며 팔을 거두었다.

“아슬아슬했나?”

마력이 고갈된 것과 돼지의 움직임이 멎기까지는 간발의 차이였다.

업경에 의한 스킬 증폭이나, 같은 등급의 던전 사이에서도 난이도 차이가 있다는 걸 감안해야겠지만,

그렇다 해도 영웅담급 던전의 보스 몬스터를 한 방에 쓰러트릴 수 있다는 걸 확인한 것은 큰 수확이었다.

-꾸이이이익!

한데 그때였다.

숯덩이가 되어 완전히 움직임을 멈추었던 돼지가 별안간 몸을 일으키고 내게 달려들었다.

“대왕님!”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강림 형의 검푸른 신성이 번쩍이는 찰나의 시간.

휘이이익!

바람을 가르며 무언가 날아들었다.

“……어?”

나는 가만히 서서 눈을 끔뻑였다.

강림 형의 신성에 날아간 숯덩이 위로 누런 종이 한 장이 달라붙었다.

“……부적?”

전에 없던 상황에 의문을 느끼자마자.

파아아앙!

부적이 하얗게 빛을 발했다.

쿠우우웅!

그러고는 한순간에 크디큰 바위가 되어 돼지를 짓눌렀다.

-꾸이이이익!

바위에 깔린 황금돼지는 마지막 비명과 함께 빛을 뿌리며 사라졌다.

[ (!) 황금 돼지가 쓰러졌습니다. ]

[ (!) 떠났던 업신이 당신의 정성을 기대합니다. ]

팝업창이 떴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황금 돼지를 쓰러트린 것이다.

파앙!

한순간 빛이 반짝이고, 돼지 위로 떨어졌던 바위는 다시 부적으로 돌아왔다.

황금 돼지의 드랍 아이템 ‘돼지머리’를 남긴 채.

“우와…….”

나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서 일행들을 돌아봤다.

“방금 누구였어요?”

처음 보는 힘에 놀란 나처럼 그들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가운데 홀로 가만히 서 있는 아이를 보았다.

“바리, 너였어?”

내 물음에 그제야 바리가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리 치성을 드려 놓은 부적이 몇 장 있어서요.”

다소곳이 모은 두 손을 어딘가 소심하게 꼼지락거리면서.

“아직 오행 권능을 얻은 것은 아니라, 미리 치성을 드려 놓은 부적만 조금 쓸 수 있어요.”

바리의 얼굴은 내내 차분했다.

그러나 업경의 권능은 바리가 드러내지 않은 부끄러움과 기쁨을 내게 고스란히 전해 왔다.

이번에는 모르는 척하지 않고 활짝 웃었다.

“고마워. 네 덕분에 완벽하게 클리어했어.”

내 말에 바리가 아주 옅은 미소를 지었다.

드러난 표정은 보일 듯 말 듯 희미했지만 내게 밀려드는 기쁨은 분명 더 선명해져 있었다.

그냥 조숙한 줄로만 알았는데.

너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도 서툴렀구나.

호구별성도 그렇고, 바리도 그렇고…….

우리에겐 아직 알아가야 할 것이 많았다.

나는 조용히 수긍하며 일행들에게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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