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10화 (110/187)

34장. 업신을 모셔라(3)

한반도의 동쪽, 어느 작은 언덕.

우리는 동해로 가는 도중 두꺼비 업신이 나온다는 던전 근처에 차를 세웠다.

“이야, 내가 업신을 모시러 간다니 기분이 또 새롭네.”

차에서 내린 호구별성이 동산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별성 너는 업신을 만나면 허구한 날 싸우기나 했을 텐데.”

뒤따라 내린 사라가 무심하게 한마디 던졌다.

“끄응…….”

사라의 핀잔에 호구별성이 앓는 소리를 냈다.

“고 쬐끄만 것들이 나랑 싸우긴 뭘 싸워. 그냥 가끔씩 재롱 떠는 거나 봐줬을걸.”

“하긴, 업신이든 가택신이든 저 흉물을 쫓아낼 수 있었다면 우리가 그리 고생하진 않았을 테지.”

그녀가 목덜미를 긁적이며 볼멘소리로 말하자 강림 형도 놓치지 않고 한마디 했다.

업신이나 가택신은 모두 집을 지키는 수호신이었다.

아무리 수호신이라 한들 한반도에서 가장 큰 신 중 하나인 호구별성을 이길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니 호구별성은 병을 내리러 왔다가도 집 지키는 업신을 만나면, 그들과 진심으로 싸우기보다는 변덕에 따라 오늘은 봐준다고 물러났으리라.

“그래, 새삼 좀 놀랍긴 하군.”

그때 고등어에서 다시 용신의 모습으로 돌아온 오휼이 입을 열었다.

“3천 년쯤 되었나? 시취(屍臭)가 서해까지 이르렀던 것이. 말로만 듣던 재앙신이 저승에 머물고 있을 줄은 몰랐어.”

3천 년 전?

시취가 서해까지 이르러?

그 말만으로도 몹시 심상치 않게 들렸다.

“한반도의 서쪽을 뒤덮었던 대역병. 그게 그대의 권능이었지?”

마찬가지로 용신의 모습이 된 오혜 역시 호구별성을 돌아보며 말했다.

“……?”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에 내 시선도 자연히 호구별성을 향했다.

두 용신이 동시에 호구별성의 과거를 언급하자, 그녀는 그 화두를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니, 다 어릴 때 얘기지, 뭘 또 그 얘기를 하고 그래?”

호구별성이 민망한 얼굴로 손을 저었다.

“어릴 때 얘기?”

한데 듣고 있던 강림 형은 호구별성의 말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 난리를 피웠던 게 경신년 외에 또 있었나 보지?”

3천 년 전의 이야기라더니 강림 형조차 들은 바 없는 옛일인 모양이었다.

“아니, 경신대기근은 우리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다니까!”

강림 형의 타박 앞에 호구별성이 잔뜩 억울한 기색으로 소리를 높였다.

“우리 권능이 마음대로 안 되다 보니까, 사방에 시체가 많아서 어쩌다 그렇게 된 거라고!”

본래 역병이란 병사한 시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더 퍼지는 법 아니겠는가.

결코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는 그녀의 주장을 나는 어느 정도 이해했다.

물론 형이 보는 앞에서 굳이 티 내지는 않을 거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변명을 들은 강림 형은 더욱 혐오스럽다는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럼 시취가 서해까지 이르렀다는 3천 년 전의 역병은 네 짓이 맞다는 뜻이군.”

“하…….”

결국 호구별성이 작게 탄식하고는 꽁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아휴, 다 어릴 때 일이라니까 자꾸 그러네!”

“정말 뻔뻔하기 짝이 없어.”

역병이라면 치를 떠는 저승차사가 험악하게 눈썹을 굽혔다.

“보십시오, 대왕님. 역시 저 흉물은 저승의 일등악이 분명합니다.”

내게 현 으뜸차사의 지난 악행을 어필하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너무 그러지 말거라, 강림.”

제일 먼저 호구별성을 놀려 놓고 지금껏 조용히 듣고 있던 사라가 끼어들었다.

“정말로 별성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의 일이니.”

5천 살이 넘은 그는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직 별성의 신성이 여물지 않았을 때였지. 권능을 다루는 게 서툴러 병이 퍼져버린 것을 지난 염라가 나서서 수습을 했다.”

호구별성을 처음 만났던 날,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별건 아니고 그냥…… 영감탱이 죽었다니까, 그 영감네 핏덩이가 눈에 밟히네.

-내가 옛날에 영감한테 빚을 좀 졌거든.

우리 대왕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에, 몹시도 쓸쓸해 보이던 그녀의 얼굴도.

“……아.”

나는 무심결에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혹시 누나가 우리 대왕님께 졌다는 빚이 그거예요?”

직후 활짝 열린 업경의 권능으로 무언가 무겁고 축축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그리움이랄까, 애틋함이랄까, 그러면서도 또 그만큼 슬픈.

왕을 잃어버린 강림 형의 통한과는 다르지만, 분명 같은 대상을 향한…….

그러한 감정이었다.

“뭐…….”

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호구별성에게서 잘라내듯 감정의 파도가 끊겼다.

“그런 게지.”

……아마도, 그녀가 그것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아 했기에.

늘 활기차고 멋진 모습만 보여주던 그녀가 그토록 애달픈 감정을 품었다는 것이, 그리고 그 감정을 바로 감춰버린 것이 내겐 다소 의외였던지라.

나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눈만 깜빡였다.

-그대에게 아무런 적의가 없는 상대마저도 그대에게서 자신을 감출 수 있어.

-그대와 상대가 서로의 업을 짊어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호구별성이 마음을 감춘 것은 우리 대왕님과의 일을 나와 나누고 싶지 않기 때문일 터였다.

무언가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내게 마음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그녀가 섭섭한 것은 아니었다.

섭섭하긴커녕 고마웠고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그 영감네 핏덩이가 눈에 밟히네.

호구별성은 그런 마음으로 면식도 없던 나와 함께해 주었는데,

정작 나는 그간 그녀의 과거를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것에.

그래서 호구별성 또한 굳이 나와 과거를 나누려 하지 않고,

그저 내가 우리 대왕님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계속 함께해줬다는 것에.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 나의 새로운 가족으로서 줄곧 곁에 있어준 그녀는 사실 내내 투명한 벽을 세운 채였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항상 반갑게 자리를 지켜줘서 나는 이 모든 사실을 이제야 겨우 알아차렸다.

나와 호구별성은 아직 서로에게 열어주어야 할 마음이 있었다.

“……나중에.”

그런 생각 끝에,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시간이 되면, 언제든 이야기해주세요.”

호구별성이 아직 나와 나누고 싶지 않다는 그 이야기를,

그래도 언젠가는 함께 나누게 될 것을 기약하며.

“……그래.”

그녀는 깊은 신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이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나는 그 대답이 거짓이 아닐 것이라 여기면서 마주 미소 지었다.

“흐음, 어쨌든.”

사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시 지난 염라가 그 일을 들추지 말 것을 명했기 때문에, 차사들 사이에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야.”

강림 형이 그 일을 몰랐던 건 그래서였구나.

우리 대왕님께서 먼저 함구령을 내리셔서.

그 때문인지 사라 역시 이 이상 자세히 이야기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그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저기 염라, 혹시 저게 그대가 말했던 동산이오?

때마침 장남 오휼의 손에 들려 있던 막내 고등어 오휼이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을 다시 입에 담았다.

-업신이 있다는 동산 말이오! 저기가 맞소?

그가 신기하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 네. 맞습니다, 왕자님.”

나는 고등어의 작고 동그란 눈에 동산이 한가득 비친 걸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오! 겉보기에는 정말로 평범한 언덕 같구려!

고등어가 지느러미를 들썩였다.

-그대에게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던전인 줄 모르고 지나쳤겠소!

“숨겨진 조건이 있으니까요.”

나는 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럼 바로 던전을 열어보겠습니다.”

업신은 집을 지켜주는 복록신으로, 보통 구렁이나 두꺼비, 족제비 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렇다 보니 업신 중에서도 두꺼비 업신을 모셔가려면 당연히 두꺼비가 나오는 업신 던전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 두꺼비 업신이 나온다는 던전은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막내 왕자에게 말했듯 숨겨진 조건이 있어 그걸 알지 못하면 결코 던전에 들어갈 수 없었다.

“흠흠!”

동산에 가까이 다가간 나는 잠깐 목을 가다듬었다.

“두껍아~ 두껍아~”

그러고는 조건에 따라 동산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쿠우우웅!

한 소절을 부르자 작은 동산을 중심으로 지진이 난 것처럼 진동했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그리하여 세 번째 곡조를 불렀을 때.

쿠우우우웅!

동산이 다시 한번 크게 진동하면서 표면에 진짜 두꺼비집처럼 동그란 입구가 생겨났다.

[ (!) 공간의 지배법칙이 바뀝니다. ]

던전을 알리는 팝업창이 떴다.

[ ‘두꺼비 집’에 입장하셨습니다! ]

- (!) 해당 던전의 등급은 ‘영웅담’입니다.

- 클리어 조건 : 업신의 축복을 받으십시오.

“음, 일단 팝업창에는 오류가 없는데.”

팝업창을 읽으며 나는 괜히 한번 주변을 둘러봤다.

“이번에는 버그 없겠지?”

그동안 던전에 들어갈 때마다 버그에 시달렸다 보니 어째 반사적으로 살피게 되었는데.

팝업창 상태도 정상적이고, 일단은 별문제 없어 보였다.

“업신은 집에서 모시는 신이니까 던전의 지형도 옛날 가정집과 비슷할 거예요.”

주변을 살핀 뒤엔 일행들에게 다시 한번 공략법을 읊어주었다.

“집이 지저분하면 업신이 떠나는 법이잖아요. 우리는 일단 집을 청소해야 합니다.”

업신 던전의 공략법은 지저분한 집을 청소하고 업신을 모시는 고사를 지내는 것.

다만 집이래도 결국 던전이기 때문에 청소란 대개 던전 내 몬스터를 잡는 것을 의미한다.

집을 더럽히는 몬스터를 처리하고, 몬스터가 드랍한 아이템으로 고사를 지내면 더러운 집이 싫어서 떠났던 업신을 만날 수 있다.

“그럼 들어가 보죠!”

공략법을 되짚은 다음 던전의 안으로 성큼 발을 내디뎠다.

파아앙!

하얗게 빛이 산개하면서 일대의 풍경이 바뀌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고래 등같이 커다란 기와집.

안채며 별채, 부엌에 재물을 모아 두는 곳간까지 딸린 아주 큰 저택이었다.

업신은 보통 곳간에서 모시니 다른 화려한 건물들은 그냥 함정이라고 보면 된다.

건물이 크고 예뻐서 여기저기 구경하기는 좋겠지만, 함부로 들어가면 집에 깃든 액운에 화를 입을 것이다.

업신이 떠난 집은 액운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데 크고 화려한 기와집에 어울리지 않게 저택의 마당은 온통 오물로 뒤덮여 있었다.

“어우, 이게 다 뭐야?!”

주변을 둘러본 호구별성이 깜짝 놀란 고양이처럼 어깨를 들썩였다.

“집이 아니라 완전 돼지우리잖아!”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돼지 천지였다.

꿀꿀꿀!

꿀꿀꿀꿀!

오물로 뒤덮인 마당에 수십 마리의 돼지 떼가 소란스럽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니,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신적으로 이 집 줄 테니까 새집 달라는 건 진짜 양심 없는 거 아니냐!”

돼지들을 둘러보며 호구별성이 한 소리 했다.

“네, 그러니까 이제 저 돼지들을 잡고 집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게 첫 번째입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검을 꺼내 들었다.

삼신이 나누어준 두 검 중 하나, ‘죽음’이었다.

“그런데 무작정 돼지를 잡는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검끝으로 수십 마리의 돼지들을 가리켰다.

“저 돼지들 중에서 황금돼지를 잡아야 해요.”

꿀꿀꿀!

꿀꿀꿀꿀!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돼지들이 토실토실한 몸으로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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