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09화 (109/187)

34장. 업신을 모셔라(2)

-아바마마께서 많이 편찮으시오?

이야기를 들은 막내 고등어가 지느러미를 떨었다.

-음…….

-현이 너를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다만.

장남 오휼과 차녀 오혜가 침음했다.

일이 일이니만큼 막내 오현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냥 막내도 아니고 영원히 어린 아이에 머물러야 하는 막냇동생이니 더욱이 그렇겠지.

-아바마마께서 중독되신 독은 몹시 치명적인 맹독이었다.

하지만 결국 막내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듯 짧은 고민 끝에 그들이 다시 말을 이었다.

-독에 당하신 것을 아시고는 황급히 신성으로 독기를 몰아내려 하셨으나, 그때는 이미 꽤 많은 독이 퍼져 불가능했어. 그저 남은 독이 더 이상 퍼지지 않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지.

“어우, 용왕이 그 정도면 진짜 고약한 독이었나 봐?”

호구별성이 눈을 크게 떴다.

그녀 본인이 독과 병을 뿌리는 역신인지라, 용왕조차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정체불명의 독이 놀라운 듯했다.

“흐음, 용왕의 신성이 통하지 않는다면 아예 몸의 기(氣) 자체를 꼬이게 하는 독인가 보구나.”

생명과 부활의 신 사라도 말을 보탰다.

“그 정도라면 내가 손을 쓰더라도 몸의 손상을 계속 재생시키는 정도밖에 안 되겠어.”

증세를 들은 것만으로도 상태를 짐작한 듯 그가 혀를 찼다.

“용왕의 병세가 깊어진 상황에 업신은 왜 찾는 거지?”

팔짱을 낀 채 이야기를 듣던 강림 형이 물었다.

업신은 집안에 복을 내리는 수호신이다.

독과 역병을 뿌리는 호구별성도, 생명과 부활의 신인 사라도 마땅한 해결 방법이 없는데, 용왕조차 어쩌지 못하는 독을 치료하는 힘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한데…… 형은 막내 고등어에게도 줄곧 경어를 썼으면서 장남과 차녀에게는 딱히 예의를 차리지 않네.

아까 날 공격했던 일을 아직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건가?

-물론 업신이 손수 독을 치료하는 것은 아니다.

장남 오휼이 대답했다.

그 또한 내게는 하오체를 썼으나 형에게는 평어체를 쓰고 있었다.

모두에게 똑같이 하오체를 사용하던 막내와 다르게 장남은 왕과 왕의 신하를 구분했다.

-아바마마께서는 독을 다스리느라 기력이 떨어지신 탓에 용궁의 정기를 보충할 필요가 있었어.

오휼의 설명이 이어졌다.

-거동이 불편하시니 우리가 대신 아바마마의 여의주에 정기를 담아오려 했지. 그런데 정기를 채취해야 하는 곳에 거대한 지네가 나타났다. 대체 무슨 조화인지 육지의 것이 바다를 더럽히고 있더군.

거기까지 말한 그는 불쾌한 표정으로 잠시 말을 멈추었다.

-불을 뿜는 그것을 물리치기 위해 업신의 힘을 빌리러 온 것이다.

말을 멈춘 오휼 대신 오혜가 마저 설명했다.

“흐음, 그렇다면 이승에는 두꺼비 업신을 찾으러 오셨겠군요.”

사라가 수긍하며 말했다.

강림 형과 달리 그는 막내 오현에게 그러했듯 장남과 차녀에게도 계속해서 경어체를 쓰고 있었다.

하기야, 나이로만 따져 봐도 오휼과 오혜는 이미 1만 살이 훌쩍 넘었을 테지.

용신은 굳이 따지자면 인간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존재였다.

특히 네 개 바다를 나눠 가진 사해 용왕은 생불왕 삼신할미와 저승 시왕이 인간의 시대를 열기도 훨씬 전에 이미 바다에서 태초의 생을 열었던 자들이고.

서해 용왕의 장남과 차녀라면 아마 우리 대왕님만큼은 아닐지언정 다른 대왕님들만큼은 살았을 것이다.

애초에 신들은 나이가 아니라 항렬로 위아래를 구분한다.

사해 용왕의 자식들은 사실 돌아가신 우리 대왕님이나 생불왕 삼신할미 같은 2세대 신들과 동렬이었다.

물론 짐승의 시대를 연 용왕의 자식들인지라, 깊게 따져 보면 인간의 시대를 연 2세대 이후 신들과는 전혀 다른 갈래이긴 하지만.

어쨌든 사라는 용왕의 자식들을 자신보다 높은 항렬로 대우하려는 모양이었다.

“불을 뿜는 지네라면 아무래도 두꺼비로 상대하는 것이 낫겠지요.”

사라가 덧붙였다.

그런데 그…… 지네와 두꺼비라면 역시 지네장터 설화를 말하는 걸까?

사라의 말에 나는 새삼 내가 신화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실감했다.

저승에 떨어진 지 50년이 되어 가지만, 신화나 민담이 진짜 있었던 일처럼 말해지는 것은 여전히 신기하게 다가왔다.

나는 신화가 허구였던 과거의 세상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요즘 육지의 것들은 업신을 잘 모시지 않는 모양이지?

그때 오혜가 불쑥 의문을 표했다.

-여기 오는 길에 육지의 것들이 사는 집을 둘러봤다만 업신을 모신 집은 보지 못했거든.

“……아.”

나는 그들이 왜 곤란을 겪었는지 바로 이해했다.

“업신을 찾으시려면 던전에 가셔야 할 거예요.”

현대 문명이 더 이상 집 안에서 업신을 모시지 않는 것을 대신하듯, 신화가 현실이 된 이후로는 업신을 직접 얻을 수 있는 던전이 생겼으니까.

-던전?

내 말에 두 고등어가 지느러미를 들썩였다.

-그렇군. 이제는 업신도 던전에서만 찾을 수 있나 보군.

-그러면 어떻게 해야 업신이 있는 던전에 갈 수 있는지 알려줄 수 있소?

“……으음, 글쎄요.”

나는 조금 앓는 소리를 내며 고등어들을 바라보았다.

말하는 것을 보니 던전이 무엇인지는 아는 듯한데, 탈해와 가신도깨비들을 두들겨 패던 그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헌터 전용 단말기를 이용해 업신 던전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서해 용궁에서 신화전을 벌였으니 필드나 스킬은 쓸 수 있는 것 같다만…….

3만 년을 바다에서 살아온 용신들이 굳이 육지의 헌터들과 경쟁할 필요는 없었을 터.

그저 간혹 바닷속에 생성된 던전들만 처리해 오지 않았을까?

“……도와드릴까요?”

생각 끝에 나는 고등어들에게 말을 꺼냈다.

“던전에서 업신을 모셔 오는 거요.”

막내 고등어와 친구가 된 지 오래인데, 그 형제들을 돕는 것 정도야.

-음? 그대가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그렇다면 업신을 데리고 함께 동해 용궁으로 가시겠소, 염라?

고등어들은 좁은 봉투에서 지느러미를 살랑거리더니 뜻밖의 말을 꺼냈다.

-안 그래도 업신을 구하면 그대와 함께 동해로 가려고 했소만.

“저를요?”

생각지 못한 제안에 눈을 끔뻑이고 있으니 고등어들이 빠르게 꼬리를 흔들었다.

-우리 막내를 보살펴줬으니 마땅한 대접을 해드려야 하지 않겠소?

“아…….”

그렇구나.

이렇게 형제들이 찾아왔으니, 이제 그만 우리 작은 고등어 친구를 가족들이 있는 바다로 돌려보내야 하는구나.

“그러면 함께 동해로 가보도록 할까요?”

다만 이별을 미리 입에 담을 필요는 없겠지.

나는 아쉬운 마음을 숨긴 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하여 곧장 용궁행이 결정되었다.

목적지는 서해의 용신들이 피신한 동해 용궁.

가는 길에 두꺼비 업신을 얻을 수 있는 업신 던전도 한 번 경유하게 될 것이다.

“마침 딱 동해로 가는 길목에 업신 던전이 있네요.”

단말기로 지도를 확인하며 나는 일행들을 돌아봤다.

막 떠날 채비를 끝낸 삼차사는 각자 하나씩 고등어가 담긴 봉투를 들고 있었다.

오휼과 오혜까지 태우기에는 차가 너무 좁은 탓에 용신들은 계속 고등어인 채로 이동하기로 했다.

운전대를 잡아야 하는 나와 막내 바리를 제외하고 나머지 차사들이 하나씩 용신의 운반을 맡기로 한 것이다.

“…!!…!……!!”

“……!!…!…!”

배웅을 나온 바리네 조부모가 잘 다녀오라며 뼈만 남은 손으로 바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대왕님.”

아직도 우주복 같은 보호슈트를 벗지 않은 탈해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상대가 고등어가 되었어도 용신 트라우마는 쉬이 사라지지 않는지, 가신도깨비들은 여전히 바리게이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나마 탈해가 왕으로서 용기를 내어 배웅하러 온 모양이었다.

물론 고등어가 담긴 봉투 쪽에는 아예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그럼 제가 없는 동안 저승을 잘 부탁합니다, 탈해.”

나는 탈해와 악수를 나누며 말했다.

“혹시 도둑이 들면 화탕지옥으로 보내주세요.”

인사를 하려니 뭔가 장난기가 돌아서 조금 실없는 농담도 덧붙였다.

“뭐, 저승까지 도둑질을 하러 올 간 큰 도둑은 없겠지만요.”

“그것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왕님.”

그런데 그 실없는 농담에 탈해가 헬멧의 글라스 너머로 눈을 번쩍였다.

한쪽 팔까지 아주 자신만만하게 들어 올리면서.

“마침 저승 방어용 경비 시스템의 첫 번째 패치가 완료된 차였지요.”

그의 말이 떨어진 순간이었다.

삐요오오옹-.

어딘가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리더니.

위이잉!

위이이잉!

정체불명의 기계음과 함께 제트기 모양 드론 여럿이 V자를 그리며 웅장하게 솟아올랐다.

“……드론?”

저승에 드론 부대라니.

너무나도 의외인 조합에 멍하니 드론들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탈해가 검붉은 귀기를 번쩍이며 대꾸했다.

“네, 저승 전역을 24시간 감찰하는 경비용 드론입니다.”

어느새 조이스틱 형태의 리모컨도 쥐고 있었다.

“침입자를 발견하면 즉시 발사되는 소형 미사일과 레이저포를 장착해 두었지요.”

철커덕!

그가 버튼을 누르자 용맹하게 날아올랐던 드론 부대가 일제히 비행을 멈추며 얄브스름하게 빠진 날개 밑으로 레이저포와 미사일을 꺼냈다.

“아직은 미사일과 레이저포뿐입니다만, 두 번째 패치를 통해 열두 대의 드론이 전투용 거대 로봇으로 합체하는 기능도 탑재할 예정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 기대… 되네요.”

나는 멍청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내가 저승을 재건했을 즈음에는 차사들을 새로 뽑을 것도 없이 탈해가 차사 로봇까지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어째 저승의 장르가 바뀌어버린 기분이 들었지만, 앞으로 내가 자리를 비워도 탈해와 도깨비들이 저승을 잘 지켜줄 것 같아 일단 마음은 든든해졌다.

“그럼 다녀올게요, 탈해.”

“예, 다녀오십시오, 대왕님!”

탈해와 인사를 끝내고 슬슬 출발하려던 때.

가만히 서 있던 바리가 묘한 얼굴로 도깨비들을 돌아봤다.

“혹시 조금 늦게 돌아오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생각지 못한 말에 모두의 시선이 바리를 향했다.

“꽤 멀리 다녀올 수도 있다고…… 할미가 말씀하시네요.”

할미라면 바리가 모시고 있는 창조신 마고할미일 터인데.

“보통 할미가 말씀을 해주시면 저도 그 미래를 같이 보는데, 이번에는 그런 것 없이 그냥 말씀만 전해주시는 거예요.”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는 앞서 누군가와 나누었던 대화를 상기했다.

-그런데 북유럽은 어떻게 넘어갑니까?

-때가 되면 자연히 아실 것입니다.

미래를 보는 남자가, 아직은 말할 수 없다고 했던 것이.

업경의 권능을 통해 느껴지는 바리는 평소와 똑같이 잔잔한 물결 같았지만, 그녀에게 깃든 마고할미에게서는 일전에 보았던 원천강처럼 내가 해석할 수 없는 영겁의 세월이 뿜어져 나왔다.

우주를 열었던 창조신이니 그 세월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도 당연하겠지.

나는 바리 너머의 존재에게 압도되는 기분을 느끼며 권능을 닫았다.

멀리 다녀올지도 모른다고 말한 바리 본인도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몰랐고, 바리에게 일러준 마고할미는 지금 내가 직시하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존재였다.

“……그런가.”

따라서 그냥 그렇게만 중얼거리며 저승을 한번 돌아보았다.

그냥 친구를 데려다주려고 했을 뿐인데.

어쩌면 꽤 긴 여행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