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장. 아니, 그거를 왜(1)
저승에 돌아오고 며칠간 그저 푹 쉬었다.
단군에게 함께 북유럽에 다녀오자는 제안이야 받았지만 당장은 언제 어떻게 가는지도 알 수 없었고,
흑탑 다음으로 노릴 상대에 대해서도 아직 확신이 서지 않은 탓이었다.
다만 아홉 명의 전설급 각성자 중에서도 흑탑주와 더불어 특히 악명 높은 가야의 수로왕을 염두에 둔 상태이기는 했다.
흑탑의 전신이 천생교라는 사이비 종교였다면, 수로왕의 가야는 말 그대로 범죄자 집단이었다.
수로왕은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그의 가야는 다른 지역에서 죄를 짓고 수배령이 내려진 각성자들이 최후의 보루로 도망치는 곳이었다.
세간에는 염라가 천생교의 주술을 완성하기 위해 사람을 해친 흑탑주를 벌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니 여기서 가야까지 벌한다면, 한반도 내에서 염라의 위치가 더욱 공고해질 터였다.
“흑탑주가 저승 던전을 점거할 때 협력한 자들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으니…… 지금은 어쩔 수 없지.”
차근히 앞으로의 계획을 짜면서, 나는 지금껏 묻어 두었던 문제를 상기했다.
흑탑주를 쓰러트렸지만 내 지옥 스킬은 여전히 다섯 개만 활성화된 상태였다.
흑탑주와 함께 지옥의 권능을 가져간 자들.
저승 던전에 흩어진 망자들의 기억을 통해 존재는 알게 되었으나, 지금도 그들의 정체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서해 용궁에서 지옥수를 키웠던 흑탑주처럼, 그들도 한반도 어딘가에서 다른 지옥의 나무를 키우고 있을까.
***
느긋한 아침이었다.
다과가 놓인 테이블에서는 진한 커피 향이 풍겼다.
저택 내 식당 공사를 마친 후, 마당에 임시로 설치했던 식당은 사라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마당에 모여 있었다.
도깨비들이 새로 짜서 놓아준 자개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마당 브런치와 마당 티타임을 은근히 마음에 들어 했던 호구별성과 사라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도깨비들을 칭찬했지.
잠옷 앞주머니에 양손을 집어넣은 채 호구별성과 사라가 나누는 옛날얘기를 듣고 있는데, 멀찍이서 강림 형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서천꽃밭 방향인 걸 보니 발설이와 형제들에게 물을 주고 돌아오는 게 분명했다.
매일 인시(寅時) 기도를 올리는 바리네 가족만큼이나 일찍 눈을 떠, 몸과 신성을 가다듬은 뒤 마지막으로 지옥수에 물을 주고 오는 것이 근래 형의 오전 일과였으니까.
“맞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형을 가만히 바라보다 문득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네 칼, 오관 놈이 준 그거 이리 내라.
탯줄을 끊은 날, 삼신은 내게 그녀의 쌍검까지 물려주었다.
그러고는 ‘탄생’과 ‘죽음’ 대신 내가 쓰던 ‘검수엽’을 달라고 했다.
-이놈아, 내 거 다 줬잖아! 난 그럼 뭘로 싸우란 말이냐.
나는 굳이 내 검을 필요로 하는 그녀의 말이 조금 의아해서 물었다.
-하지만 그 검은 왕의 격에 맞지 않는다고 하셨…….
-이런 멍청한 놈, 내가 너랑 같으냐! 난 이미 2만 년의 세월이 격이야!
이어진 호통이 너무나도 맞는 말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냥 입을 꾹 다물고 검수엽을 바쳤다.
그렇게 반백 년 가까이 쓰던 검수엽 대신 쌍검을 쓰게 되었다만, 지금껏 하나의 검을 써 왔기에 새로 받은 두 검은 아직 손에 익지 않았다.
그나마 ‘죽음’은 어느 정도 익숙한 느낌이었으나, ‘탄생’은 퍽 낯설기만 했다.
-잊지 마라. 이제 너는 탄생과 죽음의 자식이다.
-생과 사를 모두 통달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제는 삼신께서 펼치셨던 생의 검에도 익숙해져야 할 텐데.”
그때 삼신이 보여준 검은 기억하고 있었다.
겨우 두 차례 검을 맞댔을 뿐이지만, 따라 하는 것만이라면 어찌어찌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다만 그렇다 한들, 검에 담긴 생의 이치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저 형(型)만 흉내 내는 일이 되겠지.
“아침 식사는 하셨습니까, 대왕님.”
머릿속에 새겨진 삼신의 검을 곱씹는 사이, 내 앞에 멈춰 선 형이 아침 인사를 건네 왔다.
검푸른 눈동자는 아직도 새벽의 기운을 품은 듯 서늘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형 또한 죽음의 검을 익혔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형, 이따가 나 좀 도와주면 안 돼요?”
형은 곧바로 진중하게 얼굴을 굳혔다.
“제가 무얼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이미 완벽한 정자세를 취한 몸에서 옅은 신성이 너울거렸다.
도와달라는 말 한마디에 생각 이상으로 반응하는 형을 향해, 나는 작은 부담을 느끼면서도 의식적으로 웃으며 인벤토리에서 ‘탄생’과 ‘죽음’을 꺼냈다.
“별건 아니고 제가 그때 생불왕께 검을 물려받았거든요.”
나는 양손에 각각 검을 쥐고서 ‘죽음’을 형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새 검이 낯설어서요. 형이 이쪽을 들고 상대를 좀 해주셨으면 좋겠는데.”
형은 나와 ‘죽음’을 번갈아 보고는 이내 새어 나온 신성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숙였다.
“대왕님, 그 검은 제 격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인벤토리에서 다른 검을 꺼내 보였다.
오랜 세월 보아 익숙한 강림차사의 검이었다.
“필요하시다면 부족하나마 제 검으로 상대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끄덕이며 일어섰다.
그의 지나치게 깍듯한 태도는 여전히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이전만큼 마음이 조이지는 않았다.
***
그리하여 시작된 형과 나의 대련.
“이야, 할망이 우리 전하한테 칼도 줬어?”
구경하러 나온 호구별성이 내 손에 들린 ‘탄생’을 보며 신기해했다.
“너한테도 잘 어울린다.”
어색한 폼으로 탄생을 쥔 내게 덕담도 남겨주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거라. 그분께서도 네가 그 검을 쓰는 것이 맞다고 여기신 것이니.”
호구별성 옆에 선 사라도 무심한 어투로 한마디 보탰다.
새 검을 부담스러워하는 게 그렇게 티가 나나.
나는 조금 멋쩍게 웃으면서 형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럼 형, 먼저 갈게요.”
손에 들린 ‘탄생’으로, 생의 이치가 담긴 삼신의 ‘생의 검’을 휘둘렀다.
채애애앵!
강림 형은 나에게도 익숙한 ‘죽음의 검’으로 내 검을 받았다.
채앵!
채애애앵!
채애앵!
생과 사의 이치가 뒤엉키며 불꽃이 튀었다.
몇 번 검을 섞는 것만으로도 손목이 묵직하게 아파 왔다.
티 내지 않으려 했지만 형은 늘 그랬듯이 이런 내 상태를 알아차렸다.
잠시간 내 눈을 응시한 그는 그저 진중한 얼굴로 검을 맞대 왔다.
채앵!
채애애앵!
형과 검을 섞는 것은 저승 던전 이후 처음이었다.
그는 평소에 오직 발설지옥의 권능만을 쓰지만, 검에 있어서도 분명 삼백의 차사들 중 가장 강했다.
삼백차사들의 수장으로서 모든 시왕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일 터였다.
덕분에 나는 형이 휘두르는 ‘죽음’을 받아 내면서, 역설적으로 삼신이 가르쳐 준 ‘생’을 한 번 더 차분히 되새길 수 있었다.
채애애앵!
채애애애앵!
반백 년을 휘둘러온 죽음의 검이었지만, 생의 입장에서 받는 죽음은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그것이 생의 무게란다, 새로운 죽음이여.
-너는 항상 이 무게를 기억해야 해.
-너한테 생은 항상 무거워야 해.
내게 가르침을 내리시던 삼신께서 말씀하셨듯, 나는 이제 생이 되어 죽음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이토록 무거운 검이었다는 것을.
그럼에도 생이란 결국 죽음에 맞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채애애애애앵!
그 순간 우리의 검이 전에 없이 강하게 맞부딪쳤다.
“……!”
나와 형의 손에 들린 검이 동시에 날아갔다.
“뭐야, 무승부야?”
“흐음, 둘 다 훌륭하구나.”
구경하던 호구별성과 사라가 한마디씩 했다.
형은 날아간 두 검을 한 번씩 돌아보고는 진중하게 말했다.
“본래라면 저의 검이 꺾였을 것입니다.”
내가 펼친 생의 검이 어딘가 모자랐다는 말이었다.
형과 검을 맞대면서도 매초 느꼈던 사실인지라, 나는 불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했던 삼신의 검에 비해 내 검이 어설프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형이 휘두른 죽음의 검은 흠잡을 곳 없이 훌륭했다.
그 덕에 형의 죽음을 받아 내는 나와 나의 죽음을 받아 내던 삼신을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있었다.
“급하게 가실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충분히 훌륭하시니까요.”
형이 말을 이었다.
“다만 당신께서 지금까지 휘둘러 왔던 죽음은, 차사로서의 죽음이셨지요.”
그는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을 집었다.
“생과 사는 결국 하나일지니, 왕으로서의 죽음을 이해하시면 결국 생불왕께서 가르침을 내려주신 생도 이해하게 되실 겁니다.”
그것은 결국 생의 검뿐만이 아니라, 죽음의 검도 다시 시작하라는 뜻이었다.
“……아.”
형의 말에 나는 작게 탄식했다.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인벤토리에 넣어둔 ‘죽음’을 곱씹으면서.
“죽음은 이미 익혔으니까, 생만 익히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형은 더 말을 보태지 않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희미하지만 부드러운 웃음을 마주하자 무언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꽤 오랜만에 형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인데, 오늘처럼 면박이나 질책이 없던 날은 처음이었으니까.
-이제연, 내가 언제 그리 가르쳤더냐.
나를 타박하던 서슬 퍼런 목소리를 떠올리며 겸연쩍게 웃었다.
우리 대왕님께서 검을 익히라고 말씀하신 터에, 나는 발설지옥의 권법 대신 검수지옥과 도산지옥의 검을 익혔다.
다만 강림 형을 위시한 우리 발설지옥 형들은 발설지옥 소속이라는 것에 유독 자부심이 컸기 때문에, 발설지옥의 차사는 몸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며 권법도 같이 가르쳐줬었지.
-막내야! 이게 주먹이냐, 솜이냐!
-몸이 느리니까 그렇게 때리는 대로 맞는 거 아니냐!
-퍼뜩 일어나야지! 형님들은 아직도 가르칠 게 한참인데 막내가 그리 누워 있어서야 되겠느냐!
-제연아, 그놈은 우리 중에 최약체다. 그래도 이제 스물여섯 명만 쓰러트리면 되겠구나.
……으음, 가르침이 아니라 매타작이라고 해야 하나.
덕분에 신입 차사 시절 나는 아침에는 검에 뚜들겨 맞고, 저녁에는 주먹에 뚜들겨 맞으며, 밤낮으로 혼놈들을 잡으러 다니는 하드코어한 일정을 이어갔더랬다.
그 시절과 비교하자니 그저 부드럽게만 말하는 형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어서 자꾸만 어색한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팔의 힘은 조금 더 기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형이 내 손목에 시선을 두고 말했다.
그는 진중함을 다소 내려놓고 부드러운 기색을 띠고 있었지만 내 손목을 보는 눈에는 여전히 한 줄기 날카로움이 남아 있었다.
형과 검을 맞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손목에서 통증을 느끼기는 했지.
근데 그건 애초에 형의 권능이 ‘힘’이라서 더 그랬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수긍했다.
“당분간은 저와 함께 발설지옥의 권법을 단련하시는 것도 괜찮으시겠지요.”
하지만 곧바로 덧붙여진 형의 말에는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본래는 아침마다 몸을 단련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신적으로 그건 아침이 아니라 꼭두새벽이라고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
“……생각해 볼게요.”
나는 형의 간언에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내가 왕이어서 다행이다.
형과 군신 관계가 된 건 아직도 부담스럽지만, 이제는 저 꼰대가 ‘까라면 까’를 시전할 수 없게 되었으니.
“……그러십니까.”
한데 형은 정말로 예전처럼 새벽 단련을 같이 하고 싶었던 건지 눈꼬리를 미세하게 떨어뜨렸다.
풀 죽은 형이 신기하기는 했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걸 또 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어넘겼다.
동시에 생각했다.
지금이 가장 예전에 가까운 것 같다고.
“대왕님.”
형 또한 근래 가장 편안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승에 돌아오신 이후 줄곧 말씀드리려고 했었습니다만.”
그가 불현듯 인벤토리에서 꺼낸 것은 무언가 군데군데 붉게 얼룩진…….
“이것은 어찌 처리하는 게 좋겠습니까?”
“……어?”
형이 한 팔로 안아 든 게 무엇인지 알아차린 순간 나는 바로 반응하지 못하고 눈을 끔뻑였다.
그것은 아주 엉망으로 다쳐 있는 내 가짜 몸이었다.